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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물림의 샌님

운영자 2022.07.18 09:53:37
조회 550 추천 1 댓글 0

삼십년 전의 일이다. 그날 재판을 마치고 나의 변호사사무실로 돌아오니까 사십대 쯤의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선량한 인상이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한테서 소개받고 왔습니다. 도와주세요.”

그 여자는 신앙심마저 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찾아온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하다가 안돼서 문을 닫았어요. 장사를 할 때 상인들이 하는 낙찰계에 들었는데 잠시 집에 있던 저를 계주가 사기로 고소를 해서 쫒겨다녀요. 그 애를 학교에도 못 보내고 사는 게 말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돈이 든 봉투를 내게 주면서 말했다.

“선임료라고 할 수도 없는 작은 돈이예요. 그냥 수고하시면서 한 때 밥값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제 형편이 그렇습니다. 대신 변호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사건이야 말로 내가 할 사건이라는 생각과 함께 동정심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그런 여성을 돕는 일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그녀를 수사하는 검사를 찾아가 변론을 했다. 검사의 반응은 의외였다.

“저는 이 여자에 대해 바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아주 교활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시장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곗돈을 타자마자 그대로 내 빼 버렸습니다. 사정이 있다면 근처 가게의 친한 사람이나 계원에게 전화라도 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곗돈을 타고 뺑소니를 쳤던 다른 여자는 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법원에서 사기성을 인정받아 징역을 살았습니다. 법원에서 보통 전과가 없고 악의가 없으면 관대하게 하는데 실형을 받았다면 그만큼 질이 나쁜 거죠. 그런데 이 여자는 일년 전에 검사실에 와서 조사를 받다가 구속이 될 눈치니까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 잡히지를 않고 있어요. 이번에는 변호사님을 통해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이 여자가 곗돈을 갚아야 선처를 할 예정입니다. 그게 정의 아니겠습니까?”

돌아온 나는 그 여자를 불러 검사가 말한 걸 솔직히 얘기해 주었다.

“저는 조사를 받다가 도망친 적이 없어요.”

그녀는 딱 잡아 떼었다. 사소한 것을 부인하는 그녀가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변하면서 내게 물었다.

“돈을 돌려주지 않고 어떻게 잘 처리해 주실 수 없어요? 세상에 안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해주세요.”

그녀의 검은 욕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영세상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신 거 아닙니까? 돈을 돌려주시거나 지금 없으면 각서라도 써 주고 갚겠다고 하신 후에 법의 처분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자의 표정에서 일순간 비웃음이 스치는 느낌이었다. 주님을 얘기하면서 천사같던 그 여자가 갑자기 표독스러운 얼굴로 바뀌더니 이렇게 내뱉었다.

“변호사를 돈 주고 사는 건 안 되는 걸 되게 해달라고 그런 거 아닌가요? 한 게 뭐 있어요? 검사에게 돈이라도 주고 나를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거 아니예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돈을 돌려주세요. 원 나 참 능력도 없는 변호사 때문에 내가 쓸데없이 이렇게 변호사사무실을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해야 되겠어요?”

악마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사무실에 스며든 것 같았다. 나는 돈을 그 자리에서 돌려주었다. 비용을 들여 사건기록을 구해다가 검토하고 검사실에 가서 변론을 하고 나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녀는 타인의 땀이나 돈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영혼이 죽어버린 좀비 같았다. 그 며칠 후 법정을 나오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이런 소리가 들렸다.

“변호사는 말이야 아무리 애를 썼더라도 사건이 끝나면 무조건 찾아가서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떼를 써 보는 거야. 대부분 책상물림만 한 샌님들이라 시끄러울 것 같으면 꼼짝없이 돈을 내놓고 말거든. 안주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참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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