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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니까 참 좋다

운영자 2021.05.24 10: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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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니까 참 좋다




누군가 동영상을 하나 보내줬다. 추한 느낌이 드는 백인 영감의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나온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 노인의 얼굴이 순간이동을 해서 과거로 돌아갔다. 힘과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미남 알랑드롱의 모습이 나타났다. 알랑드롱이 그렇게 변했다니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어떤 늙은 백인 여자의 초라한 모습이 나타났다. 화면이 순간이동을 하더니 빛이 뿜어져 나올 만큼 아름다운 미녀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모습이 나타났다. 등에 오싹하고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의 바다 위에서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소녀 올리비아 핫세의 늙은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화면을 보면서 늙음이란 이렇게 추하고 험해지고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그런 것인가 하는 회의가 안개같이 피어올랐다. 나는 생각에 곰곰이 잠긴다.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로 사는 사람이었다. 그 외모로 세상과 접촉하던 사람이었다. 세월은 그들의 표면을 붉게 녹슬게 했다. 외모가 아니라 마음으로 살던 사람이 있다. 톨스토이는 칠십이 넘어서 ‘부활’이라는 연애소설을 썼다. 노인 톨스토이는 얼굴이 아니라 그가 쓰는 글을 통해 전해지는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는 늙어도 늙지 않았다. 그의 영혼에서는 붉은 녹슨 물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 같다. 늙음이란 무엇일까. 칠십고개의 주막에 도착해 묵고 있는 나는 요즈음 편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잔다. 침대에 누워서는 내가 언제 이렇게 느긋하게 이불이 주는 포곤함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하면서 그 부드러움의 여유를 만끽한다. 놀기 싫으면 일하고 일하기 싫으면 논다. 뒷골목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려놓고 산 속 펜션의 주인처럼 말없이 찾아드는 손님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손님이 떨구고 가는 돈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가 손님들의 사연에 매몰되어 연민 피로가 엄습한 적도 있었다. 삼십년 세월의 강을 건너면서 이제는 찾아와 억울함과 한을 털어놓는 의뢰인들에게 예전 강가의 노인처럼 웃으면서 그들의 말을 들어준다. 이제는 일이 놀이같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바람처럼 살 수 있다. 어디든지 훌쩍 떠났다 돌아올 수도 있다. 떠날 때 메모 한 장을 만들어 지갑 사이에 끼어 넣고 다닌다. 세상의 어디서 죽어도 그 자리에서 태워 재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다. 어젯밤 늦게 본 일본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간 찍어온 작품 사진을 모두 태워버리는 작가에게 나이 먹은 여자가 말한다. 우리 들도 언젠가 불에 타서 없어질 존재라고. 당연한 그 말이 새삼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나는 인생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낙엽지는 늦가을일까 아니면 헐벗은 가지에 하얀 첫눈이 내리는 겨울의 초엽일까. 하루로 치면 푸르름이 감도는 저녁 어둠이 내렸을 때 쯤이 아닐까. 가로등 빛에 자기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 저녁 길에 나는 혼자서 뭘 하고 있는가. 세상의 뭘 더 바라고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어느새 모두 증발해 버렸다. 내일은 뭔가 있겠지 일 년 십년 후는 뭔가 달라지겠지 하고 개미처럼 살았는데 그게 호젓한 오늘 같은 혼자 있는 저녁 길이었다. 뭔가 속은 것 같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하다. 회한의 벼랑길에 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젊은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갈 마음이 없다. 그냥 앞에 남아 있는 얼마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다. 나의 장인은 칠십이 넘어 깨끗한 양복을 입고 단장을 짚고 소년 시절 사랑하던 소녀를 찾아간 적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기억의 벌판 아득한 저쪽에서 까만 교복을 입은 열 다섯살 소년이 비가 내리는 차창에 가만히 기대어 밖을 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꽁지머리를 한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듯한 예쁜 소녀를 보고 짝사랑에 빠졌었다. 말도 한마디 못하고 그냥 그 사랑을 속으로 속으로 눌러 청보석으로 만들었다. 더 늦기 전에 그 청보석을 아름다운 글로 만들어 오십여년 전의 그 꽁지머리 소녀에게 보낼까. 혼자서 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노인은 행복하다. 아 인생의 저녁 보랏빛이 감도는 밤하늘에 뜬 영롱한 별들의 아름다움이여. 늙으니까 참 좋다. 인생 훌훌 털고 갈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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