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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시리즈] 춘천-홍천 지구 전투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上)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中)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下) 어제, 대한민국은 6.25전쟁 제75주년을 맞이했다. 75년. 완전히 잊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 속에서 윤색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호국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고 6.25전쟁에 대해 온전히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다.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러고 있는가?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른다. 그럼 한국은 6.25전쟁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자부할 수 있나?두 가지의 질문을 던져보겠다.하나. 1950년 국군의 작전 수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북한의 "속전속결"을 바탕으로 한 대남 적화통일 전략이 언제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는가?인천 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전? 전사(戰史)에 관심이 있는 새붕이라면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까지 나올 법하다.둘. 6.25전쟁 초반 가장 악전고투하여 전국(全局)을 전환시킨 지휘관급 전쟁영웅이 누구라 생각하는가?맥아더, 리지웨이, 벤틀리트? 백선엽? 그들 이외에 또 누굴 아는가?엉덩이가 참 무거우신 국사편찬위원회, 환장할 지경인 한국사 교육, 부처와 지역별로 따로 노는 기념행사와 홍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육군군사연구소, 역사학계의 성과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은 대중의 인식 속에서 6.25전쟁이 사실상 "잊힌 전쟁"이 되도록 유도하고 있다.김종오 장군, 국군 제 6사단, 춘천-홍천 지구 전투.생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설령 알더라도 그 중요성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국군의 첫 승리 내지는 춘천-홍천에서 악전고투 끝에 결국 철수한 전투 정도로 절하된다.근래의 연구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춘천-홍천 지구 전투는 한강 방어선 전투와 함께 ^유격적했도르^로 날먹을 시도한 김일성의 모험주의적인 '속전속결' 대전략의 총체적 실패를 입증하고 실질적인 파산선고를 내린 전투라고.실로 그러한지 김일성의 남침전략, 춘천-홍천 지구 전투의 전개와 종결, 그것이 이후 전황에 끼친 영향과 전개 양상을 통해 살펴보자.먼저 김태현 국방대학교 부교수는 김일성의 남침전략을 "전략의 전술화"라고 신랄히 비판한다.전술적 사고에 기대 전쟁의 전략을 짜고, 전쟁목표와 전국(戰局)에 있어 경중을 가리지 못하며, 클라우제비츠가 강조한 정치와 전쟁의 연관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그 요인으로는 만주에서의 유격전 경험에 대한 맹신을 바탕으로 김일성 본인이 자신을 "위대한 전략가"라 착각하고 그 경험에 입각해 전쟁 수행 전반을 결정하려 한 것과"전략적 중심"의 타격에 대한 몰이해와 잘못된 평가로 "일회의 결정적인 군사적 타격과 남한 내 20만 남로당원 총궐기'만으로 전쟁을 단 한달만에 끝낼 수 있다고 단단히 오판한 점을 꼽았다.소련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49회에 걸쳐 반려한 이유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공산권과 한반도 주변의 정치적·군사적 환경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판단만이 아닌 이런 모험주의적이고 희망회로가 불타는 "플랜B"없는 전술적 '한탕주의'에 입각한 북한의 전쟁 수행 전략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위의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은 단 "5일"만에 수도 서울을 완전 점령하고, 수원-원주-삼척까지 90km에 달하는 종심을 돌파하여 전방의 국군 주력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포위·섬멸한다는 독일군 최고 아웃풋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조차 한 수 접어줘야 할 1단계 작계를 구상했다.사진과 같이 1단계 과정에서 '5일'안에 국군 주력을 완전히 포위·섬멸할 계획이었기에, 2단계와 3단계 작계는 그냥 3개 축선을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돌격해 단 '24일' 만에 260km의 종심을 뚫어버림으로써 한반도 점령을 완전 점령하고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다는 기가 막히는 양상을 띄었다.본인이 당시 북한에 있던 소련 군사고문단의 일원이었다면 그대로 찢어버리고서는 "야 이 미친놈들아 전쟁이 무슨 대전략게임인 줄 알아!"라고 욕지기를 퍼부어줬을 용의가 있다.아무튼 북한도 이 원대한 플랜의 성공을 보장하는데 있어 핵심인 1단계 작계 수립에 지대한 정성을 쏟아부었다. 작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6월 25일 개전 즉시 서부전선(금천-구화리, 연천-철원)을 담당하는 북한군 1군단과 중동부전선(화천-양구)을 담당하는 2군단이 공세에 나선다는 것이다.1군단은 105땅크사단을 선봉으로 한 기갑, 기계화부대를 앞세워 전선을 정면 돌파하여 6월 25일 당일 동두천, 문산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일차에는 전선 방어를 위해 북상한 1사단, 7사단, 각종 예비대를 포함한 국군을 1군단과 2군단의 고속기동부대인 모터사이클 연대를 우회시켜 각각 한강철교와 수원 이남의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달성한다면 1군단은 한강 이북의 국군을 양익포위하여 완전 섬멸하고, 2군단은 대전에서 북상할 국군 제2사단을 차단하는 것이 서부전선에서의 작계에 있어 주요 골자였다.2군단은 2일차까지 춘천, 홍천을 확보하고 원주에 입성하여 국군 전선을 태백산맥에 의해 동서로 완전히 양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603 모터사이클 연대는 수원으로, 나머지 부대와 후속 사단들은 서울 동남부(가평 등), 여주로 진출하여 한강 이남 수도권에 전개된 국군 전력을 포위·섬멸한다. 예비사단은 삼척으로 진출하여 동부전선을 막는 국군의 8사단도 포위하여 섬멸한다. 5일 안에(7월 1일) 1단계 작전이 종료되면 수원-원주-삼척에서 전선이 형성되고, 국군은 지역방위사단인 제2, 3, 5사단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상실한다.이에 대해 개인적인 소감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정신병이다. 스탈린이 그따위로 전쟁할거면 집어치우라고 면박을 준 이유를 알 것 같다.뭐, 본인의 뇌피셜로는 김일성이 자신의 유격전 신화에 도취된 상태에서 45년 8월 소련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관동군, 만주군을 기갑과 항공기를 동원한 "전격전"으로 단 "11일"만에 완전히 으깨버린 것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듯 한데...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은 만주국이 아니었으며, 한반도의 전장환경도 소련식 전술을 그대로 써먹을 수 있는 만주와 엄연히 다르고, 개전 당시의 국군이 머저리 집합소였어도 주력이 대륙에서 국민혁명군과 마지막 영혼의 한타를 치루는 중이여서 2선급 취급해주기도 민망한 예비병력들로 만주 전선을 얼기설기 기워놓은 만주군, 관동군과 비교하기란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학병 징집과 군사영어학교 수료를 통해 일제와 미국의 장교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미군과 국군 모두의 폭넓은 인정과 신뢰를 받던 김종오 대령과 그의 지휘 아래에 있던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2군단을 가로막고 있었다.다음편에 계속...참고문헌김종배. [군사 논단] 국운(國運)을 가른 6·25전쟁의 두 전투. 월간군사. 2023 (10). 2023. p.28-31. 김재철. 「한국전쟁 초기 춘천·홍천 지구 전투의 평가」.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24(1). 2009. p.1-19. 김태현. 「김일성의 6.25전쟁 전략 분석: 전략의 전술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105). 2017. p.95-149.나종남. (2020.06.). "6.25전쟁 초기 춘천전투의 기적". 월드뷰. https://theworldview.co.kr/archives/13934이성춘. 「6ㆍ25전쟁 초기 춘천 지구 전투의 재분석과 평가」. 융합/보안논문지. 15(4). 2015. p.133-145.박희성. 「북한군 제2보병사단의 6 ·25전쟁 초기 작전」. 육군군사연구소. 군사(116). 2020. p.1-50.손규석. (2010.6.10.). [6.25 결정적 전투들] 1. 춘천 지구전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https://www.korea.kr/news/issueQAView.do?newsId=148695067-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中) [시리즈] 춘천-홍천 지구 전투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上)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中)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下) <표 2>,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2군단에 비해 완전한 열위에 놓여있었다.특히, 북한군 2군단은 김일성과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명백한 강점들을 다음과 같이 활용하고자 했다.1. 화력우위의 달성 (122mm 곡사포 24문, 76mm 곡사포 72문, 45mm 대전차포 139문) 및 SU-76 자주포 (48대)를 중심으로 한 보전협동(제병합동) 전술 활용2. 수적우위, 질적우위를 바탕으로 소련식 제파공세작전으로 국군 방어진지 돌파.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각각 국군 6사단과 비교했을 때 2배에 가까운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3. 철저한 시나리오 수립과 작전 목표에 부합하는 부대 편성, 주공과 조공의 사전조율 완료 및 통일된 목표의식 공유4. 정규군과 유격대, 소부대와 대부대의 긴밀한 연계를 꾀하는 배합전5.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도(2군단은 전 부대가 사단급 전술훈련까지 완료) 및 산악전과 야간전에 숙달된 조선의용군 및 중공군 출신 숙련병 다수 배속이에 맞서서 어론리부터 가평에 이르는 장장 84km의 전선을 단독으로 담당해야 했던 국군 제6사단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보기 어려웠다.압도적 수적, 질적 열위는 차치하고서 당장 개전을 15일 앞둔 6월 10일, 6사단장이 신상철 대령에서 김종오 대령으로 교체되었다.김종오 대령은 2주 안에 예하부대 초도순시를 마치고 업무 인수인계를 완료,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중한 업무를 떠맡아야 했다.6사단은 포병화력에서 크게 열위였다. 중포는 당시에도 도태중이었던 M3 105mm 곡사포 15문이 전부였다. 57mm M1 대전차포, 한줌의 2.36인치 M9 바주카, 여러 구경의 박격포를 전부 합쳐도 264문에 불과했다. 사거리, 신뢰성, 수량 어떤 것도 북한군 대비 우세를 점하는 부분이 없었다. 그나마 압도적인 화력 열세 속에서 탄약이나마 충분했다는 점이 위안거리였다.6사단의 교육훈련 수준은 2연대와 19연대는 신규 창설 직후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점과 공비토벌, 38선에서의 국지전으로 인해 나머지 연대들 또한 교육기회에 대단한 제약이 있었다는 점에서 답이 없었다.그나마 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이 교육훈련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부대원들의 전술운용 및 장비운용 능력을 숙달토록 한 것이 다행이었다. 2연대와 7연대, 예비대였던 19연대까지 모두 실전경험이 조금씩이나마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겠다.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서부 및 동부전선의 다른 국군 사단들과 달리 아래와 같은 춘천-홍천 지구 전투의 승리를 견인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1. 7연대와 2연대는 수색대를 38선 이북으로 침투시켜 정보수집활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6월 16일 북한군 2사단에서 귀순한 병사 1명을 심문하여 다음과 같은 첩보를 수집하여 사단과 육군본부에 보고하였다.이에 육군본부는 38선에서 꾸준히 반복되던 국지전의 일환으로 치부하였으나, 김종오 대령은 북한과의 전면전 가능성을 상정하고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2.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철저한 진지공사를 1년 간 진행하였다. 춘천시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아 구축된 방어선은 소양강, 말고개, 봉의산, 주요 감제고지 등의 지형지물을 고려하고 활용하였다. 16포병대대는 방어진지 인근과 북한군의 주요 예상 기동로에 화력을 집중운용할 수 있도록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이는 16포병대대를 비롯한 6사단 포병전력이 춘천-홍천 지구 전투에서 보병진지와 통합적인 작전 수행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자, 제파전술을 맹종하여 밀집대형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에게 포병화력을 통해 압도적인 손실을 강요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3. 첩보와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여 84km의 전선을 단독으로 틀어막겠다는 만용을 부리는 대신 적의 공세가 예상되는 주요 축선에 병력과 자원을 집중했다. 이는 북한의 전략전술과 2.의 내용과 맞물려 6사단의 전투력 열세를 만회하고 방어자의 이점을 극대화하는 시의적절한 조치로 평가받는다.4. 북한군의 전면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김종오 대령은 6월 23일부로 이뤄진 전국 비상해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6사단 전 장병의 외출외박을 전면 통제, 최고수준의 대비태세를 유지할 것을 명령했다.보면서 느끼겠지만, 6.25전쟁 초기 압도적인 물적, 질적 열세를 제외하고서는 국군의 패배요인으로 지적되는 요소 상당수가 6사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승만과 신성모라는 희대의 트롤링 듀오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6월 25일부터 29일까지의 춘천과 홍천에서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북한군 2군단과 국군 6사단의 작전계획은 굳이 적지않고 사진 2장으로 대체하고 넘어가겠다. 홍천 지구 전투에 대한 설명은 부실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전투의 상세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글이 납삽할 것이니 미리 큰 흐름을 잡고 가겠다. 북한군 2군단은 2사단을 5번도로를 중심으로 한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하였다. 6사단 7연대가 이들에 맞서 춘천을 방어했다. 북한군 12사단은 451번도로를 중심으로 한 인제-홍천 축선에 투입되었으며, 6사단 2연대가 홍천에서 방어전을 수행했다. 즉, 연대 하나로 사단급 제대를 수일간 저지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갑과 포병까지 얹혀진. 6사단 19연대는 사단사령부와 함께 원주에 배치되었다.춘천-홍천 지구 전투는 3단계로 전개되었다. 개전 당일에는 38선에 배치된 경계진지로 주저항선 전투가 벌어졌다. 개전 2-3일차에는 소양강과 말고개를 중심으로 한 최후저항선에서의 전투가, 마지막 4-5일차에는 방어선이 붕괴되고 육군본부로부터 전선의 전면조정 지시가 하달됨으로써 철수 및 지연전을 수행하였다.6월 25일 04시. 북한군이 전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직후 2사단이 춘천을 향해 남하했다. SU-76을 선두로 한 2사단이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기계화부대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필히 이뤄져야 했던 모진교 폭파가 실패하자, 전방의 경계진지에 전개되어 있던 7연대 2대대와 3대대는 주 방어진지로 철수를 개시했다.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2사단이 5번도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즉각 예비로 차출하였던 1대대들 5번도로와 그 주변을 감제할 수 있는 164고지로 진출시켰다.그리고 북한군 2사단에게는 재앙이 펼쳐졌다. 먼저 김일성이 입에 마르고 닳도록 강조한 산악전에서의 우세는 7연대가 164고지, 소양강, 봉의산 일대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면서 달성하기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산과 하천에 의해 극히 제약된 공간적 여유로 인해 소련식 제파전술을 구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개활지에서 밀집대형을 취하게 된 북한군 2사단은 소양강 남안과 164고지, 봉의산에서 이들을 감제하고 있던 6사단 7연대가 좌표를 불러주는 족족 105mm 고폭탄 사격에 신명나게 얻어맞을 수 밖에 없었다. 감제고지에 구축된 방어진지에서 쏟아지는 소총탄, 기관총탄, 57mm 고폭탄은 덤이었다. 전차가 없어서 빛이 좀 바랬다만, 보병과 포병의 철저한 제병합동은 북한군이 아닌 국군 6사단에 의해 구현되었다.16포병대대장에 의해 사전에 철저히 수립된 화력지원 계획에 힘업어 국군 전사상 최초로 이뤄진 화집점에 기초한 포병사격은 포병의 반응속도를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즉, 북한군은 더욱 신속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국군의 포병 사격에 얻어맞았다는 소리다.당연히 7연대가 마냥 꽃길만 걷지는 못했다. 친애하는 양키 친구들이 "에이 설마 춘천 지형을 보고서 북한이 여기에 기갑을 갖다 박겠어? 그냥 57mm 대전차포에 고폭탄 이빠이 채워놓고 보병한테나 쏘쇼"라고 고폭탄만 남겨준 덕분에 M1 대전차포의 태생적인 결함과 결합하여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대천차포가 SU-76의 연약한 장갑조차 뚫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필자는 군과 관련된 사안에서 의지드립을 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지만, 춘천-홍천 지구 전투에서 국군은 의지로 SU-76을 잡아냈다.북한군 SU-76의 사진이다. 개방형 전투실(오픈탑) 방식에, 당연히 포탑선회 능력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근접한 보병을 처리하기 위한 기관총도 하나 없었다. 장갑은 근접하면 50구경 중기관총에도 뚫리는 허접한 수준에 저열한 조작성으로 인한 느린 반응속도, 가솔린 엔진으로 인해 발화 취약성까지 가진 물건이었다. 이런 와중에 2사단의 제병합동 능력은 소련 군사고문단과 국군 양측의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어서 SU-76이 보병과 떨어져 단독으로 돌출되는 경우가 수시로 벌어졌다.춘천에서는 심일 소령(당시 소위)가 이끈 특공조가, 홍천에서는 강승호 소위의 특공자와 19연대 육탄 11용사가 육탄돌격하여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까넣으면 그대로 격파되는 경우가 여러차례 있었다.정말로 중대한 위기도 두 차례 있었다.먼저 소양강 남단의 주 방어진지로의 병력 재배치가 완료되지 못한 상황에서 7연대 2대대의 정면에서 북한군 4연대 일부 병력이 진출해 도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5중대장 김상흥 대위는 대대장의 명령을 받아 특공조를 이끌고 소양강을 역도하, 4연대 병력에 침투하여 기습을 가했다. 놀란 4연대는 도하준비를 중지하고 경계상태를 유지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는 "제4연대가 결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써 공격에 실패한 채 최초의 계선에서 전투를 지속"했다고 질타했다.2군단은 12사단 31연대를 투입하여 춘천 동북 7km까지 진출시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막상 31연대는 통신 두절로 진격을 정지하고서는 그대로 눌러앉아 하루를 통째로 소모해버렸다. 만일 통신이 원활하고 2사단과 12사단 간의 협조와 지원이 활발했더라면 북한군 31연대가 방어선을 완성하지 못한 7연대의 측면을 그대로 기습, 완전한 포위·섬멸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보전협동만 엉망이었던 것이 아니다. 2군단 소속 북한 포병들은 자신의 압도적 화력 우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뒤에서 놀고 있었던 경우가 태반이었다.직사화력을 지원해야 하는 대대포병은 굼뜬 진격속도조차 따라가지 못해 보병제대로부터 최소 3km, 최대 5km까지 떨어졌다. 전투가 한창일 시점에서 북한군의 76mm와 45mm 직사포의 투입은 한참 뒤에나 이뤄질 수 있었다. 122mm의 화려한 위력에 도취된 지휘관들은 연대포병과 대대포병을 경시하고 모든 임무를 사단포병에게 부여함으로써 북한군이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동원한 화력은 급감하였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76mm와 45mm가 7연대 정면에 포탄을 쏟아붇고, 122mm는 16포병대대와 지휘부에 묵직한 한방을 날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이런 북한군의 행태에 대해 7연대 작전주임 이남호 소령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서 북한군을 디스했다."그들은 이미 사단전술훈련까지 마쳤다고 하나 보전협동이 엉망이었다. 우리들을 얕보고 침입하였지만, 애당초 그들은 지형지물을 도외시하였고, 전술 따위는 없었다. 우리가 1개 연대로 1개 사단을 막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어며, 우리는 이길 수 있는 전투를 하였다."짧게 요약하자면, 북한이 꿈꿨던 소련식 제파전술의 한반도 버전은 까고보니 반자이 어택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춘천 지구 전투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홍천 지구 전투에서도 국군의 투혼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어론리에서 27일까지 북한의 공세에 밀리지 않고 방어했다. 28일과 29일에는 말고개로 후퇴하여 지형의 급격한 고저차를 이용하여 적 공세를 저지하였다. 특히, 수원진출 임무를 띄고 있던 603모터사이클 연대와 후속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북한군 5사단은 아무런 역할도 못한 채로 붕뜨게 되었다.국군 6사단이 철수하여 전투가 종결된 이후 북한군 2군단이 직면한 성적표는 참으로 처참했다.우선 전략목표 달성에 완전히 실패했다. 춘천은 6월 27일 저녁에, 홍천은 6월 29일 이후에나 점령한면서 본래 목표로 하였던 6월 27일에 전투를 종결한다는 구상은 무위로 돌아갔다.전술적 피해도 가볍지 않았다. 단순 산수로만 2사단과 12사단은 단 4일만에 30%의 병력손실률을 기록했고, 2군단의 보전협동 전술의 핵심인 SU-76의 37%를 손실했다. 압도적 전력우세에도 불구하고 재앙적인 손실률을 기록한 셈이다. 특히 산악전에 대비하여 투입된 조선의용군, 중공군 출신 고참 숙련병들을 대거 손실한 점은 김일성과 2군단 지휘부가 통곡할 일이었다.2군단과 12사단은 사실상 전멸하여 가평-여주-수원-원주-삼척으로 5중 포위망을 구성하기 위한 공세 지속은 고사하고 후방으로 빠져서 전면적인 재편성에 돌입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북한군은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대패를 당했다.물론 1단계 작계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상태에서 2군단의 코어인 2사단과 12사단을 놀릴 여유 따위 북한군에게 없었다. 김일성의 "속도전" 원칙에 따라 2사단과 12사단은 불가능해진 대규모 포위·섬멸 계획을 포기하고 한강을 도하, 충청도로 강행군을 개시했다.그 와중에 북한군 2사단은 서부전선에서 인정사정없이 얻어터지고 철수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수도사단과 진천 전투를 벌였다. 2사단은 415고지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하면서 적전도주 빈발과 지휘망 붕괴 위기에 시달리던 수도사단에게 첫 승리 타이틀을 달아준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후 반격으로 수도군단은 415고지를 다시 내주었으나,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무사히 퇴각하는데 성공했다.마지막 편에서 계속...참고문헌김종배. [군사 논단] 국운(國運)을 가른 6·25전쟁의 두 전투. 월간군사. 2023 (10). 2023. p.28-31. 김재철. 「한국전쟁 초기 춘천·홍천 지구 전투의 평가」.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24(1). 2009. p.1-19. 김태현. 「김일성의 6.25전쟁 전략 분석: 전략의 전술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105). 2017. p.95-149.나종남. (2020.06.). "6.25전쟁 초기 춘천전투의 기적". 월드뷰. https://theworldview.co.kr/archives/13934이성춘. 「6ㆍ25전쟁 초기 춘천 지구 전투의 재분석과 평가」. 융합/보안논문지. 15(4). 2015. p.133-145.박희성. 「북한군 제2보병사단의 6 ·25전쟁 초기 작전」. 육군군사연구소. 군사(116). 2020. p.1-50.손규석. (2010.6.10.). [6.25 결정적 전투들] 1. 춘천 지구전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https://www.korea.kr/news/issueQAView.do?newsId=148695067-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下) [시리즈] 춘천-홍천 지구 전투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上)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中) · (6.25전쟁 75주년) 1950년 6월 25일, 춘천과 홍천 (下) 첫 편에서 언급했듯이, 본래 북한의 1차 작계에 따르면 6월 27일에 서울 이북 지역 완전 장악 및 한강철교 차단으로 서울 이북의 국군 주력의 포위·섬멸이 이뤄져야 했고, 7월 1일에는 수원에 인공기가 나부끼면서 국군 제1, 6, 7, 8사단은 완전히 소멸했어야 했다.근데 막상 까보니까 결과는? 국군 제1사단을 비롯한 전방사단 다수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와해 직전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결과적으로 포위·섬멸당한 사단 없이 전부 후방으로 철수하는 것에 성공했다.북한군 1군단의 핵심부대인 105땅크사단은 김홍일 장군이 지휘한 한강 방어선 전투와 2군단이 6사단 하나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한 전황을 보여주면서 본래 목표였던 7월 1일 수원 입성은 고사하고 7월 4일이 되어서야 사단 주력이 한강 도하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 3일을 두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3일"이라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6월 29일 홍천에서 6사단이 퇴각을 완료하기 직전까지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이 상황 속에서 북한군 2군단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7월 1일에 수원, 여주로 진출하기란 꿈과 같은 소리였을 터.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장군, 이 두 명장이 한강과 춘천-홍천을 틀어막으면서 북한의 가장 중요한 1단계 작전의 전략목표 달성을 완전히 무위로 돌려버렸다.이후 국군은 계속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부산에 집결, 재편성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북한이 구상했던 웅대한 "1개월 안에 남조선 완전 적화통일"계획은 1단계는 물론이고, 2, 3단계 작계마저 완전히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운명을 맞이했다.그렇게 혹부리우스 김일성의 원대했던 "소련식 만주 전략 공세 작전 ver. Korean Peninsula"는 허망하게 종언을 고했다....는 무슨, 종언을 고한 수준에서 그쳤으면 다행이지 훨씬 악화되었다.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83호를 채택, 유엔 및 유엔 구성국들 차원에서 북한을 대상으로 집단안보 조항을 사상 최초로 발동하였다.6월 29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과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미 해군 7함대와 주일 미 공군이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군사작전을 개시하였다.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GHQ와 극동사령부(Far East Command, FECOM) 휘하의 병력을 대상으로 전권을 부여하고 미군 지상군 파병을 공식화하였다. 맥아더는 즉시 주일미군을 부산 등을 통해 한반도로 전개하기 시작했다.최소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라 자신했던 미국의 전면적인 참전이 단 6일 만에 결정되고, 7함대와 주일 미 공군,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미 해군과 공군 전력들이 한반도에 집결하여 포탄과 폭탄을 쏟아부으면서 북한 지도부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박헌영이 그토록 호언장담했던 남한 내 20만 남로당원의 일제 총궐기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남로당 지도부와 북한이 직접 침투시킨 간첩들도 북한 지도부의 남침계획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어떻게 봉기를 준비하겠는가?전국(戰局)의 전면적인 악화는 김일성의 속도전에 대한 집착과 광증을 더욱 악화시켰다. 북한군의 "제병합동"과 "전격전" 수행 능력의 결여를 확인한 혹부리우스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북한군 2군단장과 그 휘하의 2사단장, 12사단장을 전격 해임하는 동시에 후방에 머무르고 있던 소련 군사고문단을 서울에 위치한 전선사령부와 각 군단 사령부에 대거 배치할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7월 16일, 북한군 전선사령부에 김일성이 직접 내려와 지휘를 시작, 전선사령관 이하 주요 지휘관들에게 "속도전"에 집중하라는 압박을 계속 넣었다.말같잖은 소리다. 전쟁 극초기에도 한국 공군 제1전투비행단의 P-51 10기에도 대응 못하고 날려먹은 지상 기동전력이 얼마인데. 미
작성자 : 캬루룽단또단또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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