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긴 루트같이 보이지만, 직접 해보면 그렇게 어렵진 않다고 느낄거임. 특히 2단계의 많은 부분은 발췌독임. 시간이 있는 대학생 새내기라면 이 글을 따라 "새로운 세계합리성"까지 읽는 데 두 달 정도 걸릴 거라 예상함. 처음부터 이 글은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경로를 몰랐던 사람을 위해서 만들었음.
그리고 이 글은 PC버전에서 봤으면 함... 스마트폰으로 보면 가독성이 더 떨어질 거 같음...

1단계
비판이란 무엇인가 / 혁명이란 무엇인가 / 계몽이란 무엇인가
( https://www.dropbox.com/scl/fi/a5y3rujoud6dfujx05thf/.zip?rlkey=4a1cxse046jt07bz35hqhnqkb&dl=0 )
나는 이것이 푸코의 저작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함. 처음에는 모르는 말들이 많겠지만, 가장 먼저 읽어야 함.
존 라이크먼 -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
(개리 거팅 - 푸코)
{만일 현재 기 소르망의 폭로와 관련된 논란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바로 여기에서 폴 벤느의 "푸코 : 그의 사유, 그의 인격"의 맨 뒷부분에 있는 "푸코를 불태워야 하는가?"를 꼭 읽기를 바람.}
자, 이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1단계, 2단계, 3단계의 처음마다 각각의 2차저작을 넣을 것임. 폴 벤느의 책은 분명 좋은 책이지만 아주 어려움. 이 방법밖엔 없었음.
존 라이크먼의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는 가장 빨리 추천할 수 있는 책임. 이 분은 푸코를 가장 처음 영미권에 소개한 사람 중에 한 명이고, 굉장히 잘 분석한 사람임. 정작 이 이후에 푸코가 유행할 때는 별로 좋은 게 안 나왔음. 비교적 쉽게 써져 있어. 개리 거팅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로 “푸코”가 나왔는데, 이것도 참고해.
이 책에서 나오는 “푸코의 딜레마”라고 하는 부분은 꼭 주목해야 함.
앞으로 나올 기괴한 플로우차트 순서들이 복잡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푸코를 이해하는 가장 표준적이고 어쩌면 유일한 방식, 출판된 저작을 다 읽은 뒤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13권을 순서대로 전부 다 읽는 방식보다는 좀 더 빠를 거임.
영어를 잘한다면 여기 3단계에 있는 The Essential Foucault를 먼저 읽는 게 좋다는 점이 있고, 이거 정도를 제외하면 나같은 아마추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임. 나 너무 많은 일이 잇엇어 힘들다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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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을 쓴 철학자, 푸코
“제가 선택한 방향은 이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연컨대 저는 구조주의자가 아닙니다. 또 좀 유감스럽게 고백하자면 저는 분석철학자도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죠." - 자기해석학의 기원 중
ㄴ 복면을 쓴 철학자, 푸코
푸코 철학의 좋은 2차저작은 별로 없음. 푸코를 제대로 설명한 책도 드묾. 폴 벤느의 "푸코 : 그의 사유, 그의 인격", 존 라이크먼의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 프레데리크 그로의 "미셸 푸코", 개리 거팅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설명서인 "푸코"가 그래도 좋은 예시인데, 이 네가지 책이 전부 같은 점을 지적함.
저항과 투쟁, 시위하는 푸코의 이미지가 너무 과장된 면이 있으며
실제로 그가 한 철학적인 작업은 그저, 회의주의적인, 역사만을 쓴 사람에 속한다는 것임.
ㄴ 그의 성향, 그의 정치성향
“게이로서의 푸코”와 “철학적 작업에서의 푸코”를 완전히 구분해야 함 - 아니면 푸코를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임. 푸코가 게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굉장히 많은 철학적 작업이 바로 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통해 푸코를 접근하려고 했음. 하지만 나는 이런 형태의 작업은 거의 쓸데없다고 생각함.
성정체성을 빼고, 정치성향을 살펴봐도 동일함. 그의 저작을 통해 그가 가진 정치적 성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
그가 리버럴인가? 그러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나온 사회계약론의 비판은 뭐지?
그가 리버테리언인가? 그러면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나온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언급은 뭐지?
그가 공산주의자인가? 그런데 "감시와 처벌"에서 말하려는 게 제임스 C. 스콧이 쓴 "국가처럼 보기"나 다를 바 없는데?
그럼 그가 극우인가? 이러면 마지막 저작인 "진실의 용기"가 뭔지 설명을 못하는데?
그의 삶의 문제들과 그의 철학은 너무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임. 그렇다면 그는 자기 삶의 문제들을 아예 말하지 않으려고 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이 간격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내가 쓴 이 플로우차트의 최종 목표일 거임.
ㄴ 바깥?
일단 여기서 잘 알려진 것부터 설명해보자.
가장 푸코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바깥" 같음. 이 바깥이란 용어는 블랑쇼에게 나왔는데, 블랑쇼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경우 하이데거 같은 현상학과 전혀 다른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용어를 썼음. 푸코 또한 이런 점을 활용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말하는 것임.
푸코는 또한 블랑쇼에 대해 문학평론을 쓴 적 있음. "바깥의 사유"라고 하는데, 이는 "바깥의 사유"라고도,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라고도 번역할 수 있음. 그는 언제나 바깥에 있었고, 바깥의 입장에서 바깥의 중요한 점을 짚어내는 것뿐만이 아닌, 바깥의 입장에서 안의 무엇이 중요한지도 말했음. 이렇게 보면 그의 마지막 강의인 "진실의 용기"가 중요해지는데, 민주주의의 완전 바깥에 있으면서 "이 점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점이다"라고 말하는 철학자는 극히 드물기 때문임.
ㄴ 사회학에서의 바깥
푸코의 난해한 점은 사회학에서도 드러남.
사회학적 이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짐. 하나는 기능주의라고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이 함께 작동해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하나는 갈등주의라고 사회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다른 집단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이들 간의 불평등과 투쟁, 통제를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임. 푸코는, 갈등주의를 연구한 사람들이 기존 기능주의를 비판하고 갈등주의를 세우기 위해 프랑스 철학을 많이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기능주의적인 사람에 속하게 됨. 단지 안정과 질서를 자기 이론에 넣지 않을 뿐.
ㄴ 가장 좋은 법 - 과학철학자
푸코를 위치해놓을 수 있는 그나마 좋은 방법은, 그를 프랑스 과학철학자의 일부로 두는 것임.
프랑스 인식론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과학철학은 바슐라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됨. 바슐라르는 이성은 과학에 대한 반성을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고, 과학은 과학사에 대한 반성을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과학이 일상적 경험과 일상적 언어와 어떻게 다른지를 논하고, 과학철학에 있어 과학사의 중요성을 알린 첫 번째 사람이었음. 바슐라르부터 장 카바이예스, 코이레, 캉길렘 같은 제자가 나와서 이 과학사로부터 인식론을 연구하는 철학이 프랑스 고유의 전통으로 남았고, 푸코는 (그의 표현으론 현상학이란 “의식의 철학”과 대립하는 “개념의 철학”이라고 하는) 바로 여기서부터 철학적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임.
ㄴ 하지만 과학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염두해야 할 게, 푸코가 과학사를 다룬 적은 있어도 과학을 한 적은 없음. 1954년 맨 처음 저작인 “정신병과 인격” 제1판에서 과학적 설명이 있는데, 제2판에서 이를 지운 뒤부터는 단 한번도 과학을 하지 않았음. 푸코의 모든 저작은 “사회과학”이라는 용어가 확장될 대로 확장된 현재의 관점에서조차 전혀 사회과학적이지 않음.
그러면 그의 작업은 무엇인가? 역사임. 그는 "푸코의 맑스"라는 인터뷰집에서 나는 역사 이외에 다른 것을 한 적이 없다고도 말함. 그런데 이것도 또 미묘한게 수많은 인터뷰에서 "내 책을 그저 역사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든. 다시, 이것 또한 그가 그저 역사가인 것이 아니라, 역사로 철학을 한 사람이고 역사를 재료로 삼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변호해야겠음.
ㄴ 캉길렘의 논문
푸코를 지금의 이 위치로 만든 수많은 영미철학자들보다, 캉길렘이 1967년 말과 사물에 대해 서평을 한 “The death of man, or exhaustion of the cogito?”라는 논문에서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음.
이 논문은 말과 사물의 인간과학에 대한 설명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하지만, 여기서 캉길렘이 쓴 한 문장은 푸코 철학의 핵심적인 부분을 지목하고 있음. “오늘날 푸코보다 덜 규범적인 철학자는 없다”라고.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으려는 것은 푸코 철학의 내용물일 뿐만 아니라 푸코의 방법론인 것임. 바로 이 점에서 푸코 생전에는 진보라는 도식이나 역사주의와 충돌했고, 심지어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써서 규범을 세우고 있는 철학자들과도 거리를 두게 됨. 푸코는 도구상자의 용도로 쓸 수는 있어도, 푸코 스스로는 규범과 “이론”을 만든 적이 없음.
그가 역사를 쓸 때 서술description은 있어도 설명explanation은 거의 없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함. 푸코에겐 브로델의 “장기 지속”이나 뒤메질의 “삼기능 가설”과 대응하는 개념이 없음. 푸코는 역사를 설명할 때에도 “이론”을 쓰지를 않았음.
ㄴ 고고학, 계보학, 윤리학?
흔히 푸코를 저술 시기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음.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가 고고학이라고 하고,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 1”을 계보학이라 하고, “성의 역사 2”와 “성의 역사 3”를 윤리학이라고 하지.
많은 사람들이 이 구분을 좀 피상적이라고 비판하긴 함. 이 구분은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이 나오기 전의 구분이기도 하고.
내 생각엔, 그냥 거의 매년마다 사유방식을 바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함. 방법론이 어느 책을 둘러봐도 계속 바뀌고 있음. 그나마 그가 그저 역사만을 쓴 사람이라는 점만이 그를 지탱함.
ㄴ 현재성, 역사, 문제화
그를 역사가와 구분할 수 있는 점 중에 하나는 현재성임. 현재의 상황, 그 당시의 시사점이 그의 철학에 담겨 있음. “현재성”이라는 게 있고, 여기에 “역사”를 써서, “문제화”를 하는 것, 이 “현재성, 역사, 문제화” 라는 세 가지 개념이 푸코의 극초기부터 극후기까지 존재함.
그리고 이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시기의 푸코를 통합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음.
ㄴ 푸코주의자는 없다
이건 진태원이 쓴 “푸코에 대한 연구에서 푸코적인 연구로”에서 나와있는 말임. 푸코 연구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푸코 저작에 관한 주석이나 해석을 시도하기보다, 푸코의 사상과 분석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응용하면서 푸코적인 문제설정을 실천한다고 말함.
푸코 철학의 내용물을 쓰는 것만으론 푸코주의자라고 불릴 수 없는 것으로 보임. 그렇다면 푸코의 방법론을 써서 다른 분야에 적용해야 푸코주의자가 된다는 말인데,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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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권력: 푸코와 들뢰즈의 대화 ("푸코의 맑스"에 수록)
김은주 - 푸코에게 ‘철학’은 무엇이었나?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 target="_blank">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67912 )
윤영광 - 푸코의 문제화로서의 철학과 철학의 문제화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 target="_blank">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92934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 - 푸코의 맑스)
이제 논문들을 읽을 차례임. 김은주의 "푸코에게 '철학'은 무엇이었나?"와, 윤영광의 "푸코의 문제화로서의 철학과 철학의 문제화"를 읽어야 함. 푸코가 한 철학이 무엇이었나를 다루고, 이 두 논문은 어느정도 대립하고 있음. 둘 다 어느정도 맞다고 생각함.
이 김은주와 윤영광이 논문을 쓴 날짜에 주목해줘. 2022년, 2023년임! 푸코가 철학자라고 하긴 하는데, 그래서 그가 하는 “철학”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가 이렇게 최근에서야 연구주제가 된거임! 뭔가 엄청나게 큰 맹점이 있었음.
푸코의 “위치”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임. 일단 그 주제로 푸코 스스로가 한 인터뷰 중에 “지식인과 권력”이 가장 유명함. 이것을 읽어줬으면 함.
그 외에 "지식인과 권력"이 수록된 푸코의 맑스는 그 본문 또한 가치가 있음.
이 푸코의 맑스는 그 자신의 방법론을 많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맑스주의자인 상대가 워낙 다른 입장에 있다보니 불필요한 부분이 많음. 그래서 참고로만 두겠음.
유튜브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e5HpgZKQjs
푸코 스스로가 푸코의 철학을 요약하고 있는, 굉장히 좋은 영상이라서 여기에 넣어봄.
정신의학의 권력 - 옮긴이 해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2강
(정신의학의 권력 1-4강)
푸코는 사망하고 난 뒤에 더 많이 연구가 진행되었음. 그가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직이 된 뒤로 한 강의록이 출판되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유들이 나왔음. 푸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코의 출판된 저작뿐만이 아니라 이 강의록 또한 읽어야 함.
1997년부터 2014년까지 작업하면서 지금 전권 13권으로 나왔고, 한국어로는 몇몇 권이 번역되었음. 2018년에는 끝내지 못한 성의 역사 시리즈의 미완성 원고를 모아 “성의 역사 4”를 출판했음.
그나마 1단계에 넣기 좋은 글은 이 정도 있음. “정신의학의 권력” 같은 경우 본문 뒤에 역자가 150여쪽을 들여 푸코의 광기 개념을 해설함.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13권의 강의록 중 가장 유명하고, 1강과 2강에서 푸코가 어떻게 권력을 생각했는지 어느정도 나옴. “정신의학의 권력”의 1강부터 4강까지는 “광기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감시와 처벌”의 논지와 연결하며 푸코가 처음으로 파놉티콘을 언급하는 곳임.
푸코를 읽기 위해선 결국 푸코의 본문을 읽어야 함. 강의록에서 좀 더 평이한 문체가 있고, 이것이 그래도 도움될거임.
(담론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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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에 대한 설명
푸코의 친구이자 푸코의 중요한 해석자인 폴 벤느는 이 "담론"이란 개념이 완전히 잘못 논의되고 있다고 말함.
그러니까, 담론은 "말해진 것"이 아니고, "기호학과 언어학의 조합" 같은 것과도 전혀 상관없다는 것임.
폴 벤느는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라는 논문에서 담론에 있어 이런 비유를 씀.
"담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곧 담론은 발화자들 모르게 실제로 말해진 것이다. 발화자들은 스스로 자유롭고 풍부하게 말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부적절한 문법의 제약을 받는 편협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푸코가 우리더러 발견하라고 하는 이 물밑의 문법은 무엇인가? 왜 우리의 의식과 행위자들의 의식은 그것을 무시하는가? 의식이 그것을 억압하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이 전개념적이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문법, 그런 문법의 제약을 받는 편협한 이야기, 물밑의 문법, 전개념적인 문법...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보기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푸코가 한 "사브아savoir"와 "코네상스connaissance"의 구분임.
사브아와 코네상스는 둘 다 영어로 knowledge로, 한국어로 지식으로 번역됨. 프랑스어에서만 나뉘어 있고, 또 푸코의 구분은 일상적인 용어사용과도 달라서 푸코의 자의적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
하지만 푸코는 이 사브아와 코네상스를 아주 철저하게 구분함.
그렇다면 사브아가 무엇이고 코네상스는 무엇일까?
일단 아주 짧게 말하면 사브아는 전-과학이고, 코네상스는 과학을 의미함.
이거는 약간 혼동을 주는 표현이라 뒤에 고쳐서 다시 설명하겠음.
일단 생각해보자. 모든 주제는 예전에는 전부 사브아에 속했어.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이라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액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둘 다 동급으로 취급받으리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다가 “액체란 무엇인가”는 인류사가 진행되면서 완전히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리란 것도 짐작할 수 있겠지.
하지만, 수학이나 물리학과는 다른, 수많은 형태의 인간과학은 물리학처럼 아주 깔끔하게 진행되지를 못했어.
생물학이 그런 예시임.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기까지 생물학은 “호두는 뇌에 좋다. 왜냐하면 호두의 모양이 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수준의 전-과학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다가 린네에 들어서면서 “종속과목강문계”와 같이 분류, 형식, 구조를 갖춰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면서 실증성을 제시하고, 인식화를 하게 되고, 과학성을 갖추게 되었지.
또한 생물학이 계속 발전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사브아같았던 질문까지 진화론과 같은 코네상스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생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몇몇 사브아인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거로 보임.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이 그런 예.
이걸 미래의 생물학이 정말로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문제는, 바로 이 생물학이란 코네상스 때문에 인류는 무엇인가 한계가 지어진 상태에서 이 질문을 사유하게 된다는 것임. 정작 생물학자들은 아직 현재의 생물학은 이런 질문까진 탐구할 수 없다고 말할텐데 말이야.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같은 질문에 있어 사르트르와 몽테뉴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지.
좀 비슷한 현대의 패스티쉬적인 사례로 진화심리학, 뇌과학 같은 걸 들 수 있을 것 같음.
이것 자체는 분명 학문적인 것을 갖추고 있어.
하지만, 이 테마의 좀 질이 떨어지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확실히 뭔가 “외부”로 벗어나와 삶이나 세계에 대해 뭔가 명령조로 말하려고 하면, 거기에는 좀 이상하고 우스운 것이 있지. (무슨 느낌의 책인지 알지?)
경제학은 이 사브아와 코네상스의 구분의 가장 좋은 사례일 거임.
경제학에서 정치경제학은 너무 큰 것이라서 오히려 무시하는 과목으로 꼽히고, 오직 마르크스주의자들만 이것을 공부한다는 여담이 있음…
정치경제학은 “사람과 세상은 이래야만 한다”는 논조가 너무 강한 사브아적인 분야고, 이것이 아직 경제학이 할 만큼 “굳어진 지식”이지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임. 그 대신 계량경제학 등의 다른 분야는 확실히 학문적으로 굳어져 있어서, 코네상스적인 이것을 대신 전공한다는 것이지.
이제 다시 사브아와 코네상스를 설명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코네상스는 과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되었지만, 이론적일 뿐 현실에서 쓰이긴 힘든 것이고,
사브아는 학문과 같이 굳어지지는 않았지만, 현실에서는 더 많이 쓰이는 것을 말함.
여기서 푸코는 철학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
이건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처럼 코네상스가 넘지 말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경계짓기를 하는 것은 아님.
또한, 후설과 하이데거처럼 코네상스를 최대한 확장하면서 사브아적인 무언가를 연역해내려고 하는 것도 아님.
몰라, 어쩌면 코네상스로 사브아를 보일 수 있다는 둥,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이것이라는 둥의 이 학문의 깊은 목표가 진짜 실현될지도 모르지. 실현되건 말건, 푸코는 이것에는 전혀 관심가지지 않음.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바로 이 코네상스 때문에 우리의 사유가 고정되어버렸다는 것임.
그러나 코네상스를 자세히 분석한다면 이런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임.
첫째, 이도 또한 역사적으로는 사브아인 때가 있었고,
둘째, 사브아여야 할 것이 코네상스로만 설명이 되어 있으며,
셋째, 이게 그저 우연이며, 지금 현재 사브아로서의 가능성을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임.
바로 이것이 폴 벤느가 말하는 "부적절한 문법"의 의미임.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에는 또 이런 비유가 있어. "말해지거나 행해진 것이 논리적이고 수미일관하며 완벽한 문법이 아니라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문법을 따른다는 수긍할 만한 이유에서 그렇다."
푸코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이 내용이 나와 있어.
"사실 비판이란 한계를 분석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주의)적인 질문이 앎(connaissance)에 대해서, 앎이 넘어서지 말아야 할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는 것(savoir)이라면 오늘날의 비판적 질문은 좀더 긍정적인 질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의무로 제시되고 있는 것 안에서 개별적이고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제약들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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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4 - 부록 3
푸코의 철학적 유언 중 하나임. 푸코는 평생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는데, 이 이유를 조금 보여주고 있음.
2단계
프레데리크 그로 - 미셸 푸코
주체와 권력 ( https://www.dropbox.com/scl/fi/7czwucio6wr1oxemf3or4/.pdf?rlkey=fa9jyp1frqlq0vk0zggmg16ty&st=9zw3k5tl&dl=0 )
감시와 처벌
2단계 처음은 강하게 시작해야 할 것 같음. 감시와 처벌을 읽어야 함. 감시와 처벌을 더 쉽게 읽을 방법은 더 없는 것 같음.
여기 다시 푸코의 2차저작인 프레데리크 그로의 책이 있음. 푸코 연구자인 역자 배세진이 “이 책보다 엄밀하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푸코 사상 전체를 요약, 정리한 책은 없다”고 말한 만큼 좋은 책이지만, 푸코를 지금 1단계만 읽은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어려운 책 같음. 그래도 읽어야 함.
그리고 여기 “주체와 권력”이 있음. 푸코는 여기서 내 철학의 일관된 논제가 주체와 주체화였다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남김. 이것은 프레데리크 그로의 책의 중심 주제기도 함. 힘들겠지만, 이 두가지 글을 보면서 감시와 처벌을 그런 주체와 주체화를 중심으로 읽어줬음 좋겠음.
개리 거팅 - 미셸 푸꼬와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
이성에 대한 반성, 이성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철학에서 대표적으로 일어난 현상 중 하나임. 푸코는 이것이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과학사를 연구하는 자들로부터 이 일이 일어났다고 말함. 프랑스에서 이 "과학사"를 연구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바슐라르와 캉길렘임. 바슐라르는 시학을 연구하기 전에 과학철학자였는데, 그 당시까지도 메이에르송 같은 철학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뉴턴역학과 기존의 상식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된다는 구시대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바슐라르는 과학은 이미 자연관찰과 일상적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과학은 일상적 관찰의 장애를 넘어서는 단절로 발전된다고 말함. 캉길렘은 바슐라르의 제자로 이를 응용해 과학은 사회적, 경제적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말과 과학 안에 내적 논리가 있다는 말을 둘 다 거부하며 과학은 스스로 이데올로기나 규범을 가진다는 주장을 함. 이 바슐라르와 캉길렘의 철학은 과학에서 과학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음.
푸코의 철학은 이 과학사를 강조한 바슐라르-캉길렘 네트워크 안에서 자라났고, 저자 개리 거팅은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푸코의 고고학이라 불리는 저술들을 이 프랑스 과학사의 작업에 맞춰 아주 탁월하게 해설함. 특히 "말과 사물"은 몇백년에 걸친 서양의 인간과학을 르네상스 에피스테메, 고전 에피스테메, 근대 에피스테메로 나누고 또한 이것을 경제학, 생물학, 언어학 각각의 흐름으로 설명하려는 저작인데, 아직 이 책을 제외하면 좋은 2차저작이 없는 상황임. 푸코의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해석, 라마르크와 퀴비에의 해석, 푸코의 마르크스 경제학의 비판적 관점 등등의 세부적인 내용들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 그 뒤 "지식의 고고학" 또한 설명하면서 푸코에게 고고학과 계보학의 대립은 그저 표면적 대립일 뿐이라는 평가를 내림.
단연컨대 이 플로우차트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 푸코의 고고학을 가장 제대로 설명한 책임.
문제는 이 책이 절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큰 도서관에서조차도 이 책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것임.
다니는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을 꼭 하길 바람.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을 다닐 경우 대학도서관에서 읽는 것임. 하지만 대학도서관에서도 어느 곳에서는 구비되지 않았음(예를 들어, 숭실대 대학도서관에는 없다). 그렇다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의 자료복사 서비스를 이용한다거나 영어책으로 읽는 수밖에는 없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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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뜨뜻미지근한 것
폴 벤느의 "푸코 : 그의 사유,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이야기임 - 레몽 아롱은 폴 벤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함. "광기는 너무도 현실적인 것이어서 이를 알려면 광인을 한 명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맞는 말임. 푸코도 정신과 임상실습의사였던 적이 있는데, 푸코가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인지했을 것임. 푸코는 절대 "광기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음.
그러면 그 당시 유행한 반정신의학을 주장한 건가? 정신병원의 구조적 억압에 대한 해방을 말하려던 걸까?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규정할 수는 없음. 반정신의학에 어느정도 지지한 것은 맞지만, 그 후에는 이 운동을 거부했음. 애초에 반정신의학의 창시자라고 평가받는 도널드 랭도 후기에 들어서서는 자기와 연관짓지 않으려고 했고. 철학적으로 보면 브라질에서의 강연에선 "진실"의 문제를 무시했다고 비판하고, "정신의학의 권력"에선 이미 반정신의학을 역사적 사료 정도로 둠.
푸코의 의견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발언은 우리나라에서 "푸코와 철학자들"의 "푸코와 들뢰즈" 편에 있는, 1976년의 인터뷰 내용인 것 같음 - "성급하게 좌익주의적인, 격정적으로 반정신의학적 혹은 집요하게 역사적인 담론들은 이러한 광기라는 작열점에 접근하기 위한 불완전한 방식들에 불과합니다. 광기 혹은 비행이나 범죄가 절대적 외부성으로부터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믿는 것은 허상입니다. 여백은 하나의 신화입니다. 바깥의 말은 우리가 끊임없이 회귀하고 마는 그런 몽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첨가하면, 푸코의 주장이 무엇이든지간에 극히 현대적인 정신의학의 산물에 적용될 수는 없을 거임. "광기의 역사"에선 피넬과 튜크 시절 근대에서 분석이 멈추고, "정신의학의 권력"에선 프로이트의 스승이던 샤르코에서 분석이 멈춤. 프로작이 어떤 역할을 할 건지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임. 정신의학자들은 항우울제가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문에 관심가져도 이제 연구되지도 않는 역사의 한 부분에 관심가지지는 않을 거임.
개인들에 대한 의학적 지식의 조직화가 권력의 실천과 연결되었다는 내 연구가 "정신병리학의 치료효과가 갖는 과학적 타당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말한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라는 인터뷰를 참고할 수도 있겠음.
그러면, "광기의 역사"는 정말 광기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다루기만 한 정말 "광기"의 "역사"를 설명한 것뿐일까? 아무런 대안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저 역사를 설명하는 거로 끝났던 것이고, 이 꽤나 꺼림직한 역사에 대해 그냥 그대로 두라는 게 진짜 뜻이었나?
그런데 일단 책의 내용이 꺼림직하다는 것은 제쳐두더라고 이런 주장, "그대로 두자"라는 주장과 대안이 없다는 주장만큼은 푸코가 절대 취하려고 하지 않았던 입장임. 푸코는 이런 말을 해서 뭔가를 바꾸기 위해 자기 철학을 쓰고 있음.
그러면 대체 무엇일까? 대체 이 역사를 서술하는 것으로 뭘 원했던 걸까? 광기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반정신의학도 아니고, 현대 정신의학에 비판을 가할수도 없고, 그냥 역사를 서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면, 대체 이 역사라는 뜨뜻미지근한 것으로 뭘 원했던 걸까?
여기서 “미셸 푸꼬와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을 쓴 개리 거팅은 이 문제를 “대항 방법론”으로 해결하려 했음. 이런 역사적 분석이 대항 방법론을 만들 토대를 마련한다고 생각했음.
이것도 그렇게 나쁜 주장은 아니라고 봐. 하지만 폴 벤느의 “푸코 : 그의 사유, 그의 인격” 또한 살펴보겠음. 폴 벤느는 이 책에서 푸코의 철학적 연구와 철학적 입장은 훨씬 더 미묘한 관계를 이룬다고 말함.
폴 벤느는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칸트를 사용함. 칸트의 물자체처럼 푸코에게도 “물자체” 같은 게 있다고 말하지만, 푸코에겐 칸트와 다르게 물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형된다고 말함. 역사적으로 변형되므로, 어떤 시기에선 물자체로 취급된 것을 다른 시기에서는 굉장히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임.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광기나 처벌 대신,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나오는 생물학을 예로 들면 이럼. 현미경을 통한 관찰은 17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생물학자들은 가시적인 것만을 인정하고 보일 수 있는 진드기가 가장 작은 동물이라고 여겼음. 19세기가 되어서야 이 이상해보이는 생각을 거부하고 현미경을 통한 생물학적 관찰을 인정했다는 것임. 가시적인 것은 그 당시에 “피해갈 수 없는” 무언가였다는 것임.
푸코의 철학적 입장, 철학적 의견이 여기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임. 일단 푸코의 주 목표는 이런 “피해갈 수 없는” 무언가가 어떻게 역사에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임. 소박하게 보자면 이것만으로도 어느 수준의 입장표명은 가능해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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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광기 (이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을 때의 보조루트)
허경 - 광기의 역사 읽기
조르주 캉길렘 -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조르주 캉길렘 - 생명에 대한 인식 (적어도 3부 2장 "기계과 유기체"부터 3부 4장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까지)
이 광기 루트에선 이 책들을 추천하겠음. 하나는 허경의 광기의 역사 2차저작이고, 나머지 두개는 캉길렘의 책들임.
푸코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자신이 "프랑스 과학철학"의 흐름에 있다고, 그리고 특히 캉길렘의 제자라고 반복해서 말함.
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는 영역판에 추가했던 푸코의 서문이 있음. 죽기 직전에 쓴 푸코의 글인데, 다시 나는 캉길렘의 제자다, 나는 후설과 메를로퐁티 식의 "의식의 철학"이 아닌 "개념의 철학"이란 곳에 있다, 캉길렘을 모른다면 내 저작을 이해할 수 없다 수준으로 엄청나게 이 사람을 강조함. (여기 플로우차트 뒤에 있는 도미니크 르쿠르의 "조르주 캉길렘"에선 이게 과장되었다 말하긴 함. 어쩌면 자기 스스로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상한 도식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이러지 않았을까)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은 굉장히 어려운 책이지만, 요약은 한 줄로 가능함. "다른 과학과 달리, 의학은 규범을 다루는 학문이다."
"생명에 대한 인식"의 저 부분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정신의학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논함.
이 방식으로 어떻게 푸코가 광기의 역사라는 책을 서술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될 것임.
(광기의 역사)
이 플로우차트에선 광기의 역사를 선택화했음. 바로 뒤에 있는 “정신의학의 권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음.
정신의학의 권력
미친 왕 조지 3세를 치료하는 극적인 상황을 말그대로 무대적으로 해석하며, 주권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 이동하는 상황을 보여줌. 책 광기의 역사에서 나오는 가정 모델이 스스로 부적절했다고 비판하며, 규율권력으로 나오는 “장치”들을 통한 분석을 진행하게 됨. 여기에서 푸코의 가장 유명한 개념이 된 파놉티콘을 처음 언급함.
푸코는 이 책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병의 분류도, 히스테리 같은 각각의 병, 그리고 반정신의학도 아닌 “진실의 문제”라고 말함. 그는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위장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설명하는데, 이 위장은 군인이 정신병이 있다고 위장하는 단순한 경우가 아닌, 정신분석에서 "히스테리", 정신의학에선 "신체화"라고 주로 불리는 증상이 거짓인 것이 사실이고, 병자가 경험하는 것이 거짓임을 포착해야 하는 경우를 말함. 푸코는 이 진실의 문제가 병의 진행에서 결정적 변화가 생기는 시기인 “고비” 개념을 통해 히포크라테스 이후의 의학 전체로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존재의 망각” 류를 벗어난 과학과 인접한 곳에서 나오는 진실 일반에 대한 다른 철학적 이론이 있어야 함을 요청함.
1800년대에 피넬부터 샤르코까지 이 위장이란 문제는 정신의학을 큰 곤경에 빠뜨렸음.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불확정인 상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만 했고, 정신요양원의 현실 부여로도, 의사 스스로의 관리로도, 고백과 최면에서 환자에게 꺼내야 할 문제로도 변형되었음을 보여줌. 샤르코의 신경학의 발전 이후에는 이것이 히스테리의 문제가 되었고, 샤르코가 사적으로 한 “그래, 히스테리에서 성현상이 문제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지”라는 말을 통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전문용어로 "뇌절"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함.
푸코가 광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면 이 책이 정말 중요함.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라는 저작이 전부 연결지어져 있는 책은 정말 드물어.
이언 해킹 - 영혼 다시 쓰기
이 책은 무엇보다 굉장히 푸코적인 책임. “기억의 고고학”임. 심리학에서 현재 일어나는 기억의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파헤치려는 책임.
역사적 설명이 굉장히 다채롭게 들어가 있음. 그리고 이 역사적 설명은 푸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긴장 상태에 놓게 하기에 충분함.
이언 해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루핑 효과라는 이론을 주장함. 엘리자베스 앤스콤을 빌려 행위가 행위의 설명에 의해 정의되므로 불확정적인 일련의 행위들로 경험한 사람은 진단이나 언론의 조명으로 인해 특정적인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함. 경험과 기억이란 아주 평범해보이는 개념을 뒤흔드는 책임.
A 루트 끝.
오카모토 유이치로 -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들뢰즈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 15장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성의 역사 2 - 서론
[살다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인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계속적인 관찰과 생각을 해나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철학 -즉, 철학적 활동- 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철학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철학적 담론이 외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사람들에게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찾는가를 말해 주려고 할 때, 거기에는 항상 우스운 것이 존재한다. - 성의 역사 2의 서론 (“푸코의 맑스”에서 수정된 번역)]
이 책들은 프랑스 철학의 역사적 연결로서 좋은 책일 거야. 가장 좋은 책은 개리 거팅의 책이겠지만, 이는 난이도가 있어서 3단계에 있음.
오카모토 유이치로의 책을 읽는다면 프랑스 철학사에서 과학이 꽤 많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 그리고 이것은 꼭 “지적 사기” 같은 방식으로 읽혀질 필요가 없었음.
그리고 들뢰즈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가 있는데, 저 15장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에서는 들뢰즈의 구조주의에 대한 설명이 있음. 많이 난잡하긴 하지만, 이 부분이 오카모토 유이치로의 해석과 또 충돌하고 있으니 유의해서 봤으면 함.
푸코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정작 푸코는 이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안한 것 같음. 성의 역사 1 이후로 8년 뒤에야 성의 역사 2가 써졌고, 이 책이 출판된 해에 사망했음. 푸코 스스로 푸코를 요약하는 성의 역사 2의 서문은 그의 가장 완숙한 관점이 들어가 있어.
좀 딴 길로 샌 말이지만, 들뢰즈의 책의 저 부분에 들뢰즈의 “미분적인”, 여기서는 “차등적인”이라 번역된 개념에 대한 역자의 좋은 해설이 담겨져 있음. 또한 18장에 있는 “장치란 무엇인가?”는 푸코를 이해할 때 참고하기 좋을 거 같음.
진실과 권력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4장으로 수록)
푸코 효과 - 1장 "통치합리성에 관한 소개 - 콜린 고든"
이 글들을 통해 흔히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이동하며 단절되었다고 하는 것, 또 권력-지식에서 통치성으로 이동하며 단절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을 거임.
진실과 권력이란 인터뷰에서, 푸코는 대체 자신의 작업이 뭘 뜻하는지, 그러니까 광기의 역사나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에서 자기가 말하려는 게 대체 뭐였는지 다시 되짚고 있음.
과학에 사회구조가 있다고는 밝히고 있음. 그런데, 자기가 말하는 게 마르크스 식의 이데올로기는 또 아니었기 때문임. 그에게는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에서의 고고학이라 불리는 것과 감시와 처벌에서의 계보학이라 불리는 것이 굉장히 비슷한 접근이었음. 그러면 그 비슷한 것이 대체 뭔가? 이 인터뷰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음.
푸코 효과의 첫 장에 있는 “통치합리성에 관한 소개”. 이건 푸코의 글은 아니지만, 푸코의 한 시기를 잘 요약하고 있음.
감시와 처벌만 읽고 해석한 사람은 권력이 주권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 그리고 생명관리권력으로 점차 미시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이런 해석은 푸코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음.
푸코는 국가이성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함. 자유주의 통치성은, 국가에 대한 질문이 사라진 게 아니라 국가의 의무와 위험성을 가장 많이 말한 시기였다는 것임.
신자유주의 통치성 또한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고 말함. 18세기에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그 행위를 통치가 영원히 건드릴 수 없는 주체란 뜻이었지만,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신의 환경 변화와 경험하는 것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인간, 즉 조작가능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변함.
이 신자유주의는 통치성에 대해서 굉장히 이상한 모습을 보였음.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보아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 지식은 개개인의 범죄와 가족, 리스크에 있어 가능한 모든 것을 전부 통치성으로 끌어들이는 형태를 보였음.
(리오타르 - 포스트모던의 조건)
[지식이 '교육적' 가치나 정치적(행정, 외교, 군사적) 중요성이 아니라 화폐의 행로와 똑같은 행로를 따라 순환하는 모습을 그려 보기란 어렵지 않다. 이제 적절한 구분은 더 이상 지식과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출 지식'과 '투자 지식' 사이에 있다... 이제 상품 생산자와 소비자가 그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상품과 이미 맺고 있던 관계의 형식, 다시 말해 가치 형식을 띠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지식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포스트모던의 조건]
리오타르를 넣은 이유는, 학문의 세계에서 현재 권력-지식보다는 수행성이 더 잘 일어나기 때문임. 권력-지식과 수행성은 굉장히 비슷한 논지를 가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워낙 이상한 말이지만, 진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푸코와 리오타르의 저작을 살펴본다면 이들이 "지식" 자체를 철학하려는 사람임을 알 수 있음. "지식"이 이상적이고 편안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임.
마르크스는 지식에 대해서 사람은 알면서도 숨기고 거짓말한다는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푸코는 지식 중에 담론이라 불리는 것은 모르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 고대 로마 시대로 따지면, 네로 황제조차도 이것이 곡물의 경제에 뭔 일을 일으킬지 모르면서 연설할 때 말할 수밖에 없는 식임.
리오타르 또한 현대 시대의 지식이 진실에 대응한다기보다 지식 자체가 어떤 수요와 공급 관계를 만들어 그 사이클에 맞춰간다고 말하고 있음. 리오타르는 현대시대를 논했지만, 이 리오타르의 수행성이라는 개념은 푸코의 말과 사물이 말한 논지와도 잘 대응되는 것 같고.
꼭 읽을 필요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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