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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0명 저출산을 축하하는 태국인들...JPG
2026년 태국의 예상 출산율은 0.77명(태국 25년 출산율 0.87명)어떤 외국인이 이런 글을 작성했다.태국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태국의 낮은 출산율을 반기고 있습니다. 태국의 출산율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외국인들뿐입니다.최근 태국의 저출산에 대해 많은 외국인들이 우려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하지만 태국의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이를 축하하고 있습니다.요즘 많은 태국 젊은이들은 부패한 정부와 사회 때문에 태국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많은 젊은 세대들은 태국에서 출산하는 것이 태국의 부패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지금 많은 태국 젊은이들이 #우리세대와함께끝나자 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부패의 악순환을 끊고 싶어합니다.저는 단지 다른 관점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적어도 젊은 태국인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저출산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실제 출산절벽에 대한 태국 젊은이들의 SNS좋아. 지난 수십 년간 그래왔듯 사람들의 삶의 질을 계속 낮출 거라면, 그냥 멸종을 향해 인구가 줄어들어야 해. 그리고 그래, 나 태국인으로서 이 말 하는 거야.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정말 아이들을 데려와야 할까요? 생활비는 치솟고 임금은 바닥을 치며, 정치는 끝나지 않는 고리에 갇혀 있고, 부정부패가 모든 구석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이런 썩은 시스템에 갇혀 이런 투쟁 속에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세대에서 끝내자 네, 맞아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받아 마땅한 삶의 질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한편 대만의 25년 출산율 0.695명으로0.81명인 한국 보다 낮아진 상태중국 출산율은 비공식 0.7명(출산율 낮아지니까 중국공산당이 발표를 금지함)아시아는 어떻게 되가는 걸까
작성자 : 하루카스고정닉
BASED했던 19세기 미국 정치인, 존 C. 칼훈을 알아보자
19세기의 미국 정치인, 존 C. 칼훈의 초상화다. 윌렘 데포의 페이스를 닮았다. 높은 이마, 가파른 골격, 균열처럼 묘사된 주름, 냉소와 결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입매는 보는 이들에게 그가 어떤 정치인이었는지를 상상케 한다. 설득도 타협도 없으며 오직 확신한 이상의 실현을 위해 끝까지 밀고 버텨내는, 자신만의 교리를 제 한 몸으로 실천하려는 남자. 예민한 그 인상이 지시하는 그 삶을, 칼훈은 19세기 초중반의 그 시절에 그대로 살아냈다. 미국을 잉태한 건국 세대의 이상이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개척의 열망은 북부와 남부에서 뿌리 내리지 못한 이들을 서부로 떠밀었다. 미국에서도 촉발된 산업 혁명은 북부와 남부의 경제 구조에 불균형을 유발했다. 연방의 통치 원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도출하여, 작동을 어떻게 규정해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지식인들은 고민했다. 당당한 낙천주의자들도 연방의 존립을 떠올릴 때면 미래에 대한 회의를 피할 수 없었다. 존 C. 칼훈은 이 시절의 정치인이었다. 하원의원, 전쟁부 장관, 부통령, 상원의원, 국무장관이라는 직들을 모두 거친 그의 여정은 40년에 달한다. 거쳐 간 공직들만큼 그의 방향성도 하나에 구속되지 않았다. 경력 초기에는 열렬한 내셔널리스트로서 단일하고 통합된 국가의 존재를 지지했다. 후기의 그는, 연방에 일임되지 않은 주의 권리를 권리들의 공리에 버금가는 위치로 격상시켰다. 연방의 옹호자였던 그가 반대편의 극단으로 질주하여 남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역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지금도 회자되는 남부 연합의 사상적인 기초들의 일부는 그의 펜 끝에서 생명을 얻었다. 헌법에서 명시하던 Union에 연방적federal이라는 수식어를 달던 이들에게, 칼훈은 정당한 주권에 대한 변호인으로 보인다. 국가적national이라는 수식어의 사용이 옳다고 해석하는 이들에겐, 그는 반역자로서 야망에 눈이 멀어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그런 것들과 동일시된다. 그가 미국 헌정에 함축되어 있던 균열을 발견했던, 혹은 존재하지 않던 균열을 발명해냈던 간에, 미국 정치사상의 계보를 오늘로부터 타고 올라가다보면 그의 이름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누구인가? 존 콜드웰 칼훈은 1782년 3월 18일,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자의 자식으로 내어났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의 피를 물려준 칼훈의 아버지는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연방 헌법의 비준에 반대했던 완고한 반연방주의자였다. 칼훈의 정치적 궤적과 사상은 이 때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의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엘리트들은 해안가 지역으로 결집해 연방당에 모여들었다. 엘리트들의 공직 독점에 반대하는 소외된 지주들은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공화당과 결탁하고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1802년, 20세가 된 칼훈은 예일대에 입학한다. 예일대의 총장은 티모시 드와이트라는 신학자였다. 그는 제퍼슨주의를, 대중들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무브먼트들을 꺼렸다. 대학생들이 호흡하는 예일의 대기에는 연방주의가 스며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이 남자 아래서 칼훈은 성장했다. 칼훈은 1804년에 예일을 떠나 리치필드의 법과대학원에서 법학을 수학했다. 칼훈의 동창들은 그에 대해 상반된 평가들을 내렸다. 누군가는 칼훈은 다수에 대한 냉소를 설파하는 반제퍼슨주의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의 주장에 자주 노출되었다고 회상했다. 다른 누군가는 칼훈이 제퍼슨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시간을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내밀한 의향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정치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1808년에 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불과 2년 만에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8세 때의 일이었다. 하원에 입성한 칼훈은 제퍼슨주의 추종자들의 분열을 깨달았다. 헨리 클레이가 이끄는 정파는 무역과 은행에 대한 제퍼슨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테르튬 퀴드Tertium Quids, 직역하면 제3의 무언가라 불리는 구 공화파 제퍼슨주의자 도당은 독설로 유명한 존 랜돌프의 아래에 모여서 고집을 부렸다. 칼훈은 클레이를 눈여겨봤고, 그와 힘을 합쳐 여러 법안의 추진에 찬성표를 던졌다. 연방 은행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제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관세가 새로 매겨졌다. 영국과의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국가 자립의 당위를 입에 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아이리시의 정서도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보탰으리라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미국 애국주의의 선봉장에 섰던 그의 행보는 중앙정치에서 차츰 주목을 받는다. 제임스 먼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칼훈은 전쟁부 장관으로 내각에 초청되었다. 그는 먼로 행정부에서 일하며 도로와 운하 등의 국가적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에 자신의 역량을 보탰다. 곤혹스러운 일들도 있었다. 전쟁부는 당시 인디언 업무를 관할했는데, 칼훈은 수십 명의 서기와 대리인들만으로 인디언 부족들의 이주 조약의 이행을 감독하는 데 진땀을 뺐다.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앤드루 잭슨도 골칫거리였다. 잭슨이 스페인령의 펜사콜라를 침략하고 영국인 둘을 살해했을 때, 내각에서는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해결방안을 촉구했다. 칼훈은 그 회의에서 잭슨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강력한 징계를 요구하는 내각 인사들의 편에 섰다. 세미놀 사건의 책임을 물어, 잭슨을 군사법원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칼훈이었다. 아무튼 당시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거론되던 의견들이 칼훈 특유의 실천적 정치와 결합되며, 그의 이름에 정치인으로서의 무게감을 보탰다. 1824년의 대선에서 칼훈은 대통령 출마에 대한 야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존 퀸시 애덤스 행정부의 부통령직으로 만족했다. 칼훈은 애덤스와는 노예제 문제를 포함해서 정치 전반에서 거리를 뒀다. 관계는 점차적으로 악화되었다. 연방 내에 잠복되어 있던 지역적인 대립이 서서히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유권자들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관세 이슈였다. 관세에 대해 남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을 그는 전해 들었다. 관세가 국가 방위를 위한 세원 확보라는 본래의 목적을 이탈해 남부의 이익을 약탈하고, 제조업의 이익만을 보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클레이로부터 멀어졌다. 남부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다. 1825년, 칼훈은 이전의 자신이 긍정했던 종류의 관세 법안들을 물리치려는 움직임에 가담했다. 관세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연방 시설의 자금 지원에도 반대했다. 1828년 5월에는 의회에서 이례적으로 높은 관세가 제안되었다. 공식 명칭은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여러 법률의 변경에 관한 법령’ 이었으나, 남부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 때문에 가증스러운 관세(Tariff of Abominations)로 불린 법이다. 당시 미국은 전쟁으로 발생한 국가 부채를 상당수 상환해가는 상황에 있었고, 재정의 전망도 낙관적이었다. 추가적인 세입의 필요성은 낮아 보이는 상태에서 이 법안은 관세를 오히려 두 배로 인상한 것이다. 남부인들이 보기에, 제조업을 유치한 북부는 수입품에 세금을 내더라도 시장에서의 지위로 손실을 상회하는 이익을 획득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반면에 남부의 농업/상업 종사자들은 부담만을 질 것으로 보였다. 칼훈은 이를 헌법의 원래 목적을 희생시켜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른바 목적의 전용이 이루어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되었고 애덤스는 서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법안에 대응할 수단이 있을까? 있었다. 실마리는 제퍼슨과 매디슨에 의해 도입된 켄터키 및 버지니아 결의안이었다. 칼훈은 여기서 주권론을 추출해내어 논리를 구성했다. 주권 개입(Interposition)의 언어를 주의 주의 주권(state sovereignty)과 무효화(Nullification)라는 더 강력한 주권론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계약으로 본다면? 각 주는 계약의 당사자라 할 수 있다. 연방 정부가 대리인으로서 계약 조건, 헌법을 위반하여 계약 당사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각 주는 심판의 권한을 발휘하여 해당 법률의 효력을 자기 주 내에서 정지시킬 합헌적인 권한이 존재한다는 논리였다. 헌법이 주의 방어적 권력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칼훈은 자신의 해석이, 미국 건국의 본질적인 원칙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믿었다. 헌법외적extra-constitutional이지만 반헌법적unconstitutional이지는 않은 행위였다. 하지만 단순히, 헌법의 언어적 해석만으로, 사후적으로 주의 권리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칼훈은 주들이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연방보다 우선한다고 여겼다. 주들은 본래의 미국 사회들로서 각자의 정부를 형성했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들 사이의 규약을 형성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칼훈에게 미국 인민이란 주들이 연합한 형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해밀턴에게 쓰는 편지에서 칼훈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헌법이 미국 인민 집단 전체의 성과물이기는커녕, 그러한 정치적 실체는 지금도 존재하지 않고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자격으로는 이 나라의 인민은 단 한 번도 정치적 행위를 수행한 적이 없다고 불 수 있지요.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정치적 관계에서 완전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칼훈은 주들의 권리를 서술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해(South Carolina Exposition and Protest)라는 문서를 주 위원회에 제시했다. 이런 여러 일들로 인해, 애덤스에게 반대하는 칼훈의 움직임은 반 애덤스 세력들에게 높게 평가되었다. 그래서 칼훈은 선거 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팔렸다. 1828년 말에 앤드루 잭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칼훈은 여전히 부통령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었음에도 칼훈의 안에 자리잡은 소신은, 연방의 권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 신념은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신념은 언젠가 대통령과의 관계에 균열을 낼 터였고, 칼훈도 후일의 파국을 대비했다. 잭슨과 칼훈의 정치적인 관계에서는 더 큰 불씨가 내재되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 칼훈은 과거 잭슨을 비판한 이력이 있었다. 선거에서야 함께했지만 잭슨은 늘 칼훈을 의심했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워싱턴 정계에서 밀려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 있어야만 했다. 칼훈은 그래서 남부에 자신의 인상을 더 심어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그렇게 칼훈은 남부의 대변자로 거듭나며 미래를 대비했지만.. 최초의 균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진원은 워싱턴의 고위층들이 모이는 사교계였다. 잭슨 내각의 전쟁부 장관인 존 이튼의 아내, 마가릿 페기 이튼이 원인이었다. 그녀는 10대 시절에 선술집에서 일하던 재혼녀였다. 존 이튼이 잭슨의 내각에 들고, 페기 이튼이 신분상승의 꿈을 실현하려는 찰나- 소문이 돌았다. 그녀가 첫 남편이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부터 지금의 이튼과 부적절한 밀회를 가졌다는 추문이었다. 당대 여성들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규범들을 전혀 따르지 않고, 오히려 당돌한 일만을 골라서 하던 솔직한 여성이라는 점도 의혹에 바람을 보탰다. 사교계는 이튼 부부에게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적대적인 태도는 내각과 행정부로 확산되어 긴장감이 팽배되어 갔다. 워싱턴 정가의 이 소란에 잭슨이 관심을 가졌다. 잭슨은 페기 이튼이 도덕적으로 무결하며 중상모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내였던 레이첼 잭슨도 과거, 여러 의혹들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잭슨의 아내 레이첼은 이혼녀였는데, 이혼 시의 법적 처리에 오류가 있어 아직 이혼이 승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잭슨과 결혼을 하게 되었던 사정이 있었다. 이 문제로 잭슨의 반대자들은 잭슨이 레이첼과 간통을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잭슨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부터 선거 때의 네거티브까지 온갖 곤혹을 치른 바였다. 거기에 존 이튼이 잭슨의 선거에서 선거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었으며, 사적으로도 잭슨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도 있었다. 잭슨은 내각의 인사들에게 이튼 부부의 사교계 복귀를 도우라는 압력을 가했다. "아내가 내가 당선되고 오래가지 못해서 주의 곁으로 갔지. 애덤스 도당들의 공격에 순결함만을 좇던 그녀의 정신이 중대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튼도 나와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사교계에서 이튼 부부를 배척하고 있는데, 우리 내각에 있는 남자들은 아내들을 지도해서 이튼 부부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칼훈은 잭슨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의 부인인 플로리데 칼훈이 이튼 부부를 사교계에서 배척하는 운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일하던 근본 없고, 행실도 깨끗하지 못한 여자가 감히 겸상을 시도한다니? 그 19세기 시절, 거부감을 느끼는 귀부인들과 도련님들은 전부 칼훈 부인 곁으로 몰려들었다. 잭슨이 관여했음에도 이튼 부부에 대한 사교계의 배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심지어 페기 이튼의 이슈는 외교적인 사태로도 번졌다. 러시아 외교관이 주재하는 파티에서 네덜란드 외교관 셰빌리어 휴이겐즈의 부인이, 도덕적으로 불결한 여자인 이튼 부인의 자리를 자신의 옆에 배정시켰다고, 불쾌감을 표하며 만찬장을 이탈해버린 사건까지 생긴 것이다. 워싱턴의 기류를 관찰하던 존 퀸시 애덤스는 말했다. "칼훈은 도덕당Moral Party의 우두머리이고, 밴 뷰런은 비도덕당frail sisterhood의 당수다. 이튼 부인에게 추파를 던지듯 공을 들이며 정치 활동을 하는 걸로 악명높은 작자다. 자기 편 사람들의 아내들에게까지 이 여잘 만나보라고 개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녀를 옹호하게 유인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각이 잭슨파와 칼훈파의 둘로 쪼개지던 중, 1830년의 4월에 제퍼슨의 생일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렸다. 잭슨은 여기서 건배사를 제안했다. “우리의 연방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 때 모두가 보는 지켜보는 앞에서, 칼훈이 잭슨의 발언에 응수하며 다음 건배를 제안했다. “연방은 우리의 자유 다음으로 중요한 가치입니다. 연방의 이익과 부담이 공정하게 분배할 때에만, 연방의 존속이 가능하겠지요." 둘의 긴장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격화되어가던 1832년, 마침내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경계 내에서 연방 법률을 무효화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며 조례를 선포하고, 연방 관세의 입법에 맞선 정치적 투쟁을 주도한다. 그 때 관세는 연방 정부 수입의 약 90%를 차지했다. 이는 연방 권위에 대한 중대한 거부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했다. 앤드루 잭슨은 여기에 맞서 주먹을 들었다. 잭슨은 의회에 메시지를 보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이미 군사적 태세에 들어갔으며, 2월 1일부터는 연방의 세수 징수가 사실상 중단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는 군사적 강제력의 사용을 승인하는 입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대통령에게 육군, 해군 및 전체 민병대를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승인하는 무력 사용 법안, 강제법(Force Bill)이 윤곽을 드러냈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연방법을 집행하려 한 것이다. 여기서 칼훈은 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고 판단한 후, 스스로 사임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임한 부통령이라는 명패에 칼훈의 이름이 박제되는 순간이었다. 직을 내려놓은 칼훈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상원 한복판에서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무효화 논리를 변호했다. 장장 이틀에 걸친 대연설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정리하면 폭력으로 억지로 결속시킨 연방은 주인과 노예 사이의 사슬에 불과하며, 강제법은 배심원 재판이나 안전장치 없이, 법이라는 미명 하에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려는 야만적인 시도라고 규탄한 것이다. 강대강 대치에서 파국은 아슬아슬하게 미래로 유예되었다. 칼훈과 한 때 가까웠던 헨리 클레이가 둘의 출구를 열었다. 세율을 인하하는 클레이의 Compromise Tariff of 1833가 잭슨의 강제법과 함께 의회를 통과했다. 그렇게 남부는 관세 인하라는 실리를 챙겼고, 연방 정부는 군사력을 투입하는 내전 없이 사태를 봉합했다. 다만 이제 칼훈이 대통령직에 다시 도전할 가능성은 꺾였다. 그는 굴절된 자신의 열정을 정치철학적 저작들의 저술로 쏟아 부었다. 상원의원으로서 활동은 오로지 남부의 이익과 체제를 방어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훗날, 미국 상원은 칼훈과 헨리 클레이, 대니얼 웹스터, 이렇게 셋을 묶어 “위대한 삼두정Great Triumvirate” 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정부론(Disquisition on Government)’과 ‘미국 헌법 및 정부에 관한 담론(A Discourse on the Constitution and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은 그의 대안적인 공화주의 철학의 정수다. 칼훈의 정치 철학에선 거부, 미화, 경멸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거부. 칼훈은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부여되는 권리들을 거부했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기술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 는 명제를 ‘가장 근거 없고 거짓된 의견’이라고 비판했다. 자유를 인간이 후천적으로 성취해서, 얻어내야 할 보상으로 간주했으며, 모든 이에게 똑같이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축복이라는 관념 또한 부정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미화도 아끼지 않았다. 1837년의 연설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역사의 여명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앙아프리카의 흑인종이 미국식 노예제 아래에서만큼 신체뿐이 아니라 도덕적, 지적으로도 문명화되고 향상된 상태에 도달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 “중앙아프리카 인종”에게 노예제는 권력이 그들을 배정한 노동 시스템이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긍정적 선(positive good)”이었으며, 흑인이 무지와 타락, 사악함을 넘어섰다는 어떤 징후가 나타날 때까지 그들은 노예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부의 산업주의-자본주의에 대한 경멸도 선명했다. 그는 제조업의 이익이 미국에 일종의 금권 귀족정이라는 바벨탑을 세우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눈엔 대농장의 시스템이 인간과 환경, 기술과 자본 사이의 인도적인 균형을 보존하는 최상의 질서처럼 보였다. 모든 농장은 그 자체로 작은 공동체이며, 관대한 마음을 가진 백인 남성들이 만족하고 감사해하는 흑인 노예들을 중세풍의 목가적 분위기 속에서 보살핀다고, 칼훈은 믿었다. 이렇게 저술에 집중하던 칼훈은, 1844년에는 존 타일러 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 시기의 그는 텍사스 합병을 주도했다. 표면적으로는 영토 확장의 명분을 걸었으나, 팽창하는 북부에 대응하여 남부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계산이 배후에 있었다. 텍사스로 상원의 세력 균형을 맞추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려 1850년 3월 4일. 늙고 병약해진 칼훈은 상원에 앉아 동료 의원인 제임스 메이슨이 자신의 마지막 연설문을 대신 낭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훈은 원고에서 캘리포니아의 자유 주 가입을 결사반대했다. 붕괴되어 가는 연방을 구할 책임은 남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북부에 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이 연설이 있고 한 달도 되지 않은 1850년 3월 31일, 칼훈은 워싱턴 D.C에서 숨을 거둔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고 한다. "남부! 가엾은 남부!" 그가 고안한 무효화 논리의 극단적인 수단인 연방 탈퇴는 이후 남부에 결국 채택이 되었으며, 남북전쟁을 촉발하는 핵심적인 논리가 되었다. 칼훈 본인은 당시의 미국을 횡단하는 내전의 긴장과, 연방 해체를 추동하는 원심력을 막기 위해 타협안들을 제시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노력의 과실들은 오히려 남부가 연방을 이탈해 전쟁을 불사하게끔 추동한 이념적 방아쇠로 미끄러졌다. 닥쳐오던 운명을 피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운명의 실현을 재촉했다는 점은 고전적인 비극과 동형이다. 여담으로, 칼훈은 에드먼드 버크를 가장 위대한 정치 철학자라고 찬미했다. 사실 그의 사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버크의 사상을 교배시켜서 낳은 무언가에 가까워 보인다. 버크가 보편적인 정치적 원리를 불신하며 영국 헌법을 장대한 경험의 축적물로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칼훈도 자연권이라는 관념을, 가설에 가까우며 역사와 관습에서 축적된 처방을 파괴하는 명제라 비판했다. 적을 공격할 때 쓰는 어휘도 닮았다. 프랑스 혁명에 비판적이었던 버크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혁명의 참여자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고조의 광신적 정도로 개종을 강요하는 정신에 사로잡혀] [수도사를 비난하면서도 수도사의 배타적 정신으로 종교를 열렬히 공격하는 자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광신을 추상적인 것에 대한 열정, 기존 질서를 타파하려는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열정이라고 선언했다. 그 점에서 버크는 인간의 권리라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을 전파하려는 자들을 광신도로 규정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버크가 기술한 논쟁적인 독설들은 급진적인 평등을 선호하는 이들을, 종교적인 광신자들과 결합되어 있던 과녁을 빌려와 공격하게 하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칼훈의 저서에서도 버크의 이것과 유사한 사용례가 자주 발견된다. 그는 북부의 노예제 폐지 운동을 비판하거나, 헌법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혼란을 경고할 때, 광신(fanatic-) 이 들어가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했다. 칼훈은 노예제를 미워하는 북부 광신도들의 위협을 전염성이 있는 것으로 취급했으며, 또한 선동적인 속성이 있다고 여겼다. 사회의 피라미드적인 계급도식에서 반노예 운동은 지적 능력이 빈약하고 빈곤한 하층 계급에서 우선적으로 퍼지고, 지식인들과 부유층에게도 점차 확산되어, 결국 자유롭고 안정적인 정치 제도가 파괴될 것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정부론에서 그는 말한다 : [무엇이 진정한 여론인지를 간파할 지혜가 부족하여, 그것을 파벌의 일시적인 아우성이나 광신주의의 소음과 구별하지 못하는 정부들은 몰락할 운명이다.] 미국 헌법 및 정부에 관한 담론에서 그는 말한다 : [그것은 정치적 신경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신경까지 건드렸다. 연합의 북부 지역에는 노예제가 커다란 정치적 악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죄라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1837년 2월 6일 '노예제 폐지 청원 접수에 관한 연설'에서 그는 말한다 : [나는 이것이 사회의 광신적인 부분과 마찬가지로 시작될 것이며, 무지하고 약하고 젊고 생각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점차 위로 확장해 나가 정치적 지배권을 얻을 만큼 강력해질 것이며, 사회 최고위층 인사들은 아무리 내키지 않더라도 그들의 교리에 굴복하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1847년 2월 19일 '노예제 문제에 대한 결의안 도입 연설'에서 그는 말한다 : [저는 이 정책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이 정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한쪽의 맹목적인 광신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그나마 덜 광신적인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노예제도에 대한 적대감 때문인지, 혹은 정치적 권력을 노리는 자들이 이 문제를 선동하는 것이 정부의 이익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만들어낸 것인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1847년 3월 9일 '찰스턴 시민 집회 연설'에서 그는 말한다 : [이 질문에 답하려면 노예제도를 보유하지 않은 주들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감정과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각 정당의 활동, 특히 대통령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이들을 문제의 주제와 관련하여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노예제도를 죄악으로 여기는 광신적인 노예제 폐지론자들입니다. 이들은 노예제도가 죄악이기 때문에, 설령 폐지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없애야 할 최고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1850년 3월 4일 '캘리포니아 주 편입 및 연방의 일반 상태에 관한 연설에서 그는 말한다: [첫 번째 운동의 성공으로 이 소규모 광신도 집단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두 거대 정당 모두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고, 다른 두 정당의 의견도 점차 그들의 교리로 오염되어 결국 양쪽 모두에 확산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북부 지역 대다수 주민들은, 그들의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노예제에 반대하는 그들의 사상에 완전히 물들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칼훈은 19세기에서도 분열과 내전을 앞당긴 악당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1873년에 미 연방 대법원이 도축장 사건(Slaughter-house Cases, 83 U.S. 36) 판결에서, 연방 정부의 보호에 있는 미국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수정 헌법 제14조를 극도로 좁게 해석했을 때, 반대의견을 제시했던 스티브 J. 필드 대법관은 정확히 이렇게 평가했다. “그건 칼훈 씨와 그 분이 대표하던 계층의 의견이란 말입니다Such was the opinion of Mr. Calhoun and the class represented by him.” 1875년에 출판된 헨리 윌슨의 노예 권력의 흥망사(History of the Rise and Fall of the Slave Power)는 그를 분리주의의 아버지, 의회에서 노예제를 옹호한 참 대단한 인물이라고 비꼰다. 칼훈의 일대기를 학술적으로 저술한 작가 헤르만 폰 홀스트는 1882년의 저서에서 그를 “노예제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했다. 2017년 예일대는 오랜 세월동안 칼훈의 이름이 붙었던 학과 건물의 이름을 변경했다. 2020년 찰스턴 시의회는 인종적인 화해와 도시의 단합을 위한 상징적 정책으로, 매리언 광장에 서 있던 칼훈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했다. 21세기에 와서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파묘를 기다리는 과거의 기호로서 존재하고 있다. 참고 문서 : Niven, J. (1988). John C. Calhoun and the price of union: A biography.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양홍석. (2013). 칼훈(John C. Calhoun)의 주권론(States Right). 미국사연구, 38, 41-72. 칼훈의 정부론 : Calhoun, J. C. (1992). Union and liberty: The political philosophy of John C. Calhoun (R. M. Lence, Ed.). Liberty Fund. pp.3-78. 칼훈의 미국 헌법 및 정부에 관한 담론 : 위 책 79-284 페이지 칼훈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해 : 위 책 311-366 페이지 칼훈의 포스빌 법안에 관한 연설 : 위 책 401-460 페이지 칼훈의 1837년, 노예제 폐지 청원 접수에 관한 연설 : 위 책 461-476 페이지 칼훈의 1847년, 노예제 문제에 대한 결의안 연설 : 위 책 511-522 페이지 칼훈의 찰스턴 시민 집회 연설 : 위 책 523-538 페이지 칼훈의 1850년, 캘리포니아 주 편입 및 연방의 일반 상태에 관한 연설 : 위 책 571-602 페이지 칼훈이 해밀턴에게 보낸 편지 : Calhoun, J. C. (1978, August 28). Letter to James Hamilton, Jr. In C. N. Wilson (Ed.), The Papers of John C. Calhoun (Vol. 11, 1829–1832, pp. 613–649).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애덤스가 이튼 부부에 대해 언급하는 텍스트 : Adams, J. Q. (1830, February 6). Diary entry. In The John Quincy Adams Digital Diary. Primary Source Cooperative at the Massachusetts Historical Society. Burke, E. (1790/1993).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L. G. Mitchell, Ed.). Oxford University Press. 버크의 사상과 칼훈의 정치적 교리의 연결고리 : Grove, J. (2015). Calhoun and conservative reform. American Political Thought, 4(2), pp. 203–227.
작성자 : 우승희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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