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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22 - 벼슬과 낙향

운영자 2019.04.22 10: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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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마녀사냥


22


벼슬과 낙향


‘과거 급제 후 관리생활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의 영혼이 그에게 물었다.

‘나는 시강원(侍講院)에 발령이 났는데 자주 숙직을 했었소. 후에 인종(仁宗)이 되실 동궁(東宮)께서 숙직실로 오셔서 나와 글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셨소. 자연히 우리는 친하게 됐소. 한번은 동궁께서 내게 당시는 구하기 힘든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선물로 주셨소. 얼마나 기쁘던지 펄쩍 뛸 것 같았소. 그 책을 가져다 붓으로 구절구절 점을 찍어가면서 열심히 공부했었지. 하루는 동궁께서 나를 은밀히 찾으셨다오. 같이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하셨소. 먼저 동궁은 하얀 비단 위에 손수 대나무를 그리셨소. 나는 그걸 보면서 구상을 하다가 붓끝에 먹물을 듬뿍 찍어서 시를 지어 바쳤지. 그게 엄(嚴) 변호사께서 얼마 전 필암서원에 와서 봤다던 인종의 묵죽도(墨竹圖)요. 동궁과 나는 그렇게 예술을 매개로 친해졌소.’

‘장래 대권을 잡을 분과 막역(莫逆)해지셨군요.’

‘꼭 그렇게만 볼 게 아니오. 나는 당시 말단 관리로서 겁 없이 대담한 진언을 임금님께 하는 실수를 저질렀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광조(趙光祖)를 처벌한 중종(中宗)에게 그에 대한 처벌이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복권을 주장한 거지. 죽음마저 각오해야 할 그런 진언이었소.’ 

‘엄청난 일을 저지르셨군요? 그 말을 듣고 중종(中宗) 임금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중종은 묵묵부답이셨지. 그렇지만 나는 선비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大義)라고 생각했었소. 제 한 몸의 부귀영화만 누리는 속된 정치가가 아니라 성리학적 이상(理想)을 몸소 실천하는 참 선비의 길을 가고자 한 거요. 더구나 그때 나를 따라 여러 선비들이 조광조의 복권운동에 나섰소.’

‘선비들을 규합해서 왕권에 저항하는 투쟁을 하셨네요. 실수로 한 게 아니라 소신을 가지고 하신 게 아닙니까? 위험이 다가왔을 텐데요?’

‘다행히 큰 화 없이 지나갔소. 천운이 따른 거지. 그후 중종이 승하(昇遐)하시고 동궁이시던 인종이 보위에 오르셨소.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인종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셨지. 나는 계모인 문정왕후를 의심했었소. 정권에 탐이 난 그 여자를 따르는 도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때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임금의 약재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케 해달라고 했었소. 임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소. 그랬더니 내 직책이 그게 아니라면서 거절하는 답변이 왔소. 나는 전하께서 다른 궁궐로 옮겨 몸을 돌보셔야 한다고 주장했소. 그게 대충 1543년 가을일 거요. 

궁궐은 정치적 음모와 계략이 심한 곳이오. 그런 걸 보면서 나는 벼슬을 버리자고 결심했지. 그해 말 벼슬자리를 버리고 한양을 떠났다오. 그후 조정에서는 벼슬을 높여주겠다고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재촉하기를 몇 번씩 했지만 일체 사양했소. 조정에 있는 기간이 억압, 부자유, 불안이라면 낙향하는 길은 해방, 자유, 기대 그리고 사랑에 가득찬 고향 길이었다오. 벼슬을 하지 않으면 가난이 뒤따랐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시와 함께 사는 데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겠소? 벼슬이 멀어지자 생활이 곤궁해졌다오. 아내에게 미안한 심정이었소.’

나의 영혼에 감동이 잔잔한 물결이 되어 퍼지고 있었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라 물었다.

‘관리로 한양에 계실 때 안암골에 평천장이라는 집을 지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후손들이 고려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 터를 잡으셨는지요?’

‘한양에서 있을 때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성안의 북촌(北村)에 기와집을 얻으려고 했소. 나는 그게 마땅치 않았지. 어느 날 나는 몇 달치 녹봉으로 받은 엽전꾸러미를 들고 동대문을 빠져나가 돌아다니다 우연히 아름다운 땅을 발견했었지. 땅이 그윽하면서도 트이고 산은 빼어나면서도 고왔소. 물이 골짜기로부터 흘러와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연못이 되기도 했지. 그리고는 물이 평평히 퍼져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냈소. 나는 그 터에 내 집을 짓기로 했소. 덤불을 베어내고 나뭇가지를 잘라냈지. 높은 데는 그대로 살려서 대를 세우고 파인 데는 더욱 넓혀 연못을 만들었지. 나는 그 집을 평천장(平泉莊)이라고 이름 짓고 벽에 이렇게 소원을 기록했소.

<내 자손이 진실로 착해서 이 조상의 뜻을 이으려고 노력한다면 / 내가 영영 죽은 다음에도 수백 년 동안 이 집을 지키며 서로 전하리니. / 너희들은 부디 힘쓸진저 / 이런 바람으로 이 집의 벽에 글을 써서 자손 대대로 전해 읽게 하노라.>

내가 바란 것은 세상의 칭찬이 아니었다오. 자손들이 그저 선비의 바른 길을 지켜나가기만을 소망했을 뿐이오. 바른 길이 특별한 건 아니오. 항상 말조심하고 술 조심하고 성적 방종에 빠지면 안 된다오. 그리고 참된 공부를 하지 않은 인간은 바로 짐승이오. 그 재주와 힘이 뛰어날수록 문제만 더욱 커지오. 그걸 자손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거요.’

‘낙향해서 어떤 삶을 추구하셨습니까?’

내가 다시 방향을 돌렸다. 

‘아담한 초가집을 지어 놓고 맑은 물로 빚은 술을 마시며 자연을 노래했소. 꿈같은 이상을 현실로 만들었다오. 단순 소박하게 살았지. 텃밭에서 딴 채소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오. 나는 작은 정원에 취미를 가졌었소. 야생의 난초를 찾아 산과 들을 종일 헤매기도 하고 기이한 모양의 돌과 이끼를 채집하느라고 분주하였고, 우물물을 길어다가 정원의 여러 화초에 골고루 뿌려주었소. 나의 즐거움은 봄가을 꽃피고 달빛이 휘황할 때 아름다운 바깥경치를 감상하는 것이라오. 달밤에 성긴 숲 속을 서성대면서 시를 읊조리는 것, 이 아니 아름답소? 더러는 옛날 선현을 본받아 봄날 냇가에서 목욕하고 바람도 쐬었다오. 그러고는 시를 읊으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 고즈넉함이란 잊을 수 없구려. 

나는 사실 우주만물의 형성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졌소. 태극은 음양이 되고 음양은 다시 오행을 낳는다오. 이 오행이 활발히 움직여서 결국 만물을 길러낸다고 보오. 만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운동을 하지요. 내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도(道)와 기(氣)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 이(理)와 기(氣)의 관계 그리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였소. 퇴계는 나를 보고 노장(老莊)을 거쳐 시와 술에 기울다가 성리학으로 나아갔다고 했었소.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말아야 된다는 것이 내 철학의 기둥이었다오. 

나는 그것을 중화(中和)라고 불렀지. 진리란 적절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오. 중화 또는 중정을 유지하면서 참된 이치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오. 성리공부는 마음공부라는 점에서 볼 때 참선과 비슷하오. 나는 마음을 탐구했소. 나뿐 아니라 퇴계, 율곡도 마찬가지였지. 우리들이 사단칠정론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오.

나에게 하늘은 인격신으로 다가온 적이 있다오. 하늘에서 항상 나를 살피시는 이가 있는데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해야겠소? 그분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야 할 게 아니오? 단 한순간도 정성을 멈추지 않고 그분에게 바친다면 결국 천명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소. 나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이기화생(理氣化生)의 관계로 파악했소. 달리 말하면 하늘의 명령이 인간의 삶에 대단히 구체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오. 

나는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중하다고 판단했소. 그리고 인간들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누구나 다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의 성품이 있는데 그걸 찾을 줄 모르는 게 병이라고 봤소. 물욕이 인간의 착한 본성을 가린다는 거지. 나는 그걸 시로 이렇게 표현했지. 흐려진 것이 없어지면 맑아지고 막혔던 게 뚫리면 착한 본성이 회복된다고. 이게 천명도에 담은 나의 생각이오. 

깊은 마음속에는 조용하여 움직이지 않은 깊은 도(道)의 본체가 있고 한편으로는 감각기관에 의해 느껴지고 출렁이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소.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욕망을 억제하면 마음은 더욱 순수해질 수 있다고 보았소. 그렇다고 해서 욕망을 아주 뿌리 뽑자는 것은 아니었지. 주자도 인간의 기초적 욕구를 근원적으로 부정하시지는 않았다오. 

내가 천명도에서 중(中)을 강조한 점을 유의하기 바라오. 다만 내가 고심을 한 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이라든지 개인적인 차이였소. 사람마다 맑으냐 탁하냐 순수하냐 그렇지 않으냐 그런 차이들이 있는데 그건 태어날 때 획득한 기질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런 기질은 인간의 뜻대로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았소. 바로 그 점이 난관이었지. 

그러다가 결국에 나는 인간의 타고난 기질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소.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하루도 쉬지 않는다면 그게 가능한 것이라고 깨달았지. 나는 정진하는 방법으로 경(敬)을 중요시 했소. 사랑이야말로 본성을 회복하는 가장 참된 길이오. 도(道)란 계속 정진해 나가는 거요. 

나는 평소 태극도설, 근사록, 대학, 소학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했소. 주역을 포함한 그밖의 경전들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소. 꿈에서도 대학을 볼 정도였다오. 꿈에서 본 글이 있는데 그건 네 가지 두려움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소. 네 가지란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는 것이었소.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시경을 천 번 읽듯 그렇게 했다오. 그렇게 독학으로 성리철학의 묘미를 약간 봤다고 할까?’

그는 이미 하늘의 소리를 마음에 담고 있는 다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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