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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문학사상 신인상 시 부문 수상작 중 2편

ㅇㅇ(183.96) 2023.07.05 20:53:11
조회 501 추천 7 댓글 3
														

< 빛의 보존법 >

-하단 표기일까지


#1


한낮.

내가 지닌 빛이 자꾸 상한다. 내 빛을 살펴보기로 했다.


유리된 일상.

빛 한 줄기를 잘라 유리 도마에 올려두고 깨진 유리 칼로 한나절을 잘게 썰었다.


일몰.

잘게 썰어 둔 빛이 갈변하기 시작하면 냉장고에 넣는다.


노을.

바닥에 흘린 빛줄기를 손바닥으로 쓱 훔치고 나면 번지는 손바닥의 빛.


밤.

추운 빛이 가득한 냉장고 속.



#2


너는 잊고 있던 식재료가 생각난 얼굴을 하고 냉장고에 대한 기억을 꺼낸다.


있잖아, 내가 별사탕 한 개를 겨우 쥘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난생처음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불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거야. 마치 그곳에서 나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게 신나서 계속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었는데, 문을 닫으면 빛은 혼자서 뭘 하는지 문을 살짝 열어보았거든. 그때 알았어. 빛도 혼자 두면 차갑고 어둡다는 걸.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어두었지.

그래서?

빛이 번지고 있었어. 녹으면서.

그래서?

엄마가 문을 닫아버렸어.

그래서?

여전히 그곳에 있을걸.


그래서 너는 몸이 차갑고.



#3


너는 처음으로 자정이 지난 밤거리를 배회한다. 너는 거리에 쓰러진 불빛들을 밟으며 나아간다. 너는 상해버린 불빛들의 잔해를 조용히 수습하는 중이다. 너는 부패된 불빛의 주검을 부검하는 중이다. 동시에 너의 차가운 몸이 부패되는 중이다. 동시에 너는 추움과 어둠 속을 찾아 급히 달아나는 중이다.


추움과 어둠으로 생의 기한을 연장하는 냉장고 속으로.


너는 너란 빛줄기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읽어 본 사람.


지운 흔적처럼 기록된 빛의 보존법에 따라 빛의 기한을 최대한 연장하는 중이다.


#4


너가 울면서 냉장고 문을 걸어 잠근 밤,


엄마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린다.


엄마는 문고리를 향해 주먹을 편다. 일만 개의 별사탕이 우르르 쏟아지고. 엄마는 냉장고 안에 넣어둔 빛의 목록을 더듬는다. 하루치의 빛을 서둘러 꺼내야 했다. 엄마는 차가운 문고리가 따스해질 때까지 문고리를 쥐었다가 확, 열어젖힌다.


아이인 엄마이고, 엄마인 너가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는 나를 한 뭉치 꺼내 준거고.



#5


삶을 연장하려고 자는 추운 잠.


나는 나를 잠속에서 꺼낸 기억이 없는데

누가 나를 한 뭉치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둔 것일까.


식탁에 앉아 가만히 녹아가는 나를 바라보다

별사탕 생각이 났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엄마가 선물로 하나씩 주던 별사탕.

식탁에 올려진 유리병에는 별사탕이 가득하고


나는 별사탕 하나를 꺼내

아직은 푸른 새벽 같은 입안에 넣는다.


차가운 빛도 어둠을 녹일 수 있다고 믿는다.


점점 환해지는 나의 낯빛.


저는 이 낯빛으로 실온의 하루를 견디겠습니다.


(냉장고에 엄마와 너를 다시 한 뭉치로 넣어두고 집을 나선다.)



#6


0000.00.00. 실온에서 일몰 30분 전까지. 끝.



-----------------------------------------------



< 달려라 꽃게 >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다.


연골이 다 닳았습니까,

퇴행성 관절염입니까,


의사 선생님은 지금까지 사용하던 무릎은

진짜 무릎이 아니라고 했다


꽃게의 무릎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환자분의 무릎은 측면에 있으며 게걸음으로 걸어야 할 운명이었다고 했다. 환자분은 지금까지 부러진 정강이뼈로 걸어왔다고 말하고.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셨어요. 조연이 병에 걸려 죽는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멘트를 날리고,


오늘부터 게걸음을 배우라 했다. 자신이 갯벌에서 꽃게를 잡아 보았는데,

갯벌에서는 꽃게가 생각보다 빠르다는 말도 덧붙였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정류장에서 가만히 옆으로 걸어보았다. 앞을 보고 걸었는데, 내가 보는 방향을 앞이라고 해야 하나, 옆이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나는 옆이라고 믿었다. 옆은 방향에 동등하니까 걸음의 방향이 모욕이 되는 시간을 지울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으로,


오랜만에 친구에게 문자를 했다. 졸업하고 한 번도 가지 않은 학교 운동장에서. 이따 밤 10시에 봐. 절대 안 나오겠다는 친구는. 너가 죽을까 봐. 나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면서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너. 어릴 적 달리기만 하면 넘어지는 나를 매번 놀렸었잖아. 골대에서부터 골대까지. 준비. 땅. 나는 게처럼 달려서 사람처럼 달리는 친구를 이겨버렸고, 무릎을 꿇은 친구에게 세상은 진흙탕이라는 허세 비슷한 말도 한 것 같았는데,

친구는 웃고 있었고,


무릎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습니까?

네.

퇴행성입니다.


여기 전동 휠체어에 앉아보세요. 이제 전동 휠체어 타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모욕의 방향을 가르치려는 듯 전동 휠체어의 뒷걸음질을 가르치던 그에게,


전동 휠체어랑 꽃게 중에 무엇이 더 빠를까요,

갯벌에서.

그때 안경을 고쳐 쓰던 의사는,


이 도시의 x-ray를 바라보았던가

해 저문 풍경을 바라보았던가


간척지 위에 세운 도시가 무너지고 있었다.


솟아난 속도로 빌딩이 사라지고 있었고, 빌딩의 무릎이 사라지고 있었고, 뒤따라 그의 들숨이, 그의 안경이 사라지고 있었고, 끝으로 이 도시를 촬영한 최초의 x-ray 한 장이,

석유를 뒤집어쓴 가마우지 한 마리처럼 갯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잊고 있던 얼굴의 꽃게들이 갯벌에 가득하고,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문자가 왔다.


'운동장이었던 곳. 이따 밤 10시에 봐'


자세와는 별개로,


출발선에 서면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매일 처방약을 먹고

재활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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