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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안식

운영자 2020.03.23 10:05:26
조회 110 추천 2 댓글 0
사십대도 중반쯤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나는 조직폭력배 사건을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다. 검찰청 수사관들은 나에게 변호가 아니라 비호한다고까지 비아냥거렸다. 솔직히 내게는 그들의 악성보다 많은 변호비가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살인범이나 깡패도 변호하는거지 피해야 하나? 하는 자기합리화로 마음의 껍질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하러가던 날 아침 차창을 통해 문득 하늘이 보였다. 부드러운 비단같이 펼쳐진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맑은 색깔들이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시선이 물이 오르는 봄의 산자락으로 옮겨졌다. 물이 오르는 나뭇가지마다 연두색의 이파리들이 풀어지는 수채화 같았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었나?’

나는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이 지구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눈이 멀었던 것 같다. 어쩌다 순간적으로 힐끔 본 적도 있지만 애써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트랙 앞에서 목숨을 걸고 달려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다시 살려준다면 나는 여태까지 산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수술대에 올라 마취로 깊은 어둠의 나락으로 빠지기 직전의 내 각오이기도 했다. 여태까지의 삶은 삶이 아닌 걸 깨달았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수술 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실행에 옮겼다. 나의 영혼이 이 지구로 여행을 온 것이라면 곳곳을 잘 구경하고 가야 맞았다. 생활에서 제일 선 순위가 여행이었다. 미국과 시베리아를 철도로 횡단하면서 차창에 펼쳐진 풍경을 나의 뇌리에 인화했다. 히말라야의 계곡 사이의 꼬불꼬불한 길들을 지나면서 동그란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맑은 개천물을 보기도 하고 땔감으로 쓰는 마른 소똥이 벽에 붙어 있는 시골집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태리 토스카나의 전원풍경 속을 거닐기도 했다. 나는 물 굽이치는 푸른 바다가 좋았다. 크고 작은 배를 타고 지구의 바다를 흘렀다. 평택에서 LNG선을 얻어 타고 싱가폴로 갔다. 거기서 이태리 배를 타고 인도양과 아라비아 해 수에즈 운하를 지나 지중해를 넘기도 했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고 북해와 알라스카해도 들렸다. 남미대륙을 배로 항해하기도 했다. 십 오년의 세월을 여행으로 세상을 흐르는데 보냈다. 돈만 쫓아다니는 일을 잠시 멈추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도 중단했다. 생활에서 오는 팽팽한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버렸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세상이었다. 나중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꼭 돈에 여유가 있어야만 여행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인도여행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은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었다. 인도양의 배에서 만난 여성은 주민센터에서 9급 공무원으로 평생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정작 여행을 못하는 사람들은 많은 돈에 묶여 있는 부자들이었다.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집집마다 장례식장 마다 표를 구걸하러 다니는 삼류정치인들이었다. 인간의 감정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녹이 스는 것 같았다. 육십대 중반을 넘으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아도 전만큼 감동의 물결이 마음 기슭에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요즈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여행을 한다.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순례자를 따라가기도 하고 단테의 신곡을 통해 연옥의 산골짜기에 웅크리고 있는 영혼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여러 층으로 되어 있는 천국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서 바울이 살아서 들렀었다는 셋째 하늘에도 관심을 가져 본다. 하나님의 계명 중에 안식일 즉 휴식이 있다. 일상생활로부터 그리고 일로부터 휴식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내가 세워 놓은 일상의 빡빡한 스케줄을 시계바늘같이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다. 나의 일을 내 의지로 노력으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줄 알았다. 지나보면 그렇지 않았다. 모처럼 찾아온 친구를 위해 하루의 계획을 바꿀 수도 있어야 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은 되고 허락하지 않는 일은 안됐다. 안식일은 계명이 아니라 축복이고 은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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