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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힌 사건
때는 1963년 10월한 9살 여자아이가 엄청난 복통을 호소하며 전주 예수병원으로 실려왔다. 창백한 얼굴에 심한 복통으로 배를 싸쥐고 들어온 여자아이는 X선에 비춰보니 장폐색증이었고 곧바로 외국인 의사의 집도로 수술에 들어갔다.수술 결과 놀랍게도 여자아이의 뱃속에선 정확히 1063마리의 회충이 쏟아져 나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외국인 의사가 무게를 달아보니 약 5kg. 이후 여자아이는 회복을 못하고 장폐색증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이른바 여자아이의 뱃속에서 1063마리의 회충이 발견된 희대의 대사건. 이후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회충을 비롯한 기생충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9살 밖에 안된 여자아이의 뱃속에 1063마리의 회충이 들어가 있었고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일까?사실 근대화 이전의 한국은 가히 회충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1924년의 조선총독부 방역통계에서 한국인의 80%가 회충을, 한국인의 93%가 편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특히 당시 한국과 같이 농사를 지을 때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는 지방에서는 회충이 서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고 전국토가 회충알로 덮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2011년 서울 시내 발굴 중 획득한 조선시대 사대문 안의 토양 시료 분석에서는 기생충 알이 다량 발견되었다.또한 영조 37년의《승정원 일기》에서는 영조가 회충을 토해낸 뒤 이렇게 말한다.회충은 사람과 함께하는 인룡이다. 천하게 여길 것이 없다.조선시대 왕의 몸은 국가를 대표하며 동시에 가장 존귀한 존재였지만 그러한 몸에도 회충이 존재했다는 것. 즉 회충 감염에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었다.만약에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1년만 살다 와도 당신의 몸은 십여마리가 넘는 회충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이후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도 회충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1931년에 의사 민병기 씨는 매일 종묘를 지나 병원으로 출근하는 길에누구든지 길 가운데 대소변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좀 주의해 본다면 나가티 직업적 안목 이외라도 회충이나 촌백충이 군데 섞여 있는 것을 잘 볼 수가 있다.라고 기록했다.그러나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외과술이 빠르게 발달하여 이전에는 대변이나 구토를 통해서만 보다가 육안으로 처음 보여진 회충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 깊숙이 자리 잡았다.1950년 제6회 33차 국회정기회의에서 이영준 의원은 세계보건연맹의 보조금 사용처에 대해 설명하며대한민국 어른 아이로부터 아마 국회의원 우리까지라도 다 기생충이 많다.라고 발언했다. 회충 감염에는 남녀노소도, 빈부격차도 따로 없었다.하여튼 1963년 10월 24일 9세 아동이 뱃속에 있던 총 1063마리의 회충 덩어리로 인해 사망한 사건은 당시의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일으킨다.기생충 박멸을 지원하는 단체들과 의학계 인사들은 이를 인식의 전복을 꾀할 수 있는 좋은 사례로 여겼을 것이다.1960년대 수출에 기반한 경제성장이 당면 과제로 떠오르면서 기생충이 걸림돌이 되었다. 경제성장을 제1목표로 달려가고 있던 한국이 사실은 기생충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수치심을 안겼다.그 중 산업 역군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파독 광부가 회충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60년대 독일 광산의 인력 수요가 커지자 외화 회득을 노리던 한국에서 광부를 파견했지만 광부들의 갱내 투입은 순조롭지 않았다. 회충 감염 때문이었다.기생충 감염을 이유로 독일은 한국 광부의 2차 파견을 중지시켰고, 한국 정부에 철저한 검진을 요구하였다. 한 마디로 나라 망신이었다.심지어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주둔하던 미8군에서는 채소를 한국 시장에서 사지 않고 주로 일본에서 들여왔다. 외화가 절실했던 상황에서는 큰 손실이었다.이후 정부에서는 회충 박멸을 위해미국서는 길거리 약국에서 회충약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며, 이웃 일본의 수도 동경 인구의 기생충 보유율은 0.5프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선진국, 특히 한국인의 수치심을 자극할 수 있는 일본의 사례를 언급했다.이후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달리 회충을 적극적인 치료와 개입이 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회충약 복용이 일상이 되었으며 대중들은 개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회충 구충에 참여하기 시작했다.(펄럭)그리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한국이 회충 청정국이 되었다고 한다. 끝
작성자 : ㅇㅇ고정닉
스파이게이트 1편 - 페라리에 헌신했던 한 영국 남자
2000년대 초, 당시 포뮬러 원은 전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여러 제조사들이 참가하며 일 년에 수 억 달러의 돈을 퍼붓고, 매 그랑프리마다 수십만명의 관중이 찾아오며 그 인기는 최고조를 달렸다.여러 팀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가며 레이스카 개발을 위해 힘을 쏟았는데, 그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수많은 우승을 가져가며 챔피언을 거머쥔 컨스트럭터가 있었다.바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다.지금과는 다르게 당시 페라리는 수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6번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 5번 연속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이 같은 업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1996년 베네통에서 페라리로 이적한 미하엘 슈마허와 함께, 그의 ‘드림팀’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그 드림팀 멤버 중 한 남자가 있었는데…바로 ‘나이젤 스텝니’였다.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1977년에 ‘Shadow Racing’이라는 포뮬러 원 팀에 미캐닉으로 합류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로터스와 베네통에서도 미캐닉으로 지낸 후 1993년 페라리로 이직하였다.이직한 페라리에서 그의 직책은 30명의 미캐닉을 거느리며 그들의 급여 등을 관리하는 ‘수석 미캐닉’이자 ‘Race & Test Technical Manager’을 맡고 있었으며, 100만 달러의 연봉을 가져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그는 페라리에서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스플릿 휠건을 도입하고 훈련 시스템을 개선하여 피트스탑 시간을 단축시켰고, 무선 통신 시스템을 개선하고, 레이스카의 정비 체계를 개선하며 신뢰도를 높히는 것에 기여한 것 등이 있었다.그만큼 스텝니 자신 역시 페라리에 헌신적이었는데, 그 일화로 슈마허가 실수로 레이스카로 그를 들이받아 발목을 부러트려버리는 사건이 있었으나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을 정도이다.한편 2004년이 지나 페라리의 연속 챔피언 기록은 끝이 나고, 때는 르노가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던 2006년이었다…슈마허&브런 : 저희 이제 페라리 나갑니다~그렇다, 미하엘 슈마허는 2006년을 끝으로 F1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고, 페라리에서 테크니컬 디렉터를 맡으며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로스 브런 역시 안식년을 갖겠다고 선언한 것이다.이는, 페라리 내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의미했다.스텝니 : 그러면 혹시… 이제 내가 테크니컬 디렉터?스텝니는 페라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기에, 브런을 이어 수백만 달러 규모의 연봉을 받는 페라리의 새로운 테크니컬 디렉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하지만..페라리 : ㄴㄴ 님 아님 차기 테크니컬 디렉터는 마리오 아몬도임 ㅇㅇ 그런 줄 아셈하지만 페라리는 차기 테크니컬 디렉터로 스텝니가 아닌 아몬도를 기용했고, 아무래도 스텝니가 공학 학위가 없는 미캐닉 출신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여겨졌다.;;;스텝니는 아몬도가 팀의 전반적인 레이스카 개발을 이끌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 결정에 격분했고, 페라리 관계자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명했다. 거기에 지나지 않고, 2007년 2월 autosport와의 인터뷰에서는 “1년 동안 페라리에서 떨어져 있을 생각이다.”라고 언론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하지만 페라리는 어떤 팀인가?1991년, 당시 페라리 소속이었던 3회 챔피언 알랭 프로스트가 “이 차는 트럭같아서 몰기 매우 힘들다”라고 비판하지 그 해에 바로 계약 해지를 해버린 팀 아니겠는가?그런데 의외로 프로스트에게 그랬던 것과 달리 페라리 경영진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텝니가 분노하여 그랑프리를 따라 다니지 않는 팩토리 중심의 직무인 ‘Head of Team Performance Development‘를 요청했을 때도 받아주었다.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페라리에서 사실상 고립된 스텝니는 일종의 배신자처럼 여겨지며 직원들은 그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듯 했고, 실제로 스텝니는 “이탈리아에서 페라리에 반대하면, 바티칸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사실상 해고를 안 시킨 것이지, 페라리는 그를 고립시킨 것이다.그리고 2007년 5월, 한 가지 사건이 터진다. 바로 ‘페라리 파우더 사건’.2007 모나코 그랑프리를 앞둔 5월 중순, 페라리 레이스카인 F2007 후방 연료탱크에서 이상한 가루가 검출된다. 그 즉시 페라리는 마라넬로 지방경찰에 연락하여 조사가 시작됐다. 5월 17일, 한 페라리 미캐닉이 차량 근처에서 스텝니가 서성거리는 것을 봤다고 증언한 것에 더해 CCTV 영상까지 확보하며, 경찰은 스텝니를 용의자로 특정한다.그래서 5월 18일, 마라넬로 지방경찰은 스텝니를 데려가 조사하였다. 그의 바지에서는 가루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그의 집을 수색하여 정체불명의 가루를 조사한 끝에 연료탱크에서 발견된 가루가 스텝니가 가지고 있던 가루가 동일하다는 것을 특정해냈다. 그와 동시에, 페라리도 스텝니에 공장 출입 정지와 사실상 정직 처분을 내리며 내부 조사를 시작했다.당시 페라리의 연료 탱크는 복잡하게 설계된 다중 챔버 시스템이었고, 미캐닉이었던 그가 가루를 연료 탱크에 넣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을리가 없었기에, 이는 스텝니가 페라리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벌인 행위로 해석된다.그리고, 이 사건은 얼마 뒤에 터지게 될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한편, 스텝니에게는 한 명의 매우 친한 친구가 있었다.그 친구는 로터스 시절부터 함께해 이후 베네통, 페라리 시절에서도 함께 협력하여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2007년에도 스텝니는 그 친구와 여러 번 만나기도 하였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얼마 안 가서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그 친구가 바로 맥라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이크 코플런’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
작성자 : PREMA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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