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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어와 훑어보다보니 재미있는 글이 있더군요. 일본의 대소개전에 관한....(풉) 그리고 왠지 짐작(?)은 했습니다만 역시 난늘궁금해님이 활발하게 리플로 여러 의견을 올리시더군요. 대략 내용을 보아허니 일본이 본격적인 대소 공세까진 아니라도 연해주나 외몽골까지 차지하면(...) 독일군의 모스크바 함락에 결정적인(또는 큰) 도움이 되었을거라............뭐 대강 이런 논조인것 같습니다만 글쎄요..............언제나 그렇지만 제가 알고있는것과는 전혀 판이한 판단이시더군요 뭐 말이 나온 김에 관련글 하나 올려봅니다.
자. 우리같은 일반인들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상상...........당연히 당시 일본군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인이 아니라 당시 구 일본육군의 중심 참모본부가 검토했었습니다.
그럼 일단 당시 대본영 육군부 작전과, 쇼와 16년(1941년) 9월 18일의 대 영미개전 작전준비 발령시 과내 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인물들의 이름이나 이력을 보면 구 제국 육군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상의 엘리트 라인업이었겠지요. ㅎㅎ
작전부장 - 소장 다나카 신이치 ( 육사 25기 - 육대35기 )
작전과장 - 대좌 핫토리 다쿠시로 ( 육사34기 - 육대42기(3등졸) )
작전과장 보좌 - 대위 세지마 류조 ( 육사44기(2등졸) ) - 육대51기(수석) )
작전반 참모 - 소좌 타카야마 노부타케 ( 육사 39기(6등졸) - 육대47기(수석) )
전력반장 - 중좌 츠지 마사노부( 육사 36기(수석) - 육대43기(3등졸) )
이 외에 각 방면별로 대 남방작전 참모 5명, 대 북방작전 참모 2명, 대 지나방면 2명의 참모가 배치되었었는데 이때부터 대 영미전을 전제로 남방작전에 중점이 맟춰져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이때 작전반의 대 북부방면 참모에는 타카야마 노부타케(39기 - 소좌)라는 양반이 있었습니다. 이 타카야마는 전후에도 자위대 북부방면 총감을 역임하고 육상막료장, 제 2 대 통합막료회의 사무국장(한국으로 치면 합참의장격이죠)을 역임했는데 북진론으로 가장 열심히 대소(...)공세를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일본육군은 북진하지 않고 남진했지만 이양반은 전후 발간된 자신의 저서「육군 참모본부」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북진론을 꿋꿋히 전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책에서 타카야마는 다나카 신이치를 꽤나 괴로워하면서 변호하는 입장에 서있다고 하네요, 뭐 같은 조직에 속하고 있던 이상 서로 감싸는 경향은 당연하달까요 ㅡ,.ㅡ;
뭐 사담이 길었습니다만 타카야마 북진론의 요점은
1. 대소 공세는 삼국동맹의 일원으로 대 독일 협력이 된다. 결과론이지만 히틀러는 일본이 공세로 나온다면 키예프 공략보다는 모스크바에 직진할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일본군도 소련의 야전군을 포착할 수 있다.
2. 일소 중립 조약은 유명 무실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특히 독소 중립 조약을 독일이 이미 파기한 이상 일소간 조약도 준수는 적합하지 않다.
3. 대소 공세를 개시해도 미국의 참전은 어렵다.
...................뭐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만 궁금해님과 생각이 매우 비슷했다고 생각됩니다.(뽀핫)
또, 타카야마는 대놓고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핫토리 과장은 남진론자였다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츠치도 남진론으로, 참모본부 작전부 내부조차 통일된 의견은 도저히 맟출수가 없었던게 당시 일본 육군의 속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쪽도 확실한 정견은 없었던게 분명합니다. 단지 그들에게 공통된점은 독일의 승리에 들떠있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 증거로 작전과 내부의 수많은 논의 내용들에도 무장 중립의 선택사항은 결코 없었습니다. 어느쪽이나 개전한다는 의식밖에 없었던 것이었지요!!!!!!!! ㅡ,.ㅡ 역시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육군의 엘리트들이 모인 참모본부가 어설픈 정치나 여론에 영합해 개전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그 존재 의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잠깐, 다시 타카야마의 논점으로 돌아와서 그걸 비판해볼작시면........사실 이건 당시 작전과장 보좌던 세지마 류조 대위의 비판내용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뭐 이후 세지마의 이력으로 보아 세지마는 남진론쪽에 가깝습니다만
1. 7 월 중순의 시점에서 과연 일본육군이 빠른 동원을 완료하고 현실적으로 대소 공세가 가능한가?
- 타카야마는 북진론을 주장했지만 정작 실제 공세를 어떻게 진행할까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도 관특련(주1)- 관동군 특별대연습)을 실시했지만 미흡했지요.)
*주 1 ) 관특련 - 1941년 7월 7일(100호 동원)부터 시작되어 재만주 병력을 현제 25만명에서 최대 85만명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행해진 대연습. 이 동원은 7월 16일의 102호 동원으로 중지된 이후는 결국 남방으로의 동원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관동군 특별대연습은 그 대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매우 기괴한 해프닝(...)만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2. 그리고, 만약 대소 공세를 발동해 시베리아 작전이 된다면 당시까지 참모본부가 연구하던 대소 작전계획에 따라 소련의 시베리아 철도를 어디서 절단할까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 철도 절단점 이후의 보급로 확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전전 연구한 대소 작전계획의 핵심인 철도절단은 소련군의 신속증원을 최대한 막고 결전장을 일본측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취사선택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일본의 대소 공세는 예전의 시베리아 출병때(사실상 경찰활동)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소련 야전군의 주력을 포착/격멸한다는것이 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에 연해주(우즈리)는 점령해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왜 연해주 점령이 의미가 없냐는 일단 후술하겠지만 간단히만 언급하면 병력의 수급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ㅡ.ㅡ;
또한 당시 소련 야전군의 주력은 우랄 이서에 있었기에 이들에게 공세를 거는 일본군의 입장에선 시베리아 철도의 절단점까지의 보급로 확보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시베리아는 주유소(....)는 커녕 길도 없죠.....절단점 이후는 새로 철도를 부설해야 하지만 일본군에게는 그 준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세지마는 이걸 지적하고 있었던겁니다.
3. 최선의 지점은 만저우리(滿洲里-만주리)로부터 치타(Chita-동지철도와 시베리아 철도의 합류지)사이겠지만 만약 노몬한 일대에서 소련군의 선제 기습이 이루어지면 어떻할 것인가? 차선으로 브라고웨시첸스크 부근도 유력하지만 이곳은 일본이 통제하는 만철(만주철도)로부터 가장 멀다. 정말로 시베리아 작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대흥안령을 넘어 TSR(시베리아 횡단철도)을 지연시키는게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또한 이른 겨울의 도래로 전선은 정체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과연 그때 일본군이 만저우리 이서에서 공세로 전환할수 있는 것인가?
4. 극동 소련군은 관동군 특별대연습 이후도 관동군보다 우세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주2) 그리고 그 보급선은 시베리아 철도로 여전히 보관/유지되고 있다. 러시아의 철도를 기반으로 한 끈질긴 저항은 나치스 독일의 진격조차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시베리아 철도를 절단했다고 해서 소련군의 증원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장담할수 없다. 만약 재만주 소련군이 측면공격, 아마도 만저우리 - 하이라얼선으로부터 역공세를 발동하면 그 대책은 있는 것인가?
주2) 만약 관특련이 성공적으로 끝나 증강되면 재만주 일본육군은 85만명,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극동 소련군은 37개사단 100만명이었습니다. 당연 적극적인 공세는 어렵죠......세지마는 역시 이걸 지적한 것
5. 타카야마 소좌는 정면장비(주3), 예를 들자면 기갑사단을 주체로 한 공격을 진언했지만 동계의 시베리아에서 과연 우리 일본의 탱크가 유용할 것일까? 탱크는 초원 또는 도로상에서는 강하지만 핀란드 겨울전쟁에서는 치명적인 단점도 드러냈다. 그렇다면 동토의 대지로 공세하러 나가는 일본군에게 있어 탱크는 과연 필요한 병기일까? 현 수준의 탱크는 정글이나 삼림지역에선 기능이 제한된다, 그렇다면 더욱 가혹한 영구 동토에서는 어떨것인가? 이것을 보충하려면 항공용병, 스키병과 연계된 교묘한 진지축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던 참모본부의 능력으로 과연 이것을 운용할 수 있었을 것인가? 모스크바 전면에서 독일 기갑 사단을 멈춰세운것은 소련의 스키병에 의한 침투작전이지 않았나. 최악의 케이스로 일본의 지상 병력을 시베리아에서 손실.....그것도 전투가 아니고 동상으로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대륙 전선(중국전선)도 위험하게 된다.
주3) 구 일본육해군에서 주력장비를 일컽는 말 육군의 경우엔 탱크 등 기계화 장비. 해군에선 전함이나 항모 등.
6. 히틀러의 발바롯사 작전의 무정견은 그것만으로도 연구 소재다. 그토록 서부 전선이나 폴란드 전역에서는 기습성 확보를 위해 작전을 짰지만 대소 개전시는 모스크바나 키예프 등등을 거론하며 공세개시 후에야 다시 작전계획을 가다듬은 것은 독일 참모본부의 오점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색적(정찰)은 무시하고 공세 최대선만을 결정한 뒤 대소 작전을 개시한것으로 판단된다. 타카야마 소좌는 왜 이 히틀러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하는가.(단지 북진하면 좋다? ) 물론 2 대국(대영미/대소 개전) 작전은 불리하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일본이 독일과 통일 전선을 만들었다고 해서 승리의 보증이 있는것도 아니다.
7. 타카야마 소좌는 최단거리로 모스크바에 직진하면 소련의 야전군을 포착/섬멸할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제 1차 대전의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 기동전을 전개했지만 저 팔켄하인조차 괴를릿츠 돌파전에서 포위 섬멸은 불가능이라는 방침으로 임했다. 철도가 동서로 뻗어있는 소련의 지형에서는 도망치는 적군을 포착할 수 없다. 히틀러도 우랄 이서 밖에 침공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독일군은 제 1차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훈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
뭐 당시에 참모본부 내부에서 이정도 판단을 하고 있었던건 확실히 놀랍습니다. 물론 틀린 부분(2대국 작전은 불리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도 있지만 나름데로 각 참모들의 적정판단은 양호했다고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타카야마였습니다..... ㅡ,.ㅡ; 이런 장교가 대 소련전의 작전 참모였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그리고..........또하나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은 이런 북진론의 논의 전 당시 일본육군의 주류는 지나전선 단독 해결론 또는 영미 분리에 의한 영국 공격론이 육군의 주류였거든요. 즉 타카야마의 저 제안도 소수의견에 불구했기에 난늘궁금해님의 가정은 완전히 잘못된 혼자만의 if 설정이란겁니다. -ㅅ-;
또한 쇼와 15년(1940년)부터는 일본의 예산 편성도 재중국 병력 75만명의 삭감 계획이 논해져 병력증가는 재정적으로 사실상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리고 구 일본육군은 근위사단을 제외한 1~10번대의 현역사단을 중심으로 평시 20개사단 체제였는데( 하지만 그것조차 우가키 군축으로 3개 축소 - > 평시 17개 사단) 태평양전쟁 개전 시점까지 순차적으로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설 사단을 제외하면 일본군은 41년 말을 기준으로 고작 27개 사단밖에 편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편제의 변경(주로 화력 증강)으로 1개사단의 구성은 보병 3개 연대를 기준으로 정원은 이전보다 3000명이나 감소하고 있었지요. (이전까지는 4개 연대 체제)
하지만 소련의 인구는 일본의 3배.....게다가 벌써 부분 동원을 실시한 단계에서만도 일본육군 총 가용병력의 5배인 900만명 300개 사단을 동원하고 있었습니다.orz 이렇다면 독소전의 영향으로 소련군 다수가 우랄 이서로 빠져나간다고 감안해도 일본이 최소 50개 사단, 150만명정도를 동원하지 않으면 대소 작전의 승산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때까지도 일본 육군 전체가 27개사단 - 물론 참모본부도 독소전 개전 이후는 소련이 극동을 위해 남겨둔 사단은 최대 30개 사단정도라고 판단, 많다면 그중 15개 사단은 서송된다고 전망했는데 이것 또한 판단능력 결여와 시베리아 철도 경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 사실 소련군은 독소전 개전 이후도 극동군을 30개 사단에서 더 감소시키지 않고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소련도 이 병력으로는 관동군에 대헤 쉽게 공세하러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태평양전쟁 전 기간동안 만주에서 양군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던겁니다. 그리고.....스탈린도 독소전이 치열해지자 본격적인 총동원을 하령, 각 군관부별 관할구역에서 예비 사단이 대량으로 편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소련과 일본은 그 스케일 자체가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동원된 병력에 적절한 장비와 훈련, 편제를 갖추는것도 중요합니다. 흔히 간과되는 면이 있습니다만 스탈린이 지배하는 나라의 공업력-_-은, 제정시와는 완전히 달랐기에 독소전 개시후 1년간은 사실상 거의 원조도 없는 가운데 자력으로 550개 사단을 편성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덜덜덜)
- 실제로도 소련은 독소전이 한창이던 때, 즉 끝없이 밀리던 시절에도 옴스크 이동으로 37개 사단을 배치해 극동에 30개 사단은 상시 즉응할 수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게다가 제 2차 대전의 전 기간동안에도 이정도의 병력은 항상 시베리아에 있었는데 물론 이것은 총동원 실시 결과 예비 사단의 집결지가 이쪽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자..........그렇다면 이런 시점에서(당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보던 시점에서) 대륙이나 시베리아로의 대군 파견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누가 봐도 분명해집니다. -_-;
어쨌든 궁금해님의 주장은 일본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에 대한 연구 노력은 빠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일본도 동원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요? 그런데......그것도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만은요.
자. 여기서 구 일본 육군의 병역제에 대해 첨언하자면 앞서 잠깐 언급한데로 평시 20개(사실은 17개사단)현역사단 체제였습니다. 그런데......이조차 상당수의 예비역이 뒤섞여 있었습니다.(즉 지금 한국군의 육군사단중 100% 현역병으로 완편되는 부대가 존재하지 않는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실제 현 한국군 동원사단의 편제와도 아주 흡사하죠) 왜냐면 이것은 당시 일본의 징병제도가 육군의 실정에 사실상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태평양전쟁의 패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최초의 원인은 불명이고, 뒤의 원인은 분명 예산이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은 징병율이 현저하게 낮은 나라였다는 점입니다. 사실 일본은 평시에 매년 징병대상자에 대해서도 최고 18%정도밖에 징병되지 않았던 나라였거든요. 이것으로는 국민 개병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기이한 체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러일전쟁시에 이미 나타나 일본은 후비역(구 일본육군의 병역은 현역병 전역 뒤 예비역으로 그다음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후비역으로 편성되었는데 후비역의 나이는 보통 30~40대, 민방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됩니다) 까지 동원한 뒤에는 만주군에 보낼 병력이 말기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히비야공원에서 전쟁을 확대하라고 날뛰는 젊은이들은 존재했던것이죠.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에도 조기입영등의 탄력 조치는 없었고 또 지원 제도도 특별한 병과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 본토에 있는 상설 사단은 동원시부터 완편에 부족한 병력은 예비역을 편입시켜서야 간신히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이문제는 여전히 계속되다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부터 위기감을 느낀 참모본부가 보충 병역(단기 1년의 병역)을 소집하거나 또 후비역을 소집하는 편법으로 계속 나가게 됩니다.
- 여기서 보충 병역이라는 것은 단기 장교 양성 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학력으로 당시의 중학 이상으로 한정되고 있던 징집대상을 확대해 추가 징집대상자에 대해선 현역병 복무를 면제하고 단기 훈련으로 예비역적인 성격을 갖게 한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일본군에서 특설 사단은 상설(현역)사단의 동원이 종료한 뒤, 그 지구에 남아있는 예비역과 후비역에게 소집을 걸어 편성된 것으로 평균 연령은 30세가 넘었습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예비군이 끝난 민방위 자원으로 편성된 부대) 물론 이 특설 사단은 101, 104, 13, 18 사단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일전쟁시도 난징까지는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101 사단은 참모본부의 염려를 뒤집듯 가장 처음으로 오송 크리크 돌파, 대장진 공략 등 대전과를 올렸죠.
이런 일본육군의 병역제도는 뭐, 어떤 의미로는 18%의 정예 자원만으로 전문적인 군대를 만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해군의 경우는 훈련 기간이 길고 병과의 특성상 전문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제도가 유효할것이라 생각되지만 이미 나름데로 식민지를 보유한 당시 일본육군의 경우는 동원 병력의 부족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극동 소련군은 최소 상시 30개 사단 체제였으므로 1938년 이전 일본육군의 현역병력 17개 사단은 사실 너무 적었다는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가키 군축에 의한 3개 사단 축소도 이유라면 이유지만 식민지의 주둔 부대를 상시 전시 편제로 한다는 부담도 당시의 일본으로선 컸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육군은 외지 주둔 부대를 철저히 국내 사단을 가지고 교대시켰기 때문에 평시에도 전시 편제에 접근하는 반면 평시는 그 필요가 없다는 문제가 생겨 평시에는 쓸모없는 예산을 부담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데 장교가 적은 반면 하사관이나 사병이 대부분의 예산을 먹는 결과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죠.
게다가 군축에 의해 진급에서 누락된 고령의 장교들은 처우보장을 위해 대량으로 학교 교원 등으로도 파견했기 때문에 예비역 장교진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는 반면 젊은 장교의 양성은 위축되게 되었습니다. 즉, 군 전체적으로 노령화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얘긴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일본의 전체 인구는 급증해 국민들의 평균 나이는 점점 내려가고 있었으므로 비교적 노령 육군이라는 이상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중일전쟁시 상해 공방전에 참가한 제 101 사단에는 예비역 소집된 58세의 중대장(대위)이 있었다고 하죠-_-;)
정리하자면 구 일본의 육군은 상설 17개 사단과 특설 13개 사단(중일전쟁에서는 특설 6개까지로 종료) , 계 30개 사단이 편성된 단계에서 보충 사단 또는 보충 연대는 후비병으로만 편성하고 더이상의 동원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제국 육군은 후비병까지 소모되면 사실상 마지막이라는 얘기죠.... 요컨데 일본 병역제도(동원제)의 문제는 소집이 신규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재소집에 한정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 또 신규도 징병률이 현저히 낮은 -
..........궁금해님이 주장하는 공세 자체를 할만한 병력이 없었던게 당시 일본군의 실상입니다. 우선은 제도가 처음부터 완전히 꼬인 상태였고 그렇게 동원된 병력을 믿지 않은게 두번째,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동원해 종전시는 외견상 수백만의 대군이었지만 이게 어떻게 싸웠는지를 생각해 보시면 답은 명확합니다. 때문에 육군 참모본부의 주류는 이런걸 애시당초 제외하고 비교적 약하다고 판단한 대 영미개전으로 작전의 틀을 잡았고 소수파들은 하고싶어도 할 수 없었기에 못한겁니다. ㅡ.ㅡ;
물론 그렇다고해서 일본육군이 전적으로 무능만 했다는것도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태평양 전쟁의 서전 최대의 육전 말레이에서도 일본군은 고작 3개 사단 반밖에 참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겼고 그야말로 종횡무진 남방 작전을 성공시켰지요(상대가 식민지군이던 뭐던 그 전장의 넓이와 피아 병력비를 보면 이건 확실히 잘한겁니다), 하지만............당시에도 소련군은 이미 30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죠. -ㅅ-;
즉 일본은 문제점이 많은 병역제도에 의해 상비 육군병력은 1938년 이전까지 35만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극동소련군만 해도 최소 30개사단...그리고 중국군(국민당군)조차 300만을 넘는 병력을(염석산이나 모택동 등의 군벌이 거느린 각종 사병집단을 합치면 350만 이상)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뭐, 현재의 자위대와 인민해방군의 비율과도 큰 차이가 없는 수치였죠.
결국 이런 병역제도 아래 구성된 그 제국 육군는 하나하나의 전투엔 이길 수 있어도 전 국토를 장악하려면, 전쟁에 승리하려면 어떻게 싸워야하며 얼마정도의 병력이 필요한가라는 점은 완전히 간과했다는 점입니다. 요컨데 전투에 이기면 이후의 강화 조건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고, 외교적으로도 지렛대가 될 수 있는 전력과 이후의 잠재력을 보관 유지해야되는데 이런 문제점에 대해선 아마도 참모본부의 고위 장교들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뭐, 몰랐던것은 도죠뿐이겠지요-_-; 그리고, 이 남자가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p.s 전에도 한번 한 얘긴거 같은데............ If...놀이도 생각이나 가능성만으로 전개하면 뇌내망상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구 일본군에 관해선 이미 책이라던가 웹에도 여러곳에서 공개된 충분한 자료가 있습니다. 뭐 그게 없다면, 유추하면서 놀 수도 있겠는데 충분한 자료가 있으니까 단지 "상상" 만으로 결과를 만들지 말고 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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