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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1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앱에서 작성

Blee(112.152) 2023.07.01 23:43:54
조회 570 추천 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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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북풍을 타고 날아다녔다>


소녀가 파랗게 질렸다 거인이 소녀의 목소리를 삼켰다 풀어헤친 머리칼이 작은 얼굴을 휘감는다 훌쩍이는 말들 검은 씨앗으로 심장에 박혔다

밤마다 소녀는 북풍을 타고 날아다녔다 귀에 태엽을 감고 살바람과 들판을 달렸다 오르골처럼 바람은 소리를 남기고 떠났다

넝쿨 숲을 열면 어떤 악몽이 튀어나올까

거인이 소녀의 발꿈치를 깎아서 신발을 신겼다 다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내가 네 엄마란다, 무덤가 개암나무가 아무도 모르게 붉은 꽃을 피웠다

소녀의 옆구리에 이파리가 돋는다 발바닥에 잔뿌리가 내린다 종아리와 팔뚝이 터지고 갈라지며 두터운 껍질로 뒤덮였다 가는 우듬지 열어 소녀가 개암나무를 불렀다

내 목소리가 잎 속에서 자라고 있어

손을 뻗으면 공중에서 일렁이는 귀들, 푸드득 새들이 나무에게로 쏟아진다 나무의 방에 불이 켜지면 나이테에 감긴 음악이 흘러나올 거야 나무는 소리를 찾는 여행자니까,




<루지>


아버지가 빙판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다 쉭쉭, 지붕 위의 한밤을 달린다 발끝까지 몸을 곧게 뻗어요 고개를 들면 속도가 떨어져요 이런 경기는 처음이구나 등이 부서질 것 같은

얼음트랙의 경사로를 따라 쉭쉭,

발끝부터 미끄러진다 뱀의 몸속 그 차가운 내리막으로
빨려 들어간다, 꿈틀거리는 급커브에 부딪친 봄의 어깨가 찢어진다

우리는 밑바닥으로 쏟아지는데 왜 마음은 자꾸만 솟구치는 걸까요 소리를 삼킨 식탁이 뒤집어진다 아버지가 낡은 소파를 붙잡고 미끄러진다 공중으로 솟았다 흩어지는 꽃과 창문들

가파른 경기장을 따라 우리 집이 미끄러지고 있다

빙벽에 갇혀 우리는 얼음 밥을 먹는다 초침을 들고 서로의 등뼈를 쓸어내린다 칼날이 얼음바닥에 박힐 때마다 쉭쉭,

길은 더 빨리 미끄러지고 아버지는 새벽마다 스쿼트를 한다 침대 밑으로 꺼지며 지워지는 얼굴, 비틀거리는 바닥이 더 낮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아버지, 고개를 들지 마
우리는 이 트랙의 구조를 볼 수 없어

낯선 구름이 찢어지며 폭설이 쏟아진다 얼음 코스 밖으로 튕겨나간 구름의 사체들이 눈 속에 파묻히는 한밤, 쉭쉭 아버지가 맨몸으로 달린다 우리에게서 달아난 눈알들이 자작나무숲을 떠돌고 있다





당신은 살아 있는 화석
나의 동쪽 연안에서 왔습니다

오, 로로로, 라라라 파란 피를 가졌군요 당신은
투구게가 생각납니다

체온을 다시 재주세요
입구와 출구 사이에 손목을 올려놓으세요

이곳에서 당신은 몇 도입니까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까

회전문 앞에서 벌게지도록 손을 문지르세요
당신은 모래로 몸을 감싼 아우로라였는지 모르죠

오우, 로로로 라라라
몸이 뒤집히면 손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죠
이마를 짚으면 파란 미열이 올라오죠

흰 눈을 뒤집어쓰고 검은 곳을 걷는 사람들
손끝에서는 싱싱한 오해가 싹트고 있죠
우리의 파란 피는 매력적이에요

그러니 걷고 또 걸어요
광장이 당신의 안쪽으로 밀려들어오죠
바깥은 가깝거나 먼 미래의 안쪽이죠

두 손으로 공중을 딛고 물구나무로 걸어요
이곳은 새파란 물속
수레국화가 산호초처럼 흔들리죠

라라라 로로로, 나는 당신의 파란 피가 좋아요
당신의 파란 피가 필요해요

광장 지나서 모퉁이를 돌면
바다로 향하는 지류가 밀려 올 거예요



<중얼거리는 옥탑>


인기척은 너밖에 없다고 중얼거리는 옥탑
옥탑

빨랫줄엔 지키지 않은 약속이 고드름으로 달렸고 찢어진 내 입술은 겨울이 지나도 핏기가 마르지 않았다

나는 그만 너를 걷고 싶은데 아니 너를 외투처럼 걸치고 싶은데 아니, 먼지 털어낸 서랍 속에 너를 넣고 싶어서

첨탑에 갇힌 사람처럼 줄을 내리면

네가 뱉어내는 축축한 구름들
내 혓바닥을 물고 날아가는 부리가 긴 새들

바람에 뒤집히는 너의 목소리와 난간 사이로 내 귓바퀴가 굴러갔다 발목이 지나갔다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창틀에 걸린 볕이 발끝을 핥아주었다

이곳에서는 잘 보여
옥상의 돌무덤들도
나를 깨뜨리려고 나를 떨어뜨리려고 옥탑을 열었던
나는

젖은 밤들이 검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줄을 놓친 빈 소매가 어깨 너머로 날아갔다

누군가 펼쳐 읽을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저녁
너는 흰 티셔츠에 묻은 얼룩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혀에 압정을 박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낡아 부슬대는 줄을 끊을까
이 끈을 놓으면 하늘로 떠오를 것 같군 아니 떨어질 것 같군

야윈 별들이 발목을 자르고 풀려나온 자정에도 네 창의 덧문은 닫혀 있었다

너는 눈 쌓인 내 무덤을 열지 않았다



<블로우업>


언니도 무성한 초록에게 쫓길 때가 있다고 했지 꽃들이 눈을 붙이는 동안 우리는 여름을 달리고 있었어 길바닥에 햇살이 끓고 푹푹 사과가 자랐지

도로에서 금들이 흔들리며 가지를 칠 때 네가 역주행으로 달려오더군

오, 우리들의 아름다운 역주행

길의 단면에서 너는 무엇을 꺼내고 싶었을까 공중으로 솟구친 순간 한 방울 핏자국도 없이 어긋나는 우리의 초록들

여름밤이 부풀고 우리는 겨울에 도착했어 나는 한 손에 벌레 먹은 과실을 다른 손에는 빈 가지의 마음을 말아 쥐고 걷고 있었어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잘라버린다는
언니의 말이 생각나더군

내 눈 속으로 낙과가 쏟아졌어 초록이 으깨진 뒤 붉은 등을 켰어 횡단보도의 흰 건반을 밟고 건너다

뒤를 돌아보았어
그 순간에도 내 뒤는 자라고 있더군

내 팔과 다리가 엇갈리게 움직이고 주파수 찾아 깜빡이는 푸른 신호등처럼 점멸하는 내가 멀어지고 있었어



<오래된 혼잣말들이 손끝에 파랗게>


탁자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
난간을 잃은 독백이 미끄러지지

네가 오늘의 표정을
그림자를 발라낸 정오라고 읽을 때
나는 빗방울이 떨어진다고 되뇌지

내 손바닥은 유리창에 매달려 있고
지문 없는 손가락에 부옇게 숨을 불어넣다
빠삐용,
나는 나비의 골짜기로 들어갔다

네 앞에서 죽은 내 말들이
계곡 갈피갈피 다정하게 팔랑이며 날아들었다
비를 맞아도 젖지 않았다

저기, 푸른부전나비가 우화하고 있어 파르르 구겨져 있던 얇은 햇살이 몸을 떨고 있어 인편(鱗片) 깊이 묻었던 말들을 꺼내어 너에게 주고 싶다 오래된 혼잣말들이 손끝에 파랗게 묻어났다

여전히 고치로 잠든 너는
귀가 없는 너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는 내 날개를 의심했지 움직일 수 없는 관에서 두 손 모으고 잠이 들었지
나에게서 가장 멀리 온 것은 나였다

해거름이 저녁의 문턱을 넘기 전
빠삐용,
나를 버리고 날아갈게

2022년 제11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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