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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늦은 5주년 기념 (스크롤주의, 독백주의)

ㅇㅇㅇ(58.234) 2018.07.23 15:21:11
조회 2205 추천 50 댓글 11

미친 6주년 뭐냐;; 죄송 제목 수정;;;



 
[주스 다 먹었어?]


-응 다 먹었어. 고마워.


[별 말씀을. 사실 그거 샐러리 넣었어]


-웩. 어쩐지 맛이 좀 이상하더라 :(


[오늘은 몇 시쯤 들어와?]


-오늘 재판은 두 시에 있는 게 끝인데, 접견 가야해서 아마 집 가면 다섯시?


[집에 불고기 재놨는데 외식하지 말고 굽기만 해서 먹어. 아니면 이따 같이 먹을까? 잠깐 집에 들를게]


-좋아! 그럼 오기 전에 연락


메시지를 쓰던 손가락이 잠깐 멈칫했다 뒤로 가기를 눌렀다. 꾹꾹 내용을 누른다.


-아냐. 바쁠텐데. 불고기 해서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이따 시간되면 들를게.  사랑해 :)]


-나도.


다소 건조하게까지 보이는 글자를 보내고 나니 양심에 찔려 이모티콘을 딸려 보냈다. 혜성은 1이 사라지는 걸 보다 심란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조한 사무실 밖으로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과 화창하게 맑아 구름마저 드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번개가 내리칠 요량인 마음과는 전혀 다른 하늘이었다.


그날의 일은 단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축하합니다, 임신하셨어요]






해가 말 그대로 들이치는 계절이었다. 여름이지만 아직 그늘은 시원한 날씨. 바람도 어지간히 불고 습도도 높지 않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자몽에이드를 빨대로 쪽쪽 빨아마시며 혜성은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했다.

조짐은 있었다. 첫째, 생리를 건너 뛰었다. 여성용품을 언제 샀는지 생각하다 보니 생리를 건너 뛴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불규칙했던터라 별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둘째, 먹는 게 안 땡긴다. 맛있게 먹던 것도 싫고 싫었던 건 여전히 싫다. 안 땡기는 걸 넘어서서 몸이 거부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수하가 걱정하는게 싫어서 먹긴 하지만 고역일 정도였다. 


그래, 이 정도면 의심할만했고 혜성은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간 병원에서 확답을 받았다.

그 때의 기분은 다시 생각해도 이상했다. 앞에서 의사가 뭐라고 하는데 잘 들리지 않고 멀리서 웅웅대는 것 같았고, 걱정스러웠는지 조심스럽게 괜찮냐고 어깨에 손이 얹어질 때에야 또렷이 초첨이 잡혔다. 애초에 피임을 작정하고 한 적도 없어서 이상할 게 없는데도 그랬다. 누가 보면 암 선고라도 받은 사람 같았을 거라고 혜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의문이 풀리던 순간. 멀쩡히 가정이 있는 사람인데도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다가도 바닥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찾아온 아기에 대한 반가움과 기쁨이 샘솟다가도 생경한 낯섦에 당혹스러웠다.


돌아가는 길에 혜성은 도저히 한 발짝도 떼기 싫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휴가를 냈다. 때도 잘 맞았다. 연주지법 휴정기간이 시작되어 당장 급한 일도 없었다. 사무실에서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당장 오케이가 떨어졌다. 유창이 호들갑을 떨며 괜찮냐고 말하는데 말할 힘이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더니, 차변이 정말 아픈 모양이라며 푹 쉬라고 그녀를 몰아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음료나 하나 물고 놀이터에 들어섰다. 나무 그늘이 아슬아슬하게 그네 하나를 가리고 있어 냉큼 앉았다. 샌들 사이로 들어간 모래는 조금 털었지만 이내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모래밭인데 지금 털어서 뭐해. 혜성은 제 마음이 꼭 이같다 생각했다.


뭐가 이렇게 불안할까? 남들은 기뻐하기도 바쁘던데.
한숨에도 가벼워지지 않는 마음과 생각이었다.


아이를 낳을까 하는 고민은 했었다. 혜성과 수하는 만만치 않은 긴 연애를 거쳐(전적으로 혜성의 의지였다) 남들이 보기엔 'Happily Ever After' 그 자체를 살아가는 부부였다. 행복하긴 했다. 장혜성 생에 이렇게 안정감 넘치는 시기가 있었나 싶을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일까, 더 나이가 들어 임신 확률이 떨어지기 전에 정형화된 '가정'을 꾸려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남들 말 정도는 코웃음치고 넘길만한데, 가족을 너무 빨리 잃어버린 수하와 혜성 자신에게 제 편을 만들어주고 싶기도 했다. 태어날 아이의 의사는 반영하지 않은 생각이지만.


'수하 넌 아이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스치듯 물었을 때 수하는 미적지근한 말투로 '글쎄, 별 생각 없는데'라고 답했다.
미적지근했던 반응. 혜성은 마음을 읽을 줄 모르기에 답답했다. 
'쟤가 내가 별 생각이 없어서 저러는 건지, 정말로 원하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


혜성은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수하가 원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럼 나는? 아냐. 수하는 그럴 애가 아냐. 그리고 따지고 보면 본인이 원인제공을 한 거 아냐?' 라는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걔가 원하고 말고를 떠나서 아이가 생기는 게 좋은 일이기는 할까?' '난 한번도 아이를 계획해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정말 잘 키울 수 있을까?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할 텐데. 건강한 아이이기는 할까? 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사히 낳을 수는 있을까? 수하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닌데 기형아일 확률이, 그보다 애가 어디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하지?' 라는 생각으로 흐르기도 했다. 소란스럽게 생각했지만 기저에 깔린 생각은 단 하나였다. 차마 입으로, 생각으로도 꺼내지 못한 단어. '무섭다.'


그도 그럴 것이, 평도에는 어디론가 미루고 치워버리기라도 했을 텐데 무려 '임신'인 것이다. 
혜성과 수하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 장혜성 인생 최대의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혜성은 자몽에이드의 과육을 씹으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혜성은 기본적으로 욕구에 충실하다. 솔직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이 그 솔직한 본성에까지 닿지 못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감각이 혜성의 이성을 몰아세웠다. 병에 의해서였든, 사고에 의해서였든, 민준국에 의해서였든 수하와 혜성이 경험한 결핍과 상처에 대한 경험은 그 불안을 부추겼다. 애초에 이 상황이 실제이기는 한가? 나 꿈 꾸는 거 아니지? 내 안에서 세포형태로 존재한다는 '얘'가 실체가 있기는 한 거지? 


"으아아!"


혜성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넷줄에 머리를 박았다. 정신차려 장혜성, 정신차리자! 
꼭 잡고있는 그넷줄에서는 녹슨 쇠 냄새가 났다. 피냄새같기도 한 그 냄새를 따라 머리 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자취를 감췄다. 
그 때 신변호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 건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짱변, 내가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말이야. 아이를 낳고 키우는 참 무서운 일을 겁도 없이 해치웠다 싶어."

"아 예, 그걸 왜 저한테...?"

"짱변이 부담가질 캐릭터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이야. 내 아내도 겉으로는 기뻐하는 척 했는데 사실은 아이가 정말 미웠다고 하더라고. 심지어 예쁘지도 않았대. 그걸 손주를 보면서야 이야기하는데, 허 참." 

"그럴 수도 있어요?"

"왜 안 그렇겠어. 나 때야 모성애가 절로 생기는 줄 알았으니 그이가 티도 못내고 많이 우울해했지.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다는 거야. 정말 깜빡 속았지. 근데도 우리 애들 부족한 데 없이 잘 컸네. 남들 하는 카네이션도 해 오고, 사춘기 겪으며 지지고볶고 싸우고, 시답잖은 놈 데려와서 밥상 뒤집어엎기도 하고."

"잠깐, 근데 이 얘기를 왜 저한테 하세요?"

"원래 노인네가 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야. 잠자코 들어봐! 하려던 말을 까먹었잖나! 

흠... 가정에 아이가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부부가 중심을 잡고 있으면 결국 모든 건 순리대로 흐르는 법이야. 부부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이 그래. 그러니까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고민하지 말게.

어차피 짱변이야 내내 사도를 걸었고(사도라뇨, 기분 되게 나쁜데요) 꿋꿋이 헤쳐오지 않았나. 그쯤되면 사실은 남의 눈이 별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도 않을 테지만 막상 또 닥치면 이전에 배웠던 것도 다 까먹기 마련이야. 그래서 말해주는 거네." 

"... 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을 거고."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을거고.
그 말을 되내이다 보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도 같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아시기라도 한 걸까?

'그이가 자네가 엉망진창이 되는 꼴을 보고있을 위인이긴 하고?' 신변호사의 다른 말이 머리를 스친다. 
그 순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있던 한 사람이 다시 등장했다.


"좋아. 처음이니까 이럴 수 있어. 그러니까 수하한테 말하자... 한 시간만 있다가."


...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 확실하다.



*



한쪽으로 밀려나있는, 박수하의 관점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조금(많이) 달랐다.
수하는 정말로, 정말로 아이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생긴다면 그의 태도는 바뀔 것이다. 
사랑하는 혜성과의 아이가 아닌가. 그것도 혜성의 피가 이어져 자신의 생애에 나타날 생명.
거듭 말하거니와 현재 상황에서 보면 그는 정말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생기지도 않았는데,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정도.


그 이유는 간단했다. 무엇보다 혜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혜성이 감당해야하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을 제외하고서라도, 수하는 혜성과 관련한 어떤 리스크도 생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하루 하루 혜성을 더 사랑해가고 있었다. 혜성이라는 세계를 더 알아가고 있었다. 혜성이 행복해하면 그도 행복했고 제 뜻을 관철해나갈때 제 일처럼 가슴이 벅찼다.
혜성만 존재한다면 솔직한 말로, 다른 사람은 다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혼자만의 생각이고 이제는 친구나 동료, 선후배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기에 그의 주위는 좋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수하는 타인과 교류하는 즐거움과 적당한 먹금을 통해 꽤 즐거운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0년. 혜성만 쫓고, 바래왔던 시간은 계속 이어져 혜성은 그의 삶에서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생과 기쁨에 혜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서, 또 그런 혜성에게 솔직하게 사랑받고 있어서 수하는 마치 초록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듯 하루하루 더 완전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하고 완벽하기에, 수하는 더 솔직해지고 다정해지고 문득문득 불안해졌다.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몸에 학습된 기억 때문이기도 하고, 일하면서 접하는 어두운 면 때문이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수하는 '더 많이 알아서' 더 염려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수하는 그런 불안을 그럭저럭 잘 숨겨왔다. 혜성도 안전에 예민한 수하를 알아서 더 신경을 써주고는 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 연락이 안되는데, 네, 네? 오늘 짱변 휴가라고요?"


입술을 깨무는 수하를 보고 옆에서 무슨 일 있냐고 묻는데 들리지도 않았다. 
마음이 놀라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미 부재중 표시가 찍힌 건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 더 걸었지만 역시 소리샘으로 넘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전화를 해지하지 않는건데. 휴대폰이 있으니 필요없다며 해지하던 혜성을 말리지 않았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


와이프 연락이 안되서. 외투를 집어들며 말하자 서 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를 벗어나자 훅 더위가 느껴졌지만 체감하지 못할만큼 마음이 급했다. 집까지 20분정도의 거리를 수하는 성큼성큼 걸어 10분만에 도착했다. 
안 그래도 요새 몸이 안 좋은 혜성이었다. 여름을 타는지 뭘 통 먹지도 않고 비실비실해서는 쓰러질까 겁이 날 정도였다. 
약간 흐트러진 숨을 정돈한 수하가 손목 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 혜성이 와 있을 시간이었다. 
삑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이렇게 느릴 수가 없었다.  


"하..."


오후의 안온한 햇살이 비추는 집은 사람이 있었던 흔적도 없었다. 
거실에도, 침실에도, 서재에도. 
수하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으로 대충 훔치고는 머리를 짚었다. 


생각해보니 그들의 긴급 코드가 전송된 것도 아니었다. 
잠금화면을 풀고 카톡도 아닌 문자함을 뒤져보니 오늘 좀 늦게 들어가겠다는 문자가 와 있다. 
세상에, 문자를 누가 봐? 카드 쓴 내역이나 오는 문자함 사이에 혜성의 메시지가 끼어있었다. 수하는 


수하는 최근 혜성의 행동을 되짚는다. 찬찬히 되짚어보는데 갑작스레 이럴 만한 일이 없다. 수하는 혜성을 잘 알고 있었고, 혜성의 씩씩함과 뻔뻔함, 스트레스 받지 않는 성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정말로 이럴 일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수하는 미궁에 빠졌다. 도무지 건져낼 건덕지가 없으니 되짚기도 어렵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푸는 혜성이 아님을 알기에, 혜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로 이어지는 생각. 그러나 아무리 되짚어도 혜성에게도 별 일이 없었다. 


설마.


수하는 손을 멈췄다. . 
혜성이 알게모르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도 '정말' 괜찮았고 그 또한 별 생각이 없어 넘겼던 일이다. 
아이의 존재. 세간에서 가족의 완성이라고 부르는 형태. 많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이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었던 혜성이, 수하 스스로도 놀랄만큼 긍정적이었던 순간의 상상을 잡아내고 고민하고 있는 걸까? 


혜성을 봐야겠다. 눈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다. 
수하는 요즘 이상하게 넋이 나간 것 같았던 혜성의 행동이 오늘의 일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서로 다시 돌아가야한다. 경찰서로 돌아가는 수하의 뒤를 텅빈 집이 배웅하고 있었다.


*


한편 혜성은 혼돈과 걱정의 단계를 지나 어쨌든 현실긍정의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혼자 차분히 생각하고 나니 정리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아이를 가졌다는 통보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것, 남들에게 다르게 비치는 것. 그들은 시작부터 달랐고 여전히 보통과는 약간 벗어나있었다. 수하가 농담처럼 '눈을 마주치면 생각이 들린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웃거나 아직도 중2병에서 못벗어났냐며 안타까워한다. 그들의 나이차이를 알면(사실 둘은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지만) 누군가는 수하를 비웃고 누군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태도를 바꾼다. 그게 왜 우스운 일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바보같다는 걸 안다. 저런 건 하등 생각할 필요 없는 일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면전에서 코웃음치며 비웃는 건 혜성에게는 일도 아닐 것이다. 젠장, 이건 다 호르몬 때문이야! 수하는 실제로 면전에서 상대를 메다꽂은 적도 있었다. '그때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네.' 혜성은 생각했다.


일종의 사이클이다. 몇 년 주기로 며칠, 몇 시간, 몇 분 정도 비슷한 고민이 찾아든다. 결론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좆같고 가운데 손가락이나 치켜세워주면 된다는, 똑같은 대답을 얻기 위해서. 이쯤되면 부조리한 일 투성이인 세상에 열심히 맞서자는 자기다짐인가 싶을정도.


"배고프다, 집 가자."


지금이라면 입맛이 돌아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맑게 개어 상쾌했다. 혜성은 끼익 그네를 멈추고는 일어섰다. 뒤이어 찾아온 사람만 아니었어도 혜성은 애초에 원했던 완전범죄에 성공했을 것이다.


박수하였다.

혜성은 저도 모르게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 반. 수하가 난리났을 시간이 지나있었다.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란 혜성을 본 수하는 거친 숨을 쉬며 놀이터 입구에 멈춰섰다. 숨을 몰아쉬다 천천히 가라앉혔다. 호흡이 진정되며 안도가 찾아들었다. 그네 앞에 선 혜성을 제 시야에 두자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이대로 끌어안으면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눈으로 전하는 말이 한가득인데, 아쉽게도 혜성은 듣지 못한다. 놀란 눈을 한 혜성을 수하의 시선이 빠르게 훑는다. 제가 아침에 골라준 차림 그대로인 혜성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말간 눈은 그저 놀람만을 담고 있을 뿐 어느 생각도 스쳐가지 않는다. 


"나 어떻게 찾았어?"

"그게 중요해? 연락은 또 왜 안 받아."

"전화했었어?"


휴대폰을 보니 생각한답시고 무음모드로 해 놓은 화면에 부재중 전화가 와르르 뜬다. 혜성은 뜨끔했지만 티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오늘 좀 늦을 거라고 얘기했잖아. 그건 왜 무시해? 그리고 수하 너, 내가 여기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당신, 조금 늦을 거라고 문자 한통 보내면 다야?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해? 문자 한통 보내고 전화도 안 받는데 내가 걱정을 어떻게 안해?"

"그래 그건 미안해. 근데 너 아직 내가 여깄는 거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 안했다."


이번엔 그가 뜨끔했다. 하지만 부창부수라고 또 티 나지 않게 수하의 눈의 재빠르게 놀이터를 훑었다. 평소 자주 움직이던 반경 외에 위치한 곳이다. 회사와 가까운가? 그렇지 않다. 할 말을 찾고 있는데 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이 마른 수하가 눈동자를 굴리다 혜성에게 딱 걸렸다.    


"너 위치추적했지."

"이 근처 샅샅이 뒤졌어."

"그래, 그리고 위치추적도 했겠고."

"... 맞아."

"비상코드 아니면 안 쓰기로 약속했었잖아. 잘못했지?"

"...잘못했어."


수하는 조금 억울해졌다. 자기가 속 태운 게 얼마고 애초에 혜성이 연락만 받았으면 될 문제였는데 결국 또 이런 상황이 되었다. 혜성이 자주 써먹곤 하는 '태세 반전' 뭐 그런. 하지만 위험코드가 전송된 상황 이외에 쓰지 말자고 약속했던 걸 어긴 건 알아서 할 말이 없었다.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따라붙을 줄 알았던 말이 들리지 않자 더 그랬다. 수하가 얌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혜성은 제 눈을 보지 않는 수하를 올려 보다 입을 다물었다.  


둘 모두 입을 다물자 소강상태가 찾아들었다. 아까의 언쟁이 없던 일이라도 된 것 같았다. 
사실은 둘 다 조금 오버했는지도 모른다. 
혜성은 그즈음에서 수하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는 지나치지 않은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도 잘못했어 수하야."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솔직함은 언제나 통한다. 그게 심지어 자신이 유리한 상황을 포기하는 바라면 더더욱.  


혜성의 말에 수하는 늘 그랬듯 긴장을 풀었다. 혜성이 놀이터 모래를 발로 툭 찼다. 앞코에 걸린 모래 한줌이 톡톡 앞으로 쏟아졌다.  수하는 노을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눈이 부시기라도 한 양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모래 한 줌이 날아온 만큼 한 발짝 앞으로 거리를 당겼다. 
초록 나뭇잎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놀이터의 그네는 사람 없이 끼익 소리를 냈고 수하를 지나친 바람에서는 희미한 땀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혜성은 이미 마음이 풀린 것을 눈치채고서도 아닌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 풀렸어?"


슬쩍 눈치보며 건네오는 말에 수하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화가 풀렸냐고? 물론 풀렸다. 혜성이 별 탈 없이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는 걸 본 순간부터 화는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순순히 말하기도 싫어 입을 꾹 다물자 느물거리며 치대는 혜성의 말이 따라붙었다.  


"여보, 화 안 났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졌다. '여보'라는 말을 항상 저렇게 써먹는다.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웃는 소리가 오늘따라 반갑지 않다. 서로 함께한지 오래되어서일까, 눈썹의 움직임, 얼굴의 표정, 낯빛 만으로도 서로의 기분을 속속들이 파악하게 된다. 수하는 결국 슬쩍 웃었다. 별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서로의 얼굴을 줌인(zoom-in)하고 있던 시야가 긴장이 풀리며 탁 확장되었다. 혜성은 수하를 둘러싼 공원의 입구를, 수하는 혜성이 앉은 놀이터를 인식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더위가 한발 물러난 날씨에도 수하는 7부 소매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덥긴 한지 수하의 목에서는 한 줄기 땀이 흘렀다. 집에라도 들렸다왔는지 아침에 입고나갔던 옷과 다르다. 사락사락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와 얼마 전 본 '너의 이름은'에서 나올 것 같은 구름이 늘어진 하늘, 제멋대로 어슬렁거리는 비둘기와 퇴근 시간인지 하나 둘 길을 거니는 사람들. 


오늘 따라 인적이 드문 놀이터, 얼마 전 까지 앉아있었던 게 분명한 삐걱이는 그네. 그네 밑에 푹 파인 모래구멍과 혜성의 흔적임이 분명한 발자국. 그 와중에 분리수거 통에 넣으려는지 가방 안에는 다 먹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 들어가있었다. 덥지도 않아하는 걸 보면 지금은 위치가 달라진 나무그림자 밑에 숨어있었던 게 분명하다. 수하는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것 같은 손을 꾹 말아쥐었다.
낮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의도한 것보다 투정 같은 말이었다.


"내가 두 번 말하라고 했잖아. 간지러워도 좋다고."


화가 다 풀린 걸 알아버린 혜성은 자못 당당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 농담만 늘었다. 
꼭 자기 좋을 대로만 하지. 그런 면을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수하는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늙는 건 다 당신 탓이야. 


"이리 와."

"싫어."


제자리에 선 채 혜성은 팔을 살짝 벌렸다. 크지도 않은 그 동작이 수하에겐 너무 잘 보였다. 눈을 마주쳐도 읽히는 대로 읽었다. 말해주지 않는 게 많은 장혜성은 눈은 피하지 않는다.


"이리 와 수하야."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


그는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일주일치의 걱정을 다 했는데, 그렇게 만든 혜성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정리해버리고 혼자 여기서 ... .


"와 줘."


수하가 터벅터벅 걸었다. 세 번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자석에 끌리듯 수하는 발걸음을 떼고는 혜성의 품에 안겨들었다. 하, 폐에 숨이 차오르듯 온 몸에 온기. 따끈한 체온. 청량하기까지한 혜성의 향수 냄새. 덩치 차이로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된 혜성이 가슴께에서 웃는 것이 느껴졌다. 뭘 잘했다고. 한숨 놓은 것을 티내지 않으려 수하가 꽉 팔을 조였다. 작게 항복, 소리가 들리고서야 힘을 풀어주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은데. 어느새 눈 높이까지 내려온 태양이 눈부셔 눈을 감으며 수하는 아주 조금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나 좀 그만 놀래켜."


천천히 다가간 수하의 품에 안기는 혜성.


"그래 맞아. 바보 같은 행동이었어."

"난 아이 필요없어. 정말로 당신만 있으면 돼. 당신이 내 가족이잖아."

"그래 맞아. 내가 잘못했어. 근데 수하야"


끌어안은 혜성의 어깨에 턱을 올린 수하가 나지막히 응, 하고 소리를 냈다. 


"애가 들으면 서운하겠다."

"잠깐, 뭐?"

"나도 믿기진 않는데 이 안에 애가 있대."


혜성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꺼림칙하기까지한 생경함을 느끼며 허리에 감긴 수하의 손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수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대번에 사람이 달라진 것 마냥 분위기가 바뀐다. 안절부절하는 손을 혜성이 떼지 못하게 눌렀다.


"그럼 당신 요 며칠간,"

"뭐, 임신 때문이었던 거지."


이렇게 초기인데도 호르몬이 달라지나? 아님 말구. 임신은 나도 오늘 알았어. 눈으로 하는 말에 수하는 힘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제 몸보다 한참 작아 폭 끌어안은 혜성의 어깨를 그러쥐고서는 그대로 말을 잃었다. 그런 수하에게 혜성은 짖궂게 말했다.


"너 지금 후회하고 있지. 너무 좋은데 방금 애기 필요없다고 한 말 때문에."

"아닌데. 난 정말로 당신만 있으면 돼."

"어?"

"근데, 이상해. 진짜, 너무, 기뻐..."


수하의 반응에 당황하려던 찰나 마주친 기쁨에 찬 음성. 마주한 눈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잘게 진동하듯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도. 수하는 아무렇게나 꿰어입은 옷을 바스락거리며 잠깐 넋을 잃은 것 같았다. 눈썹이 들렸다가 내려앉고 웃음이 터질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가라앉는다. 그 와중에 제가 괜찮은지 샅샅이 살피고 나서야 살며시 잡는 손. 이게 현실인지 헷갈리던 수하는 혜성의 손을 잡고 그 손을 간절하게 제 뺨에 비비고서야 현실감을 되찾은 듯했다.


수하는 몇 분간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멀끔한 얼굴이 지금은 유독 바보같았다. "너 우니?" 수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평소에는 까먹고있지만 저보다 한참 어린 게 티가 나 귀여웠다. 쟤가 귀엽다고? 나도 참. 혼란스러워하는 수하의 모습을 보며 혼자 배시시 미소짓던 혜성은 고개를 끌어당겨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방황했다는 사실과 근심을 쏙 잊은듯한 웃음이었다. 


수하는 혜성과 눈을 맞추었다. 혜성의 눈에서 그녀가 생각한 많은 것들을, 고뇌와 두려움과 혼란과... 기쁨을 읽었다. 적잖이 한 마음고생도. 그는 고개를 내려 혜성의 뺨과 제 뺨을 맞대었다. 큰 손이 혜성의 뒷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맞닿던 뺨이 멀어졌다 이내 꾹 입술이 닿았다.


"사랑해."

"나도"

"당신이 아이 가져서 하는 말 아냐.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그냥 당신이 없었으면 내 삶이 어땠을까 상상해보니까 아찔해서 그런거야. 그러니까 말 좀 해. 혼자 앓지말고. 나 정말 속 탄단 말이야.


작은 목소리가 혜성의 귓가로 흘러든다. 
혜성은 잠깐 손을 꼼지락거리다 말아쥐었다.


"너 언제 이렇게 느끼해진거야?

 아무튼... 미안해."


하고싶은 말은 처음부터 맨 마지막 단어였으면서, 혜성은 솔직하지 못하게 투덜거렸다. 생생한 사랑이 마침내 혜성을 끌어당겼다. 숨 샐 틈없이 끌어안으며 수하는 참았던 숨을 쉬었다.
저도 모르게 굳어있던 긴장한 어깨에 힘이 풀린다. 놀이터를 지나치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던말던 수하는 혜성을 끌어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어깨에 고개를 묻은 수하를 혜성도 이번에는 한마디 말 없이 마주안아 주었다.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알지."


많은 대화를 했다고 생각했었다. 많은 물음과 많은 대답을 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말이 남아있었다. 


고개를 든 혜성의 눈에 맑은 구름과 분홍빛으로 번지는 노을이 보였다. 그림처럼 날아가는 새 몇 마리를 말끄러미 보다 혜성은 어느 순간 안도했던 것 같다. 마침내, 라는 말이 어울릴법한 순간이었고 ... 그래 이 말이 어울릴 것이다... 긴 하루였다.




|

후일담

수하는 제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알아야겠다며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책을 읽어제끼더니 새파래진 얼굴로 아기가 생긴 건 기쁜데 당신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혜성에게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거나 생경한 장소에 가야한다거나 연락이 안되는 일이라도 생길때면 예민하게 굴어 혜성이 놀라기도 했을 정도였다. '말도 못하게 유난스럽다' 수하의 행동을 본 관우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투로 말했다. '쟤는 어떻게 저렇게 발전이 없다니?' 이건 도연의 코멘트. 


혜성은 건강했지만 심한 입덧으로 갈수록 말라갔다. 제발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며 수하가 정화수를 떠놓고 빌 정도로 혜성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입덧을 겪어야 했다. 지극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령해도 한입도 먹지 못하는 날이 대다수였다. 수하가 모든 걸 제쳐두고 극성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혜성을 챙겼음에도 그랬다. 혜성은 다 널 닮아서 까탈스러운 거라며 수하를 좀 놀리기도 하고 재밌어하면서도 꽤 명랑한 태도를 견지했다. 일도 잘 풀리고 있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며 출산 전까지 일하겠다고 선언해 수하를 기함하게도 했고, 전보다 한층 과보호하듯 애지중지하는 걸 귀찮아해 수하를 울먹이게 하기도 했다.


수하 입장에서야 이 힘든 모든 과정을 보며 속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특히 혜성이 혼자 힘들어하는 걸 대신 겪어줄 수도 없어 괴로웠고, 따져보자면 본인이 원인제공을 했다는 것에 과거의 자신을 철없다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혜성은 그래 너도 그정도는 괴로워야한다며 방치했다.

(혜성은 사실 순탄한 임신기간을 거치진 않았다. 입덧은 임신 중기가 넘어서까지 이어졌고 만삭이 될수록 거동마저 힘겨워졌다. 그 외에도 빈혈로 고생하거나 임신중독증 초기 증상을 발견하기도 했다. 수하는 그 후 정말로 하루에 한 번씩 병원에 데려가려고 들었다.) 


수하의 간곡한 만류와 사무실 사람들의 양해-당연하다며 빨리 쉬러 가라고 했지만 혜성은 마지막까지 새로 온 국선에게 인수인계를 했다-에 집에서 쉬기로 한 혜성.


혜성은 제 몸에 아이가 있다는 걸 퍽 낯설어했다.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파도에 당황하고 거북해하던 것도 한 때. 어느 순간 정을 붙였는지 최근에는 태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클래식은 듣다가 잠이 잘 온다며 저녁시간과 낮잠시간에 틀어두고, 듣다보니 괜찮다며 연주시향 콘서트를 다녀오기도 하고. 법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읽기도 하고 다양한 것들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요즘에는, 영어공부를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러했다.
'돌머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머리는 좋을수록 세상살기 편하다'
거기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렇게까지 표현할 게 있나 싶지만)을 장혜성 2세에게까지 남겨줄 수 없다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수하는 웃어넘기거나 자리를 피하는 대신 슬쩍 웃고는 몸을 붙여 앉는다. 


"내가 읽어줄까? 나 공부 많이 했는데. 영어 발음 파닉스도 다시 했어."


진지하게 원서를 보던 혜성이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준비를 했으면 빨랑빨랑 왔어야지. 그리고는 책을 탁자에 펼쳐놓고 하는 말. 자, 시작해.


나란히 앉아 저도 모르게 짓는 비슷한 웃음. 수하의 단 하나의 '사랑하는 당신'과 혜성의 단 하나의 '내 편'. 


그들은 얼마 후 수하를 꼭 닮은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외모는 수하를, 성격은 혜성을 똑 닮아 두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말썽을 부릴때면 종종 널 닮아서 그렇다며 수하를 타박하긴 했지만 혜성은 알고있었다. 자신을 닮았다는 걸...)


그들은 매년 가족사진을 찍었고 수하는 카메라에 취미를 붙였다. 몇년 후 절대 안된다는 수하를 이기고 혜성은 둘째로 딸아이를 얻었다. 그래서 가족사진은 총 네 명이 찍게되었다. 수하처럼 차분하고 눈썰미가 좋은, 혜성을 닮은 아이였다. 수하는 울며불며 분만실 앞에서 대기하다 파리한 혜성의 얼굴을 보고는 그 날로 정관수술을 했다. 더는 없어. 혜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어서 못하겠다. 동의.


여러모로 혜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위해 전적으로 육아를 맡아서 했던 수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육아휴직을 했다. 산으로 들로 놀러다녔고 혜성은 그걸 보며 힘도 넘친다 하고 웃었다. 둘은 사이가 여전히 좋았다. 수하는 마치 애 셋을 챙기듯 굴었고 혜성은 어린 게 까분다며 결혼 n년차의 내공을 발휘해 수하의 몸을 지분대다 깔깔 웃곤 했다. 물론 그 후의 상황은 늘 침대에서 끝났다.


가끔 아들과 딸이 혼나고 난 후 "미워!나빠!" 하며 다른 쪽에 달려가 울면 혜성은 "내가? 아니면 네 아빠가? 아니면 일단 우기고 보는 요 입이 문제인가?" 하며 반성시켰고, 수하는 아이의 속마음도 듣고 말도 잘 들어주었지만 결국은 "아빠도 엄마와 의견이 같다."며 두 배로 혼냈다. 자연히 서로밖에 없다는 걸 안 남매는 사이가 좋아졌다. 그리고 커 가면서 혼을 내되 지나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되 존중하는 부모를 존경하게 되었다.


둘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썩 나쁘지 않은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가끔, 혜성이 말을 많이 해 목이 아픈 날은 눈으로 하는 얘기에 수하가 답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텔레파시처럼 통하는 대화를 보다 아빠가 엄마 마음을 읽는다며 소란을 피우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평범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한 번 결정한 일은 무슨 일이든 해내고 마는 엄마와 타인의 속마음을 듣는 조금 특별한 아빠를 가진 가족이 되어. 너무 평범하고 소중해서,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그리고 언젠가는 알게 될 지도 모른다. 그들의 부모가 지나온 시간을. 조금 감탄하고, 분개하고, 안도하고, 또 사랑하면서. 









*


6주년 기념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때맞춰 못 올려서 가지고 있다 이러다 7주년에 올릴 것 같다는 위기감에 올림;;

->>>>>>>>> 죄송 왜 5주년 아니라 6주년이라고 써놨냐 ㅈㅅㅈㅅ 더워서 정신나간듯  혼자 6주년 축하 ㄹㅇ...

부족한게 많은데 봐줘서 고맙고 의도치않게 타임라인이 연결되는 것 같아서 쓴 글 링크 두고 갈게 물론 비번 까먹어서 수정은 없음;;


청혼하는 날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yourvoice&no=199629&page=2&exception_mode=recommend

청혼하는 날 후편
https://gall.dcinside.com/board/comment_view/?id=yourvoice&no=200864&page=1&exception_mode=recommend

4주년 기념
https://gall.dcinside.com/board/comment_view/?id=yourvoice&no=200864&page=1&exception_mode=recommend


수성행쇼해라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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