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돈과 권력, 명예와 사랑, 신념과 사상...
겉으로 드러난 동기들은 다양하지만, 그 뿌리를 추적하면 결구 한 줄기의 흐름에 닿는다.
그것이 바로 "리비도"다.
프로이트가 이 말을 처음 꺼냈을 때, 그는 이를 단순히 성욕으로 한정햇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의 협소함을 넘어서 리비도는 생명 에너지이며 단지 성으로 국한되지 않는,
창조와 파괴의 원동력이라 칭했다.
인류의 역사는 위대한 발명과 찬란한 문명, 그리고 피로 얼룩진 전쟁과 몰락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거대한 파노라마를 움직여온 힘은 무엇이었는가?
지리적 조건, 기술 발전, 지도자의 결단 등...... 역사가들은 수없이 많은 외적 요인을 기록했지만
그 모든 배경 뒤에는 눈에 보이지 한 줄기 흐름이 잇다.
그것이 바로 "리비도"다.
이 흐름은 마치 지하의 용암처럼 끊임없이 들끓지만, 표면에서는 잠잠한 척한다.
때로는 예술과 사랑, 종교와 철학으로 승화되고, 때로는 폭력과 전쟁, 파괴와 집착으로 표출된다.
그것이 리비도의 양면성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성적 에너지라 불렀고,
인간의 무의식이 이 에너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 융은 스승의 한계를 넘어,
리비도를 생명 자체를 밀어 올리는 원동력으로 확장했다.
그에게 있어 리비도는 단지 침실의 속삼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엇다.
아이의 울음, 시인의 창작, 전사의 분노, 수도승의 기도, 정치가의 연설.
이 모든 것이 리비도의 발현이자 변주인 것이다.
이 힘은 바람처럼 잡히지 않고 , 불처럼 꺼지지 않는다.
그 방향이 창조로 향하면 예술과 과학, 사랑과 공동체가 태어나지만
그 방향이 파괴로 향하면 전쟁과 학살, 광기와 붕괴가 뒤따른다.
리비도는 선악의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칼과 같아서, 연인을 지키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찌르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고대인들은 이 힘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기"라고 했고,
인도의 베다는 "프라나"라 하였으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에로스"라 부르며 사랑과 창조의 근원으로 숭배했다.
각 문화권마다 표현은 달랐으나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이 불가시의 에너지를 느끼고
경외하는 마음은 같았다.
리비도는 강과 같다.
그 흐름이 잔잔하면 땅을 적시고 문명을 기르지만
홍수가 되면 마을을 쓸어버린다.
문명은 이 강에 댐을 세우고, 수로를 내고, 때로는 홍수를 막으려다 역류를 맞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법과 도덕, 종교와 예술이다.
그러나 강의 근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물길을 바꾸거나, 흐름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폭발을 지연시키는 것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리비도의 여정을 따라가 보려 한다.
태아기의 고요한 양수 속에서부터 시작해,
문명과 억압의 장치, 승화와 창조의 연금술, 그림자로서의 파괴와 광기,
성과 권력의 밀월, 종교와 금기의 불길, 자본주의의 욕망 시장,
그리고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함께 춤추는 무대까지.
나는 리비도를 미화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고귀하게 만들고, 동시에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 양극의 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태어나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기폭 고요한 바닷속에서 그것은 숨쉬고 있다.
이 바다의 이름은 어머니의 자궁이다.
태아는 양수 속에서 절대적인 안정과 보호를 누린다.
온도는 변함없고, 영양은 탯줄을 통해 끊임없이 공급되며,
바깥 세상의 소음은 부드러운 물결 속에서 필터링된다.
들려오는 것은 어머니의 심장 박동, 규칙적인 호흡, 그리고 간헐적인 장기의 울림 뿐이다.
이 완벽한 환경은 최초의 쾌락과 안전을 동시에 제공한다.
아직 배고픔도, 추위도, 외로움도 없다.
인간은 일생동안 이 상태를 무의식 속에 각인한 채 살아간다.
이는 훗날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안식처"의 원형이 된다.
사랑하는 이의 품, 따뜻한 집, 안전한 공동체, 신앙의 품 속......
그 모든 안식의 이미지 뒤에는 양수의 바다가 있다.
그러나 이 완전하은 갑작스러운 붕괴로 끝난다.
출산의 순간, 태아는 압박과 통증, 빛과 소음에 휩싸인다.
스스로 호흡해야 하고, 배고픔과 추위라는 새로운 감각을 처음으로 맛본다.
이것이 최초의 상실 경험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순간이 리비도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본다.
리비도는 단순히 "원하는 힘"이 아니라,
잃어버린 완전함을 되찾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평생토록, 무의식 속에서 이 최초의 상실을 메우려 한다.
사랑, 음식, 권력, 창조, 종교... 그 모든 추구는 양수 속 완전함의 변형된 그림자다.
이 원초적 상실은 리비도의 두 가지 방향성을 만든다
하나는 안정 욕구이고
또 하나는 탐험 욕구이다.
안정 욕구는 다시 안전하고 보호받는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이다.
화복한 가정, 친밀한 관계, 반복과 습관, 규율 속의 안도감 같은 것 들이다.
탐험 욕구는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찾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여행, 도전, 발명, 연애의 설렘, 새로운 인간관계 같은 것 들이다.
이 두 축은 평생 동안 서로 밀고 당기며 인간을 움직인다.
안정만 추구하면 정체와 무력감에 빠지고, 탐험만 추구하면 위험과 파멸이 따른다.
성숙한 리비도는 이 두 축의 균형 위에서 작동한다.
구강기는 프로이트가 정의한 첫 발달 단계다.
아기는 입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빠는 것과 씹는 것의 쾌락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영양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빠는 행위 자체가 "안전과 만족"을 상징한다.
항문기의 아기는 배변 훈련이 시작되면서
억제와 해방을 배운다.
여기서 쾌락은 단순한 신체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제하고 세사엥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으로 확장된다.
남근기 아이는 자신의 성기와 타인의 성 차이를 인식하며,
성적 호기심과 더불어 권력과 역할에 대한 감각을 형성한다.
이 모든 단계는 단순한 발달 과정이 아니라
리비도의 흐름이 어떻게 형태를 바꾸며 확장되는지 보여주는 지도라 할 수 있다.
융의 분석 심리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 대지의 어머니, 위대한 모성이라는 원형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는 실제 어머니와 동일하지 않다.
그보다 더 깊고, 더 보편적이며, 인류가 공유하는 상징적 이미지다.
이 "모성 원형"은 때로는 자애로복 풍요로운 모습으로
때로는 질투와 파괴를 품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안식처의 달콜함과
그 안식처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은
이 원형의 양면성을 반영한다
리비도의 원초적 경험은
완전함에서 시작해 상실로 이어진다.
그 상실은 인간의 영원한 추구를 낳는다.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고, 권력을 쥐려 하며, 예술을 창조하고, 신을 찾는 것은
결국 양수 속 바다로의 귀환을 꿈꾸는 변형된 시도다.
그러나 그 바다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리비도의 여정은 완전한 귀환이 아니라,
그 귀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갖체에서 의미를 얻는다.
그리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이동"하게 만드는 근원적 힘이라 할 수 있다.
리비도는 강물처럼 흐른다.
그러나 강물이 제멋대로 범람하면 마을을 삼키듯, 욕망이 무제한으로 흘러넘치면 공동체는 붕괴한다.
문명은 이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고
법과 금기라는 댐과 거미줄을 쳐 리비도의 흐름을 제어하려 했다.
최초의 법은 재산권이나 살인 금지보다 성에 대한 규제로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이는 생물학적 이유와 사회적 이유가 결합된 결과였다.
성관계는 혈통과 상속, 권력 구조에 직접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간통과 강간, 혼외관계에 대해 극형을 명시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도 혈적간 결혼, 특정 시기의 성관계를 엄격히 금했다.
이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욕망을 제어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종교는 법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욕망을 억압했다.
법이 외적 처벌을 통해 제재한다면, 종교는 내적 죄책감과 신의 심판으로 통제했다.
원죄의 개념 속에 성적 욕망을 인간 타락의 근원으로 규정한 기독교.
꾸란과 하디스에서 성적 행위의 시간, 장소, 대상을 세세하게 규율로 정의 한 이슬람교ㅣ
출가자의 계율에서 불음의 수행을 필수로 삼은 불교.
이러한 종교적 금기는 욕망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신을 향한 헌신"이나 "수행의 열정"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억압은 욕망을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지하로 스며들어 더 강한 형태로 폭발하게 만든다.
고대 로마에서 바카날리아 축제는 술과 춤, 성적 향락이 결합된 의식이었다.
본래는 포도 수확을 기념하는 소박한 잔치였으나
공화정 말기에는 억눌린 욕망이 폭발하는 집단 광란의 밤이 되었다.
결국 원로원은 이 축제를 국가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강제로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중세 유럽의 카니발 역시 평소에는 엄격히 금지된 행동이 허용되는 기간이었다.
사제와 귀족이 풍자당하고, 거리에서 남녀가 뒤섞여 춤추고 술을 마셨다.
이는 금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도권이 허락한 한시적 해방이엇따.
억압은 단순히 사회 질서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권력 유지의 도구이기도 했다.
욕망의 흐름을 통제 할 수 있는 자는 사람들의 삶을 통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황제들은 원형 경기장과 목욕탕을 지배하몃 ㅣ민의 쾌락을 관리했고
중세의 군주들은 귀족들의 결혼과 상속을 승인하며 정치적 충성을 확보했다.
현대 권력자들은 미디어와 광고를 통해 욕망의 방향을 설계한다.
이처럼 억압은 단수한 금지가 아니라
방향 설정과 해방의 타이밍을 장악하는 기술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억압이 단순히 부정적인 결과만 낳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제한된 조건이 창의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성적 묘사는 종교 검열을 피해 상징과 은유 속에 숨어들었다.
고전 신화의 비너스나 다이아나, 성서 속 수산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신성했지만
그림 속 인체와 시선에는 숨겨진 육욕이 깃들어 있었다.
이 은폐와 암시의 기법은 검열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명은 리비도의 흐름 위에 거미줄처럼 얽힌 억압의 구조를 짜놓았다.
이 거미줄은 욕망이 무질서하게 폭주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동시에,
그 욕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여 권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욕망은 와넞ㄴ히 억제되지 않는다.
그물 사이의 틈새로 빠져나가거나, 때를 기다렸다 폭발한다.
역사의 수많은 혁명과 반란, 예술의 새로운 흐름들은
이 틈새에서 자라난 리비도의 씨앗이었다.
이렇듯 리비도는 억압 속에 잠들어 있지 않는다.
그것은 길을 찾는 강물과 같아서, 막히면 돌아가고, 길이 없으면 땅속을 파고 스며든다.
그리고 때로는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욕망이 창조와 문화의 불꽃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 변환을 프로이트는 "승화"라 불렀다.
승화는 단순한 억제나 인내가 아니다.
억제는 욕망을 묻어버리는 것이고, 승화는 욕망을 새로운 형태로 살려내는 것이다.
욕망의 원래 목표가 사회적으로 욕납되지 않거나 실현 불가능 할 때,
그 에너지가 예술, 과학, 철학, 정치 등 다른 영역으로 방향을 바꾸는 현상이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종교 검열 속에서도 리비도를 숨기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인체의 조형미를 절정까지 끌어올렸다.
그 근육과 비례, 표정 속에는 인간의 육신에 대한 찬탄과 육욕이 숭고로 변환된 힘이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고대 신화를 빌려, 여서으이 나체를 아름다움과 창조의 상징으로 포장했다.
이것은 성적 매혹을 미의 철학으로 재해석한 전형적 승화였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사랑과 이상에 대한 열망이 음악으로 승화된 예다.
그의 사적인 서한 "불멸의 연인에게"에서 느껴지는 격정과 갈망은
합창 속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는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됐다.
과학자와 철학자들도 욕망의 승화를 피하지 않았다.
뉴턴이 중력을 발견한 과정, 다윈이 진화론을 집대성한 노력에는
지적 소유와 인정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숨어 있었다.
지식의 욕망은 육체적 욕망만큼이나 강렬하다.
둘 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완성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단순한 성적 욕망이 아니라, 미와 진리를 향한 상승 운동으로 보았다.
그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사랑에서 시작해 영혼의 아름다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다리를 제시했다.
이 사다리가 바로 승화의 철학적 비유다.
불교의 선종에선느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관찰하고 깨닫는 방법을 택한다.
탄트라 불교에서는 성적 결합을 우주의 합일로 승화시크는 의식을 행한다.
육체적 쾌락을 통해 집착을 초월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시도다.
기독교의 수도원 전통 속에서도 승화의 흔적이 보인다.
금욕과 기도, 수도사의 노동은 억눌린 욕망을 신의 향한 헌신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중세 수도원의 필사본 제작은 그 정교함과 집념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넘어
인간 욕망이 집충과 창조로 변환된 표본이었다.
승화는 무조건 일어나느 것이 아니다.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충분한 에너지, 장애물, 대체제가 그것이다.
우선 강렬한 욕망이 있어야 하며
원래의 욕망의 직접적 실현이 불가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욕망을 투사할 새로운 목표와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만나면, 욕망은 단순한 불만이나 좌절이 아니라
창조와 성취의 원동력으로 바뀐다.
승화가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승화된 욕망은 왜곡된 문화와 위험한 이념을 낳을 수 있다.
20세기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미술과 정치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억눌린 욕망을 집단주의와 군국주의로 승화시킨 사례이다.
겉보기엔 장업하고 고귀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끝은 파괴였다.
승화는 욕망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다.
금지된 욕망을 죽이지 않고, 다른 형태로 빛나게 만드는 기술이다.
인류의 문명은 이 기술 위에서 꽃을 피웠고
예술과 과학, 종교와 철학은 모두 이 불꽃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잊어선 안될 것이다.
승화의 불꽃은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도 있지만
방향을 잘못 잡는 순간 거대한 화재가 되어 세상을 삼키고 한다는 것을.
리비도는 생명을 낳고 예술을 만들며 문명을 세운다.
그러나 그 힘이 뒤집히면, 같은 에너지의 파괴와 광기로 치환된다.
에로스의 밝은 빛이 강렬할수록
그 반대편의 타나토스는 더욱 짙어진다.
프로이트는 후기 이론에서 리비도와 함께 또 하나의 본능
타나토스를 제시했다.
타나토스는 무질서와 파괴,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 충동을 뜻한다.
이 두 본능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얽혀잇다.
리비도가 창조와 결합을 지향한다면
타나토스는 분리와 소멸을 향한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둘은 종종 한 무대 위에서 함께 춤춘다.
전쟁은 억눌린 집단 리비도가 한순간에 해방되는 의식이다.
정복, 지배, 약탈의 욕망은 정치적 명분으로 포장되지만
그 심층에는 힘과 소유의 원초적 충동이 흐른다.
로마의 장군들과 병사들은 전리품과 포로를 행렬에 세우고
승리의 기쁨을 도시 전체에 과시하는 개선식을 명예로 여겼고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신의 뜻이라는 명분 뒤에 땅과 부, 성적 노획에 대한 욕망의 꿈틀거린 결과였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일어난 세계대전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대중의 집단 리비도를 결집시켰다.
이러한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욕망이 국가 단위로 집단 발작 같은 것을 일으킨 순간이라고 볼 수 있따.
욕망이 개인 내부에서 비틀릴 때
그것은 광기의 형태로 발현된다.
성적 욕망과 권력욕, 인정 욕구과 결합하여 폭저걱 형태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억압된 성욕과 여성혐오가 살인으로 폭발한 잭 더 리퍼
열등감과 권력욕, 민족적 환상이 결합해 인류사 최작의 파괴를 초래한 히틀러같은 유명 사례 뿐 만 아니라
현대의 연쇄살인범 중 다수는 어린 시절의 학대나 성적 업압이 잔혹한 범행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들도 리비도의 그림자를 직면한다.
그 그림자를 마주한 이들은 종종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창작을 한다.
빈센트 반 고흐나, 프란시스 베이컨, 에드거 앨런 포 같은 이들 처럼
예술은 그림자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장이 되었다.
파괴 행위는 단순히 본능의 방출이 아니라
때로는 괘락을 수반한다.
이는 금기의 역설 때문이다.
파괴가 금지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될수록
그 금기를 깨는 순간의 해방감은 강렬해진다.
고대 로마의 검투 경기에서 관객들은 피를 보며 열광했고
프랑스 혁명기의 단두대 앞 광장은 수천 명의 호기심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이 감정은 단순한 잔혹성의 산물이 아니라
억눌린 리비도가 폭발하며 만들어내는 집단적 도취라 할 수 있다.
리비도의 그림자는 전염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광풍은 종교적 금기와 성적 억압, 경제적 불안이 결합해 폭발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자신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마녀라는 타자에게 투사해
그들을 불태움으로써 스스로의 정결함을 확인했다.
현대에도 이런 현상은 SNS를 통한 집단적 마녀사냥으로 되살아난다.
그 차이는 횃불이 키보드로 바뀌었을 뿐이다.
리비도의 그림자는 결코 제거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사회 속에 항상 공존한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외면하면
그 힘은 우리를 불태우는 불길이 되고, 재만 남기게 된다.
반대로 그것을 직시하고 다룰 줄 알면
그 불길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도 있다.
성과 권력은 오래전부터 서로 비추는 거울이었다.
타인의 몸을 지배하려는 충동과 타인의 의지를 지배하려는 충동은 그 뿌리가 같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소유와 지배의 리비도에서 비롯되며
인류의 정치사와 연애사, 궁정과 침실, 전장과 연회장은 모두 이 밀월의 무대였다.
권력은 단순한 정치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삶과 선택을 좌우 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능력 자체가 강력한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클레오 파트라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은 것은 단순한 미모 뿐 만 아니라 이집트 여왕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려과 지적 카리스마 였던 것이나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 14세는 궁정의 화려한 연회와 예술 후원을 통해 자신을 신적 존재이자 궁국의 매혹 대상으로 연출했다.
현대의 정치인들과 스타들이 무대 위 의 연설, 미디어 속의 미지 관리, 대중을 설득하고 매혹하는 능력은
성적 리비도의 정치적 변주다.
역사에서 침실은 단순한 사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종종 외교와 권력 거래의 현장이기도 했다.
왕실간의 혼인은 혈통 동맹을 강화하는 정치적 계약이기도 했고
신랑과 신부의 개인적 감정보다 왕좌와 영토의 이동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
중국 명/청대 황제의 후궁은 단순한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 세력과 가문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1차 세계대전의 마타 하리는 미모와 성적 매혹을 무기로 여러 국가의 비밀을 빼낸 "침실 권력"의 상징이었다.
성적 관계와 권력 관계는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주도권 : 권력을 쥔 자는 관계의 조건과 방향을 결정한다
복종과 충성 : 피지배자는 복종을 통해 안전과 보상을 얻는다.
배신과 전복 : 관계의 균형이 깨지면 반란과 이탈이 발생한다.
이 구조는 국가와 국민, 군주와 신하, 지도자와 추종자, 연인과 연인의 관계 속에 모두 존재한다.
권력은 종종 성적 타락으로 이어진다.
권력이 억압을 무력화 하고
금기를 쉽게 넘게 하는 까닭이다.
권력을 절대성을 성적 방종으로 과시한 칼리굴라나
왕의 연애와 결혼이 국가 종교 구졸르 뒤흔들고 결국 영국 국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한 헨리 8세가 그 예이다.
권력자는 대중과도 일종의 "성적 관계'를 맺는다.
카리스마와 이미지, 대중의 환호와 지지, 감정적 유대는
정치적 결속을 넘어 심리적, 감각적 쾌락의 교환이 된다.
대중은 권력자의 힘에 매혹되고
권력자는 대중의 사랑과 복종에 취한다.
이 쾌락의 회로가 깨질 때
지배자는 매혹을 잃고 몰락한다.
성과 권력은 서로 강화하는 동시에 서로를 파멸시킬 수도 잇따.
권력은 성적 매혹을 부르고
성은 권력을 견고히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밀원은 불안정하다.
욕망이 정치를 삼키면 국가는 붕괴하고
권력이 욕망을 삼키면 인간성이 부패한다.
종교는 인류의 욕망을 길들이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장치다.
그 중심에는 늘 리비도의 억압과 변환이 있었다.
성적 욕망은 죄와 유혹으로 규정되었지만
그 불길은 완전히 꺼지지 않고, 오히려 신을 향한 열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성적 절체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는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욕망의 에너지를 공동체의 영적 사회적 목표로 돌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기독교 수도원의 정결은 수도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서약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영혼을 오직 하나님께 바치도록 한 것이다.
불교의 출가자는 불음을 지켜야 하며 이는 욕망을 끊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힌두 요가에서의 브라흐마차르야는 에너지를 보존해 영적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일부였다.
억압된 리비도는 종종 신을 향한 뜨거운 헌신으로 변모했다.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자들은 신과의 합일을 영적 결혼이나 신정한 황홀경으로 묘사했고
아빌라의 테레사가 그녀의 환시 기록에서 신과의 합일은 육체적 황홀감과 거의 동일한 감각으로 서술한 것이나
이슬람 신비주의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열정적인 시와 음악, 춤으로 표현한 수피즘이 그 예이다.
메블라나 루미의 시는 연인에게 바치는 노래 같지만 그 연인은 곧 알라였다.
이러한 표현은 성적 은유를 의도적으로 차용하여
욕망의 불길을 신을 향한 불로 재해석했다.
일부 종교 전통에서는 성적 결합 자체를 신성한 의식으로 보기도 했다.
남녀의 결합을 우주와의 합일로 해석해 성적 에너지를 깨달음의 도구로 삼은 탄트라나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의 일부 여신 숭배에서 신전의 성적 의식(매춘)은 풍요와 생명의 순환을 보장하는 신성한 행위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이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신과 인간, 자연과 우주를 매개로 잇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금욕은 종종 이면에서 타락을 낳았다.
억눌린 욕망이 비밀스럽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밀리에 정부를 두거나 성적 착취를 하기도 한 중세 성직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는 무려 교황 이었다.
억압된 리비도가 부패와 결합할 때 어떤 폭발력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종교 미술은 리비도의 억압과 승화과 교차하는 장이었다.
르네상스 성화의 마리아는 순결의 상징이지만
그 얼굴과 몸짓, 옷자락의 곡선에는 은밀한 매혹이 깃들어 있다.
성서 속 수산나, 막달라 마리아, 솔로몬의 아가서는
종교적 이야기 속에 감각적 이미지를 숨겨 놓았다.
이것은 억압이 예술적 상징과 은유의 정교함을 낳는 방식이었다.
종교는 욕망을 억누르고
그 에너지를 여적인 목표로 전환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금욕은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불길을 신의 제단 위에서 타오르게 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불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제단 위의 성화가 금기의 장막 뒤에서 타오르는 화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상품화 하고 증식시켜
무한 순환의 구조 속에 가둔다.
리비도는 더 이상 숨겨져 있지 않고
광고판과 쇼윈도, 인스타 피드 위에서 대담하게 춤춘다.
산업 혁명 이후 인류의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자본주의는 단순한 생존의 ㄱ여제에서 욕망의 경제로 진화했다.
그 과정에서 리비도는 곧 소비 욕망과 동일시되었다.
화장품 광고는 아름다움을
스포츠카 광고는 힘과 성적 매력을
부동산 광고는 사회적 지위와 안전을 은밀하게 약속한다.
이는 단순한 물건의 판매가 아닌 욕망의 형태를 설계하는 행위인 것이다.
광고는 자분주의 사회의 최전선에서
리비도를 길들이고 자극하고 변형시킨다.
프로이트의 조카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심리학을 활용한 광고 전략을 만들었다.
그는 소비를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의 해방으로 포장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여성 흡연은 금기였으나
버네이스는 담배를 자유의 횃불로 상징화하며 여성해방 운동과 연결했다.
결과적으로 담배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리비도가 어떻게 정치적, 사회적 상징으로 변환되어 소비를 이끄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포르노 사업은 리비도를 직접적으로 상품화한 극단적인 형태이다.
이는 성적 욕망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 이미지를 대량 복제/유통하여 전 세계를 연결한다.
대중음악과 영화, 패션 역시 성적 코드와 상징을 적그적으로 차용한다.
팝스타의 무대 의상, 뮤직비디오의 안무, 영화 스터 속의 시선과 포즈는
리비도를 문화 소비의 연료로 만든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하 ㄴ소비자가 아니다.
SNS는 개인을 욕망의 생산자이 상품으로 만든다.
셀카와 피드 속 이미지 관리, 여행,식사,패션을 과시하는 라이프스타일 포스팅
"따봉"과 팔로워 수로 측정되는 사회적 가치
이구조는 개인이 스스로를 광고하고
자신의 외모와 재능, 경험ㅇ르 시장에 올려놓는 자기 상품화를 촉진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결핍을 만든다
한 번 만족한 욕망으 ㄴ금새 시들고
그 빈자를 메우기 위해 더 새롭고 자극적인 상품과 경험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리비도의 무한 순환 고리이다.
결핌 -> 소비 -> 일시적 만족 -> 새로운 결핍
이 고리 속에서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만
자본주의는 이를 행복의 추구라는 언어로 포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소비문화 비평가들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조작하고 진정한 자아 실현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규정한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는 자유롭게 욕망한다고 믿지만
그 욕망조차 체제의 설계 속에 들어 있다.
이에 맞서 미니멀리즘, 로컬리즘, 슬로 라이프 같은 흐름은
욕망을 축소하건 방향을 바꾸련느 시도다.
그러나 이마저도 자본주의는 "라이프스타일 상품"으로 포섭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길러 팔고
더 크게 만들고
다시 팔아 이윤을 만든다
리비도는 더 이상 금기의 영역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이자 유통 상품이다.
고대 신전의 제단 위에서 타오르던 욕망의 불길은
이제 네온사인과 쇼핑몰,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불타고 있다.
21세기의 리비도는 더 이상 육체와 물리적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네온 간판 대신 LED 화면, 거대한 도시 대신 가상세계에서 타오른다.
인터넷, 게임, 메타버스, AI까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로 이주하며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은 욕망의 흐름을 전례없이 빠르게, 광범위하게 확산시켰다.
과거에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른 금기와 억압이 존재했지만.
이제 전 세계가 하나의 욕망 시장에 연결되어 있다.
스트리밍을 통해 전 세계의 관객이 동시에 같은 이미지를 보고 반응하고
익명성의 이름 아래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부끄러운 욕망이 온라인에서 쉽게 표출된다.
클릭 몇 번으로 쾌락을 얻고 또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다.
인터넷 포르노는 산업 규모와 영향력에서 과거 인쇄물이나 영상 시대를 아득히 능가한다.
고화질, 실시간,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은 리비도를 끝없는 탐닉의 루프로 몰아넣는다.
이는 성적 판타지를 무한히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현실 관계와 윤리 감각을 왜곡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온라인 게임과 메타버스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아바타를 통해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무대가 되었다.
현실에서의 신분, 외모, 성별을 넘어
가상의 존재로서 원하는 모습을 선택할 수 있다
일부 MMORPG나 메타버스 플랫폼에서는 연애, 결혼, 심지어 성관계까지 가상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 가상 속 관계는 현실과 다른 심리적 안전지대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정체성 혼란과 현실 회피를 심화시키기도 한다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등 SNS는 매혹의 전시장이 되었다.
여기서 리비도는 좋댓구로 환산된다.
셀카, 피트니스 , 패션 콘텐츠는 자기 몸을 상품화 하는 방식으로 리비도를 투사한다.
인플루언서와 팬 사이의 교류는 마치 현대판 궁정 연애처럼 일방적이지만 열정적인 감정의 흐름을 만든다.
후원과 구독, 기부 시스템은 이 감정 교류를 경제 활동과 직결시킨다.
AI챗봇과 가상 연인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프로그래밍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미 일부 국가는 AI연인 앱이 수백만 다운로드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용자들은 AI와의 대화에서 위로, 애정, 심지어 성적 상호작용까지 경험한다.
이 현상은 관계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 인간 관계의 대체라는 점에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잇다.
디지털 환경은 욕망의 접근성과 다양성을 폭발적으로 확장시켰따.
그러나 그만큼 중독, 고립, 현실감각 상실의 위험도 커져
무제한 선택지가 가져오는 결정 피로,
현실적 친밀감보다 즉각적 자극을 선호하는 도파민 중독 문화
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관계보다 편하고 안전하다는 착각 등을 불러일으킨다.
디지털 시대의 리비도는 형태를 바꾸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고대의 신전에서
중세의 궁정에서
산업혁명의 쇼윈도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이제는 서버실과 데이터센터
그리고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번쩍인다.
기술이 바뀌어도 욕망은 여전히 인간을 움직이는 불꽃이라는 점은 다름이 없으나
다만 그 불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태우고 있다는 점만이 달라졌다.
인간의 내면의 심층에는 두 개의 원초적 힘이 ㄱ오존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프로이튼 이 두 본능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섞이고, 교환하며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에로스는 단순한 성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낳고 유지하려는 본능,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충동이다.
육체적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가장 원초적 형태의 에로스이며
시와 그림, 음악 속에서 우리는 연결과 의미를 찾는다.
사회를 이루는 힘, 서로를 돕고 돌보려는 마음도 에로스의 한 갈래다.
에로스가 승화될 때, 그것은 문명을 세우고 인류를 진보시킨다.
타나토스는 죽음을 향한 본능,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힘이다.
그것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질서와 구조를 해체하려는 유혹이기도 하다.
전쟁과 폭력 등 파괴와 살상은 타나토스의 집단적 발현이며
중독, 무모한 도전, 극단적 선택 등의 자기파괴적 행동,
바그너의 비극적 오페라, 에드거 앨런 포의 꿀꿀한 시
타나토스는 파괴 속에서도 묘한 매혹을 발산한다.
죽음은 종종 금기와 신비를 동시에 품기 때문이다.
역사 속 많은 순간,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따로 존재하지 않고 결합했다.
전쟁 속 사랑, 위험 속 쾌락, 비극적 예술.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얽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순간은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위험과 금기 속에서 쾌락은 배가되고
파괴 직전의 창조는 불타오른다.
죽음은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이 두 본능은 새로운 무대 위에서 춤춘다.
익스트림 스포츠는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다.
게임 속의 폭력 속에서도 플레이어는 승리와 생존을 갈망한다.
정치에서도 변혁의 열망과 기존 질서 파괴가 함께 움직인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춤으 ㄴ끝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심장 박동과 같다.
한쪽이 완전히 승리하면 인간성 자체가 사라진다.
에로스만 있으면 정체와 과잉, 타나토스만 있으면 멸망이 온다.
상호간에 필수불가결의 존재인 것이다.
욕망과 죽음이 함께 춤추는 무대, 그 위에서 인간은 삶을 살아가고 사랑하며, 창조하고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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