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무반의 한 구석을 굴러다니고 있던 붉은 표지의 그 수양록을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슬슬 군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던 바로 이 상병이라는 시기 때문이었는지,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한 켠에 비치되어 있는 도서들에 관심이 간 것은 따분한 주말 오후라는 시간을 애써 등을 떠밀어서라도 어떻게든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지가 캐캐하게 쌓여있는 책들을 뒤적이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표지의 어느 낡은 수양록이었다.
훈련단 시절에서나 보던 수양록이 왜 여기까지 굴러 들어왔단 말인가.
아니, 뭐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펼쳐서 대충 책장을 몇 장 넘겨보니 초입부에만 뭐라 내용이 쓰여있었고 나머지는 깨끗했다.
마침 따분했던 나는 호기심에 어느 이름 모를 이가 남긴 일기장의 첫 장을 펼쳤다.
'19XX년, X월 1일.'
소대장에게 김XX 해병을 과한 구타와 욕설을 사유로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뭐지 이게?
우선 까마득한 옛날 시절의 수양록답게 한자도 곁들여진 글귀였다.
춘래불사춘이라... 무슨 뜻일까.
이윽고 첫 장을 넘겼다.
'19XX년, X월 3일.'
소대장에게 면담을 청한 것이 김 XX 해병에 의해 발각당해 화장실의 3사로에서 두들겨 맞았다.
맞던 도중 화장실에서 소대장과 분명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말없이 돌아섰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아무래도 소대장이 김XX 해병에게 이 가엾은 글쓴이에 대해 귀띔이라도 해준 듯 했다.
안봐도 훤한 모양새였다. 허나, 명색이 간부라는 작자가 병사에게 그걸 일러다 바치고 거기에 묵인까지 하다니.
아무리 옛날 군대라고 할지라도 선뜻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19XX년, X월 10일.'
아무래도 기수열외를 당한 것 같다.
후임이건 선임이건, 동기이건 나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
말을 걸어도 모르는 척 하거나 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식으로 대답할 뿐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기수열외라니.
그 시절에도 기수열외란 폐습이 있었단 말인가.
하기사, 별 이상한 것들은 전통이랍시고 이를 악물고 대를 이어나가는 우리 해병대가 아니던가.
혀를 끌끌차며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19XX년, X월 38일.'
특이사항 없음.
오늘 점심의 소세지야채볶음 반찬이 맛있었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38일?
거기에 아무런 내용 없이 갑자기 반찬이 맛있었다라는 말만 적은 것도 그렇거니와 뭔가 께름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28일을 잘못 적었겠거니 하고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19XX년, X월 44일.'
사마귀와 개미가 싸우는 것을 보았다. 개미가 사마귀를 쓰러뜨리고 뜯어먹는 것을 보니 즐거웠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개미가 사마귀를 이겼다라는게 말이 되는 걸까.
44일이라 쓴 것도 그렇고 이때부터는 이 글쓴이가 당시 뭔가 상태가 좋지 않았다라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다음 장을 봐야겠다.
'19XX년, X월 46일.'
내 친구 야옹이를 김XX 해병이 주계장 뒷편의 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
특이사항 없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다시 뒷장으로 향했다.
'19XX년, X월 46.5일.'
마지막으로 소대장의 이름을 이곳에 남겨야겠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다시 책장을 넘겼다.
'19XX년, X월 47.8일.'
정XX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어라?
낯익은 이름인데.
이거 우리 대대장 이름이랑 똑같네?
그냥 우연이려나?
다시 책장을 넘겼다.
"20XX년, X월 X일'
춘래사춘(春來似春)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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