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배당합니다.”
정신을 깨우는 목소리.
서서히 풀리려던 눈동자에 다시금 긴장이 몰아쳤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방금 들어온 관리자를 바라보고 외쳤다.
“확인했습니다!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베가, 신, 기계, 남간제일검.
두 손으로 세기도 힘들 정도의 이름을 가진 남간의 전설적인 관리자는, 나와 눈조차 맞추지 않은 채 빠르게 등을 돌려 집무실을 떠났다.
문이 끝까지 닫히는 소리만을 남기고, 나는 집무실에 다시 홀로 남겨졌다.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눈앞에 새로 늘어난 서류더미를 바라보며 잠시 멍을 때렸다.
흘깃 거울을 보니 잔뜩 다크서클이 내려온 모습.
오늘 새로 입주한 집무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책상에 올려진 명패에는 ‘Gotoh_Hitori’라는 이름이 파란색으로 반짝였다.
벽에는 ‘(축) 남간입사’ 등의 문구가 수놓인 소박한 화환들, 옆에 걸린 시계를 보니 지금이..
‘이럴 때가 아니지, 일 하자 일!’
잠을 깨기 위해 마시던 커피로 잠시 목을 축였다.
‘다음 신고는… 표제어 규정 위반이군?’
하나하나 검토 후 도장을 찍어가며 차단을 집행하면서 간간히 상념에 잠겼다.
눈치부터 살피며 보낸 지난 6개월의 시간. 임명회의. 여기까지의 순간들.
그리고, 나를 감독하게 된 관리자를 떠올렸다.
‘베가님을 택한 건 필연이었지.’
만일 누가 내게 가장 존경하는 관리자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 1초도 주저함 없이 베가의 이름을 외칠 것이다.
공명정대한 원칙. 경이로운 신속함.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힘든 일을 항상 도맡아 하는 기둥같은 존재.
입사 직후 베가를 지명하면서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제가 관리자가 된다면, 꼭! 베가님을 업무에서 해방시켜드리겠습니다!’
입사 후 베가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었다.
‘맡겨만 주세요.’
그때의 베가는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 상투적인 답변으로 응대하며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의 업무 지옥이 시작되었지…’
짧게 한숨이 나왔다.
지금 남은 업무는 대략 26개. 총 71개중… 아니다.
계산하지 말자. 그냥 묵묵히 하자.
약속했잖아, 베가님의 도움이 되기로.
체리피킹이나 하는 다른 관리자들은 전부 쓸모가 없다.
적어도 나만큼은, 베가님께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똑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에 빠르게 정신이 들었다.
베가님은 노크 없이 들어오시는데, 그럼 누구지?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쫑긋거리는 두 쌍의 여우귀와 토끼귀가 보였다.
아, 리틀폭스랑 코코아씨인가.
“안녕하세요 봇치님! 저흰 이제 퇴근하려고요!”
리틀폭스가 쾌활하게 외쳤다.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인데, 아마 벌써 오늘 배당을 끝마친 모양이다.
“봇치님은 퇴근 안하시나요?”
당장 눈앞에 쌓인 서류더미를 못 봤을 리는 없고, 예의상 물어보는 것 같다.
“그게… 저는 오늘 배당이 아직 안 끝나서요. 야근해야 할 것 같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몸조심 하세요.”
코코아씨가 자상하게 말했다. 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집중하자. 베가님을 실망시켜 드릴 순 없지.
오후쯤에도 한 번 잘못 처리한 건이 있어 주의를 받았다.
더이상은 한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한 번도…
음? 이게 뭐지?
서류더미 사이에 빨간색 메모지가 보였다.
집중하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건가?
‘Gotoh_Hitori 관리자님께.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업무가 다소 과중할 텐데, 일반 감독 체계로의 빠른 전환을 위해 타이트하게 배정한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운영게에서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Care’
베… 베가님이 직접 쪽지를 쓰셨다고?
충격에 잠깐 입이 벌어졌다.
상상이 안 간다. 매 순간 무표정에 엄격하셨던 그분이 나한테 몰래 쪽지를?
잠시 후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군. 리틀폭스도 있는 상황에 대놓고 말하면 편향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사적으로 전달한 것이리라.
일단은 몰래 접어서 서랍에 간직했다.
하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완전히 숨기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
“편집권 남용 가중 제재 적용, 1주 차단합니다.”
‘신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 ・∇・)로 끝마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프로필 훼손 다음엔 신규서술 3회라니 어째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는 것 같은데…
서서히 끝이 보인다.
마지막 신고는 토론 태도 불량이었다. 3일.
“후우…!”
끝이라는 해방감에 크게 숨을 몰아쉬던 도중,
“잘 처리하셨습니다. 오늘 업무는 종료입니다.”
“베, 베가님?”
깜짝이야. 노크 좀 해주세요.
설마 마지막 업무 끝날 시간이라는 걸 전부 계산하고 계셨던 건가?
베가님은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늘 보던 업무용 표정.
문득 아까의 쪽지가 떠올랐다. 그 얘기를 마저 하러 오신 건가?
“아마 아시겠지만, 봇치님의 의무 관리감독은 내일 자정에 끝날 예정입니다. 사측에는 사전에 말씀드려 두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 그 얘기라면 전달 받았습니다.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았구나. 그럼 내일이면 일반 전환 확정인가.
“오늘 첫날이셨을 텐데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네, 베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로 끝인가. 베가님께 칭찬받으니 왠지 뿌듯하다.
야근한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기에 함께 본사 건물을 나왔다. 파라과이의 서늘한 밤공기를 마주하자 잠깐 몸을 떨었다.
그러고보니, 베가님은 외투를 두껍게 입으시네.
늘 그러신 걸까? 지금껏 퇴근한 베가의 사복을 볼 기회는 없었다.
지금도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남자.
너무 조용해 아무 말이나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의무 감독 기간이 빨리 끝나는 모양이네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있던 베가는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네. 봇치님이 충분한 자질이 있으시기 때문이죠. 곧 수습 관리자를 떼고 정식 관리자가 되시게 될 겁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베가님을 정말 도와드리고 싶어요.”
“압니다. 그래서 저 지명한 것도.”
어? 이것도 알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나는 잠깐 침묵한 후에 이어서 말했다.
“감독하시느라 힘드셨을 수도 있는데…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베가님께서는 제 선생님과 같은 분이세요.”
베가의 얼굴이 움찔했다.
“정식 관리자가 되고 나면,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베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뭐지?
세상에. 자세히 보니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으흐흐… 칭찬에 약한 타입이신가?
“선배님!~ 괜찮으세요? (*≧∇≦)ノ”
“…Gotoh_Hitori 관리자. 업무와 무관한 불필요한 대화를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치만 지금은 퇴근했는걸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진중한 태도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
은은한 가로등만이 지키고 있는 깊은 밤,
두 사람의 퇴근길은 웃음소리와 설렘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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