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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39 - 조선인 주식회사 운동

운영자 2019.05.13 15: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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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마녀사냥


39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몇 년 사이, 해외 독립지사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서고에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자서전이 한 권 남아 있었다. 누렇게 변색되고 닳고 닳은 표지는 만질 때마다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깨알같이 작은 납 활자로 찍은 책자였다. 춘원은 기자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서 명사(名士)들이 이 땅을 떠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에 미투리를 신은 채 비장한 표정으로 만주나 시베리아로 향한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지는 몰라도 가슴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투사의 신념 그것이었다. 

오산학교의 교사를 그만둔 이광수 역시 길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상해에는 홍명희(洪命憙)와 신채호(申采浩)가 망명해 있었다. 이광수는 홍명희, 신채호, 조소앙(趙素昻)과 얼마간을 함께 지냈다. 홍명희와는 한방 한이불에서 잠을 잤다. 당시 큰 뜻을 품고 망명했던 홍명희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를 탐독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하루 종일 상해의 책방들을 순례했다. 돈이 없으니까 조선에 관한 말이 나오는 책은 서점의 서가(書架) 사이에 서서 읽었다. 책방 주인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그 책방에 가서 중요한 부분을 베꼈다. 신채호는 고대 조선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명희나 신채호는 다 쓰러져 가는 조선의 그림자이고 다시 나기 어려운 표본들이었다. 독립운동을 꿈꾸는 그들의 현실은 막연했다. 조소앙은 여섯 성자(聖者)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다며 코란을 읽고 있었다. 홍명희는 자신은 일생동안 갈등의 와중에 들어가지 않고 인생을 관조하는 태도로 살아가겠다고 했다. 

얼마 후 이광수는 그들과 헤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독립운동단체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실망감이 들었다. 상해의 독립운동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단체들이 심하게 반목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년간 조선인 동포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조선사람들은 밭에 감자와 오이를 심어 팔고 러시아인들의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모두가 가난했다. 그는 조선인 독립운동단체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동포들에게 경비를 무리하게 뜯고 있었다. 동포들이 잘 살고 영원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광수의 방랑은 끝이 났다. 그는 러시아 땅에 사는 조선인들이 유럽전쟁에 끌려 나가는 걸 목격했다. 그는 경성으로 돌아왔다. 진짜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가 진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다시 유학을 가서 동경에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된다. 

1917년 여름이었다. 초가 앞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봉당(封堂)에 김씨가의 남자들이 모여 앉았다. 아버지 김경중과 김성수, 김연수 형제였다. 김연수는 방학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아버지가 김연수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결혼한 지가 몇 년이 되는데도 아직 애가 없구나. 어떻게 된 일이냐?”

김경중은 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한 지 6년이 지났는데 김연수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볼 예정입니다.”

김연수의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물었다. 

“그래 학교는 잘 되어 가고 있느냐?”

“예. 유근(柳瑾) 교장이 물러나시고 제가 잠시 교장으로 있는데 그 자리를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송진우(宋鎭禹)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거라. 어떤 일이든지 한 발 물러서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거라. 그리고 모르는 일은 함부로 간섭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사람들은 제가 잘났다고 하면서 모르는 일도 다 간섭하기를 좋아하지. 더구나 돈 얼마를 내면 더욱 더 생색을 내려고 하는 게 세상이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게 일을 망치는 원인이 되는 거다. 송진우나 동경에서 만났던 다른 인재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거라. 그리고 한번 인간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가는 게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이니라.”

큰아들 김성수가 아버지 앞에서 화제를 돌려 동생 김연수에게 이렇게 권했다.

“너는 고등학교를 거쳐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게 어떻겠니? 우리 집안에서 학자가 나오는 것도 좋지 않니?”

그 말에 김연수가 아버지와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학자도 좋지만 저는 기업가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일본을 보면 봉건지주가 근대적인 산업가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기계를 사들이고 공장을 만들어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 농업도 기업형태로 새로 바꾸어 대규모 농장을 만드는 추세입니다. 

조선에서도 신세대의 사업가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경성의 김덕창이란 사람은 일본 염직(染織)공장에서 직공생활을 통해 염직기술을 배우고, 종로에 직포소(織布所)를 차려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사는 추인호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제직(製織)기술을 익히고 귀국해서 직조(織造)를 시작했습니다. 

평양의 김기호는 일본신문에 게재된 양말 관련 기사를 보고 기계 네 대를 일본에 주문하여 집안에 설치한 후 혼자서 사용법을 연구한 끝에 양말을 제조해 팔고 있죠. 평양의 정미업자인 정규현은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평양 최초로 전동식 정미기(精米機)를 갖춘 정미소를 개업했어요.

이 사람들은 상공업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지는 못했지만 업체를 경영하면서 경험을 쌓고 주변의 일본인 상공업자들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사용하는 기계를 도입하고 일본인 업체에서 기술을 배워서 자신의 업체를 만들어 가는 거죠. 경성의 공업견습소에서 염직기술을 익혀 직물공장을 차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 전 인수한 경성직뉴(京城織紐)의 운영은 어떻게 되어가느냐?”

아버지 김경중이 큰아들 김성수에게 물었다. 경성직뉴는 이강현(李康賢)이 대신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소폭 역직기(力織機) 40대를 구입해서 와사직(瓦斯織), 와사단(瓦斯緞)을 짜내고 있습니다. 비단처럼 윤기가 있는 혼합사직이죠. 모시 대용으로 한양목, 한양사를 만들어 내고 있어요. 전부터 제조하던 대님 등은 완연히 사양길입니다. 전혀 팔리지 않아요. 조선 포목상도 서민들도 경성직뉴가 전에 만든 제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재고만 쌓여 있습니다.”

“다른 업체들은 상황이 어떻냐?”

아버지가 물었다. 

“경성 변두리에 직조업체가 서른여덟 개 정도 있습니다. 대부분 다섯 대 정도의 직기(織機)와 다섯 명 정도의 직공을 거느리고 작업을 하는 수준입니다. 수공업자, 상인들이 속속 직조공장을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대기업들이 제조한 면포가 쏟아져 들어오고, 조선 안에서도 일본인의 방직회사가 생겨서 일본기업과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김성수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담담히 듣고 있던 김연수가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와 형에게 말했다.

“제가 얼마 전 동경 아사히신문에서 봤는데요. 조선에서 시행되고 있는 회사령은 입헌국가인 일본의 입장에 어긋나는 총독부의 군국주의가 반영된 것이랍니다. 그런 법은 조선총독의 정경유착으로 특권상인보호로 끝이 날 것이라고 공격을 하던데요. 일본의 저명한 기업가 시부자와 에이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에요. 일본언론과 조선총독은 벌써 여러 번 마찰을 일으켰죠. 오사카에서 발행하는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발행부수가 일본 전국을 압도하는 큰 신문이죠. 그런 일본의 신문들은 조선총독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총독은 조선의 언론에 철퇴부터 가하기 시작했어요.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한일보가 먼저 매수됐죠. 조선일일신문이, 또 다음에는 동경일보가 총독부의 직할로 넘어갔어요. 경성신보도 마찬가지구요. 소유권을 사버린 총독부가 그 신문들을 모두 폐간했잖아요? 어용지로서 경성일보와 조선어 신문인 매일신보만을 남겨 총독부의 시책을 선전하는 대변지로 명맥을 유지시키고 있죠. 조선총독은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관부연락선 이키마루에 실려오는 일본신문은 숫제 부산항에서 압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불태워버린답니다. 본국의 비판이나 여론에서 해방되고 싶은 거죠. 

조선총독의 입장은 일본재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일본재벌의 진출을 그대로 허용해 준다면 머지않아 그 대자본가들의 금력(金力) 앞에 총독부 관리들이 농락을 당하고 총독부의 위상도 흔들린다는 거죠. 지금 일본언론들이 조선총독을 맹공격하고 있어요. 조선총독이 조선의 군왕을 꿈꾸고 있다면서 즉시 소환하라는 거죠.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총독부의 회사령이나 법률들이 논란이 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듣고 있던 형 김성수가 감탄을 하면서 되물었다.

“일본의 경제상황이 달라지고 있어요. 일본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일본은 세계의 열강(列强)이 참가한 전쟁에 군수품을 공급하거나 열강이 장악했던 시장을 확보했죠. 러시아, 영국 등에서 전쟁물자의 주문이 있었어요. 유럽 열강이 전쟁을 하느라고 동남아 수출을 중단한 틈을 타서 일본은 그 지역에 상품을 공급했죠. 동남아 및 중국시장에서 유럽 열강의 수출이 두절되니까 그 기회로 일본은 일거에 이 지역 섬유사업을 장악한 거죠. 면제품의 수출은 제한이 없었고 면, 면사, 면포 등은 투기의 대상이 됐어요. 그렇지만 일본 내에서는 수시로 노동쟁의가 벌어져 일본의 기업가들은 차라리 임금이 싸고 문제가 없는 조선 진출을 모색하고 있어요.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회사의 설립을 제한하고 있는 겁니다. 

일본인 회사가 조선에 지점을 내거나 자회사를 두려고 할 때에도 총독부의 공식허가를 받아야 하죠. 총독부는 거짓신고서를 제출하거나 명령을 위반한 회사는 폐쇄하거나 해산할 수 있어요. 그 문제에 관한 공개적 논의가 일본 내에서 확산되고 있어요. 도대체 총독부에 그런 법을 만들 실제 권한이 있는지 일본언론이 문제 삼기 시작한 거죠. 앞으로 총독부의 회사령은 존속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으냐?”

김성수가 동생에게 물었다.

“작은 회사들은 경쟁에서 집니다. 주식회사라는 제도가 있는데 작은 돈들을 모아 큰 회사를 차리는 거죠.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할 겁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겁니다. 지금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신문을 보고 전하는 소리고 앞으로 좀 더 깊게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 무렵 일본의 제조업자들은 설비를 확장하고 생산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늘어난 막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해외에서 자본시장을 찾았다. 조선은 상당량의 원면(原綿)을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있었다. 부산에 미쓰이 재벌 계열의 방직회사 설립이 발표됐다. 조선에서 회사령이 철폐되고 일본에서와 같은 등록제가 시행됐다. 

김경중(金暻中)은 조선인 주식회사 설립운동을 시작했다.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어야 했다. 그는 경주 최부자인 최준(崔浚), 그리고 최부자와 함께 백산무역회사를 하는 안희제(安熙濟), 파주 교하의 대지주인 박용희(朴容喜)를 발기인으로 끌어들였다. 박용희는 일본 유학생이면서도 일본제품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평소에도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성품이었다. 민족을 위한 사업이라면 재산을 아끼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외 동래 구포 출신의 윤상은(尹相殷), 영광 출신의 조계현, 대구 출신의 이일우(李一雨) 등과 합쳐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발기인에 박영효(朴泳孝)도 참가시켰다.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가 신분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기는 했으나 민족적 양심과 기개를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러시아령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추대할 정도로 민중의 신망도 상당했다. 총독부에서도 조선정계의 원로로 대접하는 면이 있어 총독부와의 창구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김경중은 꼼꼼한 성격을 가진 이희승(李熙昇)으로 하여금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게 했다. 회사령이 철폐됐지만 절차는 여전히 까다로웠다. 당시 일본말로 ‘모로쿠미쇼’라고 부르던 사업계획서는 여러 번 꼬투리를 잡혀 반려되기도 했다. 아들 김성수를 주식회사 설립운동의 일꾼으로 내세웠다. 자본금을 100만 원으로 하고, 한 주를 50원으로 해서 2만 주를 발행하기로 했다. 제1회 불입금으로 총자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5만 원을 내야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일본계 회사인 도요방적의 자본금이 500만 원이었다. 김경중은 조선인의 손으로 세우는 회사를 한 개인이나 몇몇 소수인의 소유가 아닌 全 민족의 회사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주식의 공개모집을 해서 조선인들 사이에서 1인 1주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식 한 주를 사면 1회 불입금으로 12원50전을 내야 했다. 그 액수면 당시 쌀 두 가마 값이었다. 경성사람에게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당시 계산으로 쌀 두 가마면 춘궁기에 이자를 놔도 추수 때면 네 가마가 넘는 금액이고, 또 구석의 돌밭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주식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쉽게 사려고 하지 않았다. 광목이 생산될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한 방직회사에 투자할 사람들이 없었다. 

김경중은 주식회사 설립을 민족기업을 일으키는 운동으로 만들었다. 조선상품애용운동이나 일화배척(日貨排斥)과 마찬가지의 일이라는 걸 조선민중에게 알리고 주식이 뭔지 백성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했다. 발기인들이 전력을 기울여 일반 주식모집에 나섰다. 대부분이 사업가이거나 신용이 있는 대지주였다. 

아들 김성수가 전국의 벽지까지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식에 대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희사한다는 기분으로 돈을 냈다. 예상외로 2만 주 발행에서 일반 공모주가 1만6210주로 나타났다. 주주 수는 500주 미만의 주식을 가진 주주가 총수 188명의 95.7퍼센트인 180명이고, 그들이 가진 주식 수는 주식 총수의 63.5퍼센트였다. 조선민족의 회사가 탄생됐다. 일반에서 공모되지 않은 것을 김경중과 발기인들이 나누어 인수했다. 김경중이 2000주, 그의 형 김기중이 800주, 그 외 박영효, 김성수가 각 200주였다. 태화관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취지서의 내용은 이랬다. 

‘조선에 있어서의 면포(綿布)의 수용은 통계가 제시하는 바에 의하면 연액(年額) 약 4200만 원이며 그중 2700만 원은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는 현상에 있으니 이의 자급을 기도함은 조선경제 독립상 급무(急務)라고 할 것이다. 아래에 기명한 우리들은 이에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하여 조선공업의 발달을 도모함과 함께 다수의 조선인에게 직업을 주고 공업적 훈련을 하려고 본사 창립의 허가신청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창립취지서가 아니라 ‘조선경제독립선언서’ 같은 내용이었다. 회사의 이름은 경성방직(京城紡織)으로 하기로 결정됐다. 사장에는 박영효, 회사의 실제운영을 맡을 전무 취체역(取締役)은 박용일, 지배인은 이강현(李康賢)이 하기로 했다. 영등포에 공장부지를 마련했다. 공장건축을 추진하고 일본에서 직기 100대를 발주하는 한편 면사(綿絲)구매계약을 맺는 등 제품생산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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