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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기록 시리즈 2) 폴 포지션에 관한 잡다한 기록 10가지
[시리즈] 별별기록 시리즈 · (별별기록 시리즈) 포디움에 가장 자주 오른 트리오들은 누구일까? 1. 첫 폴 포지션을 획득하는데 가장 오래 걸린 드라이버는?세르히오 페레즈가 무려 216 그랑프리로 1위. 2011시즌 자우버에서 데뷔한 체코는 데뷔 12시즌 만인 2022 시즌 사우디 아라비아 그랑프리에서 커리어 첫 폴 포지션을 획득함.2. 첫 폴 포지션을 가장 빨리 획득한 드라이버는? (현역 기준)현역 선수중 루이스 해밀턴이 데뷔 후 여섯 경기만에 폴 포지션을 획득함.2007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첫 폴을 차지함과 동시에 그대로 우승에 골인 하며 첫 폴 투윈 기록도 작성함.현역 기준으로 한 이유는 통산 1위는 과거의 드라이버 여러 명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 (쥐세페 파리나, 마리오 안드레티, 자크 빌르너브 등등이 데뷔전에 폴 포지션을 획득)현역중 두번째는 의외의 인물인 니코 휠켄버그로, 데뷔 후 18경기만에 윌리엄스와 함께 폴 포지션을 차지한게 인상적임. (2010 브라질 그랑프리)3. 최다 연속 폴 기록은?아일톤 세나와 막스 베르스타펜이 8연속 폴로 공동 1위를 차지함.아일톤 세나는 MP4/4와 함께한 1988시즌 스페인 그랑프리 부터 1989 USA 그랑프리까지 두 시즌에 걸쳐 8번 연속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하며 1988시즌 첫 월드챔피언십을 거머쥠.막스 베르스타펜 역시 2023 아부다비 그랑프리부터 2024 이몰라까지 두 시즌에 걸쳐 8번 연속 폴 포지션을 획득하며 두 시즌 모두 챔피언십을 거머쥠.2위 기록인 7연속 폴 포지션 역시 세나가 가지고 있고, 동시에 프로스트, 슈마허, 해밀턴과 같은 불세출의 드라이버들도 7연속 폴 기록을 가지고 있음.4. 가장 많은 컨스트럭터를 거치며 폴을 따낸 선수는? 무관의 제왕 스털링 모스가 폴 포지션을 5개의 컨스트럭터와 함께 따내며 1위에 오름.스털링 모스는 쿠퍼, 로터스, 마세라티, 메르세데스, 반월과 함께 폴 포지션 16회를 기록했음. 또한 같은 국적인 영국의 전설적 드라이버 존 서티스 역시 5개의 컨스트럭터와 8개의 폴 포지션을 합작하며 공동 1위에 오름.서티스는 쿠퍼, 페라리, 혼다, 로라, 로터스와 함께 하며 1964년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 챔피언십을 거머쥠.페라리와 함께한 영국인의 챔피언십 우승, 괜시리 현재 그리드의 누군가가 생각나는 대목.공동 2위로는 4개의 컨스트럭터를 거치며 폴을 따낸 판지오, 젠슨 버튼, 루벤스 바리첼로등이 있음.5. 하나의 엔진 서플라이어와 함께 가장 많은 폴을 따낸 선수는?모두가 예상했듯 루이스 해밀턴이 104 폴 포지션을 메르세데스 엔진과 합작하며 1위를 차지함. 커리어 전체 폴 포지션을 보다폰 맥라렌-메르세데스, 메르세데스와 함께 했으니 당연한 결과로,과연 페라리 엔진과 함께 폴 포지션을 추가할 수 있을지 주목되는 부분.2위는 슈마허가 페라리와 합작한 58개의 폴 포지션, 3위는 아일톤 세나가 혼다와 함께한 46개의 폴 포지션, 4위는 베텔이 르노와 합작한 44개의 폴 포지션 등이 있음.6. 획득한 두 폴 포지션간의 간격이 가장 길었던 선수는?1위는 무려 8년 11개월만에 폴 포지션을 따낸 키미 라이코넨이 차지함.168 그랑프리 간격으로 따낸 폴 포지션이었는데, 2008시즌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마지막 폴을 따낸뒤 2017시즌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다시 폴 포지션을 탈환함두 기록 모두 페라리에서 따냈다는게 재밌는 부분. (의외로 우승도 몇번 한 로터스에서는 폴 포지션 기록이 없음.)공동 2위는 마지막 폴 포지션 이후 107경기만에 폴 포지션을 따낸 마리오 안드레티와 지안카를로 피지켈라가 차지함.현역 선수중 1위는 2년 8개월 만에 폴 포지션을 다시 획득한 랜도 노리스가 차지함. (2021 러시아 그랑프리 ~ 2024 스페인 그랑프리)참고로 알론소가 남은 커리어 내에서 폴 포지션을 따낸다면 압도적인 1위가 될 수 있음. (마지막 폴 포지션: 2012시즌 독일 그랑프리)7. 폴 투윈을 가장 많이 놓친 선수는? 루이스 해밀턴이 43회로 1위를 차지함. 사실 말이 안되는 기록인게 막스 베르스타펜이 낸 폴 포지션 횟수와 동일한 기록임. 저 만큼 폴을 따내기도 힘든데 아무튼 대단한 기록.2위는 세나가 36회, 슈마허가 28회로 3위, 베텔이 26회로 4위.모두가 궁금해 할 르클레르는 21회로 5위를 차지함. (참고로 르클레르는 26회 폴 포지션을 차지함.)8. 가장 많은 서킷에서 폴을 따낸 선수는?폴 포지션의 제왕 루이스 해밀턴이 32개 서킷에서 폴을 따내며 1위를 차지함.첫 폴 포지션 몬트리올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의 루사일까지, 32개의 서킷에서 그는 첫 그리드를 차지함.2위는 23개 서킷에서 폴 포지션을 따낸 세바스티안 베텔이 차지함.공동 3위는 22개 서킷에서 폴 포지션을 따낸 알랭 프로스트와 막스 베르스타펜이 획득.9. 생일에 폴 포지션을 따낸 드라이버는?르네 아르누, 나이젤 만셀, 랄프 슈마허 세 드라이버가 생일에 폴 포지션까지 차지하는 경사를 맞이함.르네 아르누는 생소할텐데 80년대에 꽤 이름을 날렸던 드라이버로, 1983시즌 페라리에서 3승을 거두며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가기도 했던 선수.나이젤 만셀은 콧수염 챔피언으로 엪붕이들 대부분이 알테고, 랄프 슈마허 역시 최근의 게이 밈으로 화제가 된 드라이버지만, 현역시절 꽤 실력있는 좋은 드라이버였음.재미있는 점은 세 드라이버 모두 해당 경기 우승에는 실패함.10. 포뮬러 원 75년 역사에서 몇 명의 드라이버가 폴 포지션을 차지했을까?75년 역사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한 드라이버는 고작 107명임.1950년 5월 12일 쥐세페 파리나가 포뮬러 원 역사상 첫 폴 포지션을 따내며 역사를 시작했고, 50번째로 첫 폴 포지션을 따낸 드라이버는 조디 섹터로, 1976년 스웨덴 그랑프리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함.100번째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드라이버는 막스 베르스타펜으로, 2019 헝가리에서 자신의 첫 폴 포지션 기록을 세움.그리고 가장 최근에 107번째로 폴 시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드라이버는 2025 중국에서 첫 폴을 따낸 맥라렌의 오스카 피아스트리.한줄 요약: 폴 포지션 기록에서 대충 루이스 해밀턴을 찍으면 얼추 맞는다.
작성자 : 민족반역자베르스타펜고정닉
오싹오싹 인류의 운명이 걸렸던 탈출사건
2차대전 프랑스가 독일의 낫질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영국의 수상 처칠은 울부 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군사적 재앙이다" (a colossal military disaster)"그곳에 영국군의 뿌리와 핵심 그리고 두뇌가 전부 묶여있다" (The whole root and core and brain of the British Army)무슨 일일까? 1940년 5월, 프랑스의 해안도시 됭케르크에는 낫질 작전으로 이도저도 못하고 고립 되어버린 프랑스군 10만,영국군 20만 등 연합군이 있었다 이 외에도 유럽 각지 병력도 있어 다 합치면 30만이 넘었다 문제는 영국군 20만은 프랑스를 돕겠다고 본토 방위를 책임져야 할 군대까지 다 보낸 병력들이였다 당시 본토 브리튼 섬에는 병사수는 15~20만으로 꽤 많았지만 소총조차 없는 부대가 절대 다수라서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 수는 고작 4~5만명이였다 그야말로 무방비나 다름 없었다 오죽 했으면 처칠마저도 "손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다 들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라고 했을 정도 당연히 대영제국은 최대의 식민제국 식민지 이곳 저곳에는 무장한 병력들이 많았지만 얘들 다 끌고 올려면 못해도 몇 달이 걸렸다 제 아무리 영국 해군이 강하다고 한들 이토록 병력수가 턱 없이 부족하다면 영국의 해안선 전부를 막는 것은 불가능 했다 즉, 됭케르크에 묶여버린 20만은 대영제국 최후방 병력이자 몰살 당하면 영국의 안전은 보장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처칠은 울부짖었고 히틀러는 미소를 지었다 이들만 제거한다면 전유럽 나아가선 세계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히틀러는 결정적 실수를 하고 만다 바로 정지명령(Halt order)이였다 1940년 5월 24일, 독일의 기갑부대는 파죽지세로 됭케르크의 외곽까지연합군을 밀어붙혔혀 독안에 든 쥐였다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의 거리는 고작 13km그러나 히틀러는 갑자기 진군 중지를 내린다 먼저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은 독일 사령부였는데 군을 이끌던 장군들마저 중지 명령에 충격을 먹었다 이유는 독일군 참모들도 기갑부대의 진군 속도가너무 빨라서 보급과 유지가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보병 부대가 합류할 때 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였다 독 안에 가뒀으니 헤르만 괴링은 공군의 폭격만으로도 이 30만 연합군을 궤멸 시킬 수 있다고 주장 했다 히틀로 또한 아까운 탱크들을 소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히틀러도 공식적으로 진군 중지를 내렸다 그래서 24일날 부터 3일동안 눈 앞에 적들을 두고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영국의 탈출선들과 엄호,지원 부대가 나타나자 그제서야 공격이 시작 됐는데 이 때가 27일이였다 당연히 처칠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의 운명을 건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시작 됐다 당시 처칠은 군함 외에도 어선,유람선,요트,구명보트 등 그야말로 영끌 수준으로 배를 모았는데그 수가 무려 약 900여척이나 되었다 이 중 주력은 220척의 구축함들이였다 독일은 폭격으로 배들을 다 부술려고 했지만 영국에게 이 병력은 목숨줄이였기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 힘이 나온다 했던가? 영국은 단 한차례도 독일과의 공준전에서 지지 않았고그 덕에 제공권을 확보하여 배들이 해안가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날씨도 안개가 잔뜩 끼어 독일군의 공습으로 부터 가림막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아직은 낫질 작전이 끝나지 않았기에프랑스군 4만여명이 됭케르크 전방 릴에서필사적으로 어그로를 끌면서 시간을 벌어줬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연합군을 탈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5월 26일부터 시작 된 철수작전은 2일차에는 겨우 17,000여명 밖에 철수 시키지 못해처칠은 절규 했지만 끝까지 포기 하지 않았고 9일동안 무려 33만명을 대피 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덕에 영국은 병력을 보존 할 수 있었고 이 병력으로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에게 맞설 수 있었다 그야말로 2차 세계대전 최고의 기적이였다 고작 10km 남짓 코앞에 거리에서 후방 지원도 없고 날씨 억까도 없고 앞에는 바다 뿐 도망갈 길도 숨을 곳도 없다 탁트인 해안가에 수십만이 바다만 넋 놓고 바라 보는이 상태에서 탱크들이 포를 뻥뻥 쏘면서 들이닥친다면 못해도 절반 이상은 죽는 대참사가 났을 것이다 실제로 처칠도"5만명이나 구하면 다행" ,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지도 모른다" 소수라도 살아남는 것을 기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됭케르크에서 미온적인 태도와 정지 명령은 2차대전 히틀러 최대의 실책으로 꼽히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if 거리가 되고 있다 이에 많은 역사가들은 히틀러는 영국과의평화 협성을 염두해두고 일부러 진군을 멈췄다고 주장한다 만약 됭케르크에 있는 영국군을 전멸 시킨다면양국간에 치유 불가의 불화가 조성 되므로 실제로 정지명령도 암호화 되지 않은채마치 들으라는듯 그대로 하달 됐다 그리고 기록 중엔 당시 히틀러가 당시 자신이 너무 순진 했었다고 후회 한다는 기록도 있고 나치군 총사령부의 발터 발리몬트 기록에는 처칠이 자신이 내민 스포츠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런 히틀러의 미온적 태도와 탈출 방조는 날조라고 반박한다 그저 히틀러의 판단 미스를 쉴드치기 위한 나치의 체면치레용 선전이라는 것하지만 됭케르크 철수 작전 동안에도 히틀러와 처칠의 내각은 평화협상 조건을 두고 격론을 벌이긴 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외무장관 로드 핼리팩스가 평화협정 맺죠 했다가 처칠이 강경하게 반대해서 무산 됐다 진실이 뭐든 당시 나치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진군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갔더라면 영국군이 쉽게 철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 했고 당시 연합군은 무기도 급하게 다 버리고 튀었는데이 때 노획한 무기의 양은 무려 8~10사단을 무장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류의 운명을 건 역사상 가장 처절한 탈출이였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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