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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빠들을 위한 ddr용 -조선왕조실록 2탄-세계'최대'의 역사서

2005.05.07 21: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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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sg322/140006412148 1. 서  론 한국인은 역사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 기록을 사랑한다. 한국인의 기록정신은 세계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철저하고 엄격했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을 머리 좋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기록 강국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현실을 보면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나름의 견해가 담긴 글을 잘 쓰려 하지 않는다. 컴퓨터에 앉아 자판 두드리고 남이 해놓은 자료를 눈으로 훑어보기에 바쁘다. 자신의 견해는 안중에도 없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어떠한가? 정부의 기록 정신은 한마디로 형편없다. 물론 과거보다 훨씬 수많은 일을 다루면서 기록을 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또한 현대사를 현대인이 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우리가 후세에 떳떳할 만큼 기록을 제대로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혹시 후세에 가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은폐되는 일은 없는가?”, “과연 우리가 후세의 눈을 두려워 할 만큼 우리 역사에 관한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올바른 기록을 후세에 남기고 있는가?” 이런 여러 의문들에 관해서-현재의 정부나 공공 기관의 기록 실태를 보면- 그다지 썩 좋은 대답을 내지는 못할 듯싶다. 이제 우리는 자랑스러운 기록 강국의 면모를 생각하며, 다시 철저한 기록정신이 서 있는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 발전의 지름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한국 기록문화의 상징인『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소개를 통해 조상들의 빛난 업적을 기리고 지금에 이를 본받아 후세에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물려줄 수 있는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 부족한 글이 될 것이겠지만, 많은 질책을 바라마지 않는다. 2. 실록이란 [1] 조선왕조의 블랙박스,『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중요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사를 연구하는 데 '블랙박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이 표현은 KBS 제작팀 지음,「조선시대의 블랙박스-조선왕조실록」,『책으로 보는 TV조선왕조실록』1, 가람기획, 1997, 13~14쪽에서 가져온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을 마치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복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걸출한 사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말고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도 '실록'은 있었다. 그러나 그 가치는『조선왕조실록』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가치로『조선왕조실록』은 한글(훈민정음)과 함께 지난 1997년 10월 우리 기록유산으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하는 세계기록유산 가운데 당당히 자리매김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렇다면『조선왕조실록』은 과연 어떤 책인가? 어떤 책이기에 세계적인 역사서로 자리매김하면서, 또한 세계적으로 보호를 받는 귀중한 기록유산이 되었을까? 그 놀라운 실체가 지금부터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이다. [2] 왕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늘과 역사뿐이다. 역사에서 기록이 차지하는 비중이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훨씬 각별했던 것 같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유학(儒學)이었다. 유학에서의 역사의식은 다른 어떤 사상에서보다도 훨씬 강렬했다. 공자가 지었다는『춘추』(春秋)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은 그 뒤 역사서가 쓰여지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이 춘추필법이 가장 잘 드러난 대표적인 저서를 꼽으라면 바로 사마천(司馬遷)이 지은『사기』(史記)이다.   알고 보면 춘추필법이란 참 간단한 것이다. 착한 것을 착하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그대로 썼을 뿐이니까. 그 원칙은 간단하지만 정말 어렵다. 정직하고, 영원하며,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천하의 난신적자만이 역사를 두려워하였겠는가? 사마천은 자신의 불후의 명작『사기』를 쓰며 이 춘추필법을 바탕에 깔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마천이 추구하였던 춘추필법은 남자라는 이름으로서는 수치를 안겨주었으나, 역사라는 이름으로서는 천하(天下)를 안겨주었다. [3] '실록'이란? '실록은 당대사(當代史)이다.' '실록'이란 한 황제나 왕이 승하하면 바로 다음, 또는 그 다음 왕대에서 전왕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말하는데, 그 기술 방식은 편년체(編年體)였다. 이러한 실록의 개념이 갖추어지게 된 것은 중국 남북조(南北朝)에 들어가서의 일이며, 최초의 실록은 중국 양(梁)나라의 사적을 기록한『양황제실록』(梁皇帝實錄)이다. [4] 실록의 특징 실록은 다른 관찬사서들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실록은 국가에서만 편찬했다. 실록의 기록 대상은 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그 임무를 수행한 관리가 바로 사관이었다. 왕이 승하하면 당시의 적었던 기록을 모아 실록을 편찬했다. 따라서 실록은 개인이 편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 실록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서이면서 또한 정사를 편찬하기 위한 자료집의 역할도 하였다. 3) 실록은 '당대사'였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현대사인 셈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왕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실록은 오직『조선왕조실록』뿐이었고, 따라서『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여기서 더욱 빛을 발한다. 3.『조선왕조실록』의 위대함과 그 파란만장한 역정 이제 우리는『조선왕조실록』에 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고, 이 장을 통하여『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수밖에 없는 마땅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조선왕조실록』은 세계 최대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우선 양적, 질적으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로부터 철종 이원범까지의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쓴 방대한 역사 기록이다. 한문본으로 남한에는 정족산본(鼎足山本)과 태백산본(太白山本)이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부산정부기록보존소에 각각 보관되어 있는데. 단일 왕조 전체를 담고 있는 기록(실록)으로서 그 년 수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과 질을 자랑하는 역사서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만 실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분량의 내용과 풍부함이라든지 사료의 질적 가치에서『조선왕조실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 우선 분량으로 비교를 해보자. 권수로 따진다면 중국의 실록인『명실록』과『청실록』이 훨씬 많다. 그러나 실제 분량은『조선왕조실록』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2) 이번에는 내용으로 비교를 해보자. 중국이나 월남의 실록은 양도 차이가 날뿐더러 그 내용도 주로 정책에 관련된 것이며, 다른 분야는 소략하기 짝이 없다. 이에 비해『조선왕조실록』은 정책에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경제, 사회, 그리고 사상, 과학기술, 음악, 미술, 국문학 등의 문화사, 생활사 기록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어, 조선왕조사 자체의 연구는 물론이고 당대의 동양사 연구, 한국문화사, 생활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3)『조선왕조실록』과 다른 나라의 실록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사료의 질적인 측면일 것이다. 실록의 편찬 원칙에서 직필(直筆), 공개 및 열람 금지 같은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런 것이 제대로 지켜진 것은 오직『조선왕조실록』뿐이다. 이 원칙의 철저한 준수는『조선왕조실록』이 왜 세계적인 사료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2]『조선왕조실록』은 누가 썼는가? - 사관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원칙이 이렇게 철저하게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제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 사관(史官)이란? 역사를 쓰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사관이라고 부른다. 사관이 등장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일까? 중국의 역사에서 이른바 전설의 시대라고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황제(黃帝)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많은 인원의 사관을 배치하여 본격적인 관찬 역사서 편찬 체제가 마련된 것은 당 태종 때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서가 서술되어 왔으나, 사관 제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왕조 때부터이다.『고려사』(高麗史) 등에 그런 기록이 보인다. 사관의 직무는 그때그때의 정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들이 기록의 임무를 맡은 만큼, 원칙과 소신이 분명한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른바 사림(士林) 계열에서 많이 나온 것이 사실이었다. 사관들의 입시(入侍) 기회는 후대로 가면서 점차 넓어지는데, 이러한 사관들의 적극적인 입시는 국왕과 신료 개인 사이의 사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버렸고, 아첨하는 신하가 접근하는 길을 봉쇄하는 데 기여하였다. 따라서 왕과 신하들은 사관들이 남긴 역사를 두려워하고 경계될 수밖에 없었다. 2) 사초(史草)란? 이러한 사관들이 쓰는 기록이 바로 사초였는데, 이것은 실록 편찬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였다. 현존하는 사초는 드물다.『실록』의 편찬이 끝나면 그 비밀을 보장하고 종이를 재생하는 차원에서 세초(洗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물지언정 그 일부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와 그 시대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사관의 자질 직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관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권력이 원칙을 누르는 경우 직필은 때로는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관들에게 곧은 마음과 강직한 성품, 곧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정신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사관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물을 사관으로 선발할지에 대한 그 과정 또한 매우 까다로웠다. 사관의 품계는 비록 낮지만 맡은 직무는 참으로 중요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선발 과정의 이면에는 사관에 적합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공정한 직무 수행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결함이 있는 이라면 임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3] 실록 편찬의 원칙 앞에서『조선왕조실록』이 다른 나라의 실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질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실록을 편찬하는 원칙이 잘 지켜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실록 편찬의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실록 및 사초는 누구도 볼 수 없었으며, 심지어 왕도 임의로 볼 수 없었다. 물론 전혀 그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원칙은 조선왕조의 전 시기를 통하여 공론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한편 실록은 왕이 볼 수도 없었고, 설령 본다고 해도 너무 방대하여 일상의 교훈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역대 군주의 치적에서 모범이 될 만한 일을 골라 책으로 엮으려 했다. 1458년(세조 4년) 처음 완성된 이래. 그 후에도 계속 편집되어 왕과 세자의 역사 교과서로의 활용으로도 이루어졌다. 고종 때 편집, 완성된 이 책을『국조보감』(國朝寶鑑)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왕권과 신권이 적절히 조화된 조선 사회의 풍토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사관은 바른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다.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왕조사회에서의 절대 권력자인 왕조차 계율을 정하고 어기지 않았던, 그것이 바로 조선왕조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2) '세초'(洗草)라는 또 하나의 행사가 바로 실록의 질적 가치를 높여주는 큰 요인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3단계의 편찬 과정을 거쳤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본(本)을 각각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이라고 한다. 실록이 편찬되고 나면 초초본과 중초본 두 본을 창의문 밖 세검정(洗劍亭) 계곡의 차일암(遮日巖)이라는 바위에 나가 물로 씻어 지워버렸는데, 이 과정을 세초라 한다. 그럼 세초를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하나의 보안 장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종이를 재활용하자는 측면도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역사의식과 아울러 절약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광해군일기』는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대단하다. 3) 수정실록의 편찬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실록이 수정된 경우가 네 번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래의 실록과 수정실록을 같이 남겼다는 사실이다. 원래의 실록과 수정실록을 같이 남겼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이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옳은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다. [5]『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존 과정에서의 어려움 이번에는『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고, 이 대기록이 과연 오늘날까지 어떻게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위대함을 더욱 드러내려 한다. 1) 먼저 실록의 편찬에 관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왕조는 건국한 이래 실록을 편찬하면서부터 실록의 보존이 후대까지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편찬 기관은 임시 기관으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찬수청)이었다. 실록청이 처음 설치된 것은『성종실록』편찬 때부터였다. 실록청의 설치는 실록 편찬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 이전에는 실록청을 설치하지 않고 편수관을 임명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청은 총재관(總裁官), 도청(都廳), 방(房)의 3단계로 구성되었는데, 아까 실록의 편찬이 3단계의 공정을 거쳐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실록을 편찬할 때 주로 이용되었던 자료를 보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사초와 시정기(時政記)였다. 그 밖에『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정부등록』(議政砒錄)과 후대에는『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일성록』(日省錄) 등을 비롯하여『각사등록』(各司謄錄), 개인의 일기나 문집, 소(疏), 야사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편찬 과정은 크게 초초, 중초, 정초의 3단계로 나뉜다. 실록은 이 가운데 정초본을 대본으로 삼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시대에 따라 4부 또는 5부를 만들었다. 인쇄한 뒤에는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세초하여 재생지로 이용하였다. 2) 다음으로 실록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온전하게 전해져 왔는지를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은 1413년(태종 13년)『태조실록』의 편찬으로부터이다. 이후 세종 때『정종실록』과『태종실록』이 잇따라 편찬되었다. 세종은 고려 초의 실록이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거울삼아 실록을 원래의 1부 이외에 3부 더 만들어 기존의 춘추관사고(春秋館史庫)와 충추사고(忠州史庫)에다 성주사고(星州史庫)와 전주사고(全州史庫)를 더 만들어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리고 문종 때 편찬된『세종실록』부터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필사본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라 정초본 말고 3부를 활자로 더 인쇄, 간행하여 4사고에 각각 1부씩 봉안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전기의, 이른바 4사고 체제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실록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었다. 사고는 모두 소실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본만 보존되었는데, 이는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등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안의와 손홍록은 비록 전장터에서 싸움을 한 이들은 아니지만, 이들의 공이 결코 가벼이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 최대의 기록유산 가운데 하나인『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까지 무사히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 안의와 손홍록을 우리는 충절의 표상으로, 성인의 표상으로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는 한 부만 남게 된 실록을 다시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존에 더욱 만전을 기한다. 임란 이전의 4사고 체제에서 5사고 체제로 전환되었으며, 좀더 안전한 깊은 산중에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래서 경상도 태백산, 강원도 오대산,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묘향산에 새로 사고가 지어진다. 원래의 정초본 1부, 곧 전주사고본이 마니산사고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 간행된 인쇄본 3부가 각각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사고에, 간행 당시의 교정본 1부가 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이들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춘추관사고는 잇따른 호란의 피해로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고, 묘향산사고에 있던 실록은 청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전라도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크게 훼손된 데다가 효종 때 화재로 거의 소실되었다. 조정에서는 강화도 정족산에 사고를 짓고 남은 실록을 옮겨 봉안했다. 그리고 적상산본을 저본으로 다시 만들어 완질의 실록을 이 곳에 봉안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후기에는 실질적으로 태백산본, 오대산본, 적상산본, 정족산본의 네 사고 체제로 계속 운영되어 가고,『철종실록』까지 그 체제가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실록에 또 한 번의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때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로 우리나라를 병탄했다. 이후 일제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사료들을 색출하여 압수해 갔다.『조선왕조실록』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우리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본만이 일제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어 갔을 뿐,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도서관에, 적상산본은 창경궁의 이왕직 장서각에 각각 봉안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때 오대산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안타깝게도 소실되고 말았지만, 나머지 3부는 우리 땅에 안전하게 전해 오면서 광복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1945년 10월 17일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하여 경성대학을 발족시켰다가 1946년 경성대학을 개편시키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서울대학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자연스럽게 소장되었으며, 적상산본은 광복 후 이왕직을 구왕궁사무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대로 이 곳에 소장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실록을 또 그렇게 그냥 놓아주지 않고 다시 한번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긴 피난행렬을 따라 실록도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되었다. 지금은 북한의 김일성종합과학대학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지고 지켜져 온 지 어언 600년이다. 사람은 고작 100년밖에 살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도 파란만장한 일생을 지낸다. 하물며 600년을 버텨온 실록이야 오죽하겠는가. 큰 위기도 위에서 본 것처럼 세 번이나 넘겨야 했던 실록의 기구한 일생은 바로 우리 민족의 기구한 일생이었고, 또 일제의 손에 농락당했던 실록의 아픔은 바로 우리 민족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지나고 나서는 더 이상 실록에 큰 위기는 없었다.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다시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규장각이 독립되어 이 두 실록은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1985년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의 요청으로 이 중 태백산본 848책을 부산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과거 조선왕조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록을 분산 관리하여 안전함을 도모하고자 했음이겠다. 그리고 철저한 보안과 보존 과정을 통해 지금은 편안히 쉬고 있다. 4.『조선왕조실록』의 오늘 이 장에서는『조선왕조실록』의 오늘날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가치를 인식하고 있던 국사학계에서는『조선왕조실록』의 영인본, 국역본 간행을 갈망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실록의 수요가 늘어났지만, 한국전쟁 이후 극도로 피폐해진 경제 상황에서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거질의 실록이 영인, 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 사업을 추진시켰고, 드디어 하나의 숙원을 이루어낸다. 바로『조선왕조실록』의 영인본 간행이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 태백산본을 바탕으로 1/8로 축쇄하여 마침내 48책으로 완간되었다. 이렇게 간행된『조선왕조실록』영인본은 국내 도서관은 물론이고 유럽, 미국 각국의 중요한 대학도서관에 널리 배포되었다. 영인본의 간행으로 조선왕조사 연구의 폭이 확대되고 나아가 한국사 연구의 발전에 큰 이바지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다시 올바른 국역본의 간행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6년 실록의 국역을 제창하고 1968년『세종실록』을 시작으로 실록을 국역해나갔다. 이어 1972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가 동참하여 이 두 기관에 의해 실록의 국역 사업이 이루어졌다. 실록의 국역 사업은 국고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여 사업은 부진함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말 북한에서 실록의 번역을 먼저 끝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에서 번역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것은 남한에 큰 자극이 되어 이후 활발한 지원과 국역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1993년 완간할 수 있었다. 25년에 걸쳐 총 447책이 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413책이 국역본이고 나머지 34책은 색인집이다. 한편 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사학계에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조선왕조실록』CD-ROM이 간행된 것이다. 정보화 시대에 발맞추어 간다는 단순한 의미로 치부하기에는 이 사업이 지니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이를 바탕으로 일반인들도 누구나 쉽게 실록을 열람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실록의 국역 사업에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우선 국역본의 경우는 한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역이 이루어지다 보니 한자어투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북역본의 경우는 고유어를 많이 씀으로써 읽기에는 편하나 때로는 지나치게 한글로 풀어씀으로써 오히려 한문 원본을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국역본, 북역본 모두 해석들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도, 그리고 남북한의 오랜 단절로 교류가 끊기어 문화적인 부분에서의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 것도 앞으로 실록의 국역 사업이 다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부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제3의 실록 국역 사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5.『조선왕조실록』의 올바른 이용 우리는 앞에서『조선왕조실록』의 위대함에 관해 충분히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런 위대함을 우리가 몸소 느끼려면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활용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통해 실록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좀더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성무 교수의 논문을 바탕으로, 이를 다시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첫째, 편년체의 사서이기 때문에 사료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다른 사서와의 비교,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더욱 용이하겠다. 둘째, 정통성이나 당파 간 이해에 따라 서술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셋째, 피지배층에 대한 기술이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인물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것이 조선왕조가 정쟁만 일삼은 국가로 오해하기 쉽게 만든다. 그러나 사림정치의 틀 안에서 보면 이는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 다섯째,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개념을 현재의 개념에 그대로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여섯째,『고종순종실록』의 왜곡된 측면에 관한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성무,「『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민족문화』17, 민족문화추진회, 1994, 35~37쪽에 실린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잘 정리가 된 것이라 여기에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바로 행간에 담긴 숨은 뜻을 읽어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읽어내야만『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6. 결  론 『조선왕조실록』이 아무리 세계적인 문화유산인들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수정실록의 편찬을 들 수 있겠다. 수정실록이 원래의 실록과 같이 보존되어 왔다는 점이 높게 평가된다 하더라도 정쟁의 여파 속에 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는 것 자체가 한계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쟁에 휘말려 직필의 원칙이 흔들릴 때가 적지 않았던 것, 왜란 등 미증유의 전쟁으로 기록이 부실했던 측면도 빼놓을 수 없는 한계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조선왕조실록』은 이러한 여러 한계를 충분히 덮고도 남을 중대한 가치가 있다.『조선왕조실록』에서 엿보이는 역사를 두려워하는 마음, 직필의 의지, 꼼꼼한 기록 등등은 현재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지금의 우리들 모습은 어떤가? 그렇게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정치를 보면 가관이다. 툭하면 무슨 잘못을 저질러놓고 “역사가 나를 판단해 줄 것이다.”, “역사가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와 같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 그렇게 역사를 사랑하고 역사 앞에 떳떳하다면 도대체 뭐가 아쉽고 무서워 기록을 숨기고 감추는가? 조선왕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조선왕조에 면면히 흐르던 ‘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정치판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음이다. 비단 정치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배웠다고, 조금 안답시고 이야기하지만 실상 우리는 우리 옛 조상들의 문화를 잘 모른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한탄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우선 나부터 그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많이, 그러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하며 그것을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조선왕조실록』은 그렇게 여러모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의 자랑이 된『조선왕조실록』. 이제 우리는『조선왕조실록』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는 데 대하여 단순한 자랑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 역사의 흐름 등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조선왕조실록』은 비로소 진정한 우리의 자랑, 세계의 자랑으로 한 발짝 더 다가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은 선학들의 여러 책과 논문, 교양서 등을 참조 또는 인용하면서 거기에 내 나름의 생각과 의견을 덧붙여 쓴 글인「목숨을 건 위대한 直筆의 힘, 朝鮮王朝實錄」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요약한 글은 2003년 12월 23일부터 12월 30일까지 6회에 걸쳐 제 블로그에 소개했었는데, 여기 오픈사전에 올리기 위해 이를 다시 한글파일에 복사하여 약간의 손질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글에는 제 나름의 생각과 의견도 들어가 있지만, 선학들의 연구가 없었다면 절대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아울러 제가 참조 또는 인용한 문헌들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그 분들의 명예에 흠이 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다만 이 글은 요약문이기에 이 글에 관련된 책과 글들만 밝혔습니다. [참고문헌] 1. 책 박영규,『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신명호,『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 궁중문화』, 돌베개, 2002. 이성무,『라디오한국사』1 (실록이란 무엇인가), 동방미디어, 2002. 이성무,『조선왕조사』1․2, 동방미디어, 1998. 이이화,『한국사이야기』9, 한길사, 2000. 2. 글 (논문 포함) 신석호,「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사총』5, 고려사학회, 1960. 이성무,「『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민족문화』17, 민족문화추진회, 1994. 이태진,「조선왕조실록 -나의 접관기-」,『한국사시민강좌』제23집, 일조각, 1998. KBS 제작팀 지음,「조선시대의 블랙박스-조선왕조실록」,『책으로 보는 TV조선왕조실록』1, 가람기획, 1997.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kks35679 ========================================================================================== 쪼잔하게 건물가지고 ddr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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