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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갤문학]복수자 FINAL

ㅇㅇ(220.81) 2016.04.23 00:57:33
조회 7827 추천 87 댓글 21
														

복수자 시리즈 완결.

혹시 전편을 안 본 사람이 있다면 보고 읽는게 좋을지도.




복수자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undertale&no=237335


복수자 AFTER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undertale&no=337007






* 1명 남았다.


" 허억, 허억, 헉, 헉... "


구름이 하늘을 가려 어둡다. 살아있는 것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 후드를 뒤집어쓴 붉은 눈의 해골이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는 소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갇혀있는 수억의 영혼이 샌즈의 두개골 안쪽을 긁어 빠각대는 소음이 나는 순간에도, 또렷하게 들리는 인도의 속삭임.


* 1명 남았다.


이 인간이 마지막. 이 인간이 죽음으로써 지상에 살아있는 모든 지성체가 절멸한다고.


" 사... 살려, 살려주세요... "


7일. 이 인간이 샌즈에게 쫓기며 살아남은 시간. 먹지도 자지도 않는 추적자를 피해 선잠을 자 가며, 쓰레기를 삼켜 가며 버텨온 자. 그걸 증명하는 듯이 팔도 다리도 최소한의 근육만 남아 그저 앙상하다.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수분도 간당간당한지, 눈은 찌그러지기 일보 직전. 그런 눈에도 필사적으로 고이는 눈물은 공포로 인한 것인가, 혹시 있을지 모를 연민을 구하기 위한 것인가. 붉은 눈이 받아들이는 온갖 정황정보를 페이지를 넘기듯 흘려버리며, 샌즈는 가볍게 오른손을 치켜든다.


" 히이이, 히이이익...!! "


도망가지 못하게 된 몸으로도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치는 모습. 무엇이 소녀를 이렇게까지 버티게 한 것인가. 혼자 남은 세계에서 그렇게까지 살아남아 이루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인가. 스스로의 생존 의지가 강했을 뿐인가, 아니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곁에 있었던 누군가의 유지가 소녀를 대리자로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그 모습이 문득 비틀어진 영혼 끝자락에서 언젠가 만났던 누군가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퍼석.


" 이, 이거, 뭐야. 아, 아파... 아... 아아아악...!!! "


피가 튄다. 오른쪽 어깨뼈를 부수고 솟아오른 날카로운 뼈 칼날. 박혀버린 칼날을 차마 뽑지 못하고 시선만이 부들부들 상처를 맴돈다. 그 모습을 보며 샌즈는 혀를 찼다. 심장을 노린 일격이 오른쪽 위 멀리 빗나가 버렸다. 겨우 그 정도 움직임에도 조준이 흐트러졌나. 마지막 인간이라는 생각에 잡념이라도 많아진 것인가. 피하지 마라. 너만 아프니까, 하고 건조하게 내뱉으며, 손가락이 다시 올라간다.


" 갸, 으, 어... "


터져나온 피가 공기를 틀어막아 성대까지 닿지 못한다. 고기 찢기는 소리. 갈비뼈가 깨져 흩어지며 뼈가 솟아오른다. 풍선처럼 터지는 폐포와 함께 심장을 잇는 동맥이 바깥으로 삐져나와 단면도를 드러내며 놓친 호스처럼 피를 흩뿌린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고 무심하게 기능을 정지하는 기관들. 뼈 꼬챙이에 꽂혀 효수되듯 들어올려진 자신의 심장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희생자의 눈이 빛을 잃는다. 주인을 잃고 잘게 경련하는 팔다리.


" ... "


오랜만에 바람 소리가 난다. 흘러드는 LV. 무심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인마는 그 장소를 떴다.



* * *



에봇산 정상에 뚫린 구멍. 가볍게 그 구멍으로 뛰어내리며, 샌즈는 떠올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괴물의 법칙은 인간의 법칙을 닮아 있었다. 마치 두 존재가 태초에는 하나였던 것인 양. 치러야 하는 댓가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차이날 뿐, 그 가능성만은 열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에봇산 전체의 괴물을 한데 모으는 것으로, 괴물은 도달할 수 없는 인간 1명 분의 영혼에 필적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괴물의 가능성이 한 차원 줄인 인간의 가능성을 닮아 있다면, 역으로 인간의 가능성은 괴물의 가능성을 닮아 있는가. 괴물이 해낼 수 있는 일을 한 차원 늘려 가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되는가. 아스리엘 드리무어. 에봇 산의 모든 괴물의 영혼을 모음으로써, 괴물 한 마리의 소생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죽은 인간 한 명을 살리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멸하고, 그 영혼을 취하는 것으로.


" ... "


변수가 너무 많다.
역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그 생각이 틀렸다면?
그 발상이 맞다고 해도, 이것만은 예외라면?
설령 예외가 아니라고 해도, 애초에 자신이 그걸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전제부터 틀린 길을 걷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은 없다.


하지만 이 해골에게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있었는가.


잠깐의 망설임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세계. 반복된 한 줌의 망설임에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끝자락에 몰린 내가 이제 더 뭘 망설여야 하는가. 오래 전 자신이 알던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소녀의 심장이 채 멎기 전,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결론은 나 있었다.


두근, 두근.


뼈만 남은 손이 가슴 한가운데, 고동치는 영혼을 느낀다. 따뜻하다. 73억명 분의 혼이 Lv이 되어 휘도는 그 중심, 자신의 영혼이 또 하나의 영혼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다. 천만 조각으로 갈라져 한번이라도 놓치면 그저 Lv가 되어 흩어져버릴 것 같은 소녀의 영혼. 샌즈는 떠나지마, 아직, 아직. 떠나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듯 다독거린다.


... 이런 일이 가능한 것조차 사실은 이미 변수.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얻을 수 없고, 괴물은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으로 Lv를 얻지 못한다. 어느 박사가 죽어가는 자신을 살리며 쏟아넣은 인간의 피, 그것이 샌즈를 사람도 괴물도 아닌 무언가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얻어낸 Lv는 다시 영혼의 힘으로 치환되는가, 사람도 괴물도 아니라지만 본질은 괴물은 내가, 애초에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가능한가.


갈피를 못 잡는 생각에 샌즈는 머리를 짚는다. 가능성에 걸고 73억의 영혼을 취했으면서, 이제와서 뭐가 두렵지. 실패했을 때의 절망감? 마지막 기회조차 사라지고 혼자 남겨졌을 때의 고독감?


" 지랄병이 또 도졌지. 똥자루 새끼. "


허공을 가르는 욕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잠겨 있던 샌즈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다. 그것은 언젠가 적으로서 만난 적이 있던, 말하는 노란 꽃의 목소리. 샌즈는 무심코 떠오르는 이름을 부른다.


" ...플라위. "
"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세상 고민은 혼자 다 안은 새끼인 양 멀리 떨어져서 보기만 하지. 어차피 해봤자 안 된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나 했더니, 결국 병신은 병신. "


노란 꽃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붉은빛을 키고 주변을 스캔하는 도중에도 플라위의 말은 이어진다.


" 그 때의 나를 떠올려봐. 과연 내가 널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


언젠가 되돌리기를 반복하며 수십번을 자기한테 덤벼왔던 식물. 압도적인 전력차로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패하면서도, 언젠가 자신에게 닿을 것이라는 듯 패턴을 무수하게 바꿔가며 자신을 향해 탄환을 날려대던 그 꽃의 눈빛. 결국 한번도 닿지 못했으면서 절망감이라곤 없었던, 그...


" 쫄지 말고 나아가. 여기까지 왔잖아. 그냥 해 보라고. "


날카롭게 파고들던 욕설은 어느새 조금 유해져 있다. 이건, 격려인가. 그답지 않다는 생각에 샌즈는 살짝 눈을 감는다. 잊은지 오래된 헤. 하는 말버릇과 함께, 나직하게 고맙다. 도움이 됐어. 하는 말을 전한다. 그에게도 자신답지 않은 말이 전해졌는가, 어이없다는 듯한 숨소리.


" 뭐래, 등신이... 아무튼, 꼬마 만나면 안부 전해줘. "


꽃의 목소리가 사라져 간다. 뚜벅, 뚜벅, 하고 울리는 안쪽으로 울리며 멀어져 가는 발소리. 샌즈가 떠난 자리엔 무언가를 가두는데 쓰인 듯, 원통형 유리관이 텅 빈 채로 남겨져 있다. 지직거리는 고장난 디스플레이에 글씨가 떠돈다.


- flowey the flower. 통칭 플라위. 에봇산 토착 식물의 변종으로 보임. 위험도가 높아 즉각 소각 처리 후 경과 관측중.


* * *


어디선가 불어오는 거센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다. 붉은 안광만이 겨우 눈보라 속에서 샌즈의 존재를 알린다. 푹푹 빠지는 발. 그 속에서 샌즈는 열이 오르는듯 헐떡거린다. 그동안 오른 Lv가 폭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영혼을 짊어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허리까지 묻힌 눈이 무겁다. 눈 속에 묻힌 슬리퍼가 발에서 빠진다. 넘어질 뻔 하던 그 때, 조심해, 샌즈 형!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언젠가 사랑하는 동생에게 자기가 매어준, 아직도 기억하는 빨간 스카프가, 동생이 그렇게나 아끼던 전투육체가 보인다.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눈바람을 아무렇게나 훔치며, 팝, 내가 갈게. 어디 있어. 하고 외치며 방향을 돌릴 때, 파피루스는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형은 아직 이쪽으로 오면 안 된다고, 가야 할 곳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못 버린 미련에 또 다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서려 할 때, 느아아아-! 하는 기합과 함께 자기 앞으로 박힌 창. 고개를 든 곳엔 냉엄한 표정으로 파피루스 곁에 선, 애꾸 눈의 어인 근위대장이 보인다. 곁에선 손을 잡고 일으키는 토리엘 아주머니가, 앞에선 눈 속에 빠진 자신에게 잡으라는 듯, 붉은 창을 내민 괴물의 왕이. 저기 먼 곳에선 알피스와 메타톤이 여기라고 손짓한다.



모두의 응원을 받으면서도 미안해, 파피루스. 미안해요, 모두들. 나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 하고 해골 괴물이 필사적으로 되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던 토리엘이 샌즈의 가슴을 가만히 가리키며, 아직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고개를 든 샌즈와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모두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힘을 얻으며 모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딛을 때, 발동하는 청마법이 눈앞을 가득 메운 눈보라를 지워낸다.



설원을 빠져나가기 직전, 돌아본 곳에는 안경을 쓴 정장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조용히 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서 그릴비네 3호점에서 모두와 기다리고 있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전해진다. 지하에 하나, 지상에 하나 세웠으면 됐지 뭘 또 3호점씩이나, 하고 샌즈는 웃으며 뒤돌아 걸어간다. 그래, 가는 어디에나 그릴비네가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잠시 눈보라가 그친 스노우딘.
마음 속 바텐더가 자취를 감추자 눈 속에 묻힌 그릴비네 1호점의 간판이 빛났다.


* * *


복도에 발을 딛자 던져져 있던 돌조각이 부서지며 소리를 낸다. 오는 사람이 없어 잊혀진 와중에도 스테인드글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서서 황금빛을 쏟아낸다. 반인 반 괴물로 살아난 이래로, 언제 어느 시공간에서도, 꼬마와 자신이 일 대 일로 만났던 공간. 다시 만난다고 하면 아마도 여기서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결국 샌즈는 이 곳으로 돌아왔다.


붙잡고 있었던 붉은 색 영혼이 해방된다. 공중에 떠오른 영혼이 못 견디겠다는듯 수천만 조각으로 갈라질 때, 샌즈의 혈액 속 흐르고 있던 73억 Love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영혼의 틈을 빈틈없이 메워간다. 집중하는 샌즈. 메운 곳이 다시 갈라지길, 갈라진 곳이 다시 메워지길 몇 번을 반복한 끝에, 겨우 형태가 고정되는 하트 모양의 정수.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하고 말하듯 혼란스러워하던 영혼은, 몇 걸음을 떨어진 끝에 샌즈가 알고 있던, 스웨터를 입은 단발의 꼬마아이로 변해갔다.


절반의 성공. 아니, 사실상 실패. 죽은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답하는 것 같은 결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바치고도, 얻어낸 것은 완전한 수복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간의 소멸 유예였다. 앞으로 몇 분이 지나면 되살아난 소녀는 다시 무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샌즈는 앞으로 한발짝 내딛으며 말한다.


" ...오랜만이야, 꼬마. "


어리둥절해하던 소녀는 자신을 보며 안심하는 것 같았다. 웃고 있을까. 소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만개한 황금빛으로 인한 역광이 소녀의 얼굴을 검게 가리고 있다. 기왕이면 프리스크의 얼굴, 한 번은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요동친다. 왼쪽 눈을 켜면 볼 수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 올라간 Lv로 범벅이 된 붉은 눈을 보면, 꼬마가 질겁할 게 뻔하니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하고 싶었던 말, 듣고 싶었던 말. 다 하기엔 너무도 짧은 몇 분의 시간,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샌즈가 잠깐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바보같게도 몰려오는 감정에 뜨거운 것이 눈구멍에 가득 고여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꼬마 앞에서는 쿨해야 하는데. 이미 옷이 아니게 되어버린 낡은 점퍼 소매로 몇번을 훔쳐도 다시 고이는 눈물.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거 같은 소리를 억지로 집어삼키며, 당황한 듯 뻗어오는 손을 제지한다. 괜찮아. 괜찮아.


" ...심판해 줘. "


겨우 감정을 추스른 샌즈가 입을 연다. 소녀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황한 눈치다. 당연한 일. 쌓은 EXP, 오른 Lv. 프리스크가 이제껏 해온 것, 행위의 결과를 심판하는 건 항상 방관자였던 샌즈,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자신이 심판할 수는 없는 일. 누군가가 당사자가 된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


" ...마지막까지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프리스크, 꼭 네가 해 줬으면 좋겠어. "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은 샌즈. 프리스크는 아주 오래 전 일을 떠올린다. 연약했던 자신, 그런 자신을 지켜주고 마지막에 사라져버린 소녀. 차라가 자신의 영혼에 남겼던 두 번째 유산. 주머니에는 아직도 차라가 남긴 작은 칼이 남아있다. 선명하게 새겨진 'APPDATA'. 그것을 가만히 쥐었을 때 샌즈를 휘감고 있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LV. EXP. 자제력을 잃고 학살을 시작한 자에게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악마. 그것이 자신의 수호자로서 나타났던 또 다른 차라가 걱정했던 그것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 네가 생각한 내가 아니라면, 그 칼로 찌르라고 소녀는 말했다. 73억의 원혼이 주위를 떠도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에 있는 것은 명백한 학살자. 그 진의가 어떻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심판자가 자신에게 그 권한을 위임했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무력한 첫 번째 죽음 이후로,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남자. 겨우 찾아온 잠깐의 안식에 안주할 틈도 없이, 자신이 어쩌지도 못하는 불행에 매몰되어 끝내는 마지막 남은 것마저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남자. 그 말로까지 그렇게 괴로워서야, 이 왜소한 남자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다 못해 선물이라도 하나 주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프리스크는 가슴에 APPDATA를 댄다. 스르륵, 하고 들어가는 주머니칼. 영혼의 정수가 주머니칼의 본질과 공명한다.


이리 와, 하는 부름에 샌즈는 감았던 눈을 뜬다. 다가오면서 받은 황금빛에 얼굴이 드러난다. 꼬맹이가 두 손을 뻗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내가 아는 프리스크가 이렇게나 빛나는 사람이었나, 샌즈는 홀린 것처럼 다가가 하얀 목을 감는다. 화답하듯 허리에 감기는 두 팔,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체온.


하, 이 꼬마, 바보같이 그때처럼 또 다시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 이렇게 엉망이 된 나한테도. 조금만 더 매정한 면이 있었어도 좋았을걸, 샌즈는 눈물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아아, 역시, 이런 면도 싫진 않아.


" ...고맙다. 꼬맹아. "


APPDATA가 샌즈의 몸에 스며들어 말라 비틀어진 해골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탁, 하고 금이 가는 영혼. 그 사이로 아우성치던 73억의 목소리가 해방된다. 존재의 중심을 잃은 몸이 붉은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간다. 편히 쉬라고 마지막까지 등을 다독이던 프리스크도 함께 흩어지듯 사라져간다.


언젠가 햇볕 잘 드는 곳에 피어있던 황금꽃.


같은 색의 빛이 조용히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워간다.



* * *


비가 오고 있다.


아무도 남지 않은 세계 끝자락에서 검은 옷을 입은 가면의 과학자가 헤매듯이 걷는다. 듣는 자 하나 없이, 미치광이처럼 되뇌이는 소리.


"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네. 이 세계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


폭력, 투쟁, 배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 세계. 한 번의 처참한 결말을 겪은 후, 가스터의 머리를 가득 메운 것은 오직 하나. 어딘가에 있을 완전한 해피 엔딩의 가능성이었다. 지금껏 서로 죽이고 싸워왔어도, 마지막에 가서 해피엔딩을 이룰 수만 있다면, '교정'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시공간을 넘는다는,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한 대가로 몸이 갈가리 찢겨, 어느 시공간에서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어느 곳에도 몸 둘 곳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가스터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라도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자기 몸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결국 찾아낸 '불살' 엔딩. 어느 당돌한 꼬마가 홀로 이루어낸 기적. 그러나 그 너머에도 해피 엔딩은 없었다. 그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탐욕과 이기심. 겨우겨우 살려낸 모든 생명은 다시 흙으로,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고. 그렇게 다시 모든 것이 배드 엔딩으로 돌아간다. 끝내 가스터는, 이 세계의 교정 가능성이라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가스터는 사소한 인형놀이를 하나 생각해낸다. 불의의 사고, 복수가 낳는 복수자의 연쇄. 처음엔 자포자기로 시작한 그 인형놀이는, 놀랍게도 가스터가 그렇게도 원하던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해냈다.


모든 존재를 절멸하고, 자신조차 심판받아 사라지는 복수자의 출현. 그 끝에, 시공간을 넘어 관측하는 자신만이 세계에 남는, 가장 이상적인 결과.


" 샌즈 군, 차라 양, 프리스크 양. 자네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됐네. 자네들은 이 멍청한 과학자의 인형놀음에 희생된 게야. 그래도 부디 용서해 주게. "


이 방법밖에 없었다네, 가스터는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용서를 구한다. 비를 맞아 녹아내린 몸이 눈물처럼 흘러내려 지상을 적신다.


" 돌아가세. 처음으로 말이야. "


프리스크라는 괴물의 구원자가 처음 에봇산에 떨어지던 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좀 더 과거로, 아주 먼 과거로, 인간과 괴물이 다투기도 전. 가스터가 태어나 세상에 의문을 품기도 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때로.


가스터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치켜든다.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이 세계를 멸해야 한다. 아무도 남지 않아 세계의 가치를 완전히 잃을 때에야 한 세계를 심연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남은 마지막 1 카운트. 그것은 시공간 사이에서 이곳을 엿보고 있는 바로 자신. 가스터는 자신의 영혼에 힘차게 단검을 박아넣는다.


이것이 한번도 자신에게 완전한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았던, 잔혹한 세상에 대한 한 과학자의 복수.

세상에 남은 마지막 복수자가 형체를 잃어간다.


"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우리, 다시는 이렇게 만나지 마세...! 다시는, 다시는 이런 결과가 반복되어서는 안되네...!! "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며 사라져가는 목소리. 세상을 보는 마지막 눈이 시야를 잃는 것과 같이, 온 세상이 무너져 어둠 저편으로 사라진다.

추모하는 자 하나 정도는 있을 법도 하건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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