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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밤/문학] 느끼지 마라, 감춰라 - 4

abc초콜릿(219.249) 2020.03.15 20:56:39
조회 339 추천 24 댓글 9
														

1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196592

2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202308

3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216248

화수가 있는 건 예술의밤에 들어가는 지 모르는데, 일단 올려 봤어.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녀는 언니를 언급하는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오랜 시간 동안 문 건너편에 있는 언니의 행동을 소리 하나 발끝 한 쪽까지 관찰하며 자신을 피하던 이유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안타깝게도 문 앞에서의 관찰은 부모님의 제재와 엘사의 차가운 거절로 마무리되기 일쑤였지만 나름대로 알 수 있는 것은 많았다. 평상시에는 문 가까이로 다가가지 않았고 밤이 아닐 때는 책 넘기는 소리와 펜 끄적이는 소음만이 들렸다. 이런저런 정보를 조합한 결과로 '엘사는 얼음 같이 차갑고 냉정한 사람'으로 결론 내린 지 13년이었다. 그런데 수족냉증이라니? 설마 마음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육체조차 냉기를 품은 사람이라는 건가?


"아까.. 라뇨? 얼음 하나를 공짜로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죠."


"그거 말고요. 수족냉증? 그게 뭐죠?"


"수족냉증은 손발이 정상에 비해 차가운 질병인데..."


"아니! 왜 우리 언니가 수족냉증이냐고요!"



눈동자를 굴리며 애써 제대로 된 답을 피하려던 그에게 답답한 표정으로 외쳤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들킨 것 마냥 불안해하는 그의 감정을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로 알아차렸다.




"혹시 우리 언니, 그러니까 여왕님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신지요?"


"아, 그, 그건... 말씀 드리기 곤란한데.."



이번엔 두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우물쭈물 거리는 얼음장수의 태도는 의심에 불타오르는 그녀에 성질을 돋구었다. 수족냉증이라는 어려운 단어는 그 순간에도 안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언니는 신체적인 곳에 문제가 있어서 사람들을 등지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눈 깜짝할 순간에 느낀 촉감이긴 했지만 그녀의 손은 얼음으로 된 것처럼 차가웠으니까. 그러나 온 나라 최고의 의사를 만나볼 수 있는 자리에서 그런 장애, 아니면 질병을 숨기고 살았다는 가설은 또 하나의 의문을 낳았다. 불치병이라도 되는 걸까? 네 글자 짜리 작은 단어를 시작으로 온갖 가설과 의심이 가지를 뻗었고 그녀의 감정에게 더욱 불을 지폈다.



"하아..! 이거면 되겠어요?"



답답함에 차오르는 짜증에 의해 붉게 변한 팔은 거침없이 목걸이를 벋기며 얼음장수에게 내놓았다. 그는 식은 땀 방울을 조금 흘리는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인한 뒤 목걸이를 받았다.



"불다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알겠습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그래. 장사할 때 알아봤는데, 역시 이 사람은 돈에 못 넘어가는군. 안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순록 스벤이 끄는 썰매를 타고 아렌델 밖 숲으로 이동했다. 해가 뉘였뉘였지는 저녁의 숲도 더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산길을 달리는 동안 낮에 데워진 뜨거운 바람이 둘, 아니 셋을 스쳤고 차라리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까 음료수 장수 호큰에게 준 얼음을 살짝 떼어놓아야 했다는 후회 또한 들었다.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까지 포기하면서 언니의 비밀을 알고 있을 지 모르는 남자와 같이 가게 된 것 역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납치하는 쉬늉이라도 하면 여왕, 아니 비서 카이가 온 나라를 이 잡듯 뒤질 것이고, 자신한테 턱 부러질 각오도 하라며 협박 같은 경고를 내놓았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말뿐이 아니라는 듯이 팔 근육을 살짝 보여주자 얼음장수는 눈을 회둥글게 뜨면서 시선을 피했다.



"거, 걱정 마세요. 공주님을 납치하는 게 반역인 건 이 촌사람도 아는 법이랍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멀리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데도 기꺼이 따라오겠다니. 솔직히 많이 놀랐어요."


"13년 간 궁금해 하던 언니의 비밀에 작은 단서라도 얻을 수 있게 되었잖아요. 어디까지 가서 말씀해주실건가요?"



해가 질 무렵까지 달리는 썰매를 본 그녀는 언니를 둘러싼 비밀이 상상을 뛰어넘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눈치 차렸다. 그냥 성격이 그렇다, 병이 있다 따위의 간단한 일이었으면 뒷골목에서 해도 상관 없겠지. 이렇게 멀리까지 가야 한다면 아마 내가 꿈도 꾸지 못한 비밀이 있을 게 분명하다.



"제 친구들 있는 곳에서요. 여왕님에 대해 정말 궁금하시나 보네요. 평소에 여왕님이 어떻게 지내셨길래?"


"항상 방에 틀어 박혀 있고, 공부만 하면서 지내더라고요. 어쩌다 밖에 나올 때는 장갑도 끼고 옷도 되게 두껍게 입고 다녔는데 이런 한여름에도 그랬어요. 아마 먼지를 끔찍히도 싫어하나보죠? 결벽증?"


"결벽증.. 같지는 않은데."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의 한 마디에 자신의 가설 하나가 부정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얼굴을 가져가는 안나.



"그게 아니면 뭔데요. 대인기피증? 광장공포증?"


"음, 글쎄요. 어딘가가 아주 차갑지 않았어요? 얼음.. 같이 말이에요."


"차갑고 말고요! 아니, 대관식 날 멋진 왕자님을 만나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자긴 축복할 수 없다는 거에요. 그 날 만난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요. 그리고 경비들을 시켜서 왕자님을 내쫒듯 보내버리고..."


"잠깐만요... 그 날 만난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다고요?"


"네! 네! 들어봐요. 자긴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제가 모른다니, 그런 바보 같은 얘기만 늘어놓았죠."



그녀는 이 때를 노렸다는 듯이, 반한 남자와 하루도 못가서 떨어져야 했던 자신의 신세와 사랑을 갈라 놓은 언니에 대한 한탄과 원망을 토해냈다. 중간에 어이없어하며 반박하려던 얼음장수는 말 한 마디 집어넣을 틈을 찾지 못하고, 곡사포처럼 쏟아지는 안나의 분노를 들어야 했다. 최근에야 간산히 문을 열긴 했지만 자기가 올 때마다 영화 티켓부스 같은 상자 속에 들어가 숨는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문제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나보죠. 나중에 제 친구들이 잘 말해 줄 거에요."



두 사람이 지나는 길은 갈수록 나무는 줄어들고 바람과 빗물이 조각한 기암괴석들로 가득한 좁은 골목이 되었다. 여기저기가 뒤틀리고 구멍난 바위들은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는 춤추는 도깨비 같았다. 바위들 너머에는 우뚝 솟은 북쪽 산이 만년설로 둘러싸인 채 고독에 잠긴 채 잠을 청했다. 두더지가 튀어나온 흔적 같은 구멍은 더운 연기를 뿜어내었고 멀리서 온천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도 희미하게 두 사람의 뒤를 스쳤다. 풍경 감상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썰매는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계단처럼 층이 있는 고지대가 있는 게 페루의 계단식 농장 아니면 그리스의 공연장을 연상시키는 외형이었다.



"친구들, 나 왔어! 크리스토프!"



광장 곳곳에 누워있던 둥근 바위들은 크리스토프의 외침을 듣고 5초 뒤에 새처럼 덜덜 떨면서 그에게 굴러왔다. 안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권투선수 같은 자세를 취했다.



"뭐, 뭐에요. 이 돌들은?"



살짝 당혹스러워하던 찰나 바위 세 개가 그녀의 발 밑에 도착하면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회색빛 돌로 된 종족 트롤들이었다.



"반가워 크리스토프! 어라, 왠 아가씨네."


"낯익은 아가씨네."


"그래. 지난번에 치료 받으러 온 그 아가씨야. 또 받으러 왔어?"



치료? 낯이 익다? 예전에 면식이 있었는 듯한 그들의 언행에 그녀의 머릿속은 새로운 혼란에 빠졌다. 이런 곳은 온 적 없고, 바위로 된 트롤은 동화책과 역사 수업 때나 들어본 존재인데.


"혹시 이번엔 심장이 언 거 아냐?"



이번엔 심장 타령까지. 정말 이해 안 가는 소리 투성이었다. 유일하게 만난 지 한 시간 이상 된 남자인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지만 그녀 앞에 새로 다가온 큰 바위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큰 바위는 수염과 주름이 가득한 노인 형상으로 변했고 크리스토프는 그를 '패비'로 소개했다.



"크리스토프. 안나 공주님께 무슨 문제가 있어서 찾아왔나? 요샌 상황이 조용한데."


"조용하진 않아요. 너무 더워서 바위 속에 든 쇠가 녹을 것 같아요."


"지금은 중요하니, 잠시 조용히 있게."



그새 잡담을 하려던 트롤들을 진정시킨 뒤, 패비는 크리스토프의 귓속말을 들었다. 말이 끝나자 그는 돈을 너무 밝히는 얼음장수에게 자신의 아들처럼 핀잔을 던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걸 누설하니... 아니다. 엎질러진 물에다 어차피 평생 감추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니... 이참에 공주님께 말씀 드려야겠다."


"솔직히 엎지른 지는 꽤 지났어요. 도시 아이들 몇 명은 잘 이해 하는데 어른들은 이상하게 해석해서 다행이죠."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초리로 그를 찌른 다음 안나 공주에게 다가갔다. 오랜 시간 감춰둔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공주님. 엘사 여왕님의 비밀을 13년 동안 꽁꽁 숨겨두고 있었는데, 이제 말씀 드려야겠군요. 공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을 송두리 째 바꿀 수 있는 이야긴데 괜찮으실지.."


"전 뭐든지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언니에 대한 것이랑 제 기억에 대한 것, 전부."



아렌델 성의 가장 깊은 지하실에서 여왕은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 든 표정으로 이끼 낀 방을 눈으로 훝었다. 문을 열면 차갑고 깊은 바다고 사방을 둘러싼 벽은 폭탄으로도 부술 수 없었다. 여자 한 명이 간산히 나갈 수 있는 좁은 창문은 사람들로 가득찬 도시와 마주보았다. 이 곳에 수감된 사람은 바로 눈 앞에 즐거운 음악소리로 가득찬 도심을 바라보며 신세한탄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뉘우치면서 탈옥 의지를 불태우는 데에도 충분한 환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지 반세기는 지난 것 같이 틈이란 틈은 이끼와 거미줄로 가득했고 당장 누군가의 유골이 튀어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방은 넓었지만 고요했다. 그녀는 감옥 왼쪽 구석에 놓인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굳이 이렇게까지.. 아니야. 이정도는 기본이야. 이제 필요해. 감춰야 하니까."



스스로를 세뇌하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상자를 열었다. 끝이 둥그스름하고 고리가 달린 쇳덩이 여섯 쌍이 숨막힐 정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사람 손 하나가 간산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구멍이 음각 된 상태였다. 암담한 눈빛으로 자신의 새 장갑들을 바라보며 시선을 위로 옮겼다.


상자 위에는 자신의 동생을 죽기 직전에 몰아놓은 주제에 긴 세월 동안 그 여린 마음까지 짓이긴 백금발의 괴물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응시했다. 주먹질 날리려는 손에 서리가 끼이기 시작하자 검은 커튼을 내렸다. 거친 숨이 나왔다.



다시 마주 본 상자의 오른쪽에는 사람이 앉기에는 작고, 두 발로 올라서는 데에 적합한 나무 의자 하나와 밧줄이 자리했다. 상자를 닫았지만 그녀는 머지 않아 자신이 착용해야 하는 물건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것에 희미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것만 있으면 모두가, 특히 안나가 무사할 것이다. 아렌델의 얼음여왕은 모두를 위해서는 그 밧줄까지 괴물의 목에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과가 무엇으로 찾아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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