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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유혈/고어]Praying prey 12~13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1.27 20:54:24
조회 627 추천 58 댓글 19

1화[유혈]


2화[고어]


3~4화[고어]


5~7화(1)


5~7화(2)


8~9화




47.


안나는 아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아이는 안나가 왜 그런 행동을 시켰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앞으로 가야 할 곳들에도 비슷한 풍경이 이어져 있으니까, 붉은 언니가 내심 자기를 배려해 준거라고 생각했다.

"저...기요."

"응?"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안나에게 말했다.

"저... 어디로 가는 거에요?"

아이의 손이 안나의 손에서 꼼질거렸다. 눈을 감고 걷는 그 모습은 마치 뒤뚱거리는 작은 오리 새끼 같았다. 아이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추운 것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연구소 안은 실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여기보단 더 나은 곳으로 널 데려갈 거란다."

안나의 말에서 친절함이 묻어났다. 아이는 그 말에 반신반의 했지만, 자신을 그 하얀 악마들에게서 구해줬다는 사실에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춥지?"

안나가 배낭을 벗고 위장 자켓을 벗었다. 아이의 눈에는 붉은 언니가 자켓 안에 로보트처럼 이상한 주머니와 장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다. 그 시선을 모르는 안나는 위장 자켓을 아이에게 입혀주고, 지퍼를 목 위까지 올려주었다.

"이 정도면 안 추울 거야. 아가야,  4층이랑 5층도 가야 하는데, 거기서도 입을 옷이 있는지 찾아보자. 같이 가 줄 거지?"

안나가 아이의 옷섶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다시 복면을 쓰고 이상한 헬멧과 관이 주렁주렁 달린 물건을 뒤집어 썼지만, 아이는 이 언니가 자신에게 한껏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아이는 여전히 목소리가 움츠려져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아이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속으론 기뻐하고 있었다.

"아...앞에 무서운 게 있으니까 눈을 다시 감아주렴."

안나 일행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제시카의 시체를 지나가면서 안나가 말했다. 아이는 얌전히 안나의 말을 따랐다.
계단으로 가는 문은 2층과 똑같이 잠겨 있었다. 1층에서 도망친 적이 일일히 잠구고 간 모양이었다. 연구원들이 도어 브리칭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단 점에선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해쳐 나갔는지 그게 의문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 적이 아이들에겐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안나는 그 사람을 만나면 이 궁금증을 해결해보고 싶었다. 안나가 74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세 번 문고리를 내려 쳤다. 아이는 안나의 손이 바빠진 것을 알고 안나의 오른쪽 다리를 꼬옥 안았다. 안나에겐 자세가 불편했지만,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인만큼 이런 투정은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사의 모습과 겹쳐서, 그동안 풀지 못했던 사랑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정작 그 아이는 엘사가 아니었음에도 안나는 지금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이 혼란에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쾅 소리를 내며 문고리가 바닥에 뒹굴었고, 안나는 그걸 발로 찼다. 문고리는 데굴데굴 굴러가 제시카의 시체에 부딪혔다. 안나가 무심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는 안나의 다리에서 떨어져 다시 안나의 손을 잡았다. 74소총을 등 뒤로 맨 안나는 글록에게서 로니 키트를 다시 분리했다. 패키지2인 아이를 데려가는 이상 돌격 소총과 기관단총식 권총을 들고 쏘는 건 명중률이 떨어지는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안나는 아이를 자신의 뒤로 오게 한 뒤, 한 손으로 파지해 혹시 모를 적을 제압하는 방식을 택했다.

문을 열자, 어두운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상구 전등도 꺼져 있지 않는 암흑이나 다름 없는 심연의 아가리였다. 안나는 야간투시경을 작동시켰다.

"아가야."

"네?"

눈에 힘을 주며 감고 있는 아이가 의아했다.

"여긴 좀 어두운데, 올라갈 수 있겠니?"

안나의 말을 들은 아이가 실눈을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영...차!"

안나가 기묘한 기합을 넣으며 아이를 들어안았다. 아이는 무슨 일인가 싶어 안나의 품 안에서 안절부절했지만, 안나는 터키시 앙고라 고양이같이 몸을 움츠리는 아이를 안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어느 새 사이렌의 찢어질 듯한 소리는 사라져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안나의 조용한 발소리만이 둘 사이의 침묵을 간질였다. 4층에 다다르자 안나는 다시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나는 그 과정에서 아이의 발에 아무것도 신겨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푸른 빛이 도는 동상은 아니어도, 충분히 붉고 잔 상처가 맺혀 있었다. 안나는 서둘러 가방에서 예비용 양말을 꺼냈다.

"아가야. 잠시 앉아 보겠니?"

아이는 말없이 바닥에 폭 앉는다. 안나는 양말을 손수 아이의 발에 신겨주었다. 간지러운듯 아이가 얕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을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에겐 가져도 벅찰 작은 웃음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웃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아이의 발에 노란 양말이 씌워지자, 아이는 두 발을 꼼지락거렸다.

"처음 입어보는 거에요."

그 모습을 본 안나의 평가는 '정말 오리' 같았다.

"따뜻해서 좋지?"

"부드럽고...따뜻해요."

아이가 대답했다. 안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5층의 연구층에서 패키지3을 찾으며 아이가 입을 옷을 찾아야 했다. 추위에 강한 안나도 위장 자켓을 아이에게 입힌 이상, 밖으로 탈출할 때 꼼짝없이 눈사람과 아이스맨(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이자 엑스맨.) 사이의 무언가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연구소를 탈출하고, E 포인트까지 도달할 동안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아가야, 이름이 뭐니?"

"이름이요....?"

아이는 골똘히 생각하며 턱에 손가락을 짚었다. 안나는 아이에게 '패키지2'라고 부르길 원치 않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소모품인 아이일 테지만, 안나는 미시적인 건물 속에서 아이와 함께 작은 배에 탄 상태였다.

"2호 개체요."

아이에게서 나온 답은 안나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 중 하나였다. 이름은 2호요 성은 개체니, 연구원들이 최소한 이름이라도 붙여줄 거라 생각했다. 안나는 그 얄팍한 기대를 한 자신이 한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 머리에 총을 쏜 자들인데, 뭘 바란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음... 2호 개체야?"

"왜요...?"

"어감이 너무 이상하지 않니...?"

"그런가요....?"

"다른 이름은 없니? 제시카라던가... 앨리스라던가..."

"그런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어요. 제 친구들도 모두 17호 개체, 3호 개체, 이렇게 불렸고 저희도 그렇게 불러서..."

2호 개체가 말끝을 흐렸다. 호칭의 이질스러움을 느끼지 못했고, 이질스러움을 느낀 안나에게 멋쩍어했다.

"그러면요.... 언니가 제 이름.... 지어주실 수 있어요?"

2호 개체가 안나를 올려다봤다. 안나는 2호 개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이름....이름이라....엘.."

그 사람을 투영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속여서 믿고 싶었다.

"힘드시면 안 지어주셔도 돼요... 괜찮으니까..."

2호 개체가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안나는 2호 개체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다리에 안기게 했다. 폭 소리와 함께 작은 눈사람이 다리에 안겼다.

"엘사."

"네?"

2호 개체가 올려다보았다.

"엘사...위커. 네 이름이야. 엘사."

엘사, 엘사. 엘사는 안나가 지어준 정상적인 첫 이름을 되뇌었다. 그것이 기쁜 듯 안나에게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부드러워요. 또... 맑아요!"

엘사는 은유적인 감상을 말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두드러지는 순수한 감상이었다. 더불어 안나 자신도 순수라는 병에 전염될 거 같은, 새하얀 웃음이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안나가 쿨쩍 하고 코를 들이마셨다.

"괜찮은거죠...?"

엘사가 안나의 얼굴에 손을 뻗어 보지만, 닿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위해 몸을 숙였다. 조막만한 손이 안나가 쓴 방독 마스크를 훑었다. 아이의 슬픈 눈이 유리에 비쳤다.

"음, 괜찮아! 정말로."

안나는 밝은 목소리로 하여금 엘사를 안심시키려 했다. 엘사가 안나의 다리에서 떨어졌다.

"엘사, 너에게 작은 부탁을 하려고 해."

안나가 엘사에게 말했다.

"또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데, 이번엔 몸을 숙여서 가야해. 그래 줄 수 있겠니?"

"무서운 게 또 있는 거죠...?"

엘사가 불안에 질려 안나를 바라보자, 안나는 두 손으로 엘사의 볼을 매만졌다.

"괜찮아, 언니가 다~ 무찔러줄게. 우리 꼬마 아가씨는 걱정하지 말아요?"

안나는 자기 입에서 몇 년 만에 그런 발랄한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웠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낯뜨거운 안나의 노력에 경직되어 있던 엘사의 얼굴이 풀어졌다. 엘사는 안나의 손을 꼭 잡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며 안나와 나란히 걸었다. 안나 또한 엘사의 키에 맞춰서 자세를 낮췄다.

안나가 엘사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안나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광경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4층은 청사진의 구조도로 보았을 때 체육관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복도와 방으로 이어진 게 아닌 복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안나의 옆구리까진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위로 유리창이 천장까지 뻗어 있었다. 마치 아쿠아리움에 온 것 같은 기시감이 엘사를 붙잡은 손을 훑고 지나갔다. 체육관의 내부는 조명이 있는 복도와는 다르게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안나는 엘사에게 이름을 지어줬을 때, 그 기괴한 현상의 이유를 기억했다.

[너 때문에 동기들이 가스를 마셔서 죽었어! 개체들은 우릴 죽이려 들었고! 알아? 아냔 말이야!]

안나에게 욕을 유언으로 남긴 연구원이 말했다. 종합해보면 저 체육관 안에서 동기들이 연보랏빛 가스 테러를 당해 죽었다는 소리였다.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자, 복도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연구원과 아이들의 시체가 여러 봉우리의 산을 이뤘다. 어떤 유리창에는 피묻은 손자국과 새싹, 이끼, 그리고 돌가루가 남겨져 있었다. 이것을 엘사에게 보여주었다간 기절할 게 분명했다. 안나 또한 그 '미스트'같은 공포를 즐기긴 싫었다. 4층 끝의 엘리베이터는 아직 온전히 작동이 되고 있었다. 상승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철문이 열렸고, 안나와 엘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5층은 이제껏 보았던 층들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2층에서부터 4층까지의 기괴한 마경보단 훨씬 나았다. 5층 위의 옥상에서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연구원들이 탈출하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잡기엔 시간이 없었다. 섀이탁으로 로터와 본체 사이를 저격하는 것도 자세가 벅찰 뿐더러 이미 패키지 2는 확보했다. 패키지 3는 이곳의 부스러기 정보들만 잘 취합해 회수하면 그만이었다.

"엘사,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줄 수 있지?"

"저...두고 가는거 아니죠?"

"아아니, 언니가 여기서 자료 몇개를 좀 챙겨야 해서 그래. 엘사 입힐 옷도 찾고 말이지!"

안나가 초콜릿을 꺼내려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가방이 토해 낸 것은 그레이의 관능 소설들이었다. 바닥에 책들이 쏟아져 어질러졌다.

"그녀...의....육감적인... 허리?"

엘사가 소설의 제목과 안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안나는 코미디같은 상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게 아니니까...오해하지 마 엘사. 저것도 자료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아서 챙긴 거였고, 난 너에게 초콜릿을 주기 위해 가방을 연 거야."

엘사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안나가 가방 속에서 초콜릿이 든 주머니를 꺼내 엘사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게 뭐에요?"

"초콜릿 몰라? C-H-O-C-O-L-A-T-E."

"쇼콜레이트?"

발음이 어려운 건지 엘사의 초콜릿은 끝이 늘어졌다. 처음 듣는 단어이니 만큼 입으로 음미하기 어려운건 당연했다.

"아무튼 좀 먹어보렴. 기분이 안 좋거나 힘들 땐 단 게 최고지. 다 먹어도 뭐라 안할게.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줘. 무슨 일 생기면 꼭 언니 부르는거다?"

"네! ...근데 저기..."

가방을 다시 멘 안나의 옷깃을 엘사가 잡았다. 떨어지기 싫은 것 같다고 생각한 안나는 부드럽게 엘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니는....이름이 뭐에요?"

엘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나는 고민했다. 엘사에게 이름을 밝혀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미뤄야 할까. 접시가 3개 있는 저울은 이 세상에 없었다. 안나는 3개의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리트리버?"

결국 안나는 앞의 두 사안을 섞어 엘사에게 말했다. 울프독은 안나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이름으로 인식되었고, 거기서 약간 거짓을 섞어 순박한 대형견인 리트리버를 떠올린 것이었다.

"개같은 이름이네요."

엘사의 말에는 욕할 의도가 없다는 걸 안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애니까 언어의 다의성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이 하얀 감옥에 같혀 있어 리트리버의 의미도 모를 게 분명했다. 엘사의 호기심이 어린 순수한 얼굴이 별 의도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화났어요?"

그러나 찡그린 얼굴은 복면으로도 감출 수 없었는지, 엘사가 우물쭈물 안나에게 묻는다.

"아니아니, 화 안났어. 엘사가 날 화나게 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렇..겠죠?"

"응,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여기서 꼭 기다려야 해. 꼭이야?"

"금방 돌아와야 해요..."

엘사를 뒤로 하고 안나는 연구실의 문 앞에 다다랐다. 카드키로 열리는 방식이었지만, 어느 멍청한 연구원이 카드키를 꼽고 도망쳐 자동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천재적인 무지함에 감사하며 안나는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복도와 비슷하게 자료들과 필기구, 그리고 노트북 등이 이리저리 엎어져 있었다. 토네이도라도 지나간 것처럼 발을 딛는 곳마다 알 수 없는 산식들이 쓰여진 종이들이 밟혔다. 안나는 그 중 하나를 집어 읽으려 했지만, 대부분이 러시아어인데다, 그마저도 읽을 수 있는 영어들은 화학식을 풀어 쓴 것들이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안나는 눈에 집힌 종이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노마드 1050을 배낭에서 꺼내 연구소에 있는 노트북과 연결했다. 쓸모 있는 자료가 얼마나 남아있을진 미지수였지만, 자료 정리는 안나가 아니라 CIA와 블루라운드 전산 부서에서 처리해 줄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은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게 합리적이었다. 연구실에 남아있는 노트북들은 총 3대였으며, 이미 노마드를 연결한 것을 제외하면 2대, 부서진 것을 제외하면 단 한대만이 남아있었다.

노트북에서 노마드로 정보를 이동시키는데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모니터 위의 상태창은 대략 20분의 잔여시간이 남았다고 깜빡이고 있었다. 안나는 첫번째 노트북이 완전히 전송될 동안 연구실 구석 캐비닛에서 엘사가 입을 정도로 작은 어그부츠와 스웨터, 그리고 점퍼와 방한바지를 찾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연구실 밖으로 나가자, 깨끗해진 복도와 서류와 종이 뭉치들을 한아름 안고 있는 엘사가 안나 앞에 서 있었다.

"이거 찾으시는 거죠?"

안나가 자료를 정리하는 모습을 본 것이리라. 안나는 엘사의 돌발적인 행동이 기특해 엘사를 안으며 등을 톡톡 두드렸다. 

"언니 힘들 것 같아서 모두 정리했어요."

안나는 엘사가 뽈뽈대면서 복도 위의 자료들을 모아 작은 손으로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절로 안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잘했어. 한층 일이 수월하게 풀리겠구나. 고마워, 엘사."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직 작업 중일 텐데도,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푸근한 엘사의 존재가 안나에게는 작은 진정제 캡슐 통 같았다.
방금 전까지, 참상을 목격하고 왔음에도, 둘은 어떻게든 서로를 보며 잊기 위해 악에 받쳐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은 알고 있었다.
지옥에서 완전히 빠져나온게 아니란 것을.



48.

안나의 계획 중에선 연구소 옥상으로 올라온 다음 바깥 외벽에 설치된 비상 계단으로 내려와 '조용하고' 신속하게 구릉으로 올라간 다음, 장비들을 챙겨 스노우 모빌을 챙겨 E포인트로 가는 계획 'A'가 있었다. 안나 일행은 이 계획의 첫 번째에 머물러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오자, Mi-26헬기는 이미 멀어져 눈보라 속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엘사가 아직 희미하게 머물러 있는 로터 소리에 움찔 떨었다. 안나가 걱정말라고 머리를 톡톡 두드려 엘사를 진정시켰다. 헬기장 주변의 옥상엔 진입 전 구릉에서 쏴 죽였던 병사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안나는 이번에도 엘사를 안아 들어 계단까지 걸어갔다.

"안 무거워요...?"

눈보라 속의 눈들이 신기한 것인지 엘사가 요리조리 시선을 가만두지 않았다.

"으응... 안 무거워. 언니가 메고 있는 가방이 더 무겁단다. 들어볼래?"

"아아니요...."

안나가 장난스레 말하자, 엘사는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안나에게 웃어보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엘사는 안나에게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안나는 이따금 엘사의 질문에 맞장구쳐 주면서 지루하지 않게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즐거운 대화도 지상에 도착하자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연구소 입구 밑으로 이어진 눈길이 아닌, 위의 눈길에서 적들이 쏟아낸 총알이 안나의 뒷목을 스쳤다. 분명 시설은 모두 정리했다. 재머도 작동시켰다.

프로토콜을 작동하러 간 적이 부른 듯 했다.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으며 구릉 위로 뛰어가야 할 안나였지만, 이번엔 엘사가 붙어 있었다. 아직 적들은 ak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나는 재빨리 키트를 분리한 글록을 한 손에 쥔 다음, 남은 한 팔로 엘사를 옆구리에 끼워 안았다.

"뛸 수 있어요... 저도 뛸 수 있다구요...!"

옆구리에 스시 롤처럼 끼인 엘사가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은지 연신 바둥거렸다.

"엘사, 여기서 뛰면 언니랑 너랑 아주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까 언니 말대로 해. 너 아직 세상에 나온지 10분 밖에 안 됐어."

개조 포탄의 열기들이 연구소 앞 눈길들의 눈을 모두 녹여 아스팔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합 배낭 2.5개 분의 짐을 짊어진 채로 안나는 진입할 때 만들었던 철망 입구를 재빨리 통과했다. 핑 핑 총알들이 안나의 주변에 있는 눈더미와 나무에 박혔다. 10m쯤 더 올라가자 안나는 숲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 시간이 없었다. 며칠 동안 관찰해 익혀 두었던 적들의 머릿수만큼이나 많았고, 저들 중에 이 숲을 주파할 수 있는 스노우 모빌을 타고 있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벌어질 수 있었다. 구릉 근처까지 도달한 안나는 곧바로 구릉으로 가지 않고, 한참을 빙 돌아서 구릉에 도착했다.

"왜 바로 안 가는 거에요?"

스노우 모빌에 태워진 엘사가 물었다.

"저기 주변에 언니만 알아 볼 수 있게 덫을 설치해 놓아서 그래. 혹시라도 엘사가 다치면 언니 마음이 아프잖아."

섀이탁을 매면서 안나가 말했다. 박격포는 이곳에 두고 가야 했다. 분해까지 시간이 많이 소비되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가방 속에서 타이머가 맞춰진 기폭제를 꺼내 박격포에 부착했다. 1분 뒤에 정확히 박격포는 파괴될 것이다. 설치까지 마친 안나는 곧바로 스노우 모빌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안나의 품안에 앉아 있는 엘사가 올려다 보았다.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안나가 복면을 들어 내며 애써 웃어보였다.

"금방 데려다 줄게. 걱정하지 마. 언니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눈 감고 있으렴."

안나가 엘사의 얼굴에 방독 마스크를 씌워 주며 말했다. 두 사람을 태운 스노우 모빌은 눈으로 된 분수를 뒤로 뿜어 내며 숲 속을 질주했다.  두 사람이 구릉을 떠나기가 무섭게 박격포는 파편을 흩뿌리며 완전히 파괴되었다.



49.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안나의 등 뒤로 총알들이 빗발치고 있었다. 대개 한 두 발이 안나의 배낭에 맞아 안나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이제 막 1km 를 달렸을 뿐이었다.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자, 적들이 탄 스노우 모빌들이 안나를 빠르게 추격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피가 잔뜩 묻은 모빌도 있었다. 안나의 치즈 와이어가 어느 정도 성공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미 배낭엔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다. 가장 가장자리에 넣어둔 헤스트랄 4500의 몸엔 총알이 박혀 있을 것 같았다. 안나는 한 손으론 핸들을, 나머지 한 손으론 글록을 쥐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거리를 유추하여 적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지금 이 순간, 17발의 탄창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납장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쫓아오던 약 10 대의 스노우 모빌에서 2대의 운전수가 안나의 쏜 권총탄에 맞아 뒤집어졌다. 이제 8대라는 희망적인 숫자가 남았다. 동시에 글록에 슬라이드 스톱이 걸렸다. 안나는 오로라에게 콜트 권총을 맡긴 것을 후회했다. 한계 중량을 넘어설지라도 지금 이런 상황에 콜트 권총이 있다면 적어도 1대의 스노우 모빌의 추격을 끊을 수 있을 터였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안나의 머릿 속 블랙박스가 안나에게 무언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언니!"

세찬 바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봐 엘사가 안나에게 소리질렀다.

"왜, 왜!"

"제가 도와드릴 게 있어요?!"

"아니!  ...응!"

안나가 엘사의 손에 글록 권총을 쥐어 주었다.

"그 중간에 있는 작은 버튼을 누르면 얇고 긴 게 빠져나올거야. 그거를 언니 자켓 지퍼를 열어서 안에 있는 얇고 검은 막대기와 교체해 끼워주지 않겠니?"

무리한 부탁인 것을 안나는 알고 있었다. 권총은 엘사에게 있어서 다쳐 기절까지 이르게 한 물건이었다. 글록을 든 엘사의 두 손이 벌벌 떨고 있었다. 안나는 엘사에게 이런 물건을 맡겨서 미안해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쇼콜레이트요?"

"아니아니! 그거 아니야!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다행이 엘사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사, 제발 부탁해."

안나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등 뒤에 또다시 충격이 일었다. 다시 진지하게 작업을 마무리 해야 했다. 안나의 진심이 통한건지 엘사는 입을 꾹 다물고는 파우치를 열어 탄창을 꺼냈고, 성공적으로 글록에 끼워 넣는데 성공했다.

"여기..."

"고마워!"

안나가 빠르게 엘사의 손에서 글록을 낚아채 슬라이드를 풀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일행이 지나갈 경로에 장애물이 없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두 스노우 모빌 운전수의 미간에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며 운전했다. 이번에는 직진이 아니라 나무 사이로 지그재그형식으로 모빌을 틀었다. 적을 혼란에 빠뜨려 서로 내지 나무에 부딛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안나의 도박은 다행이 성공했고, 한 대가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에 처박혔다. 이제 3대의 모빌만이 남았다. 안나는 엘사를 몸으로 누르며 최대한 몸을 낮췄다. 피탄 면적을 최소화하고 나뭇가지에 걸려 끔찍한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네에에..."

엘사가 반쯤 눌린 대답을 어렵사리 꺼냈다. 안나는 다시 모빌들에게 사격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모빌 위의 운전수가 안나에게 AK소총을 조준하고 있었다. 총알을 흩뿌려 탄막을 만들으려 방아쇠에 힘을 주려는 그 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째서?'

안나는 자신의 T존을 총알이 뚫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고통이 없었고, 몸이 붕 뜬 느낌이 해먹에 올라 탄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안나의 의식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마치 죽음이란 따뜻한 요람에 들어온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엘사의 비명이 스피커의 볼륨을 줄인 것처럼 작아졌다.



48.

엘사는 타의로 인해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하얀 악마들에게 맞았던 때처럼 욱신거렸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엘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눈바람처럼 흩날리는 설탕송이들이 엘사의 얼굴에 상냥히 앉아 녹고 있었다. 고통에 짓이겨진 몸에 비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엘사에게 총구를 겨누는, 리트리버 언니와 비슷한 옷과 물건을 지닌 사람들만 빼면 엘사 또한 자연 속의 자연처럼 조용히 녹아들 수 있을 터였다. 총구가 엘사의 볼을 쿡쿡 찔렀다. 엘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으..."

[도주중인 개체의 생존 확인, 곧 기지로 이송하겠다.]

오른쪽에 있는 덩치 큰 사람이 엘사는 모르는 단어로 허공에 중얼거렸다.

[후...근데 이 꼬맹이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그러는거야?]

왼쪽 사람이 말했다.

[낸들 알겄냐. 몸값이 30억 루블(약 564억원) 정도 된다고 회장님이 말하셨다던데.]

[뭐야. 그럼 우리가 현상금 걸린 테러리스트를 잡은 셈이잖아!]

[체첸 반군 리더 대가리보다 3배 더 많은 액수긴 하지, 근데 이 꼬맹이는 조심히 다뤄야 해.]

[당연하지. 적은 건들어도 어린아이는 건들면 안 돼는게 당연한 거잖아?]

오른쪽의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맞는데.... 저 뒤쪽에 연구소 보이지? 거기서 불미스러운 실험을 했는데... 아 몰라! 아무튼 조심히 다뤄야 돼. 아니면 우리 다 죽는다.]

엘사의 귀에는 그 사람들의 말이 무어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리트리버 언니도 사라졌고, 리트리버 언니와 같이 탔던 요상한 철마차는 엘사의 뒤에 반쯤 나뒹굴며 벌레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이 총을 거두고, 엘사의 팔을 잡았다. 우악스런 힘에 엘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놔! 싫어!"

[뭐라고 하는 거지? 이고르, 영어 해석 할 줄 알지?]

['싫다'고 하는 모양인데?]

[영어로 말해봐, '널 해치는 게 아니라'고.]

[해석만 할 줄 알지 말하는 건 영 잼병인데.]

[병신...]

그 두 멍청한 병사들은 바둥거리는 엘사를 들쳐메려 했다. 엘사는 울면서 저항했지만, 어린 아이가 성인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느새 엘사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언니! 언니이이!"

엘사는 연신 리트리버 언니를 불렀다. 하지만 그 듬직한 리트리버 언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덜컥 두려움이 작디 작은 몸을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했다.

"무서워어어!"

감정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 작은 눈보라들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저 바람에 세진 것이라고 생각해 눈보라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커지는 눈보라들이 가까워졌다. 건장한 성인 둘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눈보라들은 두 사람을 압도했다. 엘사는 울고 있었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픈 주사, 아픈 칼, 아픈 주먹. 엘사는 리트리버 언니에게 겨우 구해진 날개 다친 나비같은 아이였다. 리트리버 언니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몰라도, 엘사는 그 언니와 같이 있고 싶었다. 같이 있었던 개체들을 제외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절을 안겨준 사람이었다.

결국 엘사를 들쳐멨던 두 사람은 바람에 밀려 눈밭에 엎어졌다. 엘사도 거칠게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일어설 수조차 없을 만큼 몸이 삐걱거렸고, 그저 리트리버 언니가 제 비명을 듣고 한시라도 빨리 와 구해주기를 기도했다.

[씨발, 뭐 이런 게 다 있어?]

[왜 30억이나 하는 지 알 거 같네. 기절이라도 시켜야 돼나?]

[어떻게 하려고?]

[보급품에 마취총이 있었는데... 이걸로 재우면 되지 않을까?]

오른쪽 사람이 '파우치'라는 주머니에서 주사기가 장착된 권총을 꺼내자, 하얗던 엘사의 얼굴이 피빠진 시체처럼 더욱 하얗게 질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엘사가 두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었다.

"다신 안 도망칠게요...."

두 사람은 엘사의 표정을 보고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마취총을 엘사에게 겨눴다. 엘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몸에 바늘이 박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사는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떨었고, 덩달아 총을 겨누던 두 사람도 몸이 굳고 말았다. 엘사가 능력을 직접적으로 쓴 게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은, 뒤에서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는 피투성이의 동료를 보고 있었다. 잘린 나머지 피가 뚝뚝 흐르는 왼팔을 부여잡고, 쓰고 있던 헬멧은 반쯤 으깨져 있었다. 그의 방탄복과 자켓은 칼에 난도질 당한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괴하면서도 끔찍한 슬래셔 무비의 한 장면 같았다. 오른쪽 사람은 동료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멀쩡한 사람을 초주검으로 만든단 말인가?

[....]

동료는 그 둘에게 뭔가 말할 게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럴 때마다 입에선 피가 울컥 쏟아져 눈밭을 붉게 적셨다. 동료는 몇 걸음 오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둘은 엘사를 잠재우는 것을 뒤로 미루고 74소총을 허공에 겨눴다. 모빌의 라이트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눈 밟는 소리도, 총을 장전하는 소리도 없었다. 두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스티로폼 가루처럼 흩날리는 설야 어딘가에 엘사를 태우고 도망친 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니 그 괴물은 지금 서서히 그들을 옥죄려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이질적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오른쪽 사람의 오른팔에 손바닥만한 칼날이 박혔다.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사람이 총을 칼날이 날아온 곳으로 난사했다. 나무 줄기에 톱밥이 흩날리며 탄이 박혔다. 그 자리엔 칼날을 쏜 자는 없었다.

[대체 뭐하는 새끼야?]

[씨발....존나 아프네.]

왼쪽 사람이 오른쪽 사람을 엄호했고, 오른쪽 사람이 있는 힘껏 팔에 박힌 칼날을 뽑았다.

[그거 발리스틱 아냐?]

[뭔지 알아?]

[스페츠 놈들이 썼던 물건이잖아. 풀린 물량이 적어서 구하는게 하늘에 별 따기라던데.]

[잔재주 부리네. 미친새끼가.]

오른쪽 사람이 기어에서 구급낭을 꺼내 열었다. 붕대로 지혈을 한 다음, 왼쪽 사람이 엄호를 하고, 오른쪽 사람이 엘사를 데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이 엘사를 찾으려 했을 때, 엘사는 그곳에 없었다. 땅으로 꺼진 것처럼 엘사가 엎어진 눈자국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스노우 모빌을 타려고 발을 재촉했다. 어차피 어린아이였고,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 뿐이지만, 서로 흩어져서 찾으면 엘사를 찾아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질 것이었다. 동료를 토막내고 칼날을 날린 괴물이 스노우 모빌의 속도는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괴물도 스노우 모빌이 전복되면서 피해를 입었으리라고 두 사람은 짐작했다.


그리고 모빌에 올라선 두 사람의 몸이 한 발의 총성과 함께 고꾸라졌다. 숲 속 사이에서 날아온 거대한 저격용 탄환이 두 사람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상반신이 찢어지면서, 밧줄같은 창자들이 춤을 추며 흩어졌다. 약 100m 밖에서, 의탁 파지를 취한 안나가 샤이택의 스코프를 통해 저격했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서둘러 토막난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뛰어온 안나는 엘사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록은 전복되면서 눈 속 어딘가에 파묻혔다. 안나는 그들의 기어를 뒤져 레이저 사이트가 달린 마카로프 pmm권총과 다량의 탄창을 습득했다. 하는 수 없이 글록 탄창이 든 파우치를 적이 타고 온 스노우 모빌의 수납장에 넣은 다음, 마카로프의 약실을 점검해 탄이 장전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ak의 탄창을 추스려 파우치에 끼워넣었다.

스노우 모빌에 올라탄 안나는 천천히 모빌을 움직이면서 엘사의 발자국을 좇았다. 아직 희미하게 작은 발자국이 남았다. 상처가 가득한 발자국으로 울며 도망치려 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적 보병들도 금방 안나를 따라잡을 터였다. 최대한 빠르게 엘사를 데리고 이 숲을 빠져나와야 했다. 안나는 방탄복에 달린 무전 송신 버튼을 눌렀다.

"블랙퀸, 블랙퀸, 여긴 인디아 1-1. 패키지 회수 후 탈출 중에 있다."

잡음이 어둠 속에서 선명히 들렸다.

"...A로, 아님 B로?"

변조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메가라인 듯 했다. 다만 신변을 고려해 잠시 음성을 변조한 것이라 안나는 생각했다.

"B에요. 패키지는...2하고 3입니다."

"E포인트로 서둘러 가. 500MD와 A팀(12명으로 이뤄진 특수부대)이 포인트에서 기다리고 있어."

무선이 종료되자, 안나는 몸을 돌려 샤이택을 남은 두 모빌의 궤도에 조준했다. 혹시 모를 보병들이 모빌을 타고 추격함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두 발의 짧은 총성이 들렸고, 모빌의 엔진이 쉭쉭거리며 작동을 멈췄다. 샤이택을 맨 안나는 마카로프 권총을 한 손에 쥔 채로 그 자리를 떴다.
좋지 않은 징조가 눈물처럼 안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49.

엘사는 가쁜 숨을 내쉬며 아무도 없는 깜깜한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이곳엔 엘사를 위한 과자집과 과자 부스러기가 없었다. 오로지 차디찬 바람만이 백은의 소녀의 팔다리를 매몰차게 때리고 지나갔다. 어디까지 왔는지, 방향을 제대로 짚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엘사를 끌고 갈 악마들이 있을 거란 두려움과 동시에 리트리버 언니가 있을 거란 희망이 한데 섞여 엘사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디선가 얕은 총소리와 큰 총소리가 시간을 두고 울려퍼졌다. 리트리버 언니의 것인가, 아니면 악마들의 것인지 엘사로썬 알 수 없었다. 불현듯 리트리버 언니가 자신을 영영 못 찾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마음을 좀먹었다. 불현듯 엘사는 안개숲에 우뚝 서 있었다. 연구소에 있었을 때, 17호 개체는 엘사에게 여기서 나가도 밖에는 '늑대'란 무서운 동물이 득실거린다며 엘사를 겁주었다. 그 때 엘사는 장난으로 웃어넘겼다. 하지만 지금, 모습도 알지 못하는 늑대란 것이 어둠 속에서 엘사를 채가 잡아 먹을 것 같았다.

"언니이이......"

엘사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오한이 슬슬 올라왔다. 정작 자신은 눈과 얼음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서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엘사의 머리와 어깨 위로 머리색과 같은 눈이 차츰 쌓이기 시작했다. 살고 싶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엘사가 지내온 수 많은 밤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겨우 조금 행복을 느끼나 싶었지만, 그 행복은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 아니, 엘사가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어린 여자애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엘사는 무릎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눈물이 눈이 되어 엘사의 무릎을 적셨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고, 끝내 엘사는 그 드좁은 나무들 사이에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언니. 그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렀다.  그 작지만 최선의 노력에도, 아무도 엘사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한참을 소리내며 울던 엘사는, 슬픔과는 별개로 눈꺼풀에 찾아오는 따뜻한 졸음이 신기하다고 느꼈다.


'자고 나면 리트리버 언니가 데리러 와줄 거야. 아니,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이 졸음은 꿈에서 깨기 위한 신호일 테야.'

그렇게 엘사는 옆으로 넘어져 눈밭에 쓰러지려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리트리버 언니를 태운 철마차의 소리, 그리고 두 사람을 쫓아온 철마차의 소리였다. 엘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트리버 언니일까? 하는 얕은 희망이 떠올랐다. 하지만 악마들일 수도 있다는 불안함도 싹텄다. 엘사는 두 팔을 감싸고 점점 다가오는 불빛을 주시했다. 리트리버 언니와 탔던 스노우 모빌인지, 아니면 저들의 모빌인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엘사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모빌은 리트리버 언니의 것이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아...아..."

또다시 엘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언니...언니...언니...언니...."

모빌 위의 운전수가 한 손을 뻗었다. 늑대처럼 엘사를 채가 잡아먹을 게 분명했다. 엘사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모빌을 등지는 데 성공했다. 잡아먹히더라도 그 무서운 늑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엘사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언니이이!"

엘사의 비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늑대는 엘사를 채갔다. 거칠게 모빌로 채여 온 엘사는 조약돌 같은 주먹으로 늑대의 가슴을 향해 쳐댔다. 로봇같은 부품을 싸매고 있는 늑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낚아챈 팔을 엘사의 허리를 꼭 감쌀 뿐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늑대의 모습에 엘사는 고개를 올려다 보았다.

"괜찮아....괜찮아....괜찮아...."

듣고 싶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리트리버 언니가 힐끔 엘사를 내려보며 싱긋 웃었다.

엘사는 언니의 미소에 맞춰 같이 웃고 싶었다. 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리트리버 언니의 볼을 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엘사의 머리카락에 점점이 피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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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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