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때 스폰지밥 마니아였던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그 당시 가장 황당해했던 화는 바보상자 편이었을 겁니다.
안에서 삐비빕 소리만 내던 '바보상자'는 흔히 텔레비젼을 지칭하는 말인데
왜 텔레비전보다 더 리얼한 스폰지밥의 상자가 바보상자라 지칭되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징징이'의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점으로 봤을 때, 바보상자가 담고 있는 상징적 은유와 의미를 징징이를 비꼬는 의도와
스폰지밥과 뚱이의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것으로 한정시켜버릴 수가 있습니다.

바보상자는 단순히 스폰지밥과 뚱이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공간이 아닌,
인류를 이끌어온 시뮬레이션 게임에 대한 은유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시뮬레이션 게임이 무엇이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심시티나 심즈, 스타크래프트, 문명 5, 롤코 3, 주 타이쿤등이 있겠죠.
이 게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상상'대로 자신의 세계를 기획하며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상상'이 불확실성 속에 파괴될 수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기도 합니다.
이는 게임의 시초에서부터 나온 게임 그 자체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시뮬레이션 게임과 바보상자는 어떻게 연결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인류의 모든 예술은 시뮬레이션 게임 A.k.a 놀이에서 파생됩니다.
먼 옛날 호모 사피엔스들은 알타미르 동굴에 모여 소를 그리고 제전이라는 이름의 '시뮬레이션 게임'을 실시합니다.
이는 소를 잡기 위한 시뮬레이션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소를 몰기 위해 낸 소리가 음악의 시초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소를 잡는 전략을 짜기 위해 소를 그린 것이 미술의 시초가 되었고,
소를 잡는 동작을 연습한 것이 무용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통해 소를 더욱 수월히 잡게 되고, 계획과 작전이라는 개념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게임은 인류의 기획된,제한된 상상을 재현하는 예술과 달리 불확실성이 개입할 여지를 열어둡니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승리가 게임을 승리하는, 성장에 의한 쾌감입니다.

그 불확실성은 게임의 구상을 기획한 자의 오류가 아닌, 상대방의 행동, 상대방의 기획(온라인 게임의 경우)에서 옵니다.
우리는 게임 내에서 '타자'의 존재만 알 뿐, 그들이 어떤 전략을 보이는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스폰지밥과 뚱이는 바보상자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소리를 냅니다.
이들의 행위는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기본적 틀(해적 로봇이 내는 소리 등등) 내의 상상에서 이뤄집니다.
이를 이룩하는 그들의 행위는 게임의 버튼을 누르듯이 간단하고, PC방에서 디스코드를 깔고 온라인 게임을 하는 게이머들의 모습을 연상케합니다.
이들은 그것을 상자 '놀이'라 지칭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상자 내에서만 향유합니다.
그 상자의 공간은 컴퓨터 화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게임처럼 외부로부터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 안은 불확실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타자에 의해 보편이 정의됩니다.
타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야할 제도와 윤리, 법 등을 만들어 그들의 삶에 일어날 불확실성을 통제합니다.
그 모든 것은 불확실성을 없애 자본의 손실을 없애고 최대 효율을 달성하려는 자본주의의 이념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TV를 보는 징징이처럼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 외엔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도 타인의 언어일 뿐일테니까요.(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서의 평범한 사람은 거대한 자본을 가질 기회는커녕 '타인들'의 삶 하나 못 바꾸는, 실로 가벼운 존재에 불과합니다.
평범함이라는 원죄로 인간은 인생의 불확실성과 스릴을 느끼지 못합니다.

징징이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재능이 없는데도 클라리넷을 불며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는 그는 유목민처럼 어디론가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미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현실에 의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클라리넷 소리가 끔찍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일겁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게임 중독이 확산됩니다.
중독자들의 입장에선 드라마틱해야하는 삶이 사라지고 그 삶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게임일테니까요.
온라인게임에 깊게 탐닉하는 이들도, 약물 등 화학적인 유희를 탐닉하는 이들도 모두 현실이 사라진 세계에서 현실을 찾으려는 유목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폰지밥과 뚱이는 상자를 얻기 위해 TV를 구매합니다.
이는 게임을 구현할 상자를 얻기 위해 TV의 본 목적을 버리고 게임만을 향유하는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을 구현하는 개인적 공간(혹은 게임이 존재할 수 있는 최소조건)에 들어가 게임을 하며,
징징이의 발차기(외부의 개입)을 통해 불확실성을 향유합니다.
그것은 그들만의 세계가 건축되는 과정이며, 그들만의 세계가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징징이는 그런 그들을 보며 온 세상이 상자인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더욱 현실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는 징징이의 욕망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레슬링또한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확실성간의 싸움이지만 상자들은 그것이 왜곡되어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지개는 시적으로 동심과 유토피아의 상징입니다.
징징이는 그것을 차마 그려내지 못합니다.
게임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을 이겨나갈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야하니까요.

징징이는 결국 상자에 들어가 자신의 상상을 발휘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망상일뿐 쓰레기통에 던져져 현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은 결국 상상력을 좀먹게 되어 잃어버리게 된 동심은 쉽게 찾아오지 못한다는 조금은 비극적인 결말이지요.

헤르만 헤세는 그의 소설 유리알유희에서 게임이 인류의 고매한 정신을 이룩하는 도구라 말했습니다. 우리의 게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 샌드박스 게임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의 "상자"이고 그 속에서 재미를 찾을수 있는것도 또한 상상력이 원천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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