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Fragment-->전작 :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6)
“모두 잘 들어둬. 오늘 내가 새 아이를 데려올 거야. 우린 작은 별이 지기 전에 도착하겠지만, 꼬끼오 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문을 꼭 닫고 있어. 나쁜 인디언이나 흉악한 해적 놈들이 올 수 있으니까. 알았지?”
안나가 아침이 되자마자 아이들을 모아두고 선언했다. 아이들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상처가 거의 다 나아, 이제 다시 장난을 치기 시작한 컬리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안나는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준 후에야 길을 떠났다.
“다행히도 마침 침대 하나가 비어있네.”
“새로 오는 애가 거길 차지하면 되겠다.”
“흰 쥐를 좋아하는 녀석이 오면 좋을 텐데.”
“흰 쥐를 좋아하는 건 너 뿐이야, 슬라이틀리. 네가 저번에 데려온 녀석이 내 침대 귀퉁이를 갉아먹은 덕분에 말이지!”
모두들 새 친구가 온다는 말에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왜 침대가 하나 비어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아이는 없었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아이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피터 팬 일당들과 인디언들이 사이가 좋았다는 건 정말 옛말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아이들-정확하게 말하면 초대 피터 팬-에게 은혜를 입은 인디언들이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해적들과 싸웠다. 그리고 안전해지면 북소리로 신호를 보냈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들이 네버랜드를 마음 편하게 활보하고 다녔단다.
하지만 피터 팬이 몇 번 교체될 만큼 시간이 지나자, 그들 사이의 믿음은 접시 깨지듯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아무튼 그 후에는 인디언 부족이 둘로 갈라지고, 믿음의 상징이었던 북은 몇 대 피터 팬의 손에 찢겨졌다. 그는 “역시 어른들은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북을 찢었다고 한다.
그 후로 아이들과 인디언들은 말 그대로 찢긴 북과 같은 사이가 되었다. 거기에 종종 벌어지는 전투로 서로 미워하는 처지를 더 굳건히 다져주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지난번엔 그냥 물러났지만, 또 다시 자기네 땅을 침범 했네-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며 약한 아이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네버랜드 내에 있는 어른들을 모조리 쫓아내 버리리라. 요정이 말려도 듣지 않으리라. 아이들을 위한 섬에 나쁜 어른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존재니까.
“어른들 따위-”
안나는 허공에서 인디언 부족의 영토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작은 별의 인도에 따라 네버랜드 해를 비행했다.
“벨, 안내해. 그 집 가는 길 까먹었어.”
<웬일로 네가 앞서간다 했다>
팅커 벨은 한숨을 내쉬며 안나의 앞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안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내 앞에 서래?”
다소 화가 난 목소리다. 부탁을 받은 팅커 벨은 그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며 대답해주었다.
<안내해달라며?>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내 앞을 차지하면 안 되지!”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래. 팅커 벨은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를 냈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 이 바보 머저리야!>
“나보다 앞서지 말고 내 옆에 붙어서 길을 안내해 바보 요정!”
<이게 진짜! 그 빨간 머리 모조리 뽑아버린다?!>
“난 네가 아끼는 주전자 죄다 부숴버릴 거야!”
<이미 네가 부숴먹었잖아!>
“어 알고 있었네. 모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덜 멍청하구나?”
누가 들으면 피식 웃어버릴 정도로 치열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둘은 티격태격 몸싸움이 섞인 공중전을 벌이며 밤하늘에 빛 가루를 뿌렸다. 멀리 있는 별보다 더 찬란한 색을 가진 금빛 요정 가루가 공중에서 사라지듯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안나, 저걸 봐! 해적선이야!>
“해적선?”
놀란 안나가 손을 떼자마자, 위태롭게나마 날아가던 크리스토프는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듯 아래로 휙 내려갔다. 네버랜드 해가 자신의 품에 안기라는 듯 파도를 뻗어 크리스토프를 안으려 들었다.
“멍청아, 즐거운 상상을 해. 그럼 날아오를 수 있다고!”
“와악, 어, 어떻게-”
안나가 웃으며 아슬아슬하게 크리스토프를 붙잡아 올렸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첫 비행은 박수를 칠만큼 훌륭하지 못했다. 제대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침대 위에서 몇 번 더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안나와 크리스토프가 있는 다락방으로 들어가려는 소리가 들린 탓에 도망치듯 그곳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대중으로 배운 덕분에 잘 날아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크리스토프라는 아이는 공포로 가득 찬 머릿속을 단숨에 비집고 들어올 만큼 강렬하게 즐거운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저, 피터-”
“이젠 대장이라고 불러. 날 따르기로 한 이상, 넌 나에게 무조건 절대로 복종해야하니까.”
“네, 넵. 그, 대장, 정말로 어른들이랑 싸울 수 있어요?”
“오, 물론! 그게 네 주 임무야. 그리고 더 재미난 모험도 할 거야!”
크리스토프의 질문에 안나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안나는 크리스토프를 움켜잡고 급강하했다. 놀란 아이가 비명을 꽥 질렀다. 안나는 재빨리 크리스토프의 입을 막았다.
“입 좀 닥쳐봐. 저 멍청한 해적들이 왜 여기에 얼씬거리는 지를 봐야겠다.”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괜찮고말고... 망할 체코. 왜 하필 배 유령 얘기를 해줘서..!”
한바탕 전투하러 가는데 걸림돌을 데려가서 무엇 하느냐-주크스의 말에 모두들 쿡슨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쿡슨은 홀로 배 지킴이를 하고 있다.
겁이 난다는 말을 마음에 담아둔 채-표정은 다 드러나 있었다-적대세력이 졸리 로저 호에 침입하면 저 혼자서라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쿡슨의 현실적인 변명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스미는 바로 그 변명을 무력화 시켰다.
- 여긴 네버랜드다. 이곳에서 해적을 적대하는 세력은 딱 셋 아니, 둘이야. 늑대부족, 그리고 피터 팬 일당들이지. 우린 늑대부족 영역으로 가니까 만일 맞닥트린다면 우리 문제지 네 문제가 못 된다. 그리고 피터 팬은 지금 이 섬에 없어. 피터 팬이 없는 아이들 따위 한 입거리도 안 돼. 그러니 얌전히 배나 지켜
후크 해적단의 최고참이자 갑판장인 스미의 말에 뭐라고 반박하지 못한 쿡슨은 고개를 푹 숙였는데, 옆에서 체코라는 놈이 깐족거리며 배 유령은 혼자 있는 해적을 노리네, 해적들이 빈번히 실종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그 배 유령이네, 특히 겁쟁이가 목표네-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쿡슨보다 약 반년정도 먼저 해적이 된 그는 그렇게 실컷 겁을 주고는 무기를 챙겨 제 선배들을 뒤따라 가버린 것이다.
“젠장, 빌어먹을! 배 유령 따윈 들어본 적도 없고... 으...”
하필 그 소리가 안나 P. 팬의 귀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애써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겁을 줄여보려 했던 쿡슨의 노력은 안나를 꽤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바로 저거야.” 안나가 눈을 빛냈다.
“네?”
“크리스토프, 너에게 어른을 혼내는 방법을 알려줄게. 내가 시범을 보일 테니 잘 보고 있다가 팅커 벨과 함께 열매를 따와 나한테 주면 돼. 알겠지?”
“알겠어요, 대장.”
안나가 배를 향해 급강하를 하더니, 소리 없이 망루에 숨는다. 쿡슨은 귀신 물럿거라를 중얼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타이밍을 재던 안나는 배에 잔뜩 힘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나 는 태 풍 이다!”
생전 처음 듣는, 잔뜩 긁힌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배 위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쿡슨은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떨리는 다리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엉금엉금 난간까지 기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태, 태풍?! 그런! 네버랜드 해에는 태풍 따위-”
“덜 떨어진 해적만을 골 라 죽이는 태풍의 귀 신이다!”
“히익!”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그딴 귀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 테지만, 쿡슨은 해적이 된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참에다 체코의 배 귀신 얘기로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안나는 영악하게도 쿵쿵 소리를 내거나 무언가를 긁어대는 으스스한 소리도 첨가해 신참 해적 쿡슨의 공포심을 자극시켰다.
“사, 살려주십쇼! 전 아직 해적질도 제대로 못해봤단 말입니다! 육두구는 손도 안 댔다구요!”
금값보다 훨씬 더 비싼 향신료인 육두구 따위를 알 리가 없는 안나는 멍청한 소리로 “육두구?”하고 되물었다. 그런데도 쿡슨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 아니, 아주 조금- 조금 맛을 본 것뿐입니다.... 맛이 요상해서 뱉었지만요! 네, 바로 뱉었어요!”
“네 잘 못을 알 겠 지? 그럼 무 릎을 꿇어!”
이런 식으로 안나가 쿡슨을 놀리는 동안, 팅커 벨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날아오른 크리스토프는 안나가 알려준 열매들을 잔뜩 따왔다. 개중에는 과육이 터져 핑크색 액체가 줄줄 나와, 크리스토프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가져왔어요, 대장.”
“쉿, 이젠 조용히 해. 근데 너 물건 잘 던지니?”
“네.”
“좋아. 그럼 둘이 같이 저 멍청이를 혼내주는 거다. 벨, 너는 나머지 해적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보도록 해.”
또 무슨 멍청한 짓을 하려고. 입을 열려던 팅커 벨은 안나의 말에 따라, 허공으로 날갯짓을 했다. 장난치다가 잔뜩 열 받은 해적들-후크 해적단은 총 17명이다-에게 둘러싸이기라도 하면, 제 아무리 피터 팬이라 해도 크게 다치는 정도로 끝나진 않을 테니까.
안나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목을 가다듬어, 태풍 귀신 목소리를 내었다.
“반성은 했겠지?”
“무, 물론입니다!”
“좋다. 배에 표식을 해주지. 이걸로 네놈은 절대 바다에서 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도중에 눈을 뜨거나, 표식을 없앤다면 나는 널 날개 달린 돼지로 만들어 버릴테다!”
“히익- 살려주십쇼 제발! 뭐든 할테니-”
“눈을 감아라!”
“넵!”
딱딱한 열매는 정확하게 쿡슨의 머리를 겨냥하고는, 퍽-소리와 함께 깨졌다. 안에 든 과육이 촤악 하고 쿡슨의 온몸을 적셨다. 요란한 핫핑크가 눈앞을 덮치기도 전에 그는 기절해버렸다. 머리에는 큼지막한 혹이 나있었다. 용케 두개골이 깨지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정도였다.
“아하하하! 멍청해라!”
안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크리스토프는 반은 걱정으로 반은 즐거움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른 혼내주기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대장 대단해요! 어떻게 저리도 손쉽게...”
“난 원래 대단해. 그리고 저런 해적 한둘쯤이야 꿀 먹는 것보다 더 쉽다구! 자, 너도 던져서 저 배를 색칠해봐!”
“네!”
그들은 신이 나서 열매들을 던졌다. 색이 골고루 퍼지도록 열매 안에 있던 과즙을 위에서 뿌리느라 손과 옷에 핑크색 얼룩이 묻기도 했다. 한참을 색칠놀이에 열중해있던 그들은 망을 보던 팅커 벨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섬 깊숙한 곳으로 날아갔다.
언제부터 배가 정신 나간 핑크색으로 바뀌어있었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느정도냐 하면, 핑크성애자도 진저리를 칠만큼 덕지덕지 칠해져 있을 정도였다.
“안나 P. 팬 짓이로군.”
다들 넋을 빼고 있는 사이에도 엘사 J. 후크만이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고 나섰다. 피터 팬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부하들도 정신을 차렸다. 배 가까이까지 다가간 체코는 손으로 핑크색을 만져보았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체코의 손에 묻어버렸다. 아마도 청소를 말끔하게 한다면 배는 도로 원상복구가 될 것이다. 휴가의 마무리가 때 아닌 배청소로 끝나게 생겼다.
그들은 그 덕분에 손에 든 짐을 모조리 내동댕이치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어 이 전투의욕을 불 살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되었다.
어쨌건 짐을 짊어진 몇 몇이 배 위로 올라갔다. 그 중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은 스타키는 기절한 핑크 쿡슨을 발로 차서 억지로 깨웠다.
“헉!”
“이 멍청이가 배를 지키랬더니-”
“스, 스타키! 어서 눈을 감아! 안 그러면 태풍 귀신이 널 날개달린 돼지로 만들 거라고!”
“뭐? 태풍귀신? 헛소리 말고 눈이나 떠!”
“안 돼! 귀신한테 잡혀간다고!”
“....저 개념 없는 핑크 놈을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한 다음 배를 청소시켜라.”
엘사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윗옷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생각보다 네버랜드 체류시간이 길어질 것 같다. 엘사가 옷 윗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곤, 멀뚱히 서있던 스미에게 시계를 던졌다. 갑자기 날아온 은색 물체를 엉겁결에 받아든 스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2시간이다. 배에 핑크 얼룩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간, 너희 모두 널빤지를 건너게 해주겠어.”
엘사의 명령에 부하들은 무저갱으로 떨어진 듯한 절망을 맛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사는 망설임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 숲속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졸리 로저 호에서 그녀를 부르는 큰 목소리가 났다.
“와악, 선장니이이임! 혼자 가시면 위험합-”
쿡슨 나름대로의 충정을 보인 대사라고 할 수 있겠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쿡슨 대신 난간에 맞아버린 총알이었다.
“-지금 제일 위험한 건 네놈이야.”
“난간도 수리해” 엘사는 이 말을 끝으로 느긋하게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졸리 로저 호에서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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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후크 팀 막내이자 귀여움을 담당할 쿡슨... 네버랜드 픽이 동화면서 딮다크로 흘러가니 좀 환기시키는 느낌으로 병신짓 할 인물이 가끔 나오긴 할거임; 자주 나오진 않지만;;
psps. 왜 한 편 분량이 점점 더 늘어나는가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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