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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정책에 재정 계획 운영자에서 모겐소 계획까지 - 모겐소Jr

카이텔(59.187) 2007.05.06 16: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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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모겐소Jr (1891년. 3월. 11일 - 1967년. 2월. 6일)

 

1891년 3월 11일, 모겐소Jr는 뉴욕시에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모겐소Sr는 악명과 찬사를 동시에 가진 인물로 당대에 손에 꼽을 만한 부유한 부동산 거물이었다.


이런 좋은 집안 환경은 그가 드와이크 스쿨,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같은 명문 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대학은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코넬 대학교에 입학한다. 나중에 1938년에는 템플대학교 법학 대학원(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으로 졸업한다.


농업학과를 다니던 모겐소는 태평양 해안 쪽을 다니며 직접 농사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고, 결국 학업보다 직접 농사를 하는 것에 빠져 1913년에 대학을 중퇴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에 따라 뉴욕주 더처스군에 1천 에이커 규모의 땅을 사서 농장을 만들어 주었다
모겐소는 바로 과수 재배와 낙농업에 종사했는데, 특히 사과 농장을 가꾸어 10년간 뉴욕주에서 가장 성공한 농장주로 거듭난다.
 

농장을 경영한지 2년이 지난 1915년이 되었을 때 더처스군에 하이드파크에서 사는 루스벨트 부부를 만났고, 이들과의 친분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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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겐소와 루스벨트


1917년, 세계 제 1차 대전에 시기에서 모겐소는 처음으로 정부에 일을 했는데, 그것은 더처스군에 농장주들을 설득하여 식품청장 허버트 후버에게 농산품과 트랙터 1천5백대를 물자로 쓰도록 프랑스에 원조하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농업에 대한 잡지 팜 저널에 편집장을 겸직하여 더처스군의 농촌 사회를 위해 토양 개선법, 전력 보급, 농촌 교육의 필요성을 전파한다.


더불어서 루스벨트와 민주당을 위해 일하며, 루스벨트가 뉴욕 주지사 후보로 출마했을 때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에 참가했다.


1929년에 루스벨트가 뉴욕 주지사로 취임하자 모겐소는 뉴욕주 농업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1930년에는 뉴욕주 자연 보호 감독관에 임명된다.

특히 자연 보호 감독관으로 1932년까지 있으면서 1백만 에이커의 숲을 조림하여 많은 실업자들을 구제했으며 이 사업은 얼마 후 닥쳐올 대공황 시기에 실업 구제 방안에 모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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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와 모겐소


1933년,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모겐소는 재무부 차관과 연방 농업 신용청장으로 임명된다. 그중에서 1934년 중엽까지 맡았던 농업 신용청장직은 대공황으로 고생하던 농민들을 위해 농업 대출로 대대적인 구제를 하였다.


1934년 1월 1일에 루스벨트 정권에 신임 재무부 장관인 윌리엄 우딘이 건강 문제로 사임하자 차관이던 모겐소가 장관으로 승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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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와 모겐소


모겐소는 고전 경제학주의자인지라 루스벨트가 지지한 케인스의 경제학을 반대했고, 추진되던 뉴딜정책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자신에 직무에 최선을 다했다.


재무부를 맡으면서 모겐소는 뉴딜 정책에 대한 예산 운영을 담당했으며, 훗날 제 2차 세계 대전에 군비 예산도 운영한다.


그는 균형적 예산 배분, 통화 안정에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며, 투자를 중시하고 달러화 가치 보호에 힘썼다. 그러면서도 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노력한지라 역대 재무부 장관 중에서 가장 오래하고, 많은 양의 자금을 융통하고, 재정 수익을 거둔다.


1935년에는 와그너법(전국노동 관계법) 제정에 찬성하며,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예산과 공공사업 운영에 대한 지출에도 공적을 쌓았다.


다만 가정부나 하인, 농장 인부 등과 같은 비 생산적 직종이거나 일정하지 않은 직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수익과 세금 납부가 일정하지 않으니 사회보장 제도에서 제외하기를 주장했다.


그리고 여전히 고전 경제학을 지지하여, 1937년에 다시 국가 부채에 대한 우려가 재개되자 루스벨트에게 뉴딜 정책과 사회보장 제도 비용을 축소하여 정부 지출을 감소하자고 계속 제안했으며, 마침 보수적 상원 의원 태프트와 러셀이 뉴딜정책 반대 분위기를 조성하자 루스벨트는 모겐소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실수가 되어 1937년에 다시금 경기침체를 가져왔고, 결국 신 뉴딜정책을 추진해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터지자 모겐소는 전쟁 권한법 제정을 지지하고, 전시 비용도 탁월하게 운영했다. 특히 1941년에 무기 대여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모겐소는 색다른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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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겐소, 코델 헐, 드골, 루스벨트


모겐소는 미국인이었지만, 동시에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는 나치 집권부터 전쟁 발발까지 유럽에 있는 자신의 동족들의 고통에 안타까워하여 유대인 구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루스벨트를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1944년 1월에 전쟁 난민 위원국이 설립됐으며, 유럽에서 고통 받는 유대인 구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약 20만 명의 유대인을 구할 수 있었다.
허나 전쟁 난민 위원국의 행동은 그리 좋은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이미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으며, 전쟁 난민 위원국의 부족한 운영 규모로 더 많은 유대인들을 구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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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난민 위원회에서 - 코델 헐, 모겐소, 스팀슨


모겐소는 1944년 7월 1일에 열린 국제연합 통화 회의에 참석하여 22일까지 회의의 핵심 주체로서 국제 경제 통합과 전후 경제체재에 대하여 논의했고, 그 결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발족하고,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하며,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을 만들도록 결론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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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톤 회의에서 - 공상희와 모겐소
공상희는 중화민국 좌지우지한 4대가족에 공씨의 대표로 당대 중화민국 최고의 부자였다.
이 시기에 공상희는 재정부장(재정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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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톤 회의에 인사 말을 하는 모겐소


1944년 9월 12일에는 제2회 퀘벡회담에 참가하는데 14일까지 열린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을 비롯한 미영 인사들에게 모겐소 계획을 제안한다.


모겐소 계획은 전후 독일에 대한 처리 방법에 대한 것으로 그 목적은 독일에 대한 전쟁 배상과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서다. 허나 그 내용이 가혹하고 잔혹하여 지금까지도 논란과 비판에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계획 뒷면에는 모겐소의 아버지 모겐소Sr와 루스벨트에 후원자이며 재무적 조언자인 해리 화이트가 참여했다.


원문은 1944년 1월에서 9월 사이에 작성됐으며, 모겐소가 직접 서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독일의 비무장화
독일이 항복한 후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연합군은 독일 비무장화를 달성한다.
이것은 완전히 비무장화한 독일군과 독일국민들(전쟁 물자를 이전하거나 파괴하는 것도 포함하여), 모든 독일의 군수 산업들의 파괴, 이외에 독일군의 기본이 되는 주요 산업들의 이전과 파괴를 의미한다.


2. 독일 분할 
(a) 폴란드는 소련군이 가지지 않은 동 프로이센의 남쪽과 슐레지엔을 갖는다.
(b) 프랑스는 자르와 모젤강과 라인강 주변 영토를 갖는다.
(c) 독일을 3 지역으로 분할하며 루르와 그 주변 공업지역을 국제 구역으로 만든다.
(d) 남아 있는 지역을 2개의 자치 독립 국가로 만든다.
(1) 남독일은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과 몇몇 작은 지역들로 구성되며, (2) 북독일은 프로이센, 색스니, 튀링겐 같은 오래된 주와 작은 지역들로 구성된다.
새로운 남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938년 이전의 정치적 결합체로 복구한다.


3. 루르 지역
(루르와 주변 산업 지역을 한 지역으로 하며, 라인란트, 킬 운하와 모든 킬 운하 북부 지역을 포함하여)
여기는 독일 산업력의 심장이며 전쟁의 솥이다. 이 지역의 모든 산업을 벗겨내야 한다. 그러나 금방 실현되지는 못하니 약하고, 통제받는 산업지역으로 한다.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이룰 것이다.
(a) 짧은 기간 안에, 되도록이면 적대감이 사라진 후에 6개월까지, 전투로 파괴되지 않은 모든 공장과 설비는 완전히 해체하여 이전하거나 파괴한다. 모든 광산 설비는 제거되며, 광산은 폐광화한다.
이 지역은 3단계로 진행되리라 예상한다.
(1) 그곳에 주둔한 군대는 이전할 수 없는 공장과 시설들을 파괴한다.
(2) 국제연합의 반환과 이전에 의해 공장과 설비들은 이전한다.
(3) 남은 6달 기간 내에 모든 공장과 설비는 파괴되거나 축소하거나 국제연합에게 주어진다.
(b) 그 지역 사람들은 이곳이 다시 산업단지가 되도록 인가 받지 않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특별한 기술이나 기술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영원히 가능한 멀고 떨어진 곳에 이주하는 것을 장려할 것이다.
(c) 이 곳은 국제지역이 되어 국제연합에 국제 보안 조직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이곳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그 국제 조직은 위에 언급된 목표를 진행시키기 위해 설계될 것이다.


4. 반환과 배상
배상은 비용 지불과 현물 보상으로 이루어지면 안 된다.
반환과 배상은 독일에 존재하는 자원과 영토의 이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a) 독일이 점령한 곳에서 약탈한 물건에 반환에 의해
(b) 침략한 나라에 대한 독일 영토와 산업 재산상의 권리에 양도와 영토 분할에 의해
(c) 남독일과 북독일, 국제 지역 안에 있는 산업 시설과 설비를 유린했던 나라들에게 분배하는 걸로
(d) 타국에 대한 독일인의 강제 노동으로
(e) 어떤 특정 재산에 대한 몰수로


모겐소 계획은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이처럼 그대로 보복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처칠은 이 계획을 듣고 반대했지만, 모겐소와 루스벨트는 적극적으로 설득했으며, 심지어 무기대여법을 들며 강압하기도 했다.
결국 처칠은 동의하되 루르 군수산업을 없애고, 자르는 농업 지역으로 만든다고 따로 자신의 의견을 적어 합의를 보았다.


허나 반대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의 외무장관 엔소니 이든,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과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이 모겐소 계획에 대한 초기에 반대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주장은 계획의 보복이 독일인에 전후 생활에 너무나 가혹하게 적용됐으며, 다시 독일 경제를 재건하여 국제 사회에 이바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이 계획 실현을 보류하기로 했으나, 반독 성향에 영국 정치인들과 소련의 스탈린은 여전히 이 계획을 지지했다.


그렇다고 모겐소 계획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의미는 포츠담 선언에 여러 조항에도 영향을 끼쳤고, JCS 1067(합동참모본부 1067 지령)과 독일 산업 계획(독일 산업 수준 계획) 등과 같은 전후 독일에 대한 산업과 자원 통제와 비무장화 정책에 잘 반영되었다. 


그러나 모겐소 계획을 비롯한 정책들은 새로운 구도아래 무너지고 만다. 전쟁이 끝나면서 이념 대립을 통한 냉전 구도가 성립되어갔기 때문이다.
처칠도 이미 반공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미국 공화당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가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독일 재무장 정책에 대한 명연설을 했고, 독일 군정 사령관 루시우스 클레이 장군도 독일인의 가난한 생활력이 공산주의자들을 더 많이 만들거나 주장했다.


결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반공을 들어 모겐소 계획을 비롯한 정책들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모겐소는 1945년에 “Germany Is Our Problem“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945년 7월 22일에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 끝에 사임한다. 그리고 1947년 7월에 모겐소 계획과  JCS 1067 등을 비롯한 계획이 폐기됐으며, 마셜플랜으로 독일의 체재는 경제 재건과 재무장으로 전환하여 1950년에 군수 산업과 군비에 대한 제한이 소멸된다.


공직에서 은퇴한 모겐소는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자선사업을 운영하며 살았다. 또한 자신의 동족들을 위해 활동하여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유대인 연합회 회장을 맡아 기부금을 4억 6천 5백만 달러까지 올릴 정도였다.
1951년에서 1954년에는 재정 개발 협력회 회장으로  5억 달러를 모아 이스라엘 건국에 보탰으며, 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정부 재정 고문을 맡았다.
1967년 2월 6일, 모겐소는 76세에 심장마비로 뉴욕주 포킵시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은 뉴욕주 플레전트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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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루스벨트 대통령도 스탈린, 히틀러 못지않게 오랫동안 집권했는데, 정작 루스벨트의 측근들이 알려지지 않아 올렸습니다.

오늘 올린 3명과 올리지 못한 노동부 장관까지 합하여 루스벨트 집권부터 루스벨트 사후가까이 까지 장관 자리를 지킨 사람들입니다. 루스벨트에게 핵심 측근인 인물들이며 각자 맡은 부서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자리를 오래 지킨 장관들입니다.

이 3명에 대한 자료를 끝으로 잠시 오랫동안 잠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달은 좀 일정이 바쁠 것 같아서요... 다음 달에도 가능한지 확인한 후 힘들다 싶으면 먼 훗날에 다시 오겠습니다.

다만 어쩌다가 간단한 자료를 남기러 왔다가 갈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올린 3명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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