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인터뷰를 올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해 초, 우여곡절 끝에 수호요정 미셸의 DVD를 구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보는 동안 몇 편의 감상문을 올렸는데, 글을 보신 분 가운데 한 분께서 저에게 자기가 당시 DR 무비의 제작이사와 메카닉디자인을 맡으셨던 분을 알고 있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렇게 결국은 이 작품의 총감독을 맡으셨던 이동욱 감독님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작년 5월 말에 찾아뵙기로 하였습니다.
혼자 찾아가기는 뭐해서 갤러 한 분(지금은 갤에 안 보이시는...)과 같이 가게 되었고, 덧붙여서 수호요정 미셸에 관심이 상당히 많고 제가 이 작품의 DVD를 구해서 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인 CosmoG님(https://twitter.com/cosmoG2013)의 질문도 받아서 가져갔습니다. 이날 저희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호요정 미셸 관련한 이야기가 주였지만 다른 작품 이야기도 있었고요.
사실 원래는 다녀온 직후 가능한 한 빨리 질의응답을 정리해서 올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서 올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업로드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최근에 와서야 그 사정이 해결되었고 이렇게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주고받았던 이야기니만큼 분량이 굉장히 많다는 것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 내용을 최대한 정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화의 시간순서 같은 것이 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호요정 미셸에 대한 내용누설(스포일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간 관련해서 썼던 글
(내용누설) 킴 스페셜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korea_ani&no=36298
허니비에 관해서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korea_ani&no=36493
수호요정 미셸 끝까지 보고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korea_ani&no=37792
수호요정 미셸 관련한 옛날 기사들을 쭉 찾아보고…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korea_ani&no=38374
참석자:
이동욱 - 수호요정 미셸 총감독, 초기 설정 및 메카닉 디자인(허니비, 블랙해머단의 비행요새)
스태프 A - 수호요정 미셸 제작당시 DR 무비 촬영팀 소속
SV-001/R - 나
스미골룸 - 인터뷰에 동석한 한애갤러
사실 질문에 대한 답변에 앞서 90년대말~2000년대초 한국애니메이션 업계 상황, DR 무비 내부의 상황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이 부분은 공개하지 말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질의응답 도중에 그 부분과 연관되어 설명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 글만 보시는 분들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난번에 올린 글(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korea_ani&no=38374)을 참고하면 좀더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항
Q1: 수호요정 미셸 제작 당시 어느 회사 소속이셨고, 맡으신 업무는 정확히 무엇이었습니까?
이동욱: 저는 DR 무비 소속이었고, 맡은 업무는 제작이사 겸 총괄감독, 메카닉 디자인과 3D 연출이었습니다.
Q2: 수호요정 미셸은 아이코닉스와 DR무비가 같이 만든 작품인데, 각 회사가 당시 맡았던 일과 기획제작에 있어서의 비중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일설에 따르면 아이코닉스가 자체 제작진을 갖기 전까지는 기획만 하고 실제 제작에 기여한 비중은 적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동욱: 수호요정 미셸은 DR 무비, 아이코닉스, KBS가 만든 작품입니다. 공식적으로 DR 무비는 애니메이션 기획 및 제작, 아이코닉스는 사업기획, KBS는 포스트프로덕션과 방송을 맡았습니다. 여기서 사업기획이란 마케팅과 사업에 대한 기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 판교신도시에 위치한 아이코닉스의 사옥
(아이코닉스는 원래 금강기획의 애니메이션사업팀이 따로 빠져나와 2001년에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금강기획 시절부터 '레스톨 특수구조대', '녹색전차 해모수' 등의 기획에 참여했으며 수호요정 미셸 또한 금강기획 시절에 기획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금강기획 애니메이션사업팀이 수호요정 미셸의 기획에 참여하였다가 이후 이들이 아이코닉스라는 이름의 회사를 따로 세우고 그 이후에 수호요정 미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Q3: 시나리오를 이마가와 야스히로(今川泰宏), 스토리보드를 코지마 마사유키(小島正幸)라는 매드하우스 소속의 일본 사람이 맡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자료를 찾다 보니 이 두 분이 해당 부분 작업을 전담하신 게 아니라, 실 작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고 이분들께서 감수를 맡아 주셨기 때문에 대표격으로 시나리오에 적은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사정이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당시 발행된 기사를 보면 기획단계에서는 한중일 3국 합작으로 기획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 두 분이 참여한 사실 때문에 수호요정 미셸을 한일합작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동욱: 당시 DR 무비 내부에서는 DR 무비가 메인프로덕션(작품 본편 제작)은 잘 할 수 있지만 프리프로덕션(제작기획)은 당시 수준에서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DR 무비에서는 수호요정 미셸 말고도 '원더풀데이즈'의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어서 DR 무비의 스태프들이 그 쪽으로 파견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프리프로덕션 부분을 일본 매드하우스 소속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매드하우스가 당시 DR 무비의 주요 거래처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고, DR에서는 그 일본 팀을 통째로 고용한 것입니다.
수호요정 미셸의 전신은 DR 무비에서 1998년부터 '어린왕자'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이 무렵부터 이미 세계관 설정 등 일부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인 스태프들이 들어온 이후로는 메카닉 디자이너 역할을 맡아서, 일본인 감독이 원하는 대로 여러 메카닉을 디자인해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인공 킴이 타고 다니는 비행정 허니비와 악당 블랙해머단이 타고 다니는 비행기지입니다. 그 작업을 끝내고 난 다음 저는 원더풀데이즈의 총기류 및 메카닉 디자인을 위해 1년 반 정도 양철집(틴하우스)이라는 이름의 회사에 파견을 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동우 애니메이션(동우 A&E)에 입사하여 1년 정도 '바스토프레몬'의 연출감독을 맡았고요. 바스토프레몬 작업을 마치고 다시 DR 무비로 돌아왔는데, 6개월쯤 뒤에 수호요정 미셸의 작업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양철집에 가 있을 동안 프로젝트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저는 당시 수호요정 미셸이 왜 중단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수호요정 미셸의 제작이 재개될 당시에 남은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4화~5화까지는 초기 단계의 영상이 완성되어 있었고 어느 부분까지는 콘티, 어느 부분까지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고 시놉시스는 전부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인 감독과 스태프들이 일부분을 완성한 상태에서 제작이 중단되었고 지금까지 그 상태로 남아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작업을 다시 이어서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고요. 결국은 저와 함께 DR 무비의 스태프들이 나머지 부분을 이어서 만든 것입니다.
일례로 수호요정 미셸의 다른 에피소드의 경우 본편 영상을 만들고 나서 한두 번 정도의 수정만 거치면 최종 영상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1화와 2화는 네다섯 번씩 수정을 했습니다. 왜냐면 1화와 2화는 이미 필름까지 다 끝나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와 어색하지 않게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수호요정 미셸은 한일합작 애니메이션이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일본 쪽 스태프가 DR쪽 스태프로 합류한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획초기에는 한중일 3국 합작으로 기획되었다는 말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한국문화정책개발원에서 2002년 발행한 '한국 문화산업의 동북아지역 진출활성화 및 협력방안 연구' 에 한중일 3국 합작으로 언급된 수호요정 미셸의 사례. 당시 제목은 '출동! 요정추격대' 였습니다.
Q4: 아이코닉스의 최종일 대표님은 그동안 여러 인터뷰나 강연, TV출연 등에서 이 작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지만 어린이의 관점에서 무엇이 재미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지 않고 만든 작품"이라고 말씀해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라기보다 "교훈적인 이야기"에 좀 더 비중을 두려 했던 것 같고, 해외의 평가 또한 "이솝우화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획 당시에는 이 작품을 어떤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습니까?
이동욱: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제가 어렸을 때 보았던 수호요정 미셸같은 부류의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내레이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도 친구와 ~~를 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잘 해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와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방송사에서는 작품을 방영할 때 몇 가지 시나리오 제한사항을 보내옵니다. 이를테면 "교훈적일 것" "~~한 내용은 넣지 말 것." 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제한사항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은 무조건 부서지고 터지는 오락용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호요정 미셸을 만들 당시만 하더라도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은 무조건 교훈적인 이야기여야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는 다른 작품들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이제 막 등장하는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호요정 미셸은 교훈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좀 더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편이었습니다. 애초에 시나리오가 그렇게 써졌습니다.
그런데 아이코닉스의 최종일 사장님은 뽀로로를 가지고 성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미나, 어린이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상업적인 요소를 많이 넣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일 사장이 말하는 재미는 예를 들면 아이들끼리 숨바꼭질을 한다든가, 상자의 뚜껑을 열면 무엇이 나올 지 두근두근한다든가 하는 아이들 특유의 심리를 작품에 잘 반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코닉스가 수호요정 미셸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연출 기법을 염두에 두고 회의에 참여했던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좋은 작품 한 번 만들어 보자"라고 하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에 대해 단순하게 대답하자면, 기획 당시에는 이솝 우화처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케터나 상품기획자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업적인 부분보다는 작품 자체에 좀더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 2011년 10월 5일 방영된 '무릎팍 도사' 마지막회에 출연한 아이코닉스의 최종일 대표. 이날 방송에서도 수호요정 미셸에 관한 언급이 잠깐 나왔습니다.
Q5: 당초 프로젝트 제목이 '출동! 요정추격대' 나 '시텔 섬의 작은 요정 미셸' 이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검색으로 찾은 초기 컨셉 이미지도 보면 지금의 작품처럼 어린왕자의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왕자의 콘셉트는 제작 도중에 더해지게 된 것입니까? 하고많은 소재 중 하필 어린왕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동욱: 많은 소재 중에서 어린왕자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DR 무비를 구성하고 있던 메인 스태프들 대부분의 취향이 서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DR 무비 내부에서는 이 작품으로 한몫 크게 돈을 벌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DR 무비라는 회사는 원래 애니메이터들 중에서도 소위 오타쿠들이 모여서 만든 회사입니다. 그래서 자기 일에 대한 주관이 강하고 일에 에너지를 많이 쏟는 쪽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 사람들이 나태했다는 것은 아니고요.
Q6: 작품을 보면 비슷한 연령대를 노린 다른 작품에 비해 상품화에 대한 뚜렷한 방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용을 보면 요정들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요정 각각의 존재감이 봄의 요정 포요 외에는 크지 않습니다. 실제로 방영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분들도 수호요정 미셸은 관련상품이 시중에 별로 없었다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기획 당시 어떤 식으로 제작비를 회수할 생각이었습니까?
이동욱: 우리는 수호요정 미셸을 통해 제작비를 회수할 어떤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건 아이코닉스가 계획해야 할 일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작품을 만들고자 할 때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에 관한 사업기획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주된 업무가 그런 쪽이 아니다 보니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사업기획이라고 하는 것은, 완구회사를 찾아가서 애니메이션 작품의 이러저러한 장난감을 만들어서 국내에서 매출 얼마, 해외에서 매출 얼마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하는 사업기획이란 예를 들면 제작비가 10억 원이면 여기에서 영상 판매로 회수하는 돈이 얼마, 완구를 팔아서 얼마, 기타 등등을 팔아서 얼마 하는 식의 내역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제작사는 이를 들고 투자자 내지는 사업파트너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투자자가 이 내역을 보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투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투자자가 완구제작 등의 '사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돈만 투자하는 경우는 적습니다. (보통 캐피탈이나 벤처) 이 내역서에 만약 완구로 5억 원을 벌 수 있다고 적혀 있어도 자기들이 완구로 20억은 벌 수 있겠다고 판단하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기들(완구회사)이 10억을 모두 투자할 테니 지분 100%를 달라고 하기도 하고, 아니면 50대 50으로 해서 5억을 낼 테니 제작사는 5억을 투자하라는 식으로 나오면, 제작사는 나머지 자기들 지분인 5억을 가지고 다른 투자자를 찾는 식으로 점점 현금으로 치환하면서 위험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만든 사업기획서는 완구회사가 실행하기 위한 사업기획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DR 무비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소위 '내역서'를 만든 것이고, 아이코닉스는 장난감 총을 만들지,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그려진 노트를 만들어 팔 건지, 이모티콘을 만들어서 뿌릴 건지에 대한 계획을 한 다음에 이게 돈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참여한 것입니다.
Q7: 이 작품은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조차 흔치 않았던 2D+3D 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3D로 제작된 오브젝트와 2D 작화가 잘 어우러져서 위화감이 적었습니다. 제작진이 고생을 많이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제작 당시에 어려웠던 점이나 기억에 남는 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동욱: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23화, 사막이 배경으로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은 거의 다 3D로 만들었습니다. 수호요정 미셸의 2차 제작이 시작된 이후 작업이 안정되면서 어느 지경까지 갔냐면, 당시에 디지털실에서 거꾸로 우리(제작팀)에게 제안을 해왔습니다 "23화 시나리오 봤더니 내용이 이렇던데 그거 이번에 우리 3D로 해 보면 안돼?"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12화를 진행할 무렵에 23화만 따로 빼서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3D랑 합성을 하게 되면 작업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에피소드는 순서대로 작업을 하면서 23화만 몇 개월 전부터 미리 작업한 것입니다. 그렇게 스케줄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됐습니다.

▲ 수호요정 미셸 작업자들의 기억에 가장 크게 남았을, 23화의 한 장면
스미골룸: 보통 3D로 만드는 것은 이후 이야기에서도 계속 사용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요?
이동욱: 딱 그 에피소드를 위해서만 만든 것입니다. 어차피 정해진 제작비 안에서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D를 만들 때 엄청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러프 폴리곤(lough polygon)으로 만들고 거기에 효과를 집어넣어서 폴리곤이 가려지게 하는 식으로 효율적으로 작업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2D 작화로 화면을 회전시키는 연출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그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작업한 것은 그냥 우리끼리 이런 것 한번 해보자 해서 무리해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DR 무비는 다른 애니메이션이나 CF 등의 작업을 통해서 그런 기법을 활용하고 있었는데 마침 TV시리즈 애니메이션 작업을 오랜만에 한다고 하니까 "야 그러면 우리 이번에 한 번 제대로 해 보자" 처럼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새로운 작업이 아니라 이전에 하다가 멈춘 것을 꺼내서 다시 해야 한다고 하니까 서로 처음에는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니 제작이 본 궤도에 올라가서 그런 시도까지 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DR 무비 입장에서는 KBS나 아이코닉스에 우리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작진이 고생을 한 건 아니고, DR 무비는 원래 그 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웃음) 그렇게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이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기술을 이 작품에 모두 집약한 것입니다.
스태프 A: 일본 애니메이션 '드래곤 드라이브'를 작업했을 때 그런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 작품의 3D 작업을 모두 DR 무비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못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호요정 미셸을 작업할 시절에는 회사 분위기 자체가 그랬습니다. 각 부서 사이에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보자는 의견도 많이 나왔고 협력도 많이 할 정도로 의욕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Q8: 수호요정 미셸의 엔딩크레딧을 보면 보통의 한국애니메이션에 비해 제작진이 무척 적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나온 다른 작품의 제작진 표기를 보면 그 2~3배는 됩니다.) 실제로 엔딩크레딧에 나온 정도의 제작진이 전부인 건지, 아니면 생략된 사람이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 스튜디오 중에 '연필로 명상하기'도 콘티 작업에 일부 참여했다고 하는데 정작 엔딩크레딧에는 전혀 표기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알려진 제작진은 결코 전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동욱: 이걸 보면 프리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에 관계된 사람들만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 메인프로덕션에 관계된 사람은 빠져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캐릭터 디자인도 하고 작화감독도 하고, 일본 애니메이션과 같은 구조로 작업했습니다.
연필로 명상하기가 공식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작에 있을 때는 그 회사에 대한 명단을 전달받은 적도 없었고 그 회사에게 비용을 지출한 것을 결재한 기억도 없습니다. 혹시 1차 제작 때 참여했다면, 그 무렵 제가 DR 무비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여'했다는 말의 의미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거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외주를 받아서 했다는 것은 그냥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해 줬다는 뜻입니다. 연필로 명상하기가 콘티 작업을 맡았다면, 콘티는 외주를 많이 줬기 때문에 아마 외주를 맡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작에 "참여"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마 그 회사 스태프가 외주를 받아서 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제작진 표기는 굉장히 신경써서 만드는데 만약 1차 제작 때 콘티를 외주 받아서 해 줬다면 제작진 표기에 안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소중한 날의 꿈', '한국단편문학' 등을 만든 연필로 명상하기의 홍보용 책자에 실린 수호요정 미셸. 날짜가 2003년 4월로 적힌 것을 봐서 방영 직전(2차 제작)에 콘티 작업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킴의 비행정 허니비에 관해서(Q9)
이동욱: 허니비에 관한 질문은 한꺼번에 설명하겠습니다. 일본인 감독이 작품에 참여한 이후로 저는 메카닉 디자이너를 맡아서, 감독이 원하는 콘셉트에 맞춰서 메카닉 디자인을 해주었습니다. 허니비는 그때 완성된 것입니다. 일본인 감독이 참여하기 전에 기본적인 작품 세계관을 설정할 때 저는 큰 덩어리의 바오밥나무가 서 있는 시텔 섬의 분위기에 맞춰서, 마치 갈매기 같은 하얀색이나 하늘색의 맑고 따뜻한 느낌의 비행기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감독이 들어온 이후 저에게 제안한 내용은 그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있는데 비행기도 되고 물로도 들어가고 땅 속으로 뚫고 들어갈지도 몰라. 왜냐면 시나리오가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 말을 듣고 제가 처음으로 디자인해서 보여드린 허니비의 디자인은 두 쌍의 날개가 앞뒤로 달린(탠덤 윙 형식) 형태로 뒤쪽 날개는 뒤로 접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그 일본인 감독님에게 보여드렸더니 바로 "아니야 그게 아니고..." 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애니메이션 디자인은 그런 과정을 몇 번 거칩니다.
그래서 저는 감독님이 요구하는 것에 맞춰서 허니비의 두 번째 디자인을 만들었습니다. 초기에는 검은색으로 도색된 것도 있었는데 그 감독님이 이런 식으로 해 달라고 하셔서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된 허니비입니다. 블랙해머단의 비행기지 같은 경우는, 허니비 디자인이 끝나고 나서 바로 만들었는데 허니비와는 달리 한번에 OK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본인 감독이 추구하는 작품 스타일이나 세계관은 과거의 '루팡 3세'나 '미래소년 코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같은 종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원하는 것은 제 성향과는 달랐습니다. 저는 말하자면 리얼계 메카닉을 선호했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비행기가 착륙을 하려면 착륙장치가 꼭 있어야 하니까 그것을 그려 넣는 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본인 감독은 모든 것을 연출이나 액션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가 선회하는 장면에서 동선을 보여 주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핵심이지 비행기 날개에 조종면같은 것을 그려 넣는 것처럼 상세한 작동원리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 조종면은 비행기 주날개와 꼬리날개에 달려 있고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는 판 모양의 구조물로 공중에서 공기의 흐름을 바꾸어 항공기의 자세와 방향을 조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 이동욱 감독님께서 이 부분의 설명을 하시면서 예시로 보여준, 미래소년 코난에 등장하는 비행기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주의 디자이너와 추상화 화가가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허니비인 것입니다. (웃음) 저는 당시에 시나리오에 어떤 내용이 나올 지 모르는데 이 정도의 디자인을 가지고는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견을 냈는데 일본인 감독은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맞고 틀리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성향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매드하우스가 그 사람을 보내온 것도 어쩌면, 요정이나 마법이 나오고 하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기계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라 정서일 것이니 이 사람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허니비
아무튼 그 작업을 끝내고 나서 저는 회사를 잠시 떠났고, 다시 돌아와 보니 이제는 이 비행기를 가지고 제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말하자면 사실주의였기 때문에 이 허니비를 보고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작품을 만드나 싶었습니다. 아직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 비행기를 가지고 싸운다는 내용이 분명 있는 것으로 봐서는, 도심에서의 전투에 대비해서 헬리콥터처럼 호버링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게다가 비행기처럼도 움직이고 물 속으로도 가야 하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미 작품 일부분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 디자인을 고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기본적인 디자인은 손대지 않고 기존 비행기에 부품을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선에서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2차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메카닉을 3D로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DR 무비 내부의 3D 팀과 3D 모델링 작업을 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급조해서 추가하는 식으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허니비의 호버링 기능이나 역추진 장치 같은 것은 그렇게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공기흡입구 같은 것은 추가하면 너무 돋보이기 때문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착륙장치의 경우도 원래 디자인에는 없었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시나리오에 착륙하는 장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웃음)
이미 그때 1화, 2화는 필름이 많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1화와 2화를 보면 몇몇 장먼에서 허니비가 2D로 그려져 있을 것입니다.

▲ 이동욱 감독님께서 보여주신 허니비의 초기 도색 중 하나.
설정과 세계관에 관해서(Q10)
이동욱: 세련된 애니메이션 가운데서도 세계관이 국적불명, 시대불명 이런 애니메이션이 가끔씩 있습니다. 만화도 마찬가지고요. 수호요정 미셸 같은 경우 배경은 사실 현대인데 디자인 양식은 17~18세기의 것을 차용했습니다. 그런데 보면 아시아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유럽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은 항상 세계관 분위기가 유럽 쪽 분위기이지 않나요? 수호요정 미셸도 1화에 도심에서 킴과 블랙해머단이 쫓고 쫓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보면 (창 밖에 보이는 서울 도심의 고층 건물들을 가리키며) 이런 건물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배경이 사실은 유럽의 도시 같은 그런 거였습니다. 그런데 배경 디자인을 맡은 사람이 한국 사람이다 보니까 "도시"라고 해서 자기에게 익숙한 도시의 모습을 그린 것이죠.


▲ 미래도시와 중세 고성(古城)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관
게다가 허니비의 비행 장면이나 비행기지와의 전투 장면 등을 보면 비행기만 미래소년 코난 스타일이고 배경이나 연출방법은 마치 '마크로스'나 전쟁영화처럼 사뭇 진지합니다. 말하자면 '포켓몬스터'에 나올 법한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기동전사 건담' 같은 액션을 벌이는 것처럼 언밸런스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행기지도 원래는 지금과 같이 레이저포나 기관포를 쏘는 설정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중세 유럽의 대포 같은 것을 쏘는, '원피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원래 일본인 감독이 연출하려고 했던 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과 같은 식으로 연출한 게 맞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그 방향으로 가기로 했으면 그대로 끝까지 갔었어야 했는데, 일본인 감독이 중간에 하차하고 제가 이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캐릭터나 메카닉을 가지고 연출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이런 연출을 할 줄도 몰랐고,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 이타노 서커스 장면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던 것입니다. (웃음) 원래 의도대로 만들었으면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만한 작품을 만들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서 이 상태로라도 최대한 잘 마무리하자는 심정이었지요. 어차피 작품에 담긴 주제의식은 자연을 사랑합시다 뭐 그런 주제를 가지고 있으니, 저희는 킴이라는 아이가 여행을 하고 미셸은 그 옆에서 보조를 해 주고, 킴이 아빠를 찾으러 다니고 미셸을 만나서 이렇게 여행을 하는 이런 식의 연출이라도 제대로 표현하자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면 철학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갈 테니깐요.
블랙해머단이 뜬금없이 나온 이유는, 애니메이션의 재미를 위한 요소 가운데 "악당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의 기본 공식을 따르다 보니 악당은 2인조나 3인조가 되어야 했고요. 하나는 뚱뚱하고 하나는 비쩍 마르고. 그리고 사악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은 악당을 만들다 보니 두목이 여자인 것이고요. 이런 식으로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검증된 공식을 받아들여서 만든 작품이 된 것입니다.

▲ 블랙해머단
그래서 스태프들 입장에서는 이게 이렇게 되면 캐릭터 이름만 "미셸"일 뿐이지, 사실상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져다가 얼굴만 바꿔서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손가방을 만드는데 유럽에서 요새 유행하는 손가방 디자인을 가져다 놓고 작업한 모조품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DR 무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려고 많은 돈을 들여서 회사의 공식적인 첫 번째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했던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메카닉 디자이너로서 서른 살 즈음 되었을 때 이 작품에 연관되어서 뿌듯한 게 아니라 화가 나 있었습니다. 메카닉 디자인을 마치고 나서는 "아 그냥 저렇게 만들려고 하는가 본데..." 하고 다른 회사로 파견되었던 것이고요. 이것은 한국 작품을 만드는 데 일본인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창작자로서의 자존심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20~30대의 아직 어린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다 보니 이것이 대체 어디가 잘못돼서 우리가 기분이 나쁜 것인지 정리할 식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에 사업적인 문제 외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그리고 "킴의 아빠가 옛날에 사라졌는데, 그 사람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 놨다"는 설정은 제가 생각하기에 시나리오를 굉장히 안일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점은 굉장히 화가 납니다. 이건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것이고, 완성도가 낮은 겁니다.

▲ 미셸
수호요정 미셸같은 경우 최초의 콘셉트가 좋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린왕자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 게 아니라 이걸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를 만들었으니깐요. 그리고 수호요정 미셸은 보통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처럼 마법을 쓰면서 악당을 쳐부수는 게 아니라, 마치 어린왕자처럼 세상일에 무관심한 주인공을 내세우고 그런 주인공이 어떻게든 엮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26편이나 만들어 냈다는 것을 보면 이야기의 기본적인 구조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본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이 도중하차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미래소년 코난 버전의 어린왕자, 아니면 리얼메카닉 버전의 어린왕자든 뭔가 완성이 되었을 텐데 거기에서 한번 꼬여 버렸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DR 무비가 2D+3D를 이질감 없이 적용하고, 한국의 다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여섯 번씩 수정해서 최종 영상을 내놓지만 수호요정 미셸은 단 한두 번만 수정했을 정도로 원래 애니메이션을 잘 만드는 사람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수호요정 미셸이 첫 작품이다 보니까 노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업적으로도 마찬가지고요. 그나마 몇몇 다른 작품처럼 장난감 광고 수준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은 것만 해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면 수호요정 미셸은 잘 만든 싸구려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고 저희는 그 시기를 부끄럽게 생각했겠죠. 하지만 지금 1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예전에 작업했던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중간에 일본 사람들이 제작에서 빠지게 되면서, "오히려 참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작품이 마무리돼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 화이트 박사
Q11: 작품 내용 속에서 킴의 아버지(화이트 박사)는 킴이 어렸을 적 있었던 사고 이후 찾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화이트 박사는 그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고가 있었을 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문이 우연히 열렸다던가 하는 식의 또다른 복선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정상 화이트 박사는 실종된 것입니까 아니면 사망한 것입니까?
이동욱: 화이트 박사가 실종된 것인지 사망한 것인지에 관한 것은, 애초에 내부 스태프끼리도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수로 빠트린 것이 아닙니다. 킴의 아빠가 어떻게 되어버렸다고 결정을 내리면 그걸로 어떤 세계가 고정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킴의 아빠가 죽었는지 아닌지가 작품의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하자는 결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Q12: 위 질문 내용이 어찌되었건 간에, 킴은 아버지를 잃었으며 그 사고의 원인은 명백히 블랙해머단의 두목 살로메입니다. 비록 고의가 아니었다고 할지언정 킴에게는 살로메가 원수인 셈입니다. 그것 말고도 아버지가 개발한 기계들을 훔쳐갔으므로 킴의 입장에서는 살로메가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여럿 빼앗아 간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본편에서 킴이 살로메를 대하는 태도는 그저 정의의 사도가 범죄자를 바라보는 시선 이상이 아닙니다. (다른 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포켓몬스터에서 주인공 지우가 로켓단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살로메에 대한 킴의 태도는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순화된 것입니까?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설정이나 뒷이야기가 있습니까?
이동욱: 앞서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인데, 사실 킴의 아버지가 어찌되었건 간에 살로메는 킴의 원수이잖습니까? 그렇게 보면 킴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맞습니다. 이 부분은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나리오 상의 세계관을 연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흡했던 부분입니다. 한편 이 작품이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봤을 때 킴이 왜 살로메를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지를 알 수 있게끔 하는 정도로만 표현된 측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린이를 위해 순화된 것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련되지 못하게 연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딱히 알려지지 않은 설정이나 뒷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 미라지 건, 영어판에서는 미라지 블래스터(Mirage Blaster)라고 합니다.
킴의 주무기 미라지 건에 관해서(Q13)
이동욱: 미라지 건은 제 기억으로는... 시나리오 회의 단계에서 생성된 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킴이 미라지 건을 가지고 블랙해머단과 싸울 것이라는 설정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나리오에 관해서(Q14)
SV-001/R: 개인적으로 비암을 보면서 요정들하고 불화는 있었어도 미셸과는 좋은 관계였다든지 그런 내용을 깊게 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왜 비암이 미셸을 죽게 만들고도 나중에는 슬퍼했는지에 관해서 설명이 좀 더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고요.
이동욱: 시나리오는 DR 무비의 기획실에서 따로 담당했습니다. 기획이사의 기획실에서 시나리오와 상업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나머지 작업은 제작 쪽에서 담당하면서 시나리오 내용의 전후관계나 연출적인 부분들을 고민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놉시스(초기 시나리오)는 2차 제작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작품이 약간 완성되어 있었으므로 이걸 다시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완성한 시놉시스를 가지고 일본에서 시나리오를 만들다가 중간에 멈추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다시 하자고 해서 DR 무비의 스태프들이 다시 써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 아까 전 말씀하셨던 내용을 잘 반영하면 제일 좋았겠지만 결국 그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모여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미셸이 죽는 결말은 KBS나 아이코닉스 쪽의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인공이 죽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에는 그 당시 한국 작품 가운데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게 굉장히 위험한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시나리오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들이 동의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그 사람들도 마니아 같은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스미골룸: 저는 서정적인 부분보다 요정이 변신하고 나서 싸우는 부분부터 재미있게 봤습니다. 앞의 부분은 대충 넘겨버렸고요.
이동욱: 관점에 따라서 허술해 보이기도 하고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니까...
스미골룸: 블랙해머단이 "오늘은 어떤 요정을 써볼까?" 하고 (모두 웃음) 기계에 넣은 다음 거대화되는 때부터 재미있게 봤습니다. 오늘은 무슨 요정이 나오나 하면서요. 오프닝 장면 이후에는 졸다가 그런 장면이 나오면 다시 보고... 앞부분의 사연은 주인공이 알아서 할 노릇이니깐요.
SV-001/R: 싸우는 부분만 재미있게 봤나보네요?ㅋㅋ
스미골룸: 저는 로봇 애니메이션도 변신해서 싸우는 부분만 봤어요.
SV-001/R: 어쨌든 수호요정 미셸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어느 시점 이후에는 이야기의 패턴이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말고도 이런 의견을 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요정을 되찾는 내용 말고 일상 같은 부분도 넣었으면 이야기가 풍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고요. 예를 들면 시텔 위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같이 나눈다든지, 안개가 잔뜩 낀 곳이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킴이 허니비에 부딪힌다든지 하는 개그장면 같은 것 말입니다.
이동욱: 애니메이션 제작사나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이 액션이나 싸우고 부수고 터지는 걸 좋아할 거라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요정이 새로 바뀌고 악당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액션물 애니메이션이라면 사람들이 액션을 보기 위해서 이 작품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에서는 액션이 아니라 둘이서 어릴 적 이야기나 하고 있다면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내용을 좋아하겠지만 액션물을 원해서 그 작품을 보는 사람은 당연히 싫어할 것입니다.
수호요정 미셸의 작품 정체성은 특히 기획단계에서 고민할 부분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 사이에 의견도 좀 달랐고 분명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수호요정 미셸이 성장을 테마로 한 애니메이션이라면 지금 말한 대로 주인공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나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요정을 되찾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든지 해서 재미 요소가 될 수 있었겠지요. 사실 수호요정 미셸은 성장 애니메이션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정도까지 했으면 세계 명작이 되었겠죠. 그렇다고 그걸 실패해서 망했다고 표현하기는 어렵고, 그냥 거기까지는 미흡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제 생각에 DR 무비, KBS, 아이코닉스의 입장으로는 "어린왕자에 기반한 액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왜냐면 15년 전의 상황에서는 액션물 이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애니메이션에 철학이나 성장을 담는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만약 정말 성장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했다면 '데미안'이나 다른 작품을 기반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90% 안 팔렸을 것이고요. 결론은 어린왕자에 기반한 액션 애니메이션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제작 방향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다채로운 이야기를 모두 집어넣는 것은 모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액션과 관계없는 내용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냥 제일 안전하게 매 이야기마다 액션을 집어넣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호요정 미셸은 "어린왕자를 기반으로 한 건강한 액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인 내용이나 쉬어가는 이야기를 담는 건 당시에는 모험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 킴
Q15: 킴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은데 작품 속에서조차 캐릭터의 개인적인 사항에 대해 잘 나오지 않는 바람에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도 잘 모를 지경입니다. 우선 나이가 궁금합니다. 체형을 봐서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공식홈페이지에 소녀비행사 라고 나와 있어서 10대 후반으로 추정만 할 뿐입니다.
SV-001/R: 이건 제가 여기 오기 직전에 답을 찾았습니다. 애니메이툰 42호(2003년 3월 발간)에 보면 16살이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못 믿겠습니다. 킴은 아무리 봐도 적어도 18~19살 정도로 보여요.

Q16: 킴의 조종습관이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비행중에는 허니비의 캐노피(조종석 덮개)를 열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킴의 습관입니까? 미셸이 조종석 안팎으로 드나들거나 킴이 미라지건을 쏴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굳이 열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보였습니다. 그리고 비행중에 미라지건을 쏠 때 굳이 좌석벨트를 풀고 일어서서 쏘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이동욱: 제트기니까 엄청 빠르면 캐노피를 열기 어려울 수도 있고, 호버링을 한다고 해도 위험하기도 한데...
SV-001/R: 무엇보다도 소리가 엄청나게 커요. 귀마개가 없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에요.
이동욱: 옛날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관해서 할 말이 없으면 "이건 만화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있었는데... 사실 근본적으로는 '미래소년 코난'이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같은 데에 나오는 비행기에 대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하늘 위에서 머플러를 휘날리고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한가롭고 서정적인 모습도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캐노피를 닫는 건 비 올 때나 고속으로 돌파해야 할 때 뿐이지, 보통은 오픈카처럼 캐노피를 열어두고 다니는 것으로 설정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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