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말고 또 어떤 걸 죽이지?'
'괴물. 그런데 죽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거야?'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무슨 말이지?'
'괴물을 죽이는 것에 내 스스로 당위성을 주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나는 괴물을 공격했고, 그리고 그들은 죽었지. 그게 다야. 이 사이에 어떤 의미도 첨가되어 있지 않아. 네가 뭘 원하는지 알겠지만 기대를 채워주지 못 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게 진실인걸?'
'너와 살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
샌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더 하고 아니면 말고. 저건 대충 그런 의미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어떨까? 뼈다귀는 조금 지루해하는듯하다. 말을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 괴물은 이런 지론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
그것이 내 귀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음성이었다. 괴물은 빨갛고 파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죽음의 기억은 언제나 찰나와 같다. 그렇게 곱게 포장하고 싶어진다. 내가 하는 일이 맞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죽고 싶어 하는 생물은 없으니까. 그러나 죽는 것은 나의 일이다. 천명 같은 거 까진 거창하고 그냥 의무 정도라고 설명하고 싶다. 뼈다귀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원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냥 아날로그 방식을 좋아했다. 그게 자기한테 더 낫다고 했다. 감각이라도 없다면 자기가 죽은 건지 산 건지 어떻게 증명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위는 온통 재뿐이었고 사실 자기 자신도 재라고 해도 상관없을 지경이었다. 괴물은 부정하고 싶지만 그만큼 한계의 무게를 알고 있다.
왼쪽 눈이 쓰라린다. 괴물은 내 눈을 여덟 번 찍었다. 하얀색 뼈로 직접 후벼판 건 아니고 도구를 사용하였다. 어디서 얻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잊어버렸다. 그 칼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섬광 같았다. 내 눈은 인간과 다르게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 피가 조금 튈 뿐이지 안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기대를 채워줄 만한 쇼는 없다. 그러므로 샌즈는 나를 재미로 죽이는 게 아니다. 내가 죽는 것만큼 그 또한 죽이는 것에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그를 움직이는 주체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누군가 해골의 뒤에 존재하며 그를 실로 매달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인형은 스스로 의지가 없지. 물론 이러저러한 가정은 내 망상일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모든 것을 확신할 수도, 확신하지 않을 수도 없다. 난 샌즈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그와 나의 업무의 한 부분이었다.
내 일은 정확하게 죽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 중에 포함되어 있을 뿐 진짜 중요한 사정은 따로 있다. 그것은 딱히 비밀이 아니니 미리 밝히자면 나는 뼈다귀를 알고 싶다. 왜 괴물을 죽이는지, 왜 나를 죽이는지, 왜 혼자 있는지. 궁금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갈망해 오던 것이며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죽음이 지나갔으나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었다. 괴물은 대화를 하는 것이 가장 금기되는 행위인 마냥 입을 열다가도 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다음은 역시 살해의 반복, 그것이다.
리셋의 기억. 샌즈는 얼마나 괴물을 죽이는 것일까. 지금 이곳 우리가 서있는 심판의 복도에 내 자리에 존재하였을 뼈다귀의 긍지에 대해 추억해 본다. 마일리지가 열 번쯤 쌓이면, 폭력에 대한 그 어떤 그럴싸한 맺음말이 얻어지려니 해골은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곧이어 300회를 맞이하게 될 노동은, 아무런 맺음말도 가진 것이 없다. 맺음? 맺음말이란 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그것만 잡히면 샌즈의 불행 같은 건 아주 시시해 질까. 뼈다귀는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인지? 이런 개죽음을 남에게 선사하며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미친 시간을 보내게 될.... 아니, 그만두지. 너도 어차피 리셋을 기억하고 있잖아.'
나는 웃었다. 샌즈는 내 웃음이 멈추길 멍청히 서서 기다렸다. 복도는 커다란 창이 연이어 있었는데 그곳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상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저것은 태양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지열을 빨아들인 코어가 용암을 전기로 바꾼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도 죽기 직전에 적당히 감상적인 태도가 좋다. 삶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늉을 하고, 샌즈의 말을 곱씹어 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걸 저 빛이 도와주는 것이다.
'오늘은 어땠어?'
'리조트에 갔는데 버거 팬츠를 만났어. 그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그리고?'
'건강에 안 좋다고 걱정해줬더니 괴물이란 언제나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더군. 나를 가르치려 하는 거야. 난 그런 관념론자들이 너무나 싫어. 걔네들이 떠드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려도 말이지?'
샌즈는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빼냈다. 그곳에서 작고 투박해 보여 부엌용으로 적절한 칼이 튀어나왔다. 샌즈는 칼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크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죽잖아. 시체는 말을 못해!'
그는 칼자루를 단단히 잡은 채 나의 가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 숱하게 낭비한 이전의 경험과 같이 모든 것이 다시 리셋되고 말 것이다.
그는 내 품을 깊게 파고들었다.
돌풍처럼 휘몰아쳐 지나간 일이라 고통의 자각은 샌즈의 동작 이후에 찾아왔다. 맑은 물에 피를 떨어트린 악몽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혀를 깨물게 하는 통증 속에서 나는 해골의 진상을 알기 전에 먼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는 악귀처럼 몸을 일으켜 튀어 오르는 동작으로 나의 가슴에 박아 넣은 칼을 더 큰 악력으로 찔렀다. 섬뜩한 힘이 내 몸을 찢고 깊숙이 박혔다.
'잡았다.'
아, 아! 관자놀이가 터질 듯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마력, 나도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면! 300번째 바라마지않던 소망이다. 허리가 부서질 듯 괴상하게 구부려 왈칵 피를 뱉었다. 시야가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섬뜩한 빛이 나를 쫓았다. 보랏빛 안광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감시할 것이다. 나의 반응, 나의 고통, 나의 피. 자신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교란시키는 상념들 속에 지쳐버린 샌즈에게 유일한 기쁨이 될 것이다.
'넌 피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들어. 이제껏 너와 긴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나와 같은 종류인 거야.'
그는 지극한 유희만 남고 모든 감정이 거세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시선의 끝엔 꽤 힘겨워하는 나의 얼굴이 있었다.
'그렇지?'
'나 좀 도와줘....'
샌즈는 웃었다. 그 미소에 어떤 악의도 담겨있지 않았다. 뼈다귀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유연하게 휜 눈구멍 너머로 온도가 차단된 붉은빛이 태양처럼 말갛게 떠올랐다. 나는 넓게 퍼진 피웅덩이 가운데 고꾸라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리 이 세계에서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 따위 무의미하다 해도 나는 내가 낭비한 시간의 양을 알고 싶었다. 위장에서부터 신물이 올라온다. 우스운 이야기다. 이미 리셋된 경험이 아직까지 유효할 리가 없었다. 실재 내 입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환각일 뿐이며 이런 행위는 지층에 흙이 쌓이듯 켜켜이 몸체를 키웠다. 301번째 만남이 곧 다가온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하루였어.'
난 네가 이상해. 해골이 먼저 말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특히나 즐거움 이외의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매우 낯설었다. 샌즈는 적잖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파란 것과 빨간 것의 경계가 흩어졌다. 어떤 중대한 사건을 맞이한 듯싶었다.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리스폰 한 그릴비에서 난 평소와 다름없이 살해를 시작하려 했지. 그런데 괴물들이 이상했어. 그들은 뭔가, 발견한 듯 보였지. 그게 뭔지는 몰라. 곧 죽여버렸으니까. 근데 그 사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괴물들이 무엇을 알아차린 것 같아. 결코 알아선 안될 비밀 같은 거 말야. 솔직히 말할게. 난 불안해.'
'귀신이라도 발견한 꼬마 애같이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너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 샌즈. 살해자라면 그것답게 자신감을 가지는 게 어때? 겁먹은 미친놈이라니 이건 무슨 궤변이지?'
뼈다귀는 손을 들어 거칠게 후드를 벗었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엄청난 재 가루가 구름을 이루며 날아올랐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괴물의 잔해가 얼마 동안 해골과 내 시선을 차단하여 떠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샌즈의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악마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무한의 에너지였다.
'너밖에 없잖아. 시간선을 되돌리기 이전 기억이 남아있는 존재가!'
그는 숨을 들이켰다. 괴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터져 나오는 한숨이 마치 괴물의 감정의 정수와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입꼬리를 그려올렸다. 그건 미소가 아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좀 더 새로운 걸 해보자.'
'너, 괜찮아?'
'네 걱정이나 해.'
그가 발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귀신처럼 보였다. 형상 자체만으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을 안겨주는 제스처이다. 뼈다귀가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배를 들쑤신다거나 목을 내려치는 전조와는 다른 분위기. 엄청난 괴리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곧 해골이 내 앞에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해골의 잔인함을 제외한다면. 시선이 기우뚱하게 주파수가 어긋난 것이 인식의 시작이었다. 슬라이드 쇼로 괴물의 키가 점점 커지는 것이 보였다. 시야가 점차 아래로 추락했다. 마치 키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프게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아, 악! 아 이 개새끼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뭐야 이거!'
무릎 밑으로 나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처럼 엄청난 열기가 머리끝까지 달아올랐다. 나는 손을 널게 펼쳐 허우적거렸다. 그 사이로 기분 나쁜 것이 자꾸 걸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그것이 원래 내 신체 중 다리에 해당하였던 것임을 깨달았다. 샌즈는 어딨지?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뼈다귀는 손을 들어 바닥에 무참히 뒹굴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와 나는 온통 내 피로 젖어있었다. 하얀 바탕에 빨간 무늬가 그려진 해골의 얼굴을 힘겹게 돌아보았다. 그는 내 어깨를 눌러 나를 고정시킨다. 그리고 나의 허벅지에 포개어 앉았다. 남아있는 다리 부분에 몇 번 엉덩이를 비비적 거리다가 힘 없이 축 늘어진 내 팔을 잡아 올려 자기 어깨에 걸쳤다. 그 행동은 매우 신중했다.
'스스로 앉아 있을 수 있겠어?'
'미, 미,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
'맞아, 우린 미친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너도 동의했잖아?'
고개를 차마 가눌 수 없었다. 나는 이제 괴물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들어줄 여력이 없었다. 고통을 참는 것에 온정신을 쏟아야 했다. 그것은 물론 경중을 따질 수가 없으나 이처럼 오랫동안 죽지 않고 감내해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해골은 그런데 바지를 벗는 것 같았다. 드러난 골반뼈와 다리뼈 등이 금세 피를 머금고 붉게 변했다. 내 정신은 혼란과 공포로 온통 진흙탕이었다. 뼈다귀는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참으로 프로답구나, 너는. 비릿한 비웃음이 나왔다.
그는 더듬더듬 내 사타구니를 뒤졌다. 그리고 바지 지퍼를 활짝 열고 그 속을 해집었다. 자지를 찾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단호하게 그것을 끌어당겼다. 뼈 손가락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자지는 계속 부풀어 올랐다. 샌즈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끊임없이 귀두를 만지작거리다가 허리를 들었다. 그는 엉덩이를 내찌르는 것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쉿.... 착하지?'
내 몸은 앉아 있기도 버거워 자꾸 아래로 쓰러지려고 했다. 그는 냉혹하게 쏘아붙였다.
'일어나!'
그는 자기 몸에 자지를 꽂고 아래위로 들썩였다. 피가 섞여들어 기분 나쁜 질척한 소리가 계속 울렸다. 나는 계속 비명을 지르다 혀를 깨물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낼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샌즈는 골반뼈를 곡선으로 치고 올렸다가 다시 깊숙이 박아내리고 반복했다. 혼탁했던 그의 두 빛이 생기를 되찾는 것이 보인다. 해골은 얼마간 혼자 그렇게 들썩이다가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안아줘! 이렇게 우울한 날에 누가 좀 나를 품어줬으면 늘 바랐지. 네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해골은 내 어깨를 부서뜨릴 듯이 세게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심장 가까이 대고 달팽이처럼 동그랗게 숙였다. 괴물의 숨소리가 끊길 듯 작게 이어졌다. 그가 안정을 찾는 것과 동시에 나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처박혔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고 피멍이 든 것 같았다. 그의 귓가에 대고 더듬거리며 속삭였다.
'이제 날 쉴 수 있게 해줘.'
해골은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숨만 내쉬었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역시 괴물들이 자기의 만행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일까? 하지만 이건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괴물을 죽이는 것을 멈추면 그만이잖아. 누가 너한테 강요한지 모르겠지만 선택한 건 너잖아. 그런데 왜 괴로워할까? 상처 때문인지 체온 때문인지 해골과 연결된 부분이 따뜻했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칼을 든 쪽이었다.
'안식을 되찾을 거야.'
그리고 칼을 나의 목덜미에 깊게 찔러 넣었다. 칼이 목 안에 들어가는 느낌은 부드럽기도 하고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이상했다. 나는 곧 죽음을 맞이했다.
사정을 했던가. 기억이 어딘가 어긋나있다. 병신같이 허우적거리는 꼴이라니 우습군. 이런 경우가 있으리라 생각지 못 했다. 샌즈는 도저히 중간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땐 남보다 더 무정하게 어느땐 더없이 친근한 사이처럼 나를 대했다. 직전의 기억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생각이 둥둥 허공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것들을 쓸어 담아 상자 속에 처박는다. 어쨌거나 그 일에 대한 해석은 곧 다가올 그 녀석의 몫이었다. 나는 이렇게 노란빛을 맞으며 병풍처럼 올곧게 서있으면 그만이었다. 생각이 많은 것은, 역시 좋지 않다. 해골의 애정 어린 행동이 아무리 기억 속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해도 그것은 전연 진심일 리 없었다. 한순간의 즐거움, 극심한 유희의 부재가 낳은 사생아 같은 것이다.
'안녕. 보고 싶었어.'
아닌 건가? 나도 물론 네가 보고 싶었다.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여전해. 그런데 너조차 나와 같은 생각인 줄은? 어떻게 된 걸까. 오늘도 열심히 괴물을 죽이고 온 모양인지 파란색 점퍼가 얼룩덜룩했다. 후드는 무척 깊게 눌러 쓰고 고개를 목 끝까지 파묻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뭔가 잘못한 것을 엄한 부모에게 들킨 아이의 모습이었다. 보랏빛 안광이 보고 싶었다. 해골은 미동도 없이 그림처럼 내 앞에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너를 너 이외에 아는 괴물이 있어?'
'그렇진 않은 거 같은데, 왜 그래? 아파 보여.'
'나는 있어. 그는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야. 단순한 기억이 아니지. 누구에게도 섣불리 털어놓을 수 없는 은밀한 일이야. 그걸 나 이외에 떠올릴 수 있는 단 한명의 괴물이 있었어.'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팔을 들어 올렸다. 찰칵. 공간을 넘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샌즈는 이번엔 나를 갈기갈기 찢을 듯이 굴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 이런 하릴없고 근본 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괴물이 뭔가 알아달라고 외치는 것 같다고. 시간은 우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되돌려진다.
'할 말 있으면 해.'
나는 짜증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말을 안 하면 알 수가 없잖아. 네가 가진 슬픔이 어떤 거야?
'착하네. 묻지 않고. 처음에 너무 말이 많아서 혀를 뽑았건 거야. 그건 칼로 해결할 수 없거든. 손수 어떻게 하는 건 귀찮단 말이야. 하지만 너는 그런 식으로 다뤄주지 않으면 약이 올라서 견딜 수 없었지. 그래, 너는 그렇고. 내 동생 이야기를 해볼게.'
'이제 말이 통하는군. 하하!'
'내 동생은 스노우딘에 살고 있고, 멍청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의 골칫덩이지. 그는 자기의 위치를 잘 모르거든. 그런 자들은 항상 주제를 모르고 날뛰어. 나는 그 애를 죽일 때 가장 희열을 느껴! 망할 보모 노릇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잖아. 난 드디어 자유가 된 거야. 하하.'
'정말이야?'
샌즈는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있더니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여러 번 문지르며 소리 질렀다.
'죽어!'
죽음의 방식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내앞에 여전히 그의 살육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허리에 세 번, 왼쪽 뺨에 두 번 난도질 당했다. 피가 터져 나와 오른쪽으로 흘러넘쳤다. 이제 죽을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곧 시간이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미안해.... 팝.....'
그가 다시 피칠갑한 내게 안겨 왔다. 잿더미 속의 꽃이 빨간색을 입어 피어올랐다. 그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저 조그만 곳에서 어떤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가 나를 찌른 횟수에 비례해서 어떤 특정한 유대감을 키워가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해골을 구원해주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한심한 생각까지. 나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팔을 들어 올렸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기며 온몸이 지푸라기처럼 변했다. 나는 다시 죽었다.
'네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새로운 내가 입을 열었다. 재탄생한 기분은 역겨웠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존재, 똑같은 상황. 어느 것 하나 흥미로울 것이 없는 이 시점에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나는 괴물이야.'
'그래서.'
'원래 수도에 살고 싶었는데 파피루스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 그 애가 눈을 좋아했거든. 그래서 뭐 어쩔 수 없이 눈 골짜기에 집을 샀지. 근데 그거 의외로 엄청 비싸더라? 깜짝 놀랐어! 그래도 눈마을 주민들은 하나같이 친절했어. 나는 타인의 온기에 대해서 몰라. 내 동생은 해골이라 체온이 없거든. 아무리 안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어. 우리 둘은 그런 식으로 도태되어갔지. 하지만 괴물들은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그들은, 내 생각 이상으로 따뜻했어.'
<계속>
아 한편에 다올릴라 했는데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려야할듯 음 그래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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