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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점찍어둔 힙스터 여행지 공유한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okanto&no=369482&s_type=search_name&s_keyword=%EA%B9%80%ED%8C%8C%ED%86%A0&page=1 히로시마에서 찾은 작고 소중한 화장실 - 일본여행 - 관동이외 마이너 갤러리 常夜燈・雁木 · 1-5 Dohashicho, Naka Ward, Hiroshima, 730-0854 일본★★★★★ · 역사적 명소maps.app.goo.gl혼카와 공중화장실나름 핵폭발에서도 살아남은 gall.dcinside.com1. 혼카와 공중화장실수많은 사람들이 원폭 돔을 보러 가면서, 무심코 지나치는 숨겨진 명소. 원폭 투하 당시에 살아남은 건축물 중 하나2. 스에히로 오카미(메이 신사)이나리 산 초입에 숨겨진 작은 신사. 이미 수 백명에게 돌려먹혀 허벌개구리가 된 후쿠오카현의 뇨이린지를 잇는 걸 꿈꾸는 교토의 개구리 신사3. 쇼젠인구마모토현 남쪽 끝자락, 쿠마 강의 온천촌 끝자락 미즈카미에 자리 잡은 절. 고양이를 테마로 잡은 절이다. 곳곳에 적긴 해도 고양이 상이 보임.단점은 사연인데, 고양이가 마스코트가 된 이유가 여기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스님의 엄마가 복수하겠다고 저주 의식으로 고양이랑 같이 자살해서임;;4. 쓰와노 오토메토게 성 마리아 예배당카쿠레키리시탄과 관련한 아마 유일한 혼슈 유적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천주교도들이 정체를 밝힌 그 순간하고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그 짧은 기간 사이에 종교인 박해가 잠깐 있었는데, 그때 나가사키의 천주교도들을 유배보낸 곳이다.200명 언저리가 갔는데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까지 10% 정도만 살아서 돌아갔다고 함.5. 나가사키현 가와타나마치 카타시마 어뢰시험장구 일본군의 어뢰 발사 시험장으로 쓰였으나 패망 후 버려진 시설. 특유의 폐허미가 있어서 코스프레나 촬영 쪽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함최근엔 일부 시설엔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는 얘기도 있음.6. 오카야마현 니미일관갤에서 주웠지만 어떻게 동네 이름이 니미;;7. 가고시마현 아마기조(도쿠노시마)의 토모리 암각화 & 보마 암각화뭔가 모양새가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같아서 엄청 옛날인 선사시대의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17세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적어도 에도시대부터나 그때부터 이 근방 섬사람들에게 암각화를 새기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의의가 있다고 함그래도 힙했으면 됐지 않을까...?8. 구마모토현 가마토마치의 고니시 유키나가 공양탑정말 뜬금없는 곳에 위치한 고니시 유키나가 유적지인데, 이 공양탑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고 함.뭐 복잡한 얘기지만 고니시 가문이 멸문당하기 전에, 한 가신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조카(동생의 아들)을 이곳으로 숨겨 키웠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옴근처에 기쿠치 성터가 있다. 어차피 기쿠치 성터도 충분히 힙한데 같이 가보는 건 어떨까?9. 도쿄 이즈 열도, 고즈시마 쥬리아의 십자가고니시 유키나가랑 관련된 또다른 유적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양해서 키운 조,선 사람 중에는 오타 쥬리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고 고니시 가문을 멸문시켰을 때, 오타 쥬리아도 고즈시마로 유배당했다고 함.고즈시마에서 진짜로 죽었는지는 의문이지만(사료 상, 유배에서 풀려나긴 했다고 함) 가톨릭계 재일교포 사이에선 상징적인 인물인지라 많이들 기억하려 한다고 함.여튼 고즈시마에선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녀의 넋을 달래고자 십자가 하나를 세워놨다고 함10.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 오빠이 바위그... 바위가 젖꼭지처럼 생겼다고 함11. 아마쿠사시의 미야지다케 허수아비 마을 & 토쿠시마현의 나고로 허수아비 마을인구가 줄어 가는 마을의 인구를 허수아비로 대체하며 관광자원화시킨 곳들이다.마을의 일상을 허수아비로 표현해뒀는데, 오히려 호러스팟에 가까운 느낌. 관리원들이 상주하고 있긴한데, 밤에 가는 건 비추... 허수아비가 하나 더 늘어날지도 사이타마현의 니에카와랑 히메지시 야스토미초세키에도 허수아비 마을이 있다고 함12. 카가와현 히로시마 이쓰쿠시마 신사일관갤에서 건진 미친 힙스러운 곳. 매일매일 바이럴 당하는 히로시마가 지겹다면 히로시마로 가보는 건 어떨까? 다만 여기 이쓰쿠시마 신사는 일본 3대 절경엔 들지 못한다.13. 삼국시대 신사13-1. 사이타마현 고마 신사13-2. 시마네현 오다시 이소타케초 카라카미시라기 신사13-3. 미야자키현 미사토초 고도 신사다른 시기에 저마다 다른 이유로 어쩌다보니 삼국시대의 삼국을 대상으로 한 신사가 생겼다.신라와 관련된 신사는 규모가 아주 작은 편이지만, 고마 신사와 고도 신사는 각자 연례적으로 치루는 큰 행사가 있을 정도로 크게 자리잡은 신사들임.셋 다 가보면 일본에서 중세 한국 역사 기행이 가능함ㄷㄷ14. 오가사와라 개척비와 오가사와라일본 최고의 오지인 오가사와라의 본 신사로 오르는 길 초입에는 무인도랍시고 냅다 오가사와라 식,민지화를 선언했을 때 세워둔 개척비가 있다.아이러니하지만 일본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치치지마 식인사건과 일본 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비석이 같은 곳에 있었다는 건... 힙하잖아...이외에도 오키노시마, 이오지마, 마게시마나 오키노토리시마 같은 곳도 있지만 그런 곳은 일반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갈 수가 없어서 뺌천주교 관련으로 뭐가 좀 있는 이유는 저번 여행을 천주교 테마로 했어서 그럼
작성자 : ㅇㅇ고정닉
일본의 섬노예 사건 (일본의 신안)...jpg
전라도의 염전 노예 사건들을 보고 미개하다고 극딜하는 일본이지만, 그런 그들도 예전에는 엄연히 섬노예를 쓰고 있었던 나라야. 이 사건은 나사케지마(情島 - なさけじま) 한자로 '정'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서 벌어진 비정한 이야기야. 쇼와 23년 (昭和23) , 서기 1948년 7월, 세토내해(瀬戸内海) 에 떠있는 야마구치현의 야시로지마 (屋代島) 에 초췌한 몰골을 한 19세, 17세의 소년들이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어. 이들은 맞은 편에 있던 나사케지마(情島)에서 조업 중인 어선 등에서 노를 젓는 등, 강제노동을 하던 노예 소년들이었지 옛날부터 나사케지마에는 카지코(梶子 - かじこ) 라 불리우는, 어선의 키를 잡거나 노를 젓는 역할을 아이들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어.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가난한 집 아이들을 사다가 3-5년 정도 부려먹고 내보내곤 했는데, 패전 이후 더욱 일손이 부족해지자, "물고기를 배터지게 먹게 해주마" 같은 말로 데려온 뒤 통수쳐서 가혹한 노예 생활을 시키게 된 거야. 이 섬노예 소년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1시가 되서야 잠이 드는 강제 노가다충 생활을 매일 지속해야 했고, 조업을 완전히 쉬는 일부 명절을 제외하고 쉬는 날은 존재하지 않았어. 거기에 매일 지속되는 가혹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거의 식사를 주지 않아서 당초의 물고기를 배불리 먹여주겠다는이야기는 다 거짓부렁이었고 영양실조로 나날이 여위어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물론 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무튼 두 소년의 발견으로 이 사건이 지방 신문에 알려지고, 경찰과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지. 이 때 당시 발견된 노예 소년 들의 수는 약 50명. 지금의 나사케지마의 인구가 13명인데 비하면 많은 숫자였어. 물론 각자의 사연도 기구했는데, 빚을 갚지 못해 아이가 부모의 차금 대신 팔려온 경우, 전쟁 고아인 경우 심지어는 소년원(그 당시의 감화원-感化院-) 이나 고아원에서 원장의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비밀리에 섬으로 팔아넘긴 경우 등등 근대화 된 사회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줄줄히 터져나왔지. 거기에 해당 사건으로부터 2년 정도 전에 한 소년을 우리에 감금한 뒤 굶겨죽인 사건도 발각되었지. 감금한 범인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모든 정황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섬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행정관계자나 기자, 경찰들조차 이 사건을 이해하는 "척" 을 했을 뿐이야. 패전 이후 일본도, 천조국 성님들에게 "기브 미 쪼꼬레또" 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상황이고 모두가 빈곤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입장이라는 사고 방식이 강했고, 당연히 전쟁 고아들도 넘쳐나는 상황이었지. 그런 상황에서 섬노예 소년 하나 둘 쯤 굶어 죽는 것이 무'슨 상'관 이냐는 분위기가 강했고 하다 못해 변변치 않아도 밥이라도 주는 게 어디냐며 이런 섬노예를 "필요악" 으로 까지 보는 인식이 강한 상태였어. 이 사건에서 정부가 해준 것은 12세 이하의 아동에게 노동을 강요하지 말 것, 의무 교육을 받게 할 것 법에 의하지 않은사형(私刑)을 하지 말 것을 문서화 한 것에 불과했고, 섬노예 소년들을 이용한 어업 활동은 그대로 유지되었어. 굶겨죽인 1명의 소년 이외의 소년들에 대한 강제 노동 등은 전부 불문에 부쳐졌고, 실제로도 형사 사건화 되지 않았지. 이 사건으로 10여명의 소년들은 섬을 떠났지만 대다수의 소년들은 섬에 남았어. 섬을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도,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종결되는 줄 알았던 섬노예 사건은 3년 후인 1951년에 학대를 견디지 못한 5명의 소년들이 탈주함으로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 그 사건 당시 정부의 지도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정부가 묵인하는 모습을 보고 강제 노동 등 대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밝혔어. 이 사건을 소재로 NHK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카지코(舵子) 라는 대하 드라마를 만들었고, 1957년에는 분노의 고도 (怒りの孤島) 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지. 이 나사케지마 외에도 이 당시 일본의 농촌이나 어촌 들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한 가혹한 노동이 강요되는 사건들이 각 지역 풍습으로 남아 있었어. 오키나와 이토만 지방의 이토만우리(糸満売り - いとまんうり) 오키나와 케라마 제도(慶良間諸島)의 케라마우리 (慶良間売り) 오키나와의 빈농이 부농에게 자식을 노동력으로 파는 인쟈(インジャ) 미야기 현(宮城県) 의 모라이코(モライコ) 등 각 지역에서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도시로 노동력이 이동하고, 한국 전쟁 등의 특수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는 60대 중 후반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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