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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25)

유희자(118.43) 2017.07.18 01:44:25
조회 593 추천 18 댓글 6




전작 -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24)







“음. 음. 음음...”



지금 네버랜드에서 제일 태평하게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붉은 머리의 아이, 안나 P. 팬밖에 없을 것이다. 네버랜드가 지금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안나는 해적들이 네버랜드에 쳐들어오기도 전인 이른 아침에 요정 여왕의 요청을 받고 이곳에 와있었다. 그녀는 요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발을 벗어던졌다.



“별~게 다 있네, 요정의 호수우- 여어기에 빠진 사람이 있다네에”



이곳 요정의 성소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이계(異界)로, 네버랜드와는 또 다른 별천지다. 네버랜드가 불타든 말든 요정의 성소는 평화롭고, 요정의 성소를 반 이상 차지하는 요정의 호수도 금빛으로 반짝거리며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었다. 단 하나, 호숫가에는 시끄럽게 떠드는 요정들이 즐비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는 점만 빼면. 지나치게 조용한 나머지 외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넌 진짜 조용하구나. 벨은 수다쟁이 잔소리꾼인데. 다른 요정들도 말 많고.”



오죽 외로우면 요정에게 말 좀 해보라는 부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나의 옆에 있는 요정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성소에 남아 있는 유일한 요정이었다. 안나가 우스갯소리를 던져도 요정은 웃지 않았다. 결국 안나가 제 발을 호수에 담그고 들어갈 채비를 마쳐서야 요정이 입을 열었다. 아마 안나가 질문하지 않았다면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바보가 여기에 빠져서 나오질 못하고 있는 건데?”
<모른다. 너는 피터 팬이니까 요정 여왕의 명령에 따라 여기에 들어가야 한다>
“그 말 들으니 들어가기 싫어지네.”
<들어가라. 여왕께서 화를 내신다>
“흥! 들어가긴 할 거지만 알아두라구. 요정 여왕이 무서워서 들어가는 거 아니야! 만약에 여기에 빠진 사람이 아이면, 응당 구하는 게 피터 팬의 의무라서 그러는 거니까.”



어른이면 그냥 죽이고. 아, 여기서 뭔가를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던가? 안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요정의 성소라서 피, 화약, 어른 등의 삿된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 아이건 어른이건 일단 호수에서 건져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벨이랑 요정 여왕은?”
<없다>
“없다니? 둘이서 손잡고 소풍이라도 간 거야?”
<가셨다>
“어디에?”



요정은 또 말이 없다. 안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흥. 둘이 손잡고 어딜 가건, 뭘 하건 나랑은 상관없지. 근데 넌 이름이 뭐더라? 몇 번 본 것 같은데.”
<호수에 들어가라>



요정이 채근했다. 안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저를 무례하게 대하는 건 벨 하나면 족했다.



“너,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누구한테 명령을 하는 거야? 난 피터 팬이라고.”
<들어가주십시오>
“싫소. 메롱.”



요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안나는 낄낄거리며 호수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요정의 분노는 무섭지 않지만 그 뒷감당은 성가시기 때문이다. 안나는 인어처럼 멋진 폼으로 잠수했다.


‘어디에 있으려나. 바닥? 나도 호수 바닥까지 가본 적은 없는데.’


헤엄을 칠수록 지치기는커녕 활력이 솟구쳤다. 깊이 잠수하니 금빛은 더 진해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까지 왔다.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안 보여도 뭐, 아래로 가는 거니까 방향은 몰라도 되겠지. 방향을 몰라도 길을 잃는 건 아니니까’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나 P. 팬. 모험에는 후퇴가 없다! 의 신념을 가진 아이였다.









늑대 부족은 해적들을 습격하고,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해적들은 한숨도 돌리지 못한 채 늑대 부족들처럼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전투의 광기는 전염되기 쉬웠다. 해적들은 저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무기를 든 인디언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때문에 날개 부족의 영역에 다다라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되었다.



“늦은 건가.”



날개 부족의 부락은 불타고 있었다. 늑대 부족들이 일부러 불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네버랜드를 떠나려는 이들에게 내리는 경고인 것처럼 보였다. 맥이 탁 풀렸다. 선두에 섰던 해적 중 하나인 제이콥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생존자가 있긴 하나?”



그 순간, 낮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해적들은 다시 경계태세를 갖추어 주변을 살폈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쏘지 않으면 죽는다. 그들은 소리가 난 수풀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뭐든 간에 총알세례를 퍼부어줄 작정이었다.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인디언들이 뛰어나왔다.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인 해적들이 무의식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려 하자, 그들은 손을 마구 내저으며 인디언 말로 무어라 지껄였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몸짓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적이 아니었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아. 캡틴 훅이 말한 날개 부족이겠지.”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흄이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흄의 말대로, 그들은 날개 부족이었는데 엘사와 약속한대로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탓에 늑대 부족의 습격을 무방비하게 맞아버린 것이다.



“쏘지 마! 쏘지 마세요! 오리스 루트입니다!”



뒤늦게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인디언 하나가 탁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묘한 억양의 대륙공통어였다. 그 인디언, 오리스 루트는 날개 부족의 대표자였다. 그를 알아본 해적 퀵슬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날개 부족 대빵이군.”
“대빵이 아니라 대푭니다. 그, 그런데...”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애타게 해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날개 부족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들을 구해줄 해적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몰골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몸에는 전투의 흔적이 다분했고, 오리스 루트도 다리를 절고 있었다. 날개 부족은 갑자기 미쳐버린 늑대 부족들과 맨몸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 탓에 사상자가 꽤 많이 나왔고, 몸이 성한 인디언들은 몇 되지 않았다.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하지만 언제 늑대 부족이 다시 쳐들어올지는 모를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요정들 짓입니다! 그들이 형제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러곤 갑자기 공격을-”



오리스 루트는 쑥밭으로 변한 마을을 가리켰다.



“끔찍하군.”
“형제들이 눈먼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눈먼 자들, 요정에게 세뇌당한 인디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육을 벌였다. 제 몸뚱이의 일부가 잘리든 말든 죽고 죽이고를 반복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몇 명이나 살아있지?”
“열 한 명입니다.”
“출발하자. 늑대 부족놈들의 공격도 주춤해졌으니, 이대로 목적지까지 이동하면 목이 달아나는 일은 없을 거야.”
“안 됩니다. 우린 갈 수 없습니다.”
“...뭐?”



오리스 루트는 발을 절뚝이면서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살아남은 날개 부족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다른 형제들도 구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해적들은 기가 차, 아무런 말도 못했다.
오리스 루트가 언급한 ‘다른 형제들’은 다름 아닌 늑대 부족이다. 그의 말은 다 같이 죽자고 제안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해적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몰골로 뭘 어쩌라는 건지.
제이콥이 따지듯 물었다.



“헛소리! 저 미친놈들을 어떻게 구해달라는 거지? 날뛰는 놈들을 붙잡아다가 기절이라도 시켜서 배로 끌고 가 달라는 뜻이냐?”
“그게 아닙니다! 요정들은 우리 형제들의 눈을 가렸지만, 모두 다 거기에 넘어간 건 아니에요. 방금 전에 숨을 거둔 형제 한 명이 알려주었습니다. 늑대 부족의 영토에 생존자들이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늑대 부족 추장의 딸, 타이거 릴리도...”
“그 말이 진짜일 것 같아? 설령 진짜라고 해도 어떻게 저 미친놈들 본거지엘 갈 생각을 해!”



오리스 루트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현 상황으로는 해적들의 도움을 받아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갈 순 없었다.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칼만 안 들었지, 저놈들하고 똑같이 돌았어! 너흰 너흴 죽이려는 놈들을 아직도 형제랍시고 감싸고도는 건가? 그럴 거면 같이 고기밥이나 될 것이지 뭐하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느니 같은 소릴 지껄인 거냐! 그런 놈들을 왜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구해야 하는 거지?”
“이대로 형제들을 두고 고향으로 가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미친놈들!”



데리고 가야 할 인디언들은 꼼작하지 않고, 이대로 그냥 죽겠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버렸다. 흥분한 해적들은 그냥 인디언들을 죽여 버리자고 떠들어댔다. 흄이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에 사단이 났을 것이다.

흄은 저를 구원자 보듯 하는 날개 부족과 눈이 마주치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일단 스미에게 신호를 보내자.”



퀵슬러는 주머니에서 누런 풀떼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풀을 태우자 노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문제가 생겼을 때 연기 신호를 보내라고 엘사 J. 후크가 준 풀이었다. 이 연기를 보고 지원을 나온 동료들과 합류를 해야 뭐든 일이 진척 된다. 그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 게 나으리라. 흄은 다시금 욕설을 뱉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 연기보다 더 샛노란 금빛 호수를 헤엄치는 안나 P. 팬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당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되돌아갈 법도 한데, 안나는 고집스레 아래쪽으로 헤엄을 쳤다. 빈손으로 되돌아가는 건 영 폼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심해서 그런가? 별 생각이 다 드네’


홀딱 젖은 제 몸을 보고 팅커 벨이 얼마나 잔소리를 해댈지, 아까 본 요정이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만 해도 싫었다. 그래도 요정 여왕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젖은 제 몸을 닦아주고 안아줄 것이다. 엄마처럼.


‘엄마... 그러고보니 있었던 것 같은데’


엄마라는 존재는 낯설었지만 그립기도 했다. 그래서 요정 여왕을 보며 엄마란 게 이런 걸까 싶다가도, 요정 여왕이 아닌 다른 ‘엄마’를 갈구하기도 했다. 했었다. 그랬었다.


‘엄마가, 있었어. 나한테. 있었어. 엄마가. 있었어?’


요정 여왕도 엄마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안나는 파드득 놀라버렸다. 눈을 꽁꽁 감싸던 눈가리개가 풀린 것 같았다. 너무도 밝은 빛이 안나를 쿡쿡 찔렀다. 눈이 부셨다. 그러자 제 몸을 감싸던 금빛 호수 물이 슥, 사라졌다.
어느새 안나는 호수의 중간을 넘어선 것이었다.



“우와아아악!”



중간을 넘어서자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안나는 재빨리 날아올랐다. 몸이 젖어있어서 무거웠으나 어떻게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머리 위로는 금빛 물이 떠다녔다. 손을 뻗어 경계를 톡 건드려 보았다. 푸딩같이 몰캉거렸다.  물이니까 금방이라도 쏟아질 줄 알았는데 뭔가에 찰싹 붙어있는 것 같았다.



“옷은 언제 말랐지?”



잠깐 위쪽을 본 그 짧은 사이에, 옷에는 물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금빛 물에 접촉한 손가락에도 물이 묻어있지 않았다. 뽀송뽀송한 몸 상태로 돌아오자 균형 잡기는 더 쉬워졌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괘념치 않아했다. 네버랜드에선 이상한 일들이 얼마든지 많이 일어나서, 일일이 놀라고 있으면 모험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날아가는 거라면 헤엄치는 것보다 더 빠르니까 아까보단 시간이 덜 걸리겠지. 아래쪽으로 나는 거니까 꼭 떨어지는 것 같지만 진짜로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안나는 떨어지듯 아래를 향해 날았다.
호수 위쪽이 온통 금빛 물 천지였다면 이곳은 텅 빈 곳이었다. 위쪽을 제외하면 온통 크림색 페인트칠을 한 넓은 공터에 갇힌 것 같았다. 아래가 아니라 그 어느 쪽으로도 날아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안나를 사로잡았다. 겁이 난 적은 여럿 있었지만 지금처럼 대책 없이 떨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 그래도 안 돼. 여기에 누가 있다고 했다구....”



그 애를 구한 다음 빨리 여기서 나가자는 생각과 그 애를 발견하면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더해지자, 안나의 몸에 속도가 붙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어도 좋으니 제발 뭔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안나의 간절함 바람이 통한 건지, 저 먼 아래에서 여자아이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누군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래로 아래로 가니, 긴 금발머리를 곱게 딴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울고 있었다. 소녀는 흰색 슈미즈 드레스 위에 잎사귀를 엮어 만든 겉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 끝부분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헤진 부분이 많았는데, 잎사귀 옷으로 그걸 가린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손빗으로 여기저기 삐친 머리를 정돈하고 옷맵시를 단정히 한 다음,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이봐요. 왜 울고 있지요?”



신사처럼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다. 소녀는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들어주진 않았다. 안나는 일단 소녀가 울음을 그쳐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빨리 보금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난 안나 P. 팬이에요. 아이들의 수호자이자 네버랜드의 주인이죠! 아가씨의 이름은 뭔가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소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그래서 울고 있었군요! 걱정 말아요. 내가 아가씨의 기억을 찾아줄게요.”
“찾을 수 있어요?”
“어... 요정들이라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부하 중에 요정이 많거든요. 팅커 벨이라든지,”



팅커 벨이 들었다면 역성을 냈을 정도로 뻔뻔한 말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눈앞의 소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요정들이라면 소녀의 기억을 찾아줄지도 모르고, 또 안나 본인은 진짜로 팅커 벨을 부하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



안나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단호했다.



“요정들은 기억을 빼앗아. 그들이 기억을 돌려줄 리가 없어.”
“말도 안돼요. 왜 요정들이 그런 짓을 해요?”
“기억을 잃으면 돌아갈 수 없으니까. 기억을 빼앗고 이름을 빼앗는 대신 ‘역할’을 주면,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환상 속에서 살거든.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소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동시에 소녀의 발밑이 조금씩 까맣게 물들어갔다.



“끝까지 속으면 돼. 요정의 사탕발림 따위, 다 속아 넘어가라지. 그래야 여기에 있을 수 있으니까. 네 곁에 있을 수 있어. 이름이며 살았던 곳이며 다 잊고. 아픈 것도 다 잊고. 너만 있으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천천히 잠식되어가는 검은색이 무서워 피하고 싶었지만, 검은색에 갇혀있는 소녀 때문에 피할 수도 없었다. 상태는 좀 이상하지만 저 소녀를 구해야한다는 알량한 정의감 때문이었다.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요! 그 다음에-”
“다음은 없어. 난 이제 너밖에 없으니까.”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하고 쓰러지려는 걸 안나가 재빨리 붙잡아 소녀의 몸을 지탱했다. 안나의 녹색 신발에 검은색이 묻었다. 신발을 신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아파왔다. 맨발로 가시밭 위에 서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날아오르자. 안나는 소녀의 어깨를 잡고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정작 붕 뜬 건 안나의 몸뿐이었다. 소녀의 어깨를 움켜잡은 손은 비누라도 바른 듯 쉽게 미끄러졌다. 당황한 안나는 손을 뻗었다. 안나의 손이 소녀의 뺨에 닿았다. 그 순간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불꽃이 튀는 눈동자가 안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소녀는 극악무도한 해적 선장이 되어있었다.



“말해봐.”



해적 선장은 왼손으로 안나의 목을 졸랐다. 몸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으... 큭-”
“난 대체 뭐지?”



차분한 말투에 비해 섬뜩한 광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안나를 보며 웃는다. 애정, 증오, 슬픔, 기쁨, 고통, 쾌감으로 얼룩진 환상은 안나의 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거... 놔아, 악!”
“난 내가 가진 걸 버렸어. 오로지 널 위해 말이야. 돌아갈 수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어. 결국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지.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네가 버린 기억뿐이야. 네가 버린 기억들, 모두 내가 가지고 있어. 내 기억은 없어. 필요 없어. 난 널 원해.”



환상은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나 안나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날 사랑해달라고!!!”



불현듯, 자신이 단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낸 안나는 제 품을 뒤졌다. 오른손으로 날이 잘 서린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환상을 찔렀다. 푸욱. 기분 나쁜 감촉이 손으로 전달되었다. 썩은 과일처럼 무르고 물렁물렁했다. 사람이 아니구나. 안나는 불쾌해져서 검을 뺐다. 단검에는 검은색 액체가 묻어있었다. 심장을 찔렸을 텐데도 해적 선장은 손아귀 힘을 풀지 않았다.
끝내 안나는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버둥대었다.



“싫어, 싫어! 이거 놔!”
“날 잊지 마! 난,”



해적 선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나의 발이 해적 선장의 꿰뚫린 가슴 쪽으로 쑤욱 들어갔다. 늪에 발이 빠진 것 같았다. 안나가 몸부림을 치자 가슴에 박혀있던 발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환상은 기포처럼 소리 없이 터져버렸다. 검은 물을 잔뜩 머금은 환상이었던 걸까, 환상이 터져 사라지자 텅 빈 공간이 한순간에 검은 물로 가득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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