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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상플] 우리 사랑의 조각들 1

편린(125.184) 2019.11.26 00:23:02
조회 1553 추천 1 댓글 2

익숙하게 재신을 에스코트해서 차에 태우고 시경이 올라탔다. 재신이 차에 부딪히지 않게 머리를 받쳐주던 손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정말 아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경이 말하는 공주님이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재신은 운전하는 시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경은 검문소 앞에서 재신에게 말했다.


“여기는 검문이 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숙이고 있어야 합니다.”


재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하나뿐인 공주님은 매해 추모대상으로 다큐멘터리 등 항상 나오고 있었다. 왕실 직계가족과 허락된 이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별장에서 나타난 재신과 닮은 이를 발견한다면 어떤 여파가 일어날지 몰랐다. 시경이 잠시 차를 멈추자 재신이 조수석 아래쪽에 몸을 구기다시피해서 쪼그려 앉았다.


큰 키와 다르게 가냘팠던 몸이었다. 재신은 시경을 향해 짖궃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안 들키겠죠?”


시경은 재신의 모습을 힐끗 바라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재신처럼 짖궃고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재신을 못 알아보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었다. 누가 봐도 빛나는 그 붉은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이 났다. 시경이 항상 어디서든 재신을 발견했던 것처럼. 시경은 뒷 좌석에 있던 담요를 들어 재신의 위로 덮어주었다. 담요가 덮일지는 몰랐는지 어어 하는 재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숨으셔도 눈에 띄십니다.”

“어... 근데요. 나 궁금한 거 있어요.”

“갑갑하셔도 참으세요. 빨리 지나가면 편하게 있으셔도 됩니다.”


재신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하는 시경의 말에 재신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공주님이라는 말이 참으로 낯간지러웠다. 재신이 기억하는 것은 눈을 뜨고 나서부터였는데 익숙하게 말하는 공주님이라는 호칭이 생경하면서도 이상했다. 재신은 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시경은 검문소에서 짧게 차 안을 보는 것을 느끼곤 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은시경이라고 하면 군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시경의 얼굴이 통행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였으면 조금 더 수색했을지 모르지만, 시경은 가뿐히 검문소를 지나고서 재신의 머리 위에 덮인 담요를 걷어냈다.



“은시경씨!”

“네? 많이 답답하셨습니까?”


꼬물꼬물 올라와서 자리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쉬는 재신을 곁눈질하던 시경은 재신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안면도에서 쓰러진 재신을 발견했던 그 날과 똑같은 재신은 시경에게 건네는 말투마저 똑같았다. 조금 신경질이 났을 때나 장난기가 가득할 때처런 재신의 목소리는 시경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시경은 재신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시경의 마음을 모르는 재신은 시경에게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내죠?”

“네?”

“그리고 은시경씨가 말하는 공주님은 나랑 닮았어요? 은시경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공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난 모르잖아요.”

“아....”


갓길에 차를 세운 시경은 지갑에 넣어두었던 재신의 사진을 꺼내서 재신에게 보여주었다.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재신의 얼굴은 공식 석상의 모습뿐이었다. 시경은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의 재신의 모습을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재신은 떨리는 손으로 시경에게 사진을 받아들였다. 붉은 머릿결에 큰 눈하며 웃고 있는 모양새가 재신과 똑같았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사진 속의 얼굴을 비교해보아도 정말 똑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공주님일 것이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그럼 이렇게 있는 것이 말이 되지 않으니깐. 하지만 시경이 부르는 호칭에 뚝뚝 묻어나는 감정이 재신을 어지럽게 했다.

"이 공주님이라는 사람 말이예요... 나랑 정말 닮았네요."

"...."

시경은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감정을 꾹꾹 누른 채 재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 은시경씨가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는지 알겠네요."

"...."

"나도, 내가 봐도 이렇게 닮았는데. 그래도 은시경씨는 공주님을 자주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나를 그렇게 부른 거예요?"

재신의 말에 시경은 살짝 고개를 숙이다가 답했다.

"아닙니다. 공주님은 빛나는 별이 되었으니 제가 오해한 것이지요."

재신은 시경이 저를 바라보는 눈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엿보았다. 깊은 감정을 꼭꼭 숨기려하지만 툭하고 튀어나오듯이 숨기지 못하는 시경의 눈빛이 왠지 씁쓸해진 재신은 사진을 시경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럼 누구일까요? 난 내 이름도 모르는 걸요."

"정말 비정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시경은 한가지 가설을 생각했다. 안면도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재신은 시경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일지 몰랐다. 따뜻하고 숨쉬고 감정이 드러나는 그때의 재신에겐 슬픔도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어디서나 반짝이던. 어쩌면 시경에게 감정을 줄 일이 없었던 재신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워졌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 거짓이 될까 봐 시경은 두려웠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공주님인 것 같습니다. 이 옷차림.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으니깐요."

"하지만 공주님은 별이 되었다면서요?"

재신의 말에 시경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재신의 입에서 듣는 별이 되었다는 말은 시경을 괴롭게 했다. 감정을 숨기는 게 쉽지 않아 숨을 크게 들이마신 시경이 말했다.

"하지만 공주님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궁으로 가요?"

재신은 불안해졌다. 알에서 깨어난 새처럼 그 짧은 시간에 시경을 믿었던 모양이다. 재신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공주님일까. 재신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어. 시경의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럼요? 난 어디로 가요? 난 정말 내가 공주님인지 알 수가 없는데. 왜 난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 걸까요?"

시경도 알 수가 없었다. 재신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재신이 죽은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고 삼엄한 궁에 재신을 데리고 간다고 해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재신을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난 궁에 들어가기 싫은데."

"네?"

"별이 되었다면서요? 은시경씨는 나 믿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난 사기꾼일 거 아니에요."

"하지만...."

머뭇거리는 시경을 보며 재신은 한참을 생각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이 손뼉을 쳤다.

"그럼 은시경씨 집으로 가요. 안전할 테니깐요."

"네?"

재신의 말에 놀란 시경이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재신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한 번도 연결하지 못한 단어였다. 재신과 시경의 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재신을 어딘가에 데려갈 곳이 있다면 그건 없었다. 망설이는 듯한 시경에게 재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 은시경씨 믿어요."

재신의 말에 시경은 한숨을 쉬었다. 재신의 눈에는 시경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 시경은 재신을 바라보면서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의 홍수에 빠졌는데. 재신은 담백했다. 마치 예전처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시경을 바라보는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시경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앞만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재신에게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핸들을 쥔 시경의 손에서 핏줄이 쏟을 것만 같았다.

"은시경씨를 말이예요. 당신은 나에게 위험한 사람이 아니죠."

재신의 말에 시경은 복잡하게 재신을 바라보았다.

"나 이런 촉은 틀리지 않아요. 시경씨는 절대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재신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시경은 이내 풀이 죽었다. 재신의 말이 맞았다. 시경은 다시 돌아온 재신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재신이 다른 곳에 가겠다고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시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동을 걸었다.

"맞습니다. 공주님. 저는 오롯이 공주님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시경의 말을 들으며 재신은 복잡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경의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재신도 스스로가 공주님이길 바랐다. 저런 깊은 감정을 복잡하게 감추는 것은 분명 깊은 애정이었다. 충동일지도 몰랐지만, 재신이 가지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재신은 모든 것을 찾아 가지고 싶었다. 설령 이것이 거짓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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