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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픽] 회중시계 -23-

00(115.22) 2021.03.27 23:30:32
조회 297 추천 17 댓글 4


  건우는 요즘들어 자신에게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느꼈다. 고작 두 사람이지만, 하필이면 건우의 이곳에서의 삶에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의 질문이라 그 크기는 작지 않았다.


'왜 음악을 하냐?'


 처음 교수님이 질문하셨을 때만 해도, 쉬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본 다음에 답을 하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을 정도로. 그런데, 어쩐일인지 방금 명환이의 질문에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무슨 재미로 살고 있냐는 질문이 먼저 와서 일지도 몰랐다. 꼭, 명환이는 건우 자신이 음악을 하며 마냥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있잖아, 사실 넌 몇 번이나 관뒀어야 하거든."

"뭐?"

"그렇잖아. 너 수재민 출신인거, 우리 학교에 모르는 애가 있었냐? 이상한 놈이 굴러와서 1등 2등 해대니 애들이 니 뒷조사 얼마나 했게. 툭하면 급식비 못 내서 담임한테 불려가, 뭔 행사 있으니 돈 내라 하면 그런 거 할 시간 없다고 연습해야한다고 빠져...."

"......."

"너도 알고, 나도 알아. 이 바닥은 돈 없으면 버티기 힘들어. 그런데 왜 넌 이 길을 포기할 수 없었을까. 몇 번이나 포기하고도 남았을 형편에, 상황에, 왜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마냥 피아노를 치고 있냐구. 너 공부도 잘 했잖아. 차라리 음악이 아니라 공부를 했으면 그 듣기 싫은 소리들 안 들어도 됐을 텐데."


  명환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서, 평소의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건우는, 명환이 그냥 해보는 말이라거나 자신을 비웃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님을, 그 지점에서 알아보았다.


"근데, 그렇다고 니가 막, '음악 할 때만큼은 즐거워요' 하는 놈도 아니거든. 넌 누구보다도 음악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잖아. 애들이랑 맨날 싸우는 이유도 그래서지. 다들 하하호호 웃고, 즐기고 싶은데 넌 아니거든."

"........."

"기억나? 지난 번에 내가 했던 말."


'야, 뭘 그렇게 죽어라 해? 그냥 좀 즐겨, 노래잖아.'


3월 초였나. 잘 되지 않는 열 마디만 주구장창 쳐댔던 날이 있었다. 레슨 전까지는 완성하고 말리라, 이를 꽉 깨물고 연습하던 건우를 찾아온 명환이 가볍게 툭 내뱉은 말. 건우의 마음 속에 심긴 열등감을 한 뼘 자라게 만든 말이기도 했다. 건우의 눈에 다시금 그 순간의 감정이 떠올랐다.


"강건우."

"......."

"즐겁지도 않고, 돈이 남아 도는 것도 아니고, 이것 말곤 안 되는 놈도 아닌데 넌 왜 이걸 하냐고."


  건우와 명환의 까만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건우는 지난 번처럼 명환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날 궁금해 하는 걸까. 잘 감추고 있다 생각한 부분을 들춰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다. 더 웅크리고, 더 가시를 뾰족하게 세워도, 겨우 그런 걸론 어림도 없다는 듯이....


"알아서 뭐 하게?"

"........ 뭘 어쩐다는 건 아냐."


명환은 내심 실망했다. 건우는 또 '관심을 끄라'고 화를 내며 자신을 내몰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스튜디오에서도 느꼈지만, 건우는 '왜 음악을 하냐'는 질문엔 답을 하기 싫어했다. '그냥'이라고 둘러댈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하고 명백한 이유가 있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사정에 반해, 명환 자신의 호기심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근거가 빈약했다.


"........"


그런데 어쩐일인지, 침묵이 길어졌다. 명환의 가슴 속에 기대와 체념이 싸움 붙었다. 그 탓에, 내내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명환이 먼저 스르르 피해버렸고, 그의 입에서 한숨이 작게 새어나왔다.

  명환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건우는 나름대로 고민 중이었다. 어쩐일인지, '뭘 어쩌려는 것은 아니라'는 명환의 말에, 이 애한텐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에. '도와주려고 묻는다'는 말보다 훨씬 신뢰가 가는 말이었고, 건우가 바라는 바였다. 여태껏 겪었던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정이나 마음 한 켠을 보여주면 이용해먹을 생각을 먼저 했기 때문에. 정작 말하는 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것 뿐인데도.

  건우의 마음 속에서는 '또 속으면 안 된다'는 경계와, 약간의 신뢰감, 정, 같은 것이 맡붙어 싸우는 중이었다. 결국에, 이긴 쪽은 늘상 건우가 버리려 애쓰는 나약한 마음이었다.


"살려고 하는 거야."

"..........어?"


꿈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에 내몰려 잠시간 본 환영이었을까. 어쨌든, 그 날 이후로 건우는 다시 살고자 마음 먹었다. 살아서, 그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빗자루로 맞아가며, 욕과 비아냥을 떠안아 가며 여기까지 온 거였다. 그리고 아직도 그 순간은 저 먼 곳에서 별처럼 빛나는 중이었다.


"별 본 적 있냐?"

"으응...? 별이야 당연히......"

"예쁘지?"


명환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났다.


"난 그걸 갖고 싶어."

"........."

"고모는, 아니 많은 사람들이 분수에 맞지 않는댔어. 누나는 그냥 날 두고 보고, 가끔 손 내밀면 보태주긴 했지만. ...몇 번이나 내가 얼른 현실로 돌아왔으면 하던 걸 난 알아. 다들 나보고 별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걸 보래. 근데 그랬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야."


건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우리집이 동네에서 제일 높아. 계단은 좁고 가파르고, 겨울엔 춥고, 여름엔 쪄 죽을 것 같애. 고개를 쳐들지 않으면 시멘트 발린 회색 계단밖에 안 보여. 끝이 없을 것 같고, 넘지 못할 벽 같아. 그 걸 보고 살라고? 얼마 못 가 미치고 말걸. 거길 지나는 방법은 딱 하나야. 고개를 쳐들고, 꼭대기 그 너머를 봐야 돼."


건우는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명환을 보고, 픽 웃었다. 작은 비웃음과, 그럴 줄 알았다는 체념이었다. 명환이 같은 애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마음을 적시는 실망감에, 건우는 또 스스로에게 속았음을 인정했다. 기대같은 건 하면 안 된다는 걸, 여러번 겪어 놓고도, 또! 건우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됐다, 내가 또 쓸데 없는 말을 했네."


소용없는 대화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지 여러 해다. 어차피 이해 못할 사람을 이해시키느라 시간과 정성을 쏟지 않는 게 이로운 방향임을 알고 있었다. 건우는 그만 대화를 끝내고 명환을 쫓아내려고, 명환이 쥐고 있는 와인병을 잡아 당겼다.


"강건우."


건우가 막, 병 입구에 입을 댔을 때, 명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우는 느린 동작으로 돌아와, 다시 반짝이는 명환의 눈을 쳐다보았다.


"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럼 그렇지. 건우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별 따겠다고 애쓰는 사람 봤냐?"

"........."

"그런 걸 꿈이라고 부르는 거야, 임마. 니 냄새, 니 색깔 다 묻혀놓고 무슨 별이냐? 별에 색칠한 사람 봤어? 누가 황당무계 별나라 얘기 하재?"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투에, 건우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건우의 입이 열렸지만, 명환이 한 템포 더 빨랐다.


"됐고, 그래서 니 꿈은 뭐야?"

".........뭐?"

"음악을 왜 하는지는 알겠어. 그래서, 음악해서 뭘 어쩌고 싶은 건데?"


건우는 일순간 명환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해 눈썹을 들썩였다. 명환은 다시금, 건우가 늘상 얄미워하는 미소를 씩 지으며 건우의 손에서 와인을 빼앗아갔다. 한 모금 마시고 입가를 쓱 닦으며 다시 건우에게 돌려주었다.


"살려고 한다매, 그게 끝이야? 그렇게 살아서 뭔가 이루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냐."

"..........."

"돈 많이 버는 피아니스트?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존경받는 피아니스트?"


건우는 또 콧방귀를 꼈다. 넌 겨우 그정도냐는 듯한 뉘앙스에, 명환은 멈칫했다.


"돈도 많이 벌고 인정도 받는 음악가 될 거다, 왜?"


좁은 연습실에 밝고 명랑한 웃음 소리가 울렸다. 명환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낄낄 웃으며 고개까지 저었다.


"그래, 넌 욕심 많은 놈이지."

"모르는 모양인데, 욕심은 다른 말로 힘이야."

"알아, 나도."


무어라 더 설명하려던 건우는 간단하고 명료한 명환의 대꾸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욕심이 없다는 건, 거기까지란 뜻이잖아. 맞지?"

"............."

"그래, 그래서 음악을 하겠다 한거면.... 욕심이 많아야 했겠네."


명환의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는 건우에게까지 닿았다. 희한하게도, 그 인정과 같은 중얼거림에 건우는 갑자기 취기가 확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괜한 것을 말했다 싶으면서, 동시에 조금 후련한 듯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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