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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갤문학]복수자

ㅇㅇ(220.81) 2016.03.24 18:23:56
조회 18820 추천 118 댓글 23
														

프리스크가 유리멘탈에 차라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쓴 단편.

한 3일 전부터 쓰던 건데 쓰다가 이것저것 생각이 섞이고 해서 결과물이 어떨지 나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론 본편인데 입맛대로 전개를 막 바꾼 것도 있어. 살짝 어긋나는 것들은 좀 봐주렴.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좋겠고, 혹시 재미없으면, 오... 미안...









문을 통과하자 밝은 통로가 나타났다. 좌우로 시선을 묘하게 압도하는 거대한 기둥들이 서 있는 사이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온다. 이 빛은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들어오는 것인가. 통로 전체가 노란 빛으로 물들어 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자 통로 전체에 발소리가 울려퍼진다. 걷는 자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이제 끝. 이 앞이 대단원.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고. 앞으로 조금이면 된다고. 착각인지 모를 격려에 힘입어 그녀의 의지가 다시 한번 충만해진다.


별거 아닌 발걸음에도 통로 전체가 울릴 정도로, 이 통로는 조용했다. 이런 곳에서 응당 들려야 할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통로. 주변을 살짝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며 걷던 발이 순간 멈춘다. 끝을 불과 몇 걸음 남겨둔 시점, 그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처음 그 인영을 알아챘을 때 소녀는 작게 동요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멈췄던 발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누군가 막아서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군가가 이 남자라는 것이 다소 의외였을 뿐.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지 식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키에 비해서 짜리몽땅하다는 느낌마저 받게 만드는 옆으로 퍼진 저 체형, 대충 줏어입고 온 듯한 옷과 슬리퍼, 찔러넣은 두 손... 이 동네에서도 이러고 다니는 건 꽤나 유별난 거에 속했으니까. 아마 이름이 샌즈였던가. 소녀는 이 스켈레톤을 만난 적이 있다. 언젠가 던져 온 농담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녀는 속으로 그 해골을 코미디언이라고 비꼬아 부르고는 했다.


소녀는 살짝 멀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거리에 다시 멈춰섰다. 언젠가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조용하게 시선만 보내오던 그다. 그냥 지나가게 해 줄 거였다면 저렇게 보란듯이 서 있을 리는 없겠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한 손에는 챙겨온 물건을 꺼내 쥐었다. 감정을 잘 알 수 없게 만드는 언제나의 빙글빙글한 웃음을 띄운 채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샌즈는 손에 들린 것에 살짝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소녀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렇게 둘은 가만히 서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


조용한 가운데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


" 말해. "
" 이걸 기억하나? "


샌즈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떨어뜨린 후 지그시 밟았다. 밟은 것에서 바람이 빠지면서 뿌드드득 하는 소리가 난다. 해골의 영문 모를 짓에 소녀는 살짝 눈을 찌푸리면서 건성건성 기억을 되짚는다. 방귀 소리가 나는 그런 물건 따위는 기억에 없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한다.


" 모르겠는데. "
" 헤... 그래. "


샌즈는 살짝 허탈한 듯 말했다가,


" 물어볼 것도 없었구만. 지금 너는 그 쪽이군. 모두를 죽인 자. "


의외의 말을 했다. 이제껏 가만히 샌즈의 말을 듣고만 있던 소녀, 차라의 눈이 순간 커지며 숨을 살짝 삼킨다.


" 처음 만났을 때의 꼬맹이는 그럴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별개의 인격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추측했었다. 이중인격? 아니면 원혼이라도 씌인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말야. "


그제서야 차라는 샌즈가 그 이상한 물건을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그 물건은 이 남자가 처음 이 몸뚱아리를 만났을 때 썼던 것. 그 때의 자신은 분명 의식의 저편으로 다시 들어가 있었다. 아예 존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경험한 것도 아닌 것을 뚜렷하게 기억하게 있을 수가 없다. 반면, 그 때 잠깐 주도권을 돌려받았던 꼬마라면 처음 샌즈를 만난 시점, 그 때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한 몸에 두 명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처음 만난 자신과 이후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한 몸에 있는 둘을 구분하는데 그것을 쓰는 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은 없겠지.


그것까진 그렇다고 쳐도, 이 샌즈라는 남자, 그 잠깐 사이에 거기까지 이해하고 있었는가. 차라는 묘하게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 제법인데? 그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지금의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다는 걸까? "
" 그래... "


샌즈는 잠깐 두 눈을 감고 생각하는 듯 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 왜 죽였지? "

하고 물어왔다.


" 뻔하잖아. 전부 죽어야 했으니까 죽인거야. "


샌즈는 말이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왼쪽 눈에서 파란 스파크가 튀었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차라는 샌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한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건가? 어째서 죽어야 했다는거지? 네가 한 짓을 무고한 자들 탓으로 돌리지 마라. 살인자! 나쁜 새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겠어! 함께 살던 모든 이를 잃고 혼자 남은 자가 복수를 부르짖으며 절규할 때 듣는 식상한 말들. 그 모든 말들이 정말 샌즈가 느끼는 감정인지, 차라가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차라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기가 이제껏 느껴온 것. 자기가 이제껏 해 온 일. 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 있잖아. "


차라는 입을 떼며 손에 들고 있던 걸 샌즈에게 겨눠 보였다. 식칼이 서늘한 색으로 빛나고 있다.


" 너희는 이걸로 베이면 어느 정도로 아픈지 알고 있어? "


대답은 없다. 사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는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아주 옛날에 한번 실수로 손가락을 벤 적이 있거든. 지금 생각하면 별 일 아니었어. 피 쪼끔 나고 말았으니까. 그 정도로 죽을 정도로 인간이 약하지는 않아. 그런데 그땐 정말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정말이지, 너무 아팠거든. "


차라는 자기 몸을 힐끗 내려다본다. 왼쪽 옆구리가 아직도 욱신댄다.


" 살짝 베인 상처 가지고도 그렇게 날뛰는 게 인간인데,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다치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본 적 있어? "


차라는 왼손으로 가만히 몸을 만져본다. 옷 위로도 울퉁불퉁한 감각이 느껴진다. 윗쪽으로 올라가는 사선이 그려진 왼쪽 허벅지, 가로선이 그인 왼쪽 배, 얕지만 피부를 벗기고 지나갔을 오른쪽 팔꿈치, 목 아래 찢겨나갔던 부분. '의지'가 발현했을 때 상처는 모두 사라졌지만, 흉터만큼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마 옷을 벗으면 온 몸이 정말 꺼림칙한 자국으로 가득하겠지.

...아직도 왼쪽 옆구리 부분은 욱신댄다.


"너흰 알지 못하겠지만, 이 아이, 내 파트너. 여기 오자마자 온 몸에 상처가 생겼다. 어떤 빌어먹을 꽃 새끼가 날린 친절 알갱이에 온 몸을 꿰뚫렸거든. 피를 줄줄 흘리면서 누워 있자니 그 새끼가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오더라고. 뭐라 그랬더라? 여기선 죽이지 않으면 죽는 거라고 그랬던가? 내가 나와서 새로운 걸 가르쳐줬지. 갖고 있던 나뭇가지를 반으로 꺾어서 완전히 축 늘어질 때까지 정확히 62번을 찔렀거든. 아마 지금은 저승에 가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게 뭔지 제대로 깨달았을거야. "


잠들어 있던 자기가 깨어나서 처음 한 일. 차라는 아직도 그 때의 감정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 그 애 있잖아. 이미 그 시점에서 인간으로서는 거의 붕괴해 있었을걸. 아프다고, 아프다고, 그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뭘 하고 있는 줄 알아? 내가 30번쯤 찔렀을 즈음에 팔을 붙들고는 안 놔줄려고 그러는거야.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미 그렇게 간단하게 자기 몸을 빼앗길 정도로 약해졌으면서. 열받아서 그 다음부턴 더 아프게 찔렀었어. "

차라는 그러면서 식칼을 거꾸로 들어서 직선으로 찔러 넣었다가 안쪽으로 꺾어 넣고, 그대로 긁어 파내는 시늉을 했다. 아마 나뭇가지도 그 꽃도 어느 시점부턴 원형이 뭔지도 모르게 뭉개졌을 것이다.


" '의지'를 써서 상처를 치유하기는 했지만, 파트너의 정신만은 제대로 돌아오질 않았다. 떨어질 때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자기 이름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더라고. 완전 바보가 되어버렸어. 그래서 그 다음부턴 내가 좀 도와줬지. 아주 맛이 간 건 아니었는지 간단한 퍼즐 같은 건 곧잘 하던데, 갑자기 뭐가 튀어나와서 공격해올 땐 영 맥을 못추더라고. 그래서 그런 새끼들이 나올 땐 내가 나와서 손을 봐줬어. "


뒷처리 하나는 편했었지, 먼지만 남았으니깐 하고 들으라는 듯이 차라는 중얼거렸다.


" 아, 그러고보니 그 염소를 잊었구나. 이름이 토리엘이었지? 이름이 되게 익숙해서 처음엔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 뭐 집어치우고. 여튼 별걸 다 던져대는 놈만 보다가 친절하게 대해 주는 괴물이 하나 나타나니까 그나마 좀 살겠더라고. 그 아줌마네 집에서 같이 살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혹했었어. 이 아이한테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근데 아니더라고. 그 꼬마. 어떻게든 밖에 나가고 싶어했으니까. 몇 번을 나가고 싶다니까 그 염소, 나가는 길을 알려주더니 대뜸 꼬마 몸을 지져버리더라? 비명소리가 어땠는지 알아? "


저번처럼 찢겨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때 오른쪽 아랫배부터 무릎 바로 밑까지 불에 닿은 부분은 그대로 화상이 되어버렸다. 바로 치유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진물을 흘리고 있겠지.


" 그래서 그 염소도 찢어 죽였어. 그냥 참견이었던 게 그때부턴 좀 오기가 생겼던 거 같다. 됐잖아 이제. 이 꼬마 좀 냅둬. 그렇지 않으면, 뭐 그런 얄팍한... 무슨 느낌인지 알지? "

샌즈는 듣고 있는가. 뭐 사실 애초에 누가 듣든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상관은 없었다. 그냥 한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누구든지 들어줬으면 한다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줄줄 풀어내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 그러고 나서 다음에 만난 게 바로 코미디언. 그래 너. 너하고 그 멀대같은, 이름이 뭐였더라. 파피루스? "


일부러 기억이 안 나는 척 파피루스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며, 네 관심사는 역시 여기였구나 하고 웃는다. 샌즈의 왼쪽 눈은 이제 대놓고 푸른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다. 샌즈의 분노는 정확히는 여기를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무고한 자들을 모두 죽였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동생을 어째서 죽였냐는 그 부분.


" 조금 역겹네. 누가 보면 내가 정말 죄 없는 괴물 하나 죽인 줄 알겠어... 우리 입장에선 정작 제일 나쁜 새끼는 그 새끼인데 말이야. "
"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


차라는 옷을 걷어서 왼쪽 옆구리를 보였다. 이미 여기저기 흉터로 가득한 곳에 새로 난 듯한 죽 그어진 상처가 있다. ...겨우 지혈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 이거, 누가 낸 상처라고 생각해? 네 동생, 위대한 파피루스님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신 상처이시다. 넌 기억도 나지 않겠지만 말야. "


솔직히 말해서 코미디언, 너와 네 동생을 만났을 때, 난 당장 우릴 죽이지 않는 너희들을 보며 조금 안심했었다. 난 그 염소한테 배신당한 시점에서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고. 이 앞에는 우릴 죽이려고 하든가, 우릴 속여서 죽이려고 하는 녀석들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던 우리를 네가 구해줬었지. 좀 나사가 빠진 거 같기는 했지만 내 파트너와 놀아주는 너희를 보면서 난 바보같이 또 안심하고 있었어. 앞으로 무슨 일이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파트너가 더 상처받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나서, 이 지하에도 착한 녀석들이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히히히, 근데 그거 다 내 착각이었지.


파피루스 그 자식, 데이트니 뭐니 지껄이더니 갑자기 내 파트너를 땅에 꽂아버리고는 옆구리에 한 방 먹이더라고. 점프해서 피하라는 개같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지금 장난하자는거야? "

" 뭐라고? 아냐, 파피루스는 그럴려고 그런... "
 
" 죽일 의도는 아니었을 거다. 뭐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거야? 원래 모습은 그게 아니라고?


동생을 잘 아는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럼 우리는? 벌써 세 번 배반당해서 상처투성이가 된 내 파트너는? 이 애, 안 그래도 약해진 상태인데 이제 자기 영혼만으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그 상처를 입었을 때 결정적으로 망가져버렸어. 살아갈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

차라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자비를 베푸는 양 가증스럽게 웃던 키 큰 스켈레톤의 얼굴을 떠올린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 내 파트너가 앞으로 얼마나 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어야 너희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아예 한 번은 죽어 나자빠져야 했었던 걸까? 나는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건데? 내 파트너가 완전히 조각나서 나밖에 남지 않으면, 그 때서야 화낼 자격이 생기는 걸까?


난 맞고도 가만히 다른 쪽 뺨 내 주는 그런 사람이 아냐. 언젠가는 그런 인간이 떨어져 올 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라고. 괴롭게 한 자에겐 똑같이 괴롭게 해 주는게 내 방식이지. 한 번이면 됐어. 한 번이면. 사실, 너희들이 두 번 그런 시점에서 내 인내심은 바닥났어. 내 파트너를 봐서 참았던 거 뿐이라고. 두 번까지 참고도 한 번 더, 세번까지 참았어. 근데 너희는 세 번째에 와서도 나와 내 파트너를 배반했지.


이 상처, '의지'를 쓰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대로 뒀다. 주저함이 생길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말하지. 곧 배반할 네놈들을 살려둘 이유 따위가 없다고. 그 다음부터는 전부 죽였어. 찾아다니면서 죽였지. 이젠 너희들을 보자마자 모두 죽이지 않은 것조차도 후회해... 처음부터 아무도 믿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차라는 다시 식칼을 샌즈에게 겨눈다. 샌즈는 이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살의가 느껴질 정도. 아마 차라 본인의 살의도 샌즈에게 느껴지겠지.


" 우린 나갈 거야. 내 파트너에게 고통을 준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보란듯이 지상으로 나가주겠어.


너, 코미디언, 너는 그래도 아직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릴 배반하지 않았지. 그래서 난 네게 딱 한번만 선택권을 줄 거야. 지금 우리를 보내주면, 난 널 베지 않겠어. 지하에 혼자 남겨지겠지만, 살다 보면 어떻게 방법이 생길 수도 있겠지. 너희들, 우리 이전에 6명이나 죽인 모양이던데, 그걸 이용할 수도 있겠고. 하지만 네가 같잖지도 않은 동생의 원수 운운을 하면서 우릴 막으면, 너도 얄짤없어. 난 널 모르지만, 어떻게든 더 이상 상처를 입지 않고 널 죽일 거다. 자. 어떻게 할 거냐. 대답해. "


식칼 끝과, 차라의 눈을 번갈아 응시하던 샌즈는,


" 네 입장이 그렇다면, 나도 더 주저하진 않지.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

그런 말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 살인마에게는 실낱같은 죄악감도 없다. 그 모든 일이 했어야만 했던 당연한 일. 그렇다면 자신이 더 이야기할 것도 없겠지.


" ... 정말 좋은 날이야. 새는 지저귀고, 꽃은 피어나고. "


샌즈는 동생이 죽은 그 순간부터 이 자를 지켜봐왔기에 알고 있다. 우연히 마주쳤든, 누군가의 복수를 위해서 달려들었든, 그 누구도 이 여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난도질당해 사라져갔다. 그런 자를, 나는 하고 떠올렸다가, 억지로 그 망설임을 지워버린다.


" 이런 날에 너희 같은 꼬마들은, "

감았다 뜬 왼쪽 눈에서 파란 색과 황금 색의 스파크가 번갈아서 튄다.


" ...지옥에서 불타고 있어야 하는데. "
" 멍청이, 내가 마냥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


동시에 솟아오르는 수십 개의 날카로운 뼈, 나타나는 거대한 해골 용의 머리, 주머니에서 나온 샌즈의 왼손에 머금은 청의 마법.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차라가 발을 딛는다. 모조리 빗나가는 자신의 공격과 희생양을 쫓는 차라의 시선. 샌즈는 살인마의 눈 속에서 피어오르는 의지의 붉은 빛, 그리고 옅지만 분명하게 빛나고 있는 황금빛을 본다. 황금빛.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색이었던가. 샌즈는 치밀어오르는 구토를 겨우 참았다.


*   *   *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 파트너, 일어날 수 있겠어? "

얼마나 이 공간에 웅크리고 있었는가. 소녀는 누군가가 일으키는 힘에 정신을 차렸다.


" 갑자기 주도권을 찾으면 현기증이 올 거다. 조심해. "

그 말과 함께 찾아오는 지-잉한 느낌에 소녀는 뒤쪽으로 넘어갈 뻔 하다가, 겨우 다시 중심을 찾았다. 뜨인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언젠가 보았던 광경.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광경. 지금 자신들은 지상에 나와 있다. 소녀는 자신을 파트너라고 부른 목소리를 향해 돌아본다. 하트 모양의 로켓을 목에 건 초록 옷의 소녀가 그 곳에 있었다.


" 그래, 완전히 깎여나간 건 아니구나.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네가 정신을 못 차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어.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고, 이제, 안심이야. "

하고, 거기 서 있던 소녀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 히히히, 역시 죽은 몸으로 좀 무리했나봐. 이제 일어나지도 못하겠네. "

짐짓 웃어보이고 있지만, 받치고 있는 손의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이건 일어나고 못 일어나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완전한 방전. 쓰러진 소녀의 영혼은 텅 비어 있었다.


"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었던 거 같지만... 잊어버렸어. 뭐 아마 중요한 건 아니었겠지. 지금의 난 너뿐이야. 이렇게 나왔으니, 이제 됐어. "

거기까지 말한 소녀는 아차, 하고 손을 뻗어 푸른 옷의 소녀의 옆구리에 가져다댄다.


" 의지. "

스쳐가는 따끔한 느낌. 그러나 이제 더는 아프지 않다. 손에서 나온 불가사의한 힘이 남은 상처를 치유해간다.


" 있지. 멋대로 다 정해버려서 미안해. 네가 원한 결말은... 사실 이런 게 아니었지? 이런 상처 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넌 다른 결말을 바랬어.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좀 심하게 참견해버렸다. 그대로 뒀으면 분명 망가질 거라는 걸 알아버려서 말이야... 마음대로 원망해도 좋아. "

치유를 끝낸 손이 몸을 가만히 만져 간다.


" 솔직히 말하면, 난 다시 하고 싶어. 이런 상처, 이런 흉터 따위 남기지 않는 결말로 나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내가 해야 할 게 아니지. 그럴 권리 같은 게 나한테는 없어. "


초록 옷의 소녀가 푸른 옷의 소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준다. 조그맣게 RESET이라고 적혀 있는 하트 모양의 로켓. 영혼의 공간 속에서 건네주는 것이기에 그것은 존재하는 물건 같은 것은 아니다. 소녀의 영혼의 일부 같은 것.


" 이게 '의지'. 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만 썼지만, 사실 이걸 이용하면 전부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해. 네게 맡길게. 지금 다시 하지는 마. 누군가가 네 몸을 찢어내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뒤에 다시 오는거야. "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손이 또 다른 물건을 내민다. 이건... 작은 쇠붙이. Appdata. A로 시작하는 영어 일곱 자가 쓰여 있는 작은 칼.

" 이건... 보험 같은 거. 네 몸이 처음 찢기는 충격에 잊어버렸지만, 느낄 수 있어.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널 지키는 게 아니었을 거야. 원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다를지도 몰라. 어떤 짓을 할지... 어떤 결말을 원할지... 혹시 전부 다시 할 거라면, 날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 때의 내가 네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라면 "

그 칼로 날 찔러. 하고 소녀는 힘겹게 말한다.


" 히히... 이제 더는 못 버티겠다.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네. 만나서 반가웠어. ...나, 그러고보니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

안녕, 내 파트너.
혹시 다시 만난다면, 그 땐 네 이름이 뭔지 알려줘.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긴 영혼이 사라져 간다.
 
혼자 남겨진 소녀는 남겨진 물건을 손에 쥔 채로

가만히 숨죽여 울었다.


*  *  *




" 으..... 으으.... "


아직 죽지 못한 몸이 기어간다.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왼쪽 눈이 푸른 빛으로 이글거린다.


" 이런 결말 따위를 원한 게 아니야,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야... "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베인 상처에서 먼지바람이 새어나간다. ...급소를 간신히 피해서 완전히 죽진 않았지만,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


" 팝... 난... "

죽음을 예감한 해골 남자가 상처를 감싸쥐고 웅크린다. 자신이 얼마나 자책하든, 얼마나 원망하든, 얼마나 다른 결말을 원하든, 그런 건 상관없이 곧 심연의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결국은 그 살인마에게 상처조차 한 번 내지 못하고 이 꼴이 되고 말았다. 파피루스, 먼저 기다리고 있을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는가. 샌즈는 죽음보다도 그게 두려웠다.


" 아.... 아...아....... "

어둠이 깔린다. 점점 찾아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샌즈는 망상한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


이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할 수 있다면.



" 그 여자, 용서하지 않겠다. 그렇지? 응? "

감기던 샌즈의 눈이 뜨인다. 그 곳에 서 있는 것은 검은 옷을 입은 괴상한 가면의 남자. 아니, 가면이 아니다. 금이 가 있는 그 것은 분명히 얼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얼굴이 죽어가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한 번이 아냐.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 내 기억과 내 힘의 일부. 이거라면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망상 속의 이야기는 아니지. "

기괴하게 뚫려 있는 손에 알지 못하는 기계가 장착되고, 샌즈의 치명상에 다가와서, 그대로 쑤셔박혔다. 펌프 소리와 함께 붉은 액체가 넘쳐흐른다.


" 크.....아.......... "
" 아, 몸부림치지 말도록. 묻는 건 질색이니까. 어차피 고통은 잠깐이야. 그 정도는 바라던 기적을 위해서 감수해야 할 일 아닌가? "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웃고 있다고 샌즈는 느꼈다.


" 지금의 기억... 일단은 회수하도록 하겠네. 복수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걸 자네에게 가르쳐주고 싶기도 하니, 그건 나중의 재미로 남겨두자고. 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세나. "


상처가 사라진 샌즈의 몸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형의 공간으로 보내진 것이다.


가면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 가스터는 마지막 사라지기 전 샌즈의 눈을 보고는 이것도 재미있겠군, 하고 쿡쿡 웃는다. 파란 색과 붉은 빛이 뒤섞여 보랏빛으로 타오르던 그 눈. 뻔한 인형놀이에 질렸을 때, 회수한 기억을 다시 꽂아 넣으면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겠지. 그 눈을 가진 남자가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가스터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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