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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44~45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17 21: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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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안나는 오후 7시가 되서야 이동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mp5는 백팩과 함께 뒤로 매 둔 안나는 파우치 안으로 점프 슈트를 끼워 입었다. 방한 기능이 있는 점프 슈트여서 조금은 불편해도 몸이 경직되어 대비를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대안이었다. 엘사와 멜리사는 조금 싫어한 눈치였지만, 안나가 '동생들을 향한 안전과 안나의 사랑'을 강조해 방탄복과 함께 겨우 입혀놓을 수 있었다.


안나는 소음기를 낀 m&p의 총대를 앞으로 매어 사주 경계를 했다. 한 밤의 숲은 인조광이 전혀 없어 어두웠지만, 안나는 백팩에서 꺼낸 옵스코어 헬멧과 쌍안식(AN/PVS-15 NVG)야간투시경을 결합시켜 착용하고 있었다. 배터리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작업과 이후의 교전에선 짧게 짧게 썼으므로 비교적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산한 바람이 안나와 두 동생 사이를 흘러 지나갔다.


-조심조심, 앞에 쓰러진 나무 있어.-


안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청록색의 세상에 헬멧 속 아이들의 눈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두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고, 안나는 나무 줄기를 손쉽게 넘는다. 하지만 두 동생이 넘기엔 조금 높았고, 안나는 두 동생의 겨드랑이를 잡고 한 명씩 나무 줄기를 건너게 했다. 세 사람은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안나의 눈에 보이는 나무들의 수가 차츰 줄어들었다.


안나는 고도계를 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 20분, 오차 범위 30분으로 예상에 가깝게 이두나의 저택 근처 숲에 도달했다. 안나는 mp5를 들어 스코프의 영점을 조절해 배율을 확대시켰다. 희미하게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풀밭이 보였고, 그 너머로 인조광이 맺혀있는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자, 안나가 핫라인으로 보았던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나는 손을 들어 동생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도착했어?-


멜리사가 비음을 섞으며 말했다. 안나가 사전에 두 동생에게 지시해 둔 규칙이었다. 말을 하되, 속삭이듯 말해야 했다.

-그런 것 같아. 조금만 더 움직여야 해. 다리 아프니?-

-금방이라도 자버릴 것 같아요...-

엘사가 안나의 오른쪽 종아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다. 멜리사도 질 세라 안나의 왼쪽 종아리를 쿡쿡 눌렀다.

-조금만 참아 줘. 몇 걸음만 더 가면 되니까, 그 땐 쉬게 해줄게.-

-몇 걸음 걸어야 해?-

멜리사가 안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안나는 초점을 두지 않고 숲 속을 바라보았다.

-한 50걸음?-

-금방이네...-

-쉬고 싶어요...-


안나는 엘사와 멜리사의 헬멧을 쓰다듬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뒤로 동생들이 졸졸 따라왔고, 이내 그들은 50걸음을 모두 걷는 데 성공했다. 안나는 저택에서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1.5.미터 가량 되는 바위의 뒤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 세 사람이 넉넉하게 숨을 수 있는 크기의 바위였다.


-이제 앉아도 돼요?-

이렇게 말을 꺼낸 엘사였지만, 이미 엘사는 흙이 거의 없는 돌바닥에 앉아 있었다.

-응, 멜리사도 엘사 옆에 앉아서 쉬렴.-

멜리사의 헬멧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멜리사는 엘사의 옆에 자리를 잡아 바위벽에 등을 기댔다. 안나는 잠시 백팩을 내려놓고 두 동생처럼 조금 쉬기로 했다. 딱딱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바위들은 안나에게 최고의 의자가 되어 주었다. 하아- 하고 고된 한숨이 안나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언니도 피곤하지?-

멜리사가 안나의 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그렇지...6시간 동안 걷고...가방도 맸고...이젠...-


인연을 끊으러 가야지, 안나는 마지막 문장을 속으로 대답했다. 판단이 무뎌지는 것은 공황을 일으키는 부품 중 하나였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안나는 진짜 엘사의 정보를 취득해 엘사와 멜리사를 데리고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이두나와의 피할 수 없는 대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똑같겠지만, 안나는 이두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말로 3일간의 친절이 그저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두나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알고 싶지 않았다. 블루라운드에서 있었던 그 사람의 친절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따스해서, 뒤에 드러날 진실들을 한편으로는 마음 속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경황이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선 이성과 논리보단 감성이 더 우세해지고 있음을 안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안나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언니....괜찮아요?-

안나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엘사가 안나에게 엉금엉금 다가와 얼굴을 살폈다.


-좀 긴장되서...-


안나는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굳이 아이들에게까지 불안감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엘사는 눈가루를 만들어 안나의 볼에 조금씩 묻혔다. 진통제를 먹은 것처럼 몸이 둔해진 것 같았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언니, 힘들면 그냥 도망치면 안 돼?-


멜리사가 별안간 안나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언니가 엄청 걱정 돼.-


멜리사의 걱정은 합당했다. 풀밭에 호수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나 언니가 못 보고 빠질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낙하산 줄을 끊으며 호수 속에 잠겨 있을 때, 멜리사는 안나 언니의 발작과 엘사의 부재, 그리고 자신의 무기력함을 몸으로 체감했다. 안나 언니는 멜리사의 얼음이 발작을 치료해 주었다고 했지만 멜리사는 믿지 않았다. 멜리사는 엘사와 달리 남을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얼음들을만들어 낼 수 있었고, 때때로 해를 입히는 용도로 쓰였다. 그러기에 멜리사는 안나 언니와 엘사 앞에선 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 언니의 주장은 너무 확고해서, 정말로 그런 능력이 새로 발현되었을까 싶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전에 멜리사는 연구원들의 얘기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감정에 따라 능력의 성격이 일시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내용은 불현듯 멜리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멜리사는 평소와 다르게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으니, 연구원들이 말한 요건은 충족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없었다. 지금 안나 언니의 몸 상태는 멀쩡했고, 구태여 얼음을 쏠 일도 없었다.


-언니가 걱정되니?-


-응... 그것도 아주 많이.-


멜리사가 안나의 오른팔을 안으며 말했다. 안나는 멜리사의 팔을 살살 쓸어내렸다.


-언니도 알아, 우리 멜리사와 엘사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고...앞으로도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거라는 보장은 없어.-

안나가 엘사와 멜리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도 가야 해. 그만큼 언니와 너희들에게 중요한 일이고...이 일을 안 하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거든.-


안나는 무릎꿇고 앉은 엘사의 팔을 잡아당겨 왼쪽에 앉혔다. 엘사도 슬금슬금 안나의 팔에 헬멧을 대었다.


-이제 거의 끝나 가니까...일단 조금만 쉬자.-



안나는 잠시 야간투시경을 꺼두고 고개를 들었다. 나무들이 이전보단 수가 줄어들어 남색의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설탕을 뿌린 듯한 하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그 광채에 안나와 엘사, 멜리사는 잠시 넋을 잃었다. 별들 사이에 떠 있는 반달이 보였다. 안나는 달을 보며 어두운 쪽은 멜리사, 밝은 쪽은 엘사의 머리 색깔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더 많고, 더 적지 않았다. 서로 공평하게 안나의 마음을 채워주는 두 아이의 사랑이 하늘 위에서 은은하게 세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안나는 이 밤이 지나가는 것처럼, 이 비극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달과 별들에게 작업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세 사람은 하늘을 보며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122.



안나는 두 동생이 쉬고 있을 동안, 잠시 숲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작업 이후의 수습을 해두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안나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안나는 구스만의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메가라.-

[누구신데요?]

-스칼렛.-

[스칼렛?]

구스만의 휴대폰의 배터리는 60%가 남아있었고, 안나는 별 탈 없이 메가라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메가라는 짐짓 놀란 눈치였다.

[지금 어디 있어? 아니...잠깐, 어떻게 전화한 거야?]

-여기? 우크라이나 폴 타바. 전화는 내가 공중 강하하려고 탄 비행기의 승무원에게서 슬쩍했고.-

안나는 주저하지 않고 메가라에게 자신의 위치를 불었다.

-여기로 팀 좀 보내줘. 가능해?-

[가능....해. 한 2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은데? 백업팀 리더긴 네가 우크라이나로 갔다고만 말하길래 네가 어디로 떨어진 지 몰라서 타 지부 요원들까지 차출해서 전역에 포진시켜 놓았거든.]

-참 대단하네...백업 팀이라 생각했던 적은 고스트나 다름없이 하늘에서 침투하질 않나... 나라 전역에 요원을 풀어놓지 않나...-


안나가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카자흐스탄에 마땅히 차출할 사람이 없었어. 흉내를 내고 싶어도 금방 들키거든...어디 다친 데는 없어?]


-지금 너랑 얘기하고 있는 내가 귀신은 아니잖아.-


안나의 말에 메가라가 푸훕 하고 웃었다. 어디가 개그 포인트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메가라는 안나의 농담을 두고 30초 가량 소리내어 웃었다. 스피커 기능으로 전환하지 않아 들킬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안나는 조용히 볼륨 키를 눌러 음량을 줄였다. 


[하하...하...하... 그래서 유출자를 찾아낸 거야? 지명을 당당히 말하는 걸로 봐서 기정사실화 된 거 같은데?]


-뭐....사실상 그렇지. 그래서...난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할 거야. 아직 너희 살생부에 내가 있으니까, 내가 그 사람을 죽여서 넘기는 게 더 가능성이 높을 것 같네.-


[어쩔 수 없어. 미안해, 나도 최대한 노력해 보려고 했는데... 조건부 변경밖에 할 수 없었어. 그리고 굳이 유출자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일이 좀 꼬여서 풀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어. 아무튼....이게 유언이 될 지도 모르겠어.-


[그런 소리 하지마, 스칼렛.]

-안나야, 내 이름, 안나 브라이트라고.-


[안나? 의외로 평범하네...네 실명은 2급 기밀이고 별로 안 궁금했는데... 정 안 돼면 우리한테 맡겨.]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난 이 일을 해야 해. 조력자가 협박 비스무리한 걸 했어. 변절자를 죽이는게 조건이고.-


[우리가 추적해줄 수도 있어.]


-추적을 하면 나만 더 힘들어져, 메가라. 그냥 지금은 내 말만 들어줘. 언제 죽을지 모를 난데...-


잔기침을 두어 번 한 안나는 코를 문질렀다.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패키지 2...아니다. 엘사와 멜리사를 좀 부탁해. 너 어차피 솔로잖아.-


[그게 여기서 왜 나와...그리고 엘사? 멜리사? 그 아이들은...모르겠어. 일단 실험은 진행될 것 같은데, 내 권한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미지수야.]


-그럼 최소한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선을 넘는다 싶은 실험들은 최대한 배제할 수 있게 손 좀 써주면 좋겠어. 그리고.... 애들이 사람답게 클 수 크게 옆에서 좀 도와줘. 많이 상처받은  아이들이라서 잘 좀 봐줬으면 해.-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 볼게. 아, 오로라 씨는 잘 지내고 있어. 아직 구금이지만...신변 보호는 해둬야 하니까.]


안나는 메가라가 완전히 인간성을 저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블루라운드에서 재회할 때까지만 해도 안나는 메가라가 권력에 취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취기는 점점 깨가고 있는 듯 했다.

-고마워.-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스칼렛... 아니 안나답지 않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


-이 일?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안나는 한스랑 통화를 나누었을 때, 메가라가 한스에게 정보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히 곱씹어 보면, 잘못된 생각이었다. 메가라는 어떻게든 안나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고 변절자 생포 및 사살이라는 추가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안나에게 다시 한 번 언급했고,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 때 총 쏜 거 말이야. 그거 미안하단 소리야.]

안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계속 네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진짜 죽을 뻔 했는데. 난 아직 그 일 용서 안 했어. 굳이 용서받고 싶으면, 나하고 아이들 케어나 좀 잘 해줘. 위치 추적은 이 휴대폰으로 하고.-

[...진짜 가는 거야?]

메가라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 한 마디에는 슬픔이란 감정이 묻어 있었다.


-뭐...일단 가 보면 알겠지. 끊을게.-


통화를 마친 안나는 구스만의 휴대폰을 파우치에 집어넣었다. 다시 바위로 돌아온 안나는 속닥거리는 두 병아리들 앞에 앉았다.

-이제 언니는 출발해야 해.-


-정말 가시는 거예요?-

엘사가 안나의 손을 잡았다. 안나는 버섯같이 부드러운 손을 매만졌다.


-가기 전에....일단 너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안나는 크게 숨을 쉬었다. 마음 속으로 연습을 해 두었지만, 실제로 말을 내뱉는 것은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너희들이 있어서 난 정말로,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너희들은 또래 애들보다 더한 상황에서, 아주 잘 자라 주었고... 언니보다 너희들이 더 용감하고 강할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만 커 주었으면 좋겠어.-


-언니....죽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엘사가 훌쩍이기 시작했고, 멜리사는 그런 엘사를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그럼 저희랑 같이 가요. 제발요. 네?-


엘사가 안나의 품에 안겼다. 얼굴을 들어올리지 않은 엘사는 참았던 울음을 소리없이 터뜨렸다.

-나도... 언니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

멜리사가 안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언니가 다치면 우리가 치료해 주면 되잖아. 아니면 우리가 보조해 줄 수 있어.-



결국 이렇게 상황은 터지고 말았다. 아이들은 안나의 말을 잘 들으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실, 여지껏 엘사와 멜리사는 이 일에 찾아올지도 모를 이별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애써 미어져 나오려는 슬픔을 참으며 안나 언니를 향해 웃어주었지만, 그것도 끝내 안나 언니의 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터지고 말았다.


-안 떨어질래요.. 안 떨어질래...-


엘사는 더더욱 팔에 힘을 주었다.


-아마 엘사...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안나는 어깨에 올려진 멜리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두고 가는 게 맞는 일인가, 아니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게 맞는 일인가? 안나는 딜레마에 부딪히고 말았다. 논리는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하지만, 감성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설령 논리가 우세해도, 나무늘보처럼 안나의 몸에 딱 붙은 엘사를 떼낼 방법은 없었다. 억지로 떼려고 했다간, 그 과정에서 들킬 수도 있었고, 어쩌면 엘사가 눈보라로 안나를 숲 끝으로 내던져 버릴 수도 있었다. 연구소에서 보았던, 엘사가 진심으로 내뿜은 눈보라들은 시체들을 천장으로 날려버릴 만큼 강했었고, 이 과정에서도 들킬 염려가 있었다.


-이번엔 웅덩이랑 호수랑 착각 안 할게. 그냥...우리도 같이 가게 해 줘.-


그리고 안나의 옆에는, 안나를 살리려 악에 받쳐 울던 멜리사가 있었다. 멜리사의 눈은 감겨 있었다. 멜리사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언니 말고는 아무도 못 믿겠단 말이야. 응? 걱정 안 끼칠게. 그냥 뒤따라 오게만 해 주면 안 돼...?-


안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안나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한 변화가 생겨 버렸다. 안나는 왼손으로 엘사의 등을, 오른손으로 멜리사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은 무엇을 택하든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준 어느 베테랑 킬러를 따르기로 했다. 더 이상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은 솜처럼 약한 아이들일지라도, 고집은 강철 같았다.


-그럼... 멜리사는 엘사 보호해 줘야 해?-


-같이 가게 해 줄거야?-


-너희들을 말릴 방법이 없어서 그래. 엘사는 멜리사 잘 보조해 주고, 알았지?-


-진짜죠...?-


-대신 다치면 안 돼. 언니한테 혼날 거야.-


-몇 번이고 혼나도 좋아요...-


안나는 잠시 엘사와 멜리사의 헬멧을 벗겼다. 잔뜩 울상인 두 아이의 눈물을 닦아낸 안나는 두 아이를 끌어 안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데, 들어줄 거지?-

-응...-

-네...-


안나는 피식 웃으며 아직 하늘에 떠 있는 아름다운 반달을 바라보았다. 모든 비극의 끝이 될 작업의 앞에서, 안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이 작지만 강한 가족들 때문일 것이었다.





-너희들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야.-










123.


한나는 거의 하루종일 뻐근한 몸을 끌고 다녀야 했다.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난 다음부터 다음날 아침까지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저 꿈 속에서 들었던 반쯤 지워진 엄마의 조언이 전부였고, 이두나의 방 앞에서 이두나에게 주었던 연고랑 반창고와 함께 깨어났다. 반창고 상자에는 '분노는 산과 같아서 산이 뿌려지는 대상보다 담고 있는 그릇에 더 큰 해를 끼친다 - 마크 트웨인'이라는 문구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내려가 아침 수프를 가져온 한나는 이두나에게 글귀의 주인이 당신이냐고 물었었다.



"한나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싶었어요. 싫었다면 미안해요."


오히려 한나는 그 글귀를 되뇌이며 남은 두 끼, 두 번의 대화를 이두나와 다시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힘들면 도망쳐라, 분노는 산과 같다. 이두나의 목소리와 흡사한 엄마의 목소리는 한나의 마음에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정말 내가 아는게 거짓이면...'

생각은 밤을 넘어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한나는 아예 복면들에게서 침낭 하나를 가져와 이두나의 방 앞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고민하고 있죠?"

이두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나의 귀를 간질였다.

"...잘 아시네요."

"고민은 아니지만, 스칼렛....아니, 미안해요."

이두나는 당황하며 말을 끊으려 했다. 한나는 그저께 저녁에 있었던 둘 사이의 작은 불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한나는 하룻동안 틈날 때마다 곰곰히 생각해 어느 정도 결론을 도출해 냈다. 지금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그 스칼렛과 하얀 아이가 거짓이라는 가정 하에, 한나는 이두나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표적 스칼렛이 아닌, 사람 스칼렛을 알고 싶었다.

"듣고 싶어요. 계속 해주세요."

문 너머에서 이두나의 얕은 웃음이 들렸다. 무엇이 기쁜 건지 한나는 알 것 같았고, 뜨거워진 귓볼을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해진 바람으로 식혀내었다. 한나는 몸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이젠 자연현상이 아닌, 한나에게 알 수 없이 부여된 능력이라 생각했고, 밤을 지나 편안해진 마음으로 저택의 2층 방 중 한 곳에 들어가 연습을 했다. 꽃병이 부서지는 건 기본이요, 커튼이 한나의 뺨을 세차게 때리기도 했다. 어쩔 땐 바람이 몸을 휘감아 한나를 침대로 던지기까지 했다. 한나는 금방 지쳤지만, 체력이 돌아올 때마다 연습을 반복한 끝에 비글에서 리트리버로 바람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쁘세요?"

무심코 한나가 이두나에게 물었다.

"제가 가진 기억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쁜걸요."

한나는 일단 동의하기로 했다. 나쁜 기억만 가지고 있는 한나였지만, 이두나의 말은 결과적으로 틀리진 않아서였다.

"스칼렛은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따듯했지만 가끔 멍을 때리고 있을 때가 많았어요. 전 그때마다 이유를 물었지만, 한나처럼 말하기를 꺼렸었죠. 스칼렛은 고민이 있다기보단, 많이 지쳐있었죠. 스칼렛과 지낸 지 이틀이 되어서야, 스칼렛이 블루라운드...아, 블루라운드는 제 회사예요. 블루라운드로 오기 전의 일을 말해 주었어요. 친구를 잃었다고 했었죠..."

"어떤 친구였대요?"

"저도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스칼렛을 웃을 수 있게 한 사람이었다고 했어요."

한나는 문득 자신이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웃는 법을 알지 못했다. 웃음이란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안면 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만약 이고르를 포함한 복면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들은 기겁하면서 그들의 'pp-19-01'을 한나에게 쏴재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나는 바람을 잠시 잠재웠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다시 한 번 입을 씰룩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경련에 인위적으로 웃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말했죠. 한나는 초콜릿 좋아해요?"

이두나가 넌지시 물었다. 초콜릿, 기억 속에 있던 음식이었다. 분명 달콤한 내음을 풍기는 것이었다. 

"좋아해요."

"한나, 만약에 이 곳에서 같이 나간다면, 우리 다 같이 여행 한 번 가보지 않을래요? 스칼렛이랑 함께 말이예요."

"제가요?"

"같이 가기 싫어요?"

"그건 아닌데... 하지만 스칼렛은...."

한나는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아..."

한나는 이두나가 고마웠다. 얼굴도 맞대지 않았고, 겨우 목소리밖에 알지 못했음에도, 이두나는 한나를 딸처럼 아껴주었다. 한나의 마음 속에 있던 분노는 모래바람에 깎이는 바위가 된 지 오래였다. 밑부분이 겨우 얇게 남아 윗부분을 지탱하기도 버거운 그 분노는 금방이라도 엎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전 스칼렛을...죽여야.."

"한나."

이두나가 한나의 이름을 불렀다. 한나의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스칼렛은 좋은 사람이예요. 스칼렛과 얘기를 나눠보는 건 어때요? 서로 오해도 풀 수 있을 거예요. 한나처럼 따뜻한 사람이니까,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줘요."

끝내, 한나를 옥죄던 분노라는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이내 시야는 뿌옇게 흐려진다. 한나는 앞을 보려고 눈을 비볐지만, 눈썹이 찔려 되려 눈물은 멈추지 않고 줄줄 흘러내렸다.


"혹시 울고 있어요?"


"...네."


한나는 이제 감정을 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확신 없는 증오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한나는 거짓이 아닌, 진실된 감정을 풀어내려고 했다.


"힘들면, 울어도 돼요. 제 어깨는 아니지만, 전 지금 문에 어깨를 기대고 있어요. 한나, 문을 제 어깨라고 생각해 주겠어요?"


"너무 이상한데..."

"그러지 말고, 어서요."

이두나는 한나를 부추겼고, 한나는 이두나의 재촉에 이기지 못하고 몸을 움직여 침낭을 문에 기대었다. 차가웠지만, 따뜻했다. 따뜻한 바람이 한나의 귓가에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죠?"

"...그런 거 같아요."

"저도 지금 이불을 덮고 한나처럼 문에 기대고 있어요. 서로 공통점이 하나 생겼네요. 어때요?"

공통점, 그건 아까 이두나가 말했던 경험의 공유였다. 한나와 이두나는 서로 문에 기대고 있었다. 이두나와 경험을 공유한다.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더니, 이내 잔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기뻐요. 아주 많이 기뻐요."

기쁨이란 감정을, 한나는 꿈속의 아이가 아닌, 이두나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이제 자 볼까요? 내일이 무슨 일을 가져다 줄지 모르니까, 잠은 푹 자둬요."

이두나가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고, 한나는 바람을 침낭 속에 집어 넣었다. 따뜻함이 배가 되어 한나의 졸음은 빠르게 눈꺼풀로 달음박질을 했다.

"네...그럼 이두나도...잘.."

한나의 마지막 말은 맺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굉음과 함께 한나가 있는 복도의 창가에 폭발이 일어났고, 한나는 반사적으로 바람을 창가 쪽으로 산개시켜 파편을 날려보냈다. 방 안쪽에서 이두나가 비명을 질렀고, 곧이어 사이렌 소리가 저택을 가득 메꿨다.

"이두나!"

"한나!"

한나는 바로 침낭에서 몸을 빼 복면들의 것과 같은 pp19를 들었다.

"한나,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한나는 고글을 쓰며 말했다. 한나의 것이 아닌 자연의 바람이 복도로 휘어올라왔다. 한나는 어두운 들판을 주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진이라도 난 건가요?"

"....아뇨. 지진은 아니예요."

풀들은 마치 응원을 하는 것처럼 하늘하늘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한나는 이내 풀들을 조금씩 꺾으며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두 개의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풀 속에서 다가오는 작은 2개의 얼음 벽들, 그리고 그 중 하나에서 야구공과 비슷한 크기의 물체가 눈을 섞은 바람에 휘날려 한나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한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바람을 공에 집중시켰다.

공은 힘을 잃고 저택에 떨어지기 전에 한나의 바람에 크게 궤도를 틀어 돌담에 직격했고, 창가를 부순 것과 비슷한 폭발이 일어났다. 흙먼지가 3층까지 솟아올랐고, 한나는 바람으로 들어오는 먼지를 쫓아내었다. 벌써부터 몸이 피곤함을 느꼈다.

"...이두나, 혹시 마법을 믿어요?"

"네?"

"...그냥 흘려 들어줘요."

이곳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었다. 저택은 이두나를 가두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했고, 찾아올 사람은 복면들이 말한 회장이거나 지원 팀을 빼고는 단 한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스칼렛.'

"당신이 말한 스칼렛이 찾아온 거 같아요."

"스칼렛이요?"

"수류탄을 던진 거 같아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괴상한 공격에 한나는 이렇게라도 이두나에게 거짓으로 포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두나에게 '나 바람 조종할 줄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나 얘기하지 않은 한나였고, 하물며 저택을 공격한 눈바람과 공들도 정상적인 설명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 가지 말아요."

이두나가 걱정이 묻어있는 한 마디를 건넸다. 이틀 전이었다면, 한나는 이두나의 말을 거의 깔끔히 무시했을 것이 분명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한나는 이두나에게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스칼렛을 만나, 진실을 물어볼 것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럼 나랑 약속 하나만 해요."

"약속?"

한나는 굳은 다짐을 하려는 연설자의 심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을 믿어볼 테니까. 이 일이 잘 끝나면..."

"잘 끝나면...?"

"저랑 같이 있어 줘요.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까요. 그게 제가 바라는 약속이예요."

어쩌면 무리인 부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이두나를 믿은 이상 목적 없이, 갈 곳 없이 방황하게 될 고아나 다름이 없었다. 한나는 절박했고, 불안했다.

"저도 약속 하나 해도 될까요? 안전하게 숨어 있다가 일이 다 끝나면 나와 줘요. 그럼 스칼렛과 같이 당신을 맞이하고, 원하는 만큼 같이 있어줄게요."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한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전 숨어 있을 테니까... 스칼렛에게 제 얘기 잘 해줘요."

"...꼭 살아서 이곳으로 돌아와요."

한나는 알겠다는 표시로 처음 이두나와 대화를 나누기 전 했던 다섯 번의 노크를 하고, 총을 챙겨 계단 쪽 복도로 향했다.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눈여겨 본 다락방으로 가는 문이 하나 있었지만, 사다리가 필요했고, 사다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한나는 숨을 가다듬고, 바람을 군화에 걸었다. 낮에 강행한 연습이 빛을 발하길 바라면서, 한나는 바람을 움직였다. 조금씩 바람이 한나의 발을 띄웠고, 한나는 세탁기의 빨래처럼 휘청거렸다.


한나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았고, 짖궃던 바람은 이내 한나의 마음대로 한나의 몸을 수직으로 올렸다. 마침내 한나는  다락방의 문을 잡아 열었고, 그 위로 들어간 다음 문을 조금만 열어 두기로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소리만 내지 않으면 스칼렛이 위를 올려다 볼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한나는 약속을 지킬 준비를 마쳤다.
이제 이두나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124.


엘사의 디오라마는 근거리에 있는 환경들만 구현할 수 있었다. 숲에서 저택까지의 거리는 못해도 200여 미터 남짓이었고, 이것은 디오라마 기준으로 근거리는 절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안나와 두 동생은 서로 떨어져서 풀숲을 통과하기로 했다. 멜리사는 다행이 작은 얼음 벽들을 자신들과 안나 언니의 몫까지 만들어 띄울 수 있었다. 숲에서 나온 세 사람은 즉시 풀밭에 엎드리다시피 앉아서 저택으로 접근했다. 저택의 CCTV를 무력화 시켜야 했기에, 안나는 엘사에게 뇌산수은 폭탄들을 넘겨주었다.


-엘사, 그건 충격에 약한 폭탄들이니까, 언니가 기계 장치를 부수면 너는 눈보라로 부서진 기계장치를 목표 삼아 날려 보내줘.-

엘사는 그 작은 공이 폭탄이란 것을 다시 상기시켰고, 앙나 언니가 총을 조준해 CCTV를 부수자, 눈보라를 만들어 폭탄을 실어보냈다. 잠시 뒤, 폭발과 함께 기계장치가 있는 곳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3층의 복도 창가 밑과 2층 복도 창가의 위가 파편이 튀어나오면서 골조만 남게 되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을 들으며 엘사는 다시 한 번 폭탄을 들어 실어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폭탄은 아까 명중하려던 곳에 닿지 못하고 급격히 꺾여 1층의 돌담을 폭파시켰다.

"엘사, 무슨 일 있어?"

멜리사는 엘사를 걱정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눈보라에도 엘사가 제어할 수 있는 거리가 있었다. 엘사는 이제 막 피곤함을 덜어 낸 상태에서 앙나 언니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고, 방금의 그 상황 또한 그 예민함 때문에 통제를 잘 하지 못한 거라고 자책했다.

"언니, 죄송해요.."

"괜찮아, 나머지 하나는 옆의 벽을 터뜨려 주렴, 아까 처럼 말이야."

안나는 이번엔 건물 옆 면의 CCTV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는 걸 알려주듯 총알의 거친 마찰음과 함께 CCTV에서 스파크 소리가 들렸다. 엘사는 마지막으로 남은 폭탄에 다시 집중하며 눈보라를 만들어 냈고, 폭탄은 꺾이지 않고 옆 면 CCTV에 명중해 폭발을 일으켰다.

"이제 다 썼어요.."

"수고했어. 이제 멜리사 뒤에서 잘 따라와 주렴. 멜리사, 엘사를 부탁해."

"맡겨줘!"

곧이어 적들이 안나 일행을 발견한 듯 저택의 정문으로 튀어나오는 두 명의 적이 있었고, 그들은 안나 일행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대부분 멜리사가 쳐 놓은 얼음 벽에 맞거나 튕겨나갔다. 안나는 멜리사와 엘사가 없었다면 오로지 잠입으로만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잠입보다 더 생존 확률이 높은 방법이 이 두 아이를 동행시키는 것을 총알이 박히는 얼음 벽들을 보며 깨달았다.

적들의 총알 세례가 잠시 멈추자, 안나는 얼음 벽에서 총구를 살짝 기울여 침착하게 적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8발의 총알을 4발씩 끊어 쏴 방탄복과 목을 맞추어 쓰러진 적들을 보고, 안나는 잠시 동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풀숲 너머로 희미하게 안나를 바라보는 두 동생의 모습이 있었다.

"언니가 눈 감으라고 할 때는 감아야 해. 알았지?"


동생들을 알았다는 듯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2층 창가에!"

엘사가 다급하게 외쳤고, 안나는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2층에 있던 적이 무언가를 거치시키더니, 방금 쓰러뜨린 두 적의 것보다 더 위협적인 난사가 이루어졌다. 기관총을 거치한 듯 했다.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안나는 급히 방향을 꺾어 두 동생과 합류했고, 즉시 연막탄을 두 개 꺼내 하나는 조금 왼쪽, 나머지 하나는 오른쪽을 향해 던졌다. 연막이 피어오르자, 엘사가 눈보라를 이용해 연막을 넓게 퍼뜨렸다.

"이제부터 언니 등만 보고 따라와야 해. 알았지?"

"응. 조심해야 해."

"네...다치면 안 돼요..."

두 동생은 알겠다면서도 안나를 걱정했고, 안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것으로 긍정의 표시를 대신했다. 안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고, 등 뒤에서 아이들의 다급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앞으로는 엘리사가 띄워 놓은 얼음 벽에 부닥치는 총알들의 타격음과 기관총의 발사음이 연달아 들렸다. 연막에 가려진 덕택에 세 사람에게 쏟아지는 총알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연막 속에서 엘사가 폭탄으로 부순 돌담의 흔적이 보였고, 안나는 곧바로 돌담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다급함을 파고든 실수였다. 돌담의 바로 앞에는 부서진 창가가 있었고, 창가에 숨어있는 적 하나가 안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안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리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안나는 어떻게든 총에 맞지 않으려고 mp5로 목과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엘사가 보낸 눈보라와 멜리사의 얼음 조각들이 적을 향해 직격했고, 적은 총을 쏠 새도 없이 뒤로 넘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조심하라니까!"

멜리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미안!"

안나는 쓰러진 적을 향해 mp5를 세 발 발사했다. 이제 탄창에 남은 총알은 19발이었다. 여차하면 mk25권총으로 대비할 수 있었지만, 잔탄 계산은 교전 중이라면 다다익선인 습관 중 하나였다. 등 뒤에서 멜리사가 안나가 매고 있는 백팩을 팡팡 두드렸다.

"다음 번에 그러면 엉덩이 때려줄거야!"

그 말을 들은 엘사는 조용히 멜리사의 옆에 서서 안나의 엉덩이를 툭 툭 쳤다.

"알겠어, 미안해 얘들아... 눈 좀 감아주겠니."


안나는 창가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엘사가 폭파시킨 1층의 창가는 안나가 핫라인에서 보았던 그 이질적인 부엌의 것이었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따로 패닉룸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안나는 멜리사의 손을, 멜리사는 엘사의 손을 잡고 저택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하기 전, 안나는 벽에 붙은 차단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물쇠는 mp5에서 사출된 한 발로 손쉽게 열렸고, 안나는 보이는 레버들을 죄다 내렸다.

잠시 동안은 정전이겠지만, 특수 목적으로 지어진 저택이라면 곧바로 건물 내 비상발전기가 작동할 터였다. 저택 안과 밖의 모든 불이 꺼졌고, 안나는 재머를 작동시켰다. 사이렌이 울렸다는 건 추가로 적이 더 올 수도 있다는 신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마저 확실하지 않았다. 모든 작업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변수는 존재하며, 그것을 경험과 직감으로 대비해 살아있을 뿐이다. 안나는 그저 지금 켜진 재머가 적들의 후속 지원을 막아주길 바랬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눈을 꼭 감고 줄줄이 소시지처럼 안나의 손과 이어진 두 동생이 있었다.

피웅덩이에서 꺼낸 핏덩이들을, 안나는 비자발적으로 피웅덩이로 끌어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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