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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팬대] 신념을 바란 주제넘은 이야기

전장의방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8.23 22:45:59
조회 768 추천 15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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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벌을 선포합니다-"
"재판장님. 선포 전에 잠시 발언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회오의 봉이 멈춘다. 그녀는 봉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재판장님에게도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흠."


고민한다. 곧 그녀는 고민하는 본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보통은 죄를 알려주고, 선포한 뒤, 다음 영혼을 들여보내는 단조로운 반복작업일 터. 반론은 듣지 않았을 터...인데 실로 오랜만에 회오의 봉이 멈춘 것이다. 마침 지루하기도 하다. 잠깐 쉴 겸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죄에 대한 변론입니까?"
"네, 뭐, 그렇습니다만, 변론을 위한 변론은 아닙니다."
"분명 생전에 정치인이셨지요? 보자, 이름이..."
"이름이나 출신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관련 없는 정보들이 자칫 동정을 사 죄를 흐리게 함이 우려됩니다. 저는 그냥 한 명의 인간일 뿐입니다."
"벌써부터 재밌는 이야길 하시네요. 제 판단이 그 정도에 흔들릴 거라 생각하십니까?"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인간의 삶을 살아왔기에. 거기선 흔한 일이었습니다."
"화난 게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럼 인간씨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목을 가다듬었다. 군중 앞의 달변가가 되어 가슴을 쭉 폈다.


"우선, 제 죄목을 다시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제 분수에 맞지 않게 높은 자리에 올라 많은 이들을 괴롭게 한 죄.입니다."
"높은 자리라 함은 정치인의 자리이고, 괴롭힘이라 함은 권력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 말에 정정할 부분이 있으십니까?"
"다소 의미가 함축되었습니다만, 정정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네요."
"정치인이나 권력이 여기선 생소한 주제라고 생각하기에, 이걸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여기가 환상향이라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안됐지만 저는 여러 정치인들의 삶을 봐왔는데요?"
"사실 정치인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재판장님께서도 볼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아아, 그쪽으로 주장을 펼칠 셈이시군요. 정치나 권력을 애매한 개념으로 만들어서 죄를 희석하는 전략입니까?"
"뻔한 클리셰로도 재밌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게 소설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재밌게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능글맞은 정치적 말투에 어느새 그녀는 입까지 웃고 있었다.


"높은 자리를 정치인으로 함축했지만, 여전히 의미가 넓은 것 같습니다. 국가 안에 소속되어 국가의 권력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을 예시로 골라 설명하겠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을 말하는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과거의 정치인들은 종교적인 믿음이나 관습적인 믿음 등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설명할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타당한 법적 절차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투표라고 하지요?"
"네, 정확히는 투표에 대한 믿음이죠."
"지적하려던 참입니다. 다수결이라는 게 타당한 방법은 아니거든요."
"인간은 이것보다 타당한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투표가 정치인의 권력에 대단한 힘을 실어주었다는 건 틀림없습니다. 정치인이 권력을 뺏어든 게 아니라, 우리가 정치인에게 권력을 쥐여준 것이기 때문이죠."
"흐음."
"권력에 대해서도 말해야겠군요. 이것 또한 설명에 필요한 정도로 함축시키겠습니다. 권력이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다수의 힘을 모아서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물이 있고 물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싸움을 벌이거나 물을 도둑질하기 전에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만큼 분배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이 과정에서 강제성을 띠는 게 특징입니다."
"이상하네요. 권력이 그런 거라면 왜 분배가 끝난 뒤에 또다시 싸움이 벌어지고 도둑질을 하나요?"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듯, 권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벌써 제 말을 이해하신 거 아닙니까?"
"말려들 생각 없습니다. 설명을 계속하세요."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까칠한 그녀의 모습에 인간도 미소로 화답했다.


"해서 타당한 정치인이 대단한 권력을 쥐었더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그 사이의 조화가 흔들립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건가요?"
"아뇨. 해소할 방법은 있습니다만 그건 조금 뒤에 덧붙이겠습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정치와 권력은 이상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치인과 권력을 만드는 건 이상을 억지로 현실에 다운그레이드 시켜 적용하는 것입니다."
"희석 시작이군요."
"이런, 눈을 찌푸리시니 미모가 떨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죄목에 성희롱을 추가하도록 하죠."
"어이쿠."
"농담입니다. 비꼬아서 미안해요."


흔들흔들 발끝이 흔들린다. 인간은 쾌활하게 웃었다.


"틀린 말을 하신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사람은 현실적인데, 권력의 검은 그렇지 않아서, 휘두르면 꼭 조준이 엇나가 엉뚱한 걸 베거나 허공만 가르거나, 제대로 베었음에도 자국이 남는 등 트러블이 필연적으로 생깁니다. 이것은 감내해야 할 일이지 예방하는 일은 아닐 겁니다."
"폭력을 휘두르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죠."
"이상적인 정치, 이상적인 권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짜 정치, 가짜 권력만이 존재합니다. 재판장님은 어떠십니까?"
"..."


흔들리는 발끝이 멈춘다. 꼰 다리를 펴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인간, 지금부터는 발언을 특히 조심해야 할 거예요."
"재판장님은 어떤 자리에 앉아 어떤 일을 하십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 많은 이들을 재판합니다."
"분수에 맞는 자리입니까? 재판받는 이들은 괴롭습니까?"
"이 자리에 저를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재판받는 이들의 괴로움은 그들 자신에서 나옵니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신지 그 근거가 궁금합니다."
"저는 흑백을 구분하는 정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능력이죠. 인간씨가 주장한 가짜 권력 따위가 아닌 이상적인 권력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제 자리에 대한 자격도 이걸로 설명하겠습니다."
"한때 이상적인 정치를 쫓았던 인간으로써 부러움을 표합니다."


꾸벅. 인간이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과찬입니다."
"이상적인 재판장님, 혹시 신념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신념말입니까?"
"네, 신념입니다. 저는 제 가짜 권력을 휘둘러야 할 때, 언제나 신념에 가늠 좌를 맞췄습니다. 재판장님은 혹시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뭐라 말할지 고민됩니다만, 여태껏 능력 외에 신념이 추가로 필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쓰던 신념은, 권력에 대한 책임을 진정으로 느끼며 철저히 윤리에 맞춰 행동하다가, 어떤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오.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는 없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신념이었습니다."


문득 인간의 두 눈이 빛난다. 재판장은 본인의 입이 벌어진 줄을 몰랐다.


"그건... 마음을 움직이는군요."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합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뿌리뽑으려는 탐욕과 그에 뒤따르는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허영심을 구분 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믿는 일을 관철할 때 신념은 신념으로 기능합니다. 한때 정치를 쫓았던 가짜 인간으로서, 감히 재판장님께 권해봅니다."


그녀는 단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침묵했다. 연설을 마친 정치인은 가만히 기다렸다.


"한데, 저에게 신념을 권하게 된 계기를 물어봐도 될까요?"
"종종 인간 마을에 내려가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시지 않습니까? 때문에 인간들이나 요괴들에게 꺼려지는 걸로 압니다만."
"..."
"그 건으로 고심이 깊다고 하기에, 신념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믿는 일을 관철하시길 바라서 주제넘은 조언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 그걸 어디서 들었어요?"
"어떤...?"
"인간 마을 이야기요."
"실은 재판장님의 정보를 듣고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여, 뱃사공에게 팁을 주고 이야기를 좀 들었습니다."
"코마치 이 년이-"
"예?"
"아닙니다."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았으나 인간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재밌는 이야기였네요. 인간씨 말대로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쉽습니다. 재판장님의 사상 첫 번복을 만들고 싶었습니다만."
"그럼 벌을 선포합니다."


회오의 봉을 뒤집었다. 적힌 글자를 인간에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번 더 생을 살며, 분수 넘치는 이상과 가짜를 반복할 것. 불가능에 도전하고 발전할 것."
"아앗, 변론을 한번 더 요청합니다!"
"안돼요. 더는 시간이 없다고요. 그리고 몇 번을 변론해봐도 제 판결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끄응..."
"후후, 다시 한번 즐거웠습니다, 인간씨."
"저 또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재판장님."




-그녀는 다음 영혼을 불렀다.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모티브를 따와, 제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대화문 형식으로 풀어 설명해봤습니다.

최대한 어렵거나 막연한 표현들을 좀 더 쉽고 시각적으로 그려지는 단어들로 대체하려 노력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상금은 이 몸이 가져간DAZE-!!




















"우왓, 또 왔잖아. 저 재판장 녀석."
"저렇게 따박따박 설교를 늘어놓으면 막연히 있던 존경심도 날아갈 텐데요."
"그러게... 그래도 오늘은 듣는 사람이 조금 있는걸."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삿감이군요."
"진짜 저 지루한 내용을 기사로 쓸거야?"
"설마요. 음... 근데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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