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고봉이란...
장고봉은 해발 155m의 낮은 산으로 훈춘시 징신진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북한,중국,러시아의 접경지이기도 합니다.
이 평범한 산이 분쟁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한국,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이고, 철도가 명확하게 조망되고 나진까지 관찰될 수 잇는 전술적인 요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분쟁의 씨앗이 되는 국경선이 불명확했는데, 일본은 1886년의 훈춘조약에 따라 장고봉은 청나라영토 즉 만주국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소련측은 조약의 국경선이 하산호수의 서쪽 장고봉을 지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 일대에 일본군이 관동군 6개사단을 배치한데 반해 극동 소련군은 20개가 넘는 사단을 증파하면서 소련의 공세적인 전략이 엿보이기 시작합니다.
- 사건의 원인 및 동기
소련군 침범의 원인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대일위기를 부추겨 반스탈린 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중국을 간접적으로 도와 일본의 팽창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이 많습니다.
한편 일본 측에서는 장고봉이 전술적 요지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봤을대 넓은 만주의 작은 지점에 불과했고 소련이 이 지점을 점령한다 해도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중일전쟁이 한창인 시점에서 큰 이해가 걸리지 않은 지점을 놓고 소련과 분쟁에 휘말리기를 피하려 했기 때문에 일본측이 수세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 사건 경위
1938년 6월 13일 (쇼와 13년) 소련인민위원부 극동부장관(GPU 장관) 류시코프 정치대장이, 만주국 훈춘현에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동기였다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동년 7월 9일 10여명의 소련군이 장고봉정상에 나타나 그 병력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장고봉부근 지역은 만주국에 속해 있었지만, 실제로 이 방면의 방위를 담당하는 것은 조선주둔군이었는데, 조선군은 '국경 불명확 지구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방침에 따라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7월 13일 이 지역을 담당하는 제 19사단으로부터 소련병 40여명이 장고봉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조선주둔군은 19사단의 일부 병력의 파견을 준비하고, 타다 참모본부 차장, 도조 육군 차관, 이소야 관동군 참모장에게 소련측의 행동을 보고합니다.
7월 16일 일본정부는 소련에 병력의 철수를 요구하고 참모본부는 대륙령 제154호를 통해 장고봉부근에 소련군의 불법 월경에 대해 병력파견은 조선주둔군 사령관의 판단에 맡긴다는 훈령을 내립니다. (단, 교전은 재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따라 조선군 사령관은 19사단장에 긴급 파병의 준비를 명령하고 21일 밤 야습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에 무력행사에 대한 재가를 구하는 과정에서 내각 안에 무력행사 반대론이 생겼고, 쇼와천황이 "대소전이 일어나면 어쩔것인가...." 라고 하문을 하면서...
조선군은 자발적으로 병력파견을 취소, 복귀명령을 내리고 경흥지역에 보병 1개대대 포병, 공병 1개 중대를 배치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선에서 장고봉충돌은 피할 수 있을듯 보였습니다만....
- 사건의 확대
7월 29일 소련군 10여명이 장고봉 북방 2km지점을 또 다시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자 호전적인 것으로 알려진 19사단장 오다카 중장은 단독 공격을 결심하고 2개 소대를 동원하여 소련군 진지를 공격하게 됩니다.
7월 30일 이 소식을 접한 대본영은 불확대방침을 지키도록 명령을 내리지만, 오다카중장은 이에 불복하고 2개 대대병력을 동원해 장고봉 북방지점을 점령한 소련군에 야습을 감행, 일대의 능선을 모두 점령합니다.
특히 75연대 소속 대대의 야습은 일본육군의 기습전에서 손꼽히는 전투로 소련군이 큰 피해를 보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제 40 저격사단을 주축으로 반격을 가했지만 일본군에게 모두 패퇴하자, 소련 국방인민위원 보로시로프는 슈테른 대장을 군단장으로 임명하고 3개 저격사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 일본군의 격멸과 국경선 회복을 명하게 됩니다.
8월 6일 소련군은 군단 주력병력을 총 동원, 연해주 항공대가 맹폭격을 함과 동시에 전차와 대포로 반격을 가하여 5일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군단병력을 상대로 항공기와 전차, 장거리포의 지원이 전혀 없는 19사단이 혼자 상대하긴 벅찬 일이었습니다.
비교적 화력이 강했던 15cm 가농포, 90식 야포등도 종전 하루전에 겨우 지원되는 열악한 형편의 19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장고봉과 능선에서 버티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 정전 협의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압도적인 병력의 소련군에 불리해지고 있었고, 소련측도 많은 병력을 동원하도고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정전 협의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장고봉 북부능선에서 1km 를 후퇴하고, 소련군은 현재 지점에 머무르는 것으로 8월 11일 정오 정전협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 양군의 병력 및 손실
일본군 소련군
동원 병력 8862명 32000명
전투투입 병력 6814명 15000명
대포 37문 237문
전차 - 285량
항공 지원 - 250기
전사자 526명 792명
전상자 914명 3279명
전차손실 - 96량
대포손실 - 16문
항공기손실 - 3기
- 장고봉 사건의 여파
당시 대본영은 한구작전을 준비중이었기 때문에, 대소방면으로 병력이 빠지지 않도록 전차나 항공기의 동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정전 직후에는 2주동안 사수한 전선에서 퇴각하고, 두만강인근에는 병력을 배치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따라 장고봉은 소련군측의 세력권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는 일본측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충돌을 피해간 탓이었습니다.
또한 국지전으로 끝났다 해도 전투로 발전한 계기가 된 19사단장 오다카 중장의 단독 공격은 불문에 붙여졌고 참모장교들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참모본부의 일방적이고 소극적인 처리에 불만을 품은 관동군은 일선부대에 강경한 '만소 국경분쟁 처리요강'을 명시하게 되고, 이것이 10개월 뒤 1939년 5월 11일 서방국경에서 노몬한 전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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