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뫼르달(61.78) 2017.10.14 16:22:16
조회 1412 추천 14 댓글 20

 오후의 문학 시간이었다. 젊은 여선생은 동경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건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한 그리움이라고.

물론 동경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죽박죽으로 섞여든 삶에서 살아남은 동경의 의미는 하나뿐이었다.

 하루키, 피츠제럴드 같은 소설이나 왕가위 감독의 영화 따위에서 그걸 배웠다. 겪어보지 않은 일들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가슴에 품게끔 하는 것. 뭐 대충 그런 것들을 동경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토사물을 반추해야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건 단지 빈약한 경험의 폭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설. 어느 순간부터 가보지 않은 곳은 단지 먼 과거나 허구의 세계관, 아득한 철학의 벼랑에만 한정되는 수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10월 14일 오후 4시 5분을 나는 지금 처음 와보았다. 그리고 이미 막 떠나온 참이다. 뭐 대충 그런 식으로 부풀려가면 이야기는 끝이 없다.

존재란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처없이 쏘다니는 것이다, 길을 잃은 개처럼. 목줄에 예쁜 글씨로 연락처를 달고 있는지, 상처를 입어 비틀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낯선 곳에서 죽을 것이다. 이따금 서로의 몸을 부비거나 죽일 듯이 으르렁대기도, 언 땅을 마구 파헤치기도 하겠지만.

 

 그, 서양의 사상가는 문명은 울타리를 지음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멋진 말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울타리, 이성과 본능을 나누고 두려움과 분노 따위를 나누는 굴레에서 어쩌면 영혼의 시대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 눈물 육신 영혼 우리가 잘 아는 듯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짚어낸 건 하나도 없는 듯싶은 그런 용어들이 인간을 만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 그립다. 무의미한 신음이나 괴성만이 있던 시절. 단말마의 비명만이 유언이 되던 시절. 완벽한 허무의 시대. 살아본 적 없는 그 시대가 그립다. 그곳이었다면 인간은 분명 온전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말을 짓고 선을 긋기 시작하면 도무지 끝을 맺을 수 없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편리하게 보기 위해 분류와 분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본질적으로 세상을 복잡하게 만듦을, 알았겠지? 그래, 분명 알면서도 그랬을 것이다. 종종 나는 인간이 복잡함을 선호하는 것인지 편리함을 선호하는 것인지 정말로 알 수가 없다는 생각도 한다. 다 불살라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나는 그 끝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또 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다 잊는다고 해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경험하지 못한 것에 손을 뻗을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저주이다.

K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다시금 똑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은 사랑, 저것은 그리움, 질투 상투적인 단어들로 세상을 바라보겠지. 

 편지를 찢고 다시 붙이는 거. 그거 되게 쉬운 일이더라고. 정말이야.

 부친 편지를 다시 떼어버리는 거. 그건 어때?

 오후의 문학 시간이었다. 여선생의 머리는 윤기가 흐르는 적갈빛. 하늘은 무척이나 푸르고. 나는 눈을 감고 공상에 잠기었다. 그리고 동경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리라는 사실도 분명 알고 있었다. 연필이 부러졌던 것도 기억난다. 매일같이 연필을 부러뜨리면서도 나는 볼펜을 싫어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추천 비추천

14

고정닉 3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공지 ☆★☆★알아두면 좋은 맞춤법 공략 103선☆★☆★ [66] 성아(222.107) 09.02.21 48702 56
공지 문학 갤러리 이용 안내 [99] 운영자 08.01.17 24065 21
289808 아파트 [3] ㅇㅇ(211.234) 04.28 221 9
289786 [4] ㅇㅇ(223.38) 04.28 171 4
289587 고1 자작시 평가좀. [1] 문갤러(118.221) 04.22 454 12
289530 굴절 [9] 쿵치팍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20 347 7
289482 큰 파도 [1] ㅇㅇ(211.234) 04.20 193 7
289358 만갤의 윤동주...jpg [1] ㅇㅇ(14.138) 04.18 496 7
289355 고삐리 취미로 써보는 첫 시인데 어떤가요 [7] 쿵치팍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7 376 8
289348 빗물 [2] ㅇㅇ(39.115) 04.17 167 5
288596 벌판 [3] ㅇㅇ(223.38) 04.02 309 8
288036 황인찬 짧게 쓴 시 보니까 실력 바로 뽀록나네ㅋㅋ [2] 런던공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24 961 12
287967 사는 게 고달프더라도 [2] 블루만틸라(112.160) 03.22 372 7
287939 대한민국 문과새끼들은 한게 뭐임??? [19] 문갤러(211.57) 03.22 773 13
287815 자작시 평가좀 [4] 문갤러(175.223) 03.18 578 4
287191 a 이새끼는 아직도 이럼? [1] vesuviu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5 426 6
286999 내 소설 마더쉽을 보고 코파일럿이 그림 [2] 니그라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9 233 5
286988 문예갤-가짜문학갤러리 [3] 블루만틸라(59.25) 02.29 756 11
286691 비묻은 책 [1] ㅇㅇ(211.234) 02.21 364 5
286647 a언니 간만에 기강 씨게 잡으시네 [1] ㅇㅇ(121.160) 02.20 392 7
285987 문학수용소 친구들 새해복 [4] 문갤러(1.217) 02.09 448 6
285805 안녕하세요! [4] TMIartisan(14.40) 02.05 374 5
285713 <저녁 오후 즈음> [5] 런던공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02 394 6
285636 제가 쓴 시 어떤가요 [6] Yy(175.112) 01.31 902 13
284978 문창과 다니면서 느낀점 [8] 문갤러(180.70) 01.17 1812 17
284081 구름 [2] ㅇㅇ(211.234) 23.12.26 99 4
284030 실수 [2] 문갤러(39.115) 23.12.25 593 10
283981 시 어떰? [5/1] ㅇㅇ(211.234) 23.12.24 953 11
283267 신춘문예 심사진행중... [4] 인생(118.235) 23.12.13 2311 9
283244 병원 가는 길 [6]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12 615 8
282778 신춘 낸 사람 [12] 문갤러(210.95) 23.12.04 1495 6
282505 원테이크 - 이혜미 [4] ㅇㅇ(220.118) 23.11.29 581 6
282126 혹시 국문학 중에 이거 뭔지 아는사람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18 1298 12
281649 신춘 분산 vs 한 군데에 여러 개 [6] 문갤러(110.35) 23.11.10 1171 7
281557 재밌는 시집 없나 [20] 김사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08 290 3
281413 문갤러 모두를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 [6] 문갤러(1.220) 23.11.06 1784 20
281393 문학갤러리는 그냥 a라는 사람에게 잠식당한 듯 [16] oo(59.7) 23.11.06 1328 18
280776 무한한 샘물 [2] ㅇㅇ(211.234) 23.10.25 552 8
280706 김은지는 시만 별로인게 아니라서 더 안타까움 ... [6] ㅇㅇd(61.102) 23.10.23 1765 14
280701 순문학 담론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 [3] ㅇㅇ(106.101) 23.10.23 789 12
280476 글 쓴다는 겄들은 다 똑같드라 ㅋㅋ [3] ㅇㅇ(175.223) 23.10.18 1363 19
280438 시인 윤동주 거품 [9] 문갤러(218.147) 23.10.18 1573 8
280410 초여름 /김은지 [9] 5픽서폿빼고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17 1520 7
280054 무지개 [2] ㅇㅇ(211.234) 23.10.12 495 8
279759 여기는 왤케 조현병 환자새끼들 같은 글이 많이 올라옴? [6] 문갤러(2.58) 23.10.08 183 3
279435 정말 오랜만에 들르네요 [4] 뫼르달(118.235) 23.10.04 622 7
279427 등단, 신춘문예, 시집 추천, 문예창작, 문창과, 번역 얘기 하려면 [1] ㅇㅇ (220.82) 23.10.03 1329 7
279247 등단 하려는데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음 [2] 문갤러(211.246) 23.10.01 842 7
279159 재회 [3] ㅇㅇ(211.234) 23.09.29 539 11
279128 이다희 시인? 시 보고 ㅋㅋㅋㅋㅋ 씨팔 [5] ㅇㅇ(223.39) 23.09.29 2203 1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