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단편소설] 찍먹

ㄹㄱ(116.44) 2018.01.04 18:23:16
조회 635 추천 8 댓글 4

누구나 말 못할 비밀이 있다. 그것이 흘러가버렸다면 그저 이불 찰 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가슴속에 품은 비밀은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다. 내 정말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내 비밀을 듣는다면 나를 어떻게 볼지도 모르겠고, 또 나를 얼마나 혐오할지도 알 도리가 없다. 왜 그들은 나 같은 사람들을 혐오하는 걸까?

하지만, 오늘 나는 말 하려고 한다. 더 이상은 가슴에 묻어 두지 않을꺼야. 너무나도 오래된 상자 속에 감추어 왔잖아. 나는, 그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치부해왔잖아. 이제 나는 알았어, 그 열쇠는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말 할 수 있어. 숙희의 무고를 위해서라도.



나는 비가 내리는 일요일, 용궁반점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열심히 냉동만두를 녹이고 있었다.

“사장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 사장님은 손을 행주로 닦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한 번 들어보자."

"전 어릴 때부터 용궁반점에서 시켜먹어왔잖아요, 사장님?”

“그랬었지, 내가 네 짜장면에 소스도 부어주었잖아.”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떨지 않았다. 열쇠는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저는 탕수육을 찍어먹는게 좋아요. 사장님, 어쩌면 좋을까요?"

그는 마치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오, 세상에..!"

흔들리는 손으로 팔보채의 레시피를 외우던 사장님은 눈물을 흘리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탕수육은 널 사랑하신단다. 우리 모두가 가끔 병을 앓듯, 찍먹도 어떤 사람들이 열병처럼 앓고 지나가는 병이야."

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그 날은 일요일. 용궁반점이었다. 평소처럼 가족이 모두 모여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용궁반점은 주변의 다른 중국집보다도 훨씬 크고 주방장이 대를 이어서 장사를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편이라, 짜장면이 느리게 나왔지만 탕수육은 더욱 느리게 나와서, 우리 가족은 짜장면을 먼저 먹고 있었다.

“탕수육 나왔습니다.”

홀 서빙은 우리 가족의 식탁으로 다가와 탕수육을 내려놓았다. 그 탕수육에는 소스가 부어져있지 않아, 튀김의 바삭함이 눈에 보일정도였다.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에 설레어 그 바삭함에 젓가락을 내밀었지만,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홀 서빙에게 다그쳤다.

“지금 내 가족에게 소스부음도 못 받은 탕수육을 먹으라는 거야? 주방장 불러.”

“아, 저 그게, 지금 소스가 밀렸답니다.”

“우리 가족이 이 중국집 몇 년째 다니는 줄 알고 이러는 거야!”

아버지가 테이블을 내리치자 탕수육 몇 개가 그릇에서 떨어졌다.

“어? 주방장 어디 갔냐고? 소스도 안 부어진 탕수육같은건 매뉴책에서 지워버려야해. 알았어?”



홀의 소란을 감지한 주방장이 나와서 사태를 수습하기 전까지 상황은 계속되었다.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아버지는 소스 없는 탕수육을 혐오하셨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관용은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소스를 부어먹는걸 싫어한다면,”

그는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좋은 조건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다는 걸 기억해라.”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어머니가 화장을 고칠 때. 나는 아까 테이블에 떨어진 탕수육을 보고 있었다. 비록, 처음 나왔을 때의 바삭함은 없었지만, 한 점의 소스도 묻지 않은 상품이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고해서 너무 늦어버린다면,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아이라인을 그리는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나는 쏜살같이 손을 뻗어 내 욕망의 산물을 잡았다. 오른손으로 꽉쥐었음에도 소스가 묻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단지 기름, 그것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바로 입어 털어 넣자, 상상도 못한 바삭함이 내 입안에서 춤을 추었다. 마치 그것은 나에게, 더 이상 내가 아니면 누구와도 춤추지 못할 거라 말 하는 것 같았다. 처음 먹어본 소스 없는 탕수육에 나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만약 시간이 더 있었으면 소스에 ‘찍어’ 먹어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아들, 여기 흘려진 탕수육 못 봤니?”

나는 그 자리에서 거의 체할 뻔했다.

“더러워서 바닥에 버렸어요.”

“잘했다. 여보, 가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나는 바삭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다음 일요일.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친구들과 함께 용궁반점을 찾았다. 여전히 짜장면은 먼저 나왔고, 탕수육은 뒤늦게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온 탕수육 위에 부어지는 소스를 보며 그저 소스가 덜 닿은 탕수육을 찾고 있었다.

피곤한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각자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한 명, 그는 나를 쫒아왔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았다.

“너, 혹시.”

나는 침을 삼켰다.

“찍어먹니?”

그때, 내 영혼은 구원받았다. 이 넓은 홀에서 오직 나만이 찍어먹는다고 생각했던, 길었던 질곡의 굴레를 끊어준. 숙희였다.

점차 다른 친구들과는 중국집에 같이 가지 않게 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외진 중국집으로 가서 숙희와 탕수육 소짜를 찍어먹었다. 숙희는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 찍어먹어.”

난 그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나와 숙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찍어먹을줄은 전혀 몰랐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행복. 그것은 낙엽처럼

오래가지 못 했다.

숙희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국어선생이 아무리 이상의 날개를 해체하더라도, 과학 선생이 아무리 멘델과 완두콩의 왈츠를 설명하더라도, 역사 선생이 아무리 병인박해를 읊더라도, 머릿속에서 머무는 것은 숙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여성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다짜고짜 내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숙희의 편지였다.

'
그 놈들은 내가 찍어먹는 사실을 알고 가만 두지를 않았어.
참았어. 난 이 세상과 네가 좋아.
하지만, 지난 날. 그 놈들은 뒷골목에서 나한테 탕수육 소스를 부어버렸어.
머리카락에까지 파고들은 이 소스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두 손을 아무리 닦아도 나에게서는 소스 냄새가 나는걸.
그래서 널 볼 수도 없었어.
미안해, 미안해.
'

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여자의 팔목을 잡고, ‘정말로 숙희의 편지가 맞나’ 물었다.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카락을 기르고 뿔테 안경을 쓴 여자애가 맞나’ 물었다. 그 여자는 흐느낄 뿐이었다.

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난 고작 그런 소스 따위가 묻었다고 해서 숙희를 싫어하지 않는데. 소스 따위가 묻었다고 해도 나는 안아줄 수 있는데. 소스 따위가 묻었다고 해서.

소스 따위가 묻었다고 해서.


“하지만…….”

“누구나 탕수육을 먹다보면 한 번쯤은 소스가 안 묻은 탕수육을 찍어 먹어볼 수 있단다. 이 주방장은 결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내 두 손을 잡고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이해와 관용이에요.”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 소스가 보였다. 숙희에게 뒤엎어진 소스. 나는 용궁반점을 뛰쳐나왔다. 달렸다. 달렸지. 달아나려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나를 몰아붙였다. 차가운 강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다리 난간 너머로는 드넓은 소스의 향연이었다. 나는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난간에 서자 깊은 향기가 느껴졌다. 강물이 따듯해보였다.

“예뻐.”

나는 내 스스로를 강물에 찍었다.




#


예전에 올린 소설 도입부가 갑자기 생각나서 끝 맺음. 4천자가 안 되긴 하는데, 병맛과 주제를 줄타는건 상당히 어려운듯.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ps. 앞부분의 아버지 대사는 위대한 개츠비 대사 오마주 한 부분임. 피츠제럴드에게 직접 허락을 구하지 못한 점, 유감스럽게 생각함

추천 비추천

8

고정닉 2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공지 ☆★☆★알아두면 좋은 맞춤법 공략 103선☆★☆★ [66] 성아(222.107) 09.02.21 48706 56
공지 문학 갤러리 이용 안내 [99] 운영자 08.01.17 24067 21
289808 아파트 [3] ㅇㅇ(211.234) 04.28 228 9
289786 [4] ㅇㅇ(223.38) 04.28 172 4
289587 고1 자작시 평가좀. [1] 문갤러(118.221) 04.22 457 12
289530 굴절 [9] 쿵치팍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20 347 7
289482 큰 파도 [1] ㅇㅇ(211.234) 04.20 193 7
289358 만갤의 윤동주...jpg [1] ㅇㅇ(14.138) 04.18 500 7
289355 고삐리 취미로 써보는 첫 시인데 어떤가요 [7] 쿵치팍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17 377 8
289348 빗물 [2] ㅇㅇ(39.115) 04.17 168 5
288596 벌판 [3] ㅇㅇ(223.38) 04.02 309 8
288036 황인찬 짧게 쓴 시 보니까 실력 바로 뽀록나네ㅋㅋ [2] 런던공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24 963 12
287967 사는 게 고달프더라도 [2] 블루만틸라(112.160) 03.22 373 7
287939 대한민국 문과새끼들은 한게 뭐임??? [19] 문갤러(211.57) 03.22 777 13
287815 자작시 평가좀 [4] 문갤러(175.223) 03.18 580 4
287191 a 이새끼는 아직도 이럼? [1] vesuviu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5 426 6
286999 내 소설 마더쉽을 보고 코파일럿이 그림 [2] 니그라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9 233 5
286988 문예갤-가짜문학갤러리 [3] 블루만틸라(59.25) 02.29 756 11
286691 비묻은 책 [1] ㅇㅇ(211.234) 02.21 364 5
286647 a언니 간만에 기강 씨게 잡으시네 [1] ㅇㅇ(121.160) 02.20 392 7
285987 문학수용소 친구들 새해복 [4] 문갤러(1.217) 02.09 448 6
285805 안녕하세요! [4] TMIartisan(14.40) 02.05 374 5
285713 <저녁 오후 즈음> [5] 런던공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02 394 6
285636 제가 쓴 시 어떤가요 [6] Yy(175.112) 01.31 904 13
284978 문창과 다니면서 느낀점 [8] 문갤러(180.70) 01.17 1814 17
284081 구름 [2] ㅇㅇ(211.234) 23.12.26 99 4
284030 실수 [2] 문갤러(39.115) 23.12.25 593 10
283981 시 어떰? [5/1] ㅇㅇ(211.234) 23.12.24 954 11
283267 신춘문예 심사진행중... [4] 인생(118.235) 23.12.13 2312 9
283244 병원 가는 길 [6] 딥딥-검은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12 615 8
282778 신춘 낸 사람 [12] 문갤러(210.95) 23.12.04 1497 6
282505 원테이크 - 이혜미 [4] ㅇㅇ(220.118) 23.11.29 581 6
282126 혹시 국문학 중에 이거 뭔지 아는사람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18 1298 12
281649 신춘 분산 vs 한 군데에 여러 개 [6] 문갤러(110.35) 23.11.10 1171 7
281557 재밌는 시집 없나 [20] 김사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08 290 3
281413 문갤러 모두를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 [6] 문갤러(1.220) 23.11.06 1784 20
281393 문학갤러리는 그냥 a라는 사람에게 잠식당한 듯 [16] oo(59.7) 23.11.06 1329 18
280776 무한한 샘물 [2] ㅇㅇ(211.234) 23.10.25 552 8
280706 김은지는 시만 별로인게 아니라서 더 안타까움 ... [6] ㅇㅇd(61.102) 23.10.23 1765 14
280701 순문학 담론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 [3] ㅇㅇ(106.101) 23.10.23 790 12
280476 글 쓴다는 겄들은 다 똑같드라 ㅋㅋ [3] ㅇㅇ(175.223) 23.10.18 1363 19
280438 시인 윤동주 거품 [9] 문갤러(218.147) 23.10.18 1574 8
280410 초여름 /김은지 [9] 5픽서폿빼고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17 1520 7
280054 무지개 [2] ㅇㅇ(211.234) 23.10.12 495 8
279759 여기는 왤케 조현병 환자새끼들 같은 글이 많이 올라옴? [6] 문갤러(2.58) 23.10.08 183 3
279435 정말 오랜만에 들르네요 [4] 뫼르달(118.235) 23.10.04 622 7
279427 등단, 신춘문예, 시집 추천, 문예창작, 문창과, 번역 얘기 하려면 [1] ㅇㅇ (220.82) 23.10.03 1330 7
279247 등단 하려는데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음 [2] 문갤러(211.246) 23.10.01 842 7
279159 재회 [3] ㅇㅇ(211.234) 23.09.29 539 11
279128 이다희 시인? 시 보고 ㅋㅋㅋㅋㅋ 씨팔 [5] ㅇㅇ(223.39) 23.09.29 2204 1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