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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 후기 농촌 사회 개괄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19 11: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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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은 성지를 되찾기 위해 진군하고, 왕은 궁수와 중장병들과 함께 성을 포위한다. 주교는 새로 지어진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상인은 시장과 장터에서 물건 값을 흥정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중세사에서 다루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물론 당대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전형적이지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중세인은 기사, 왕, 성직자, 또는 상인이 아니었다. 대부분(10명 중 9명 이상)은 땅을 일구며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중세풍 세계를 다루는 현대의 드라마조차 이 거대한 농민 집단을 대부분 잊고 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칠왕국의 소농들은 단지 배경에 불과하며, 지저분하고 멍청하며 다소 위험한 존재로만 언급된다. 심지어 자유롭고 정착하지 않은 야생인들조차 이들보다 더 많은 존중을 받는다. '반지의 제왕'의 호빗들은 더 깨끗하고 똑똑하며 자비롭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호빗이다.

엘리트 중심의 역사서에서는 무시되고 판타지 드라마에서는 비인간적으로 묘사된 중세시대 농민은 대부분 우리의 상상력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책은 흑사병(1347-1349) 직전 수십 년 동안 잉글랜드 중부 지역에서 살았던 세실리아 페니파더(Cecilia Penifader)라는 한 실존 인물의 삶을 통해 잉글랜드 소작농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이러한 균형을 바로잡고자 한다.

왜 우리는 농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중세시대 소농을 더럽고 작은 하층민이나 털이 보송보송한 발을 가진 호빗으로 전락시킨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선진국에서 작물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통 '소농'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들을 '농부'나 '농업 노동자'라고 부른다. 소농이라는 단어는 후진국에서 작은 규모로 작물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유럽에서는 소농이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여겨지는데, 이 과정은 한 유명한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19세기 소농을 현대 프랑스인으로 만든 과정이었다. 북미에서는 유럽 식민 정착자들이 이주와 정착으로 인해 소농에서 농부로 변신했다고 여겨진다. 한때 인구의 약 50%가 소농이었던 중국에서, 경제학자들은 이제는 소농이 과연 남아 있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럼에도 작은 규모로 자급자족 농업을 하는 사회는 오늘날까지도 특히 중남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에서 여전히 존재하며 번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농과 농촌 경제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도 우리와 함께한다. 오늘날의 소농을 난쟁이나 호빗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현대 세계 경제를 심각하게 오해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중세 농민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살았던 농촌 사회는 물론, 중세 사회 전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농민들과 함께 진흙길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며, 가난한 농민뿐 아니라 부유한 성직자, 기사, 상인까지, 모두가 농민의 노동에 의존했던 사회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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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페니파더는 13세기 말인 1297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농민들이 성을 대대로 물려주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다. 세실리아의 성씨는 페니파더(Pennyfather)에서 파생된 것으로, 세실리아의 증조부나 고조부가 재물에 인색한 것으로 알려졌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그녀 조상의 구두쇠 기질이 가족의 번영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기사나 귀부인들과 비교했을 때 세실리아의 부모는 가난한 소작농에 불과했지만, 다른 농민들과 비교했을 때는 부유한 편에 속했다. 그 결과 세실리아는 당시의 많은 가난한 이웃들보다 잘 지어진 오두막집에서 자라고, 더 나은 식사를 했다. 또한 그녀는 많은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는데, 형제 세 명과 자매 네 명이 있었다.

약 20살이 되었을 때, 세실리아는 브릭스톡에서 처음으로 약간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 후 27년 동안 브릭스톡의 장원 법정 기록은 그녀가 다양한 목초지와 경작지를 어떻게 획득하고 사용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기록은 또한 그녀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시사(Cissa)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같은 기록에는 세실리아가 때때로 이웃에게서 곡물을 훔치고,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무리에서 떨어진 가축을 훔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약 10년 동안 한 형제의 옆집에 살았고, 나중에는 약 5년 동안 다른 형제와 함께 살았다. 약 45세가 되었을 때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해, 1년 이상 투병한 후 1344년에 세실리아는 사망했다. 죽기 직전에 그녀는 자신의 토지를 세 명의 젊은 친척들(조카 한 명과 조카딸 한 명 포함)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길고 불편한 논쟁 끝에 그녀의 누이인 크리스티나(Christina)가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것이 세실리아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지만, 브릭스톡의 중세 문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다른 중세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세실리아 페니파더는 일기, 편지 또는 기타 개인 저술물을 남기지 않았다. 때때로 똑똑하고 운 좋은 농민들도 읽고 쓰기를 배웠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문맹이었다. 문해력을 얻은 소수의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약 1168년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였다. 그는 자신의 배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링컨 주교로 승진했다. 하지만 로버트 그로스테스트는 이례적인 경우였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너무 똑똑해서 그의 성이 “큰 머리”라는 별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영리함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만약 부모가 집에서 그를 필요로 했거나 영주가 그의 교육에 반대했다면 그는 결코 태어난 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의 성공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글을 읽고 쓰지 못했던 소작농들은 자신들의 희망이나 두려움, 즐거움, 또는 실망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남기지 않았다. 철학적이고 실용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남긴 로버트 그로스테스트도 자신이 보낸 가난한 젊은 시절의 모습을 묘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농민과 그들의 삶에 대해 간접적으로, 즉 그들의 사회적 상급자들의 글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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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부터 인기를 얻은 삼신분 이론에서는 농민이 세 가지 계층의 가장 하위에 속해 있었다. 노동하는 자들(라틴어로 laboratores)인 농민들은 기도하는 자들(oratores)과 싸우는 자들(pugnatores)로 불리는 더 특권화된 계층을 부양했다.

이들 세 계급은 각자 서로를 돕는 것이 이상적이었으며, 성직자가 기도를, 기사가 보호를 제공했지만, 현실은 이론보다 덜 이상적이었다. 또한 세 계층은 평등하지 않았다. 농민은 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덜 존재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천한 신분에서 태어난 농민의 운명은 다른 사람을 위한 노동이었다. 이는 농민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역사가들에게는 다행이었다. 농민은 중요한 경제적 자산이었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들과 싸우는 자들은 농민들의 행동에 대한 기록을 주의 깊게 보관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사용하여 700년 전에 태어난 평범한 여성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 여성이 자라고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한 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세실리아 페니파더와 그녀의 세계가 담긴 문서들을 살펴보기 전에, 역사와 역사가 주장할 수 있는(또는 그렇지 않은) 것들을 고찰해보자. 역사와 역사가들은 한때 고귀한 꿈을 간직했는데, 바로 역사가들이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는 꿈이었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신처럼, 역사가는 죽은 사람들을 되돌아보고 그들의 삶에 대한 진실을 기록했다.

오늘날, 진실은 훨씬 더 애매해 보인다. 세계화와 다문화주의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예를 들어, 콜럼버스의 항해가 유럽인들에게는 기회를,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파멸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진실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는 매일, 때로는 매 시간마다 우리를 뒤덮는 소위 가짜 뉴스의 전염병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20세기의 확실한 진실 대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무도 믿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21세기 회의주의의 원인은 새로운 것이지만, 회의주의 자체는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학생들만큼 음악을 사랑했던 중세 학생들은 이러한 불만을 노래했다.

"악의와 기만, 그리고
노골적인 거짓말은 잡초처럼 자란다,
한 때 진실이었던 것의 씨앗을 훔쳐간다"

거짓말과 가짜 뉴스는 심각한 우려 사항이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즉, 회의주의을 장려하는데, 이는 특히 학생과 유권자들에게 있어 거의 항상 좋은 것이다. 현대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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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농민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중세 특권층이 농민을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한 단서는 궁정풍의 노래, 풍자적인 속담, 불쾌한 농담, 경건한 설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문학 작품들은 종종 농민들에 대한 엘리트들의 경악할만큼 부정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만, 농민들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농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정보는 장원 운영에 대해 보고하는 법률 및 경제 문서가 가장 풍부하고 유용한 자료이다.

장원제도는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를 부양하는 경제 시스템이었다. 즉, 장원에서는 농민들의 노동 생활이 그들의 상위 계층의 재정적 필요와 맞물려 있었다. 장원은 토지와 소작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비옥한 토양으로 집약적인 경작의 보상을 받는 지역들에서 흔했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 남동부와 중부, 프랑스 북부, 독일 서부, 그리고 론 계곡과 포 계곡 같은 남유럽의 특정 지역들이다. 장원의 땅은 영주(dominus) 또는 여영주(domina)라고 불리는 지주의 소유였다(장원의 약 10%는 대부분 과부인 여성들이 소유했다). 직영지(demesne)라고 불리는 일부는 지주의 직접적인 사용을 위해 남겨졌고, 대부분은 지대와 각종 세금을 내는 소작농들이 소유했다.

장원제도는 중세 초기에 처음으로 발달했다. 장원에서는 원래 주로 노예와 그밖의 예속적 소작인들이 일했다. 일부는 한때 로마 제국의 대농장(villas)에서 일했던 예속 농민(coloni)의 후손이었다. 다른 이들은 폭력과 전쟁으로 예속 상태가 강요되었고, 또 다른 이들은 보호를 대가로 스스로 노예 신분에 들어갔다. 11세기와 12세기에 이르러, 노예제도는 교회의 정책과 농민들의 반발, 토지 소유 엘리트의 현실적인 양보가 결합되어 유럽 대부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세실리아 시대에는 대부분의 장원에서 자유소작농과 농노가 일을 했다. 자유민과 농노의 신분은 출생 시 결정되었다. 농노 부모에게서 태어난 소년 소녀는 농노 신분에 묶였다. 농노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마음대로 사고팔 수 없었고 관습에 의해 보호되었다(즉, 그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장원에서 일할 의무가 있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농노는 노동력 제공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직영지 경작을 위해 지주들이 비정상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을 제공했다. 1300년 잉글랜드에서 모든 농민의 약 절반이 농노였고 나머지 절반은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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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은 발전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중세 초기, 장원은 직접적으로 이익을 창출했다. 예를 들어, 농민들이 경작한 농작물, 장원 작업장에서 생산한 물품,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경작지에서 지불한 지대 등이다. 1300년이 되자, 영주들은 추가적인 방법으로 장원에서 이익을 얻었다.

첫째, 직영지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소비하거나 판매했다. 한때 노예들이 경작하던 영주 직영지는 그 무렵에는 보통 농노와 임금 노동자들이 경작했다.

둘째, 장원 소작지를 가진 모든 소작농들에게서 지대를 걷었다. 자유소작농들은 현금과 현물로(아마도 크리스마스에 닭 한 마리, 부활절에 달걀 몇 개), 또는 농노라면 노동으로도 지대를 지불했다(장원 관료들의 지휘 아래 농노들은 직영지를 파종, 제초, 수확했다).

셋째, 영주들은 수 세기에 걸쳐 장원에 대해 가진 법적 권리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소작인들은 장원 법정에 참석해야 했고, 소소한 벌금과 수수료는 귀중한 수입을 창출했다. 장원의 방앗간, 오븐, 포도주 압착기 등의 시설을 사용하려면 종종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결혼할 때, 여행할 때, 심지어 죽을 때도 소소하지만 빈번하게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자유소작농들과 농노들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장원제(manorialism)의 부담을 감내했다. "기도하는 자들"과 "싸우는 자들"의 경제적 특권은 상당한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으로 뒷받침되었다.

장원제는 군사 엘리트의 문화와 권력에 의해 강화되었다. 9세기와 11세기 사이에 유럽에서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술이 뛰어나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위를 상속받고, 토지를 지배하는 전사 집단이 등장했다. 역사가들은 이후 이러한 전사들이 살았던 문화, 관계, 규칙을 설명하기 위해 봉건제(feudalism)라는 용어를 만들었지만, 이 단어는 종종 명확성보다는 혼란을 야기한다. 봉건제는 근대적인 단어이고(중세의 사람은 아마도 가신제vassalage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용어는 실제보다 더 많은 질서, 체계, 표준화를 의미한다.

더 나쁜 것은, 봉건제가 오늘날 두 가지 독특하고 혼란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봉건제라는 용어를 중세 경제 전반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에게 봉건제는 장원의 농노가 전사 계급을 위해 노동하도록 강요당한 경제 발전 단계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 단계를 노예제와 자본주의 사이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많은 학생들이 경제학과 사회학 수업에서 이러한 봉건제의 정의를 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세사학자들은 보다 제한된 의미에서 봉건제를 사용한다. 즉,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으로 인해 평민들을 지배한 엘리트의 관습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세실리아가 살았던 13세기 말 잉글랜드에서는 왕을 수장으로 하는 이 소규모 봉건 엘리트가 땅을 지배했다. 그들은 전쟁을 벌이고 평화를 협상했으며, 범죄자를 판단하고 처벌하고, 누가 그들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지 결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부, 귀족 신분, 그리고 군사력으로 통치했다. 농민들은 봉건 엘리트의 권위를 당연하고 좋은 것으로 존중하도록 교육받았지만, 존중하는 태도는 실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강력하고 오만한 기사와 마주한 세실리아나 다른 농민들은 복종과 순종이 가장 안전한 행동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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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영주들은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할 뿐만 아니라 장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8세기 후반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는 왕실 장원의 상세한 목록을 작성하려고 했으며, 9세기에는 일부 교회 영지에 대한 토지, 소작인, 소득의 등록부가 보관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장원 기록 보관 시스템이 보다 완전하게 발전했다. 그곳에서 스튜어드, 베일리프, 리브, 서기 및 기타 장원 관리들이 장원을 감독했으며, 그들이 양심적이고 정직한 관리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경우에 따라 그들의 속임수를 숨기기 위해) 방대한 기록을 보관했다. 이러한 기록은 장원 관리들이 정기적으로 거래했던 농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관습법집(Custumal)은 장원의 관습법을 상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 브릭스톡의 한 관습법집은, 땅을 기부한 병.자는 기증 후에 외출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만약 기증자가 그렇게 하지 않고 사망하면 양도는 무효가 되었다. 이는 죽어가는 사람이 재산을 상속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사 및 임대 명부(Surveys and rentals)는 장원의 소작인을 나열하고, 그들이 보유한 토지와 임대의 경우 지불해야 하는 지대(현금, 현물 또는 노동)를 기록했다. 세실리아 시대의 브릭스톡에 대한 그러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의 사망 약 70년 후인 1416년의 임대 명부는 그녀의 가문이 몰락했음을 시사한다. 페니파더라는 이름은 단 한 명도 장원의 소작인 목록에 등재되지 않았다.

회계 장부(Account rolls)는 일반적으로 수확기가 끝나는 성 미카엘 축일(9월 29일)에 시작하여 1년 동안 장원의 비용과 이익을 기록했다. 중세 브릭스톡에 대한 완전한 회계 장부는 남아 있지 않지만, 만약 그것이 남아 있었다면 장원 하인에게 주어진 봉급이나 특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별로 고용된 노동자에게 지급된 임금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

장원 법정 기록(Court rolls)은 다양한 계약, 분쟁 및 사소한 범죄를 다루는 장원 법정의 절차를 설명한다. 이 법정들은 보통 일 년에 두 번, 또는 브릭스톡의 경우처럼 3주마다 열렸다. 서기들이 모든 법정 업무를 적은 후에 그들은 쉽게 운반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양피지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 ‘Court rolls’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법정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경우(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의 브릭스톡의 경우처럼) 중세 농민들 사이의 범죄, 논쟁 및 상업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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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페니파더의 생애 동안, 잉글랜드의 봉건 귀족과 성직자 엘리트의 거의 대부분은 그들의 생활의 일부를 장원과 소작농들에 의존했다. 왕, 왕비, 영주, 귀부인, 주교, 수도사와 수녀들이 저녁 식사에 앉았을 때, 그들은 영주 직영지에서 소작농들이 일궈낸 식량을 먹었다. 그들이 동방에서 고급 비단을 구입하거나, 돌로 새 집을 짓거나, 가스코뉴에서 포도주를 배로 실어 올 때, 그들은 자유소작농이든 농노든 장원 소속의 농민들로부터 걷은 지대, 수수료 및 벌금으로 축적한 돈을 썼다.

그렇지만 장원은 소작농과 그들의 사회적 상급자들 사이의 유일한 재정적 상호작용 수단이 아니었다. 왕들도 지주로서 왕실 장원을 소유했지만, 그들은 또한 다른 지주들이 소유한 장원에 사는 이들을 포함하여 왕국 내의 모든 주민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권한을 주장했다. 잉글랜드에서 왕은 왕국의 모든 농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남성 농민을 군대에 징집하며, 농민들에게 가축이나 식량을 정해진 가격으로 팔도록 강요할 수도 있었다. 세실리아 페니파더는 특히 왕실의 착취가 가혹했던 시기에 살았다는 점에서 불운했다. 에드워드 1세,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 그리고 그의 손자 에드워드 3세, 이 세 명의 에드워드가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에서 벌인 전쟁을 위해 자금, 병력, 식량을 마련하고자 평범한 농민들에게 거듭 의지했던 시기였다.

주교, 수도사, 수녀들도 역시 장원의 지원을 받았고, 왕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주교 관저와 수도원 성벽 밖에 사는 농민들에게 추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모든 중세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은 십일조를 바칠 의무가 있었다. 이는 매년 수확한 곡물, 새로 태어난 양, 기타 생산물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쳐야 함을 의미했다. 교회 장원에 사는 소작농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대와 십일조를 모두 지불했다.

농민들은 또한 교회법의 적용을 받았고, 만약 간통, 비방, 중혼, 교회의 감독하에 있는 기타 범죄로 교회 법정에 회부되면 벌금과 형벌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일부 농민들은 교회 관계자들을 너무 분노하게 하여 심지어 파문에 처해지기도 했다. 즉, 그들은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교회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것이다. 예를 들어, 1299년 1월 링컨 주교는 일주일 전에 일어난 절도 사건에 연루된 브릭스톡의 모든 사람을 파문하라고 명령했다. 도둑들은 한 미망인의 집에 머물던 휴 웨이드라는 사람의 방에 비밀리에 들어가 그의 금고에서 돈과 물건을 훔쳤다 (주교가 이 절도 사건에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한 것은 아마도 휴 웨이드가 그의 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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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세금 명세서, 군사물자 조달 기록, 법정 기록, 주교 등록부와 같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들은 잉글랜드에서, 특히 13세기와 14세기에 그 기록이 방대하고 풍부하다. 잉글랜드의 장원 관련 문서 또한 세세히 보존되어 있어, 당시 농민의 삶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중세 잉글랜드 농민에 대한 연구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교회, 왕, 그리고 지배 엘리트 계층을 부양하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잉글랜드의 농민 연구가 활발한 이유는 그곳의 관련 기록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문서 관리도 한 몫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 세기에 걸쳐 기록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핵심이다. 잉글랜드의 강력한 법 체계,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회 질서, 그리고 다소의 운 덕분에 이러한 중세 문서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중에 많은 중세 기록들이 소실되었고, 스코틀랜드는 1661년 공문서를 실은 배가 침몰하면서 수천 건의 공문서들을 잃었다. 역사는 증거에 기반하므로, 증거가 부족하면 역사가들은 연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결론도 적어지게 된다. 다행히도, 현존하는 기록들은 잉글랜드의 농민들에 대해 상당 부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나라들의 기록과 비교하여 잉글랜드 농민과 프랑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 농민들과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다.

영주와 농민에 관한 모든 기록은 중요한 역사 자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장원 법정 기록이다. 농민들은 대부분의 법적 문제를 이 법정에 가져왔다. 자유민의 경우에는 특정한 사안을 카운티 법정이나 국왕 법정에 제기할 수 있었고, 살인이나 강간과 같은 중범죄는 이들 상위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사소한 분쟁, 범죄, 상속, 계약 등의 사안은 장원 법정의 관할이었다. 브릭스톡 장원 법원 기록은 세실리아 페니파더가 살았던 시기에 파격적인 수가 남아 있다 – 1287년부터 1348년까지 열린 소송이 549건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원 법정이 오늘날의 법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소환을 받거나 특별한 문제가 발생해야 법원에 가지만, 14세기 세실리아 페니파더를 비롯한 브릭스톡 소작인들은 의무적으로 3주마다 법정에 참석했다. 오늘날 법정은 갈등이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방문하는 불편한 장소지만, 세실리아와 그녀의 이웃들은 분쟁 해결 뿐 아니라 합의사항의 등록, 토지 교환, 조례 제정 등 다양한 이유로 법원을 이용했다. 또한, 오늘날 법원에서는 전문 변호사의 도움 없이는 거의 어떤 일도 진행할 수 없지만, 브릭스톡의 농민들은 법정 규칙에 정통하여 스스로 소송을 진행했다. 장원 법정의 회의는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에게 법정은 교회나 집 앞 골목길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을 것이다. 전용 건물이 없던 당시에 농민들은 법정이 열리는 날이면 지역 교회, 골목길, 마을 광장 등 익숙한 장소에 모였다.

영주의 법정은 원래 영주가 영지의 소작인을 통제하고 수입을 챙기는 수단이자 권력의 도구였다. 하지만 실제로, 특히 세실리아 페니파더가 살던 시기에는, 농민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장원 법정을 이용했으며 이 법정은 영주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지역 관습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장원은 법정을 소집하고 절차를 기록한 기관이었지만, 또 다른 기관인 농민 공동체가 법정 회의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만약 배심원들이 어느 젊은 여성이 영주의 양 우리에 침입한 사실을 법정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면, 그녀는 처벌받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지역 관습법에 따라 막내아들이 장남 대신에 아버지의 땅을 상속해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어떠한 영주도 법정에서 그 전통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소작인이 장원 관리의 조치에 불만을 품는다면, 그들은 법정에서 주저 없이 항의하고 심지어는 구제책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실리아 페니파더와 그녀의 이웃들이 브릭스톡 법정 회의를 위해 3주마다 모였을 때, 그들은 그 절차에 위압되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농민들은 법정에서 더욱 활발하고 강력했을 것이고, 대다수는 이를 유용한 포럼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법정을 통해서 그들은 분쟁을 해결하고, 폭행과 범죄를 처벌하고, 상속과 토지 양도를 등록하고, 양조업자와 제빵사들이 고객을 속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대출 및 기타 계약을 기록하고, 그 외에 지역 사회의 일상생활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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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 수천 개의 농촌 공동체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인접한 마을도 서로 상당히 다를 수 있었고, 유럽의 각 지역 간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그 결과 세실리아 페니파더가 거의 50년 동안 살았던 공동체인 브릭스톡은 물론 중세 농촌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이탈리아의 경우 정착 양식은 잉글랜드에서보다 로마 전통과 연결이 강했고, 장원제는 노동력 제공보다는 현금 지대에 더 의존했으며, 건조한 토양으로 인해 다른 도구, 다른 윤작 방식, 다른 작물이 필요했다.

또 다른 예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영주들이 11세기와 12세기에 엘베 강 동쪽의 땅을 식민화하려고 할 때 정착민을 유치하기 위해 특권을 제공했다. 그 결과 이 새롭게 식민지화된 지역의 농민은 다른 지역의 농민이 부러워할 만큼 광범위한 자유와 낮은 지대를 누렸다.

브릭스톡은 심지어 잉글랜드의 공동체도 대표하지 않는다. 북부에는 수백 명이 사는 마을보다 소규모 촌락이 더 흔하고 영주의 권위의 영향이 미미한 지역이 존재했고, 동부에는 집약적이고 정교한 농업 기술로 유명한 이스트 앵글리아가 있었으며, 남서쪽의 데번과 콘월에는 장원의 구조나 경제에서 브릭스톡과 흡사한 공동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세실리아도 중세 농민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많은 농민들은 그녀보다 가난했고, 많은 이들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으며, 대부분은 결혼을 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어느 마을이나 개인도 그러한 유럽 전역의 다양성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브릭스톡과 세실리아는 적어도 크게 비정상적이지는 않았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장원제의 영향이 강한 지방의 중심부에 위치한 브릭스톡은 장원, 마을, 교구가 교차하는 특별히 좋은 사례를 제공하고, 세실리아의 삶은, 기혼 형제들의 삶을 통해 보완될 때, 농촌 공동체에서 여성과 남성이 직면했던 기회와 선택에 대한 이례적으로 명확한 예시를 제공한다.

게다가 브릭스톡과 세실리아는 매우 잘 기록되어 있어, 수 세기 전에 살았던 중하층민을 연구할 때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세실리아의 삶은 보편적인 예시라기보다는 사례 연구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녀는 매우 평범하고, 평균적이고, 어쩌면 대표성을 띠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면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오직 그녀만의 것이다. 때로는 전형적이고 때로는 예외적인 세실리아의 삶은 우리가 중세 농민의 평범한 삶과 공동체에 친밀한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세실리아 시대의 브릭스톡은 마을, 장원, 교구라는 세 가지 제도가 겹쳐서 존재했다. 이들 중 마을이 가장 오래된 기관이었다. 장원이나 교구가 생기기 오래 전, 유럽의 농민들은 이미 이 땅에 정착했다. 브릭스톡에서 로마 시대 정착의 흔적이 있지만, 사람들이 처음 이 지역에 와서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주변 들판을 개간한 것은 5~6세기 게르만족이 정착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브릭스톡의 중심지에 밀집된 형태로 거주지를 세운 이 초기 정착민들은 중세 시대의 농촌 공동체의 유형 중 하나인 집촌(nucleated village)을 형성했다. 다른 지역의 농민들은 다른 유형의 정착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농촌 곳곳에 흩어져서 각자의 토지에 정착했고, 어떤 이들은 소규모 촌락을 형성해 몇 가구씩 모여 살기도 했다. 이러한 대안적인 형태의 정착지는 지형이 험하거나 토양이 척박한 지역에서 흔했다. 브릭스톡의 집촌은 잉글랜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정착 형태였으며, 한꺼번에 많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토양이 비옥한 북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발견되었다.

브릭스톡의 장원은 마을 자체보다 훨씬 더 넓었다. 이곳은 또한 200년 이상 된 오래된 장원이었는데, 1086년 정복왕 윌리엄이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인 '둠스데이 북'에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브릭스톡 장원은 브릭스톡 마을의 거의 전체와 다른 세 정착지의 일부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북서쪽의 스태니언(Stanion)이었고, 나머지는 남서쪽의 게딩턴(Geddington), 남동쪽의 이슬립(Islip)의 일부였다. 스태니언은 특히 중요했다. 왜냐면 브릭스톡 사람들이 숲 속 더 깊은 곳을 개간하기로 했던 1086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 페니파더 시대에 스태니언과 브릭스톡은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부모는 두 마을 모두에 토지를 소유했으며, 그들의 자녀들도 대부분 그랬다.

브릭스톡은 또한 교구의 일부였고, 장원과 마찬가지로 교구는 브릭스톡 마을보다 커다란 지역을 관할했다. 브릭스톡 중심에는 성 앤드류에게 봉헌된 교회가 있었고, 이곳은 지역사회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일요일뿐만 아니라 축일에도 성 앤드류 교회에서 미사를 들었다. 그들의 신앙은 기독교 이전의 관습과 뒤섞여 있었지만, 경건하고 진심이었으며, 중세 브릭스톡은 물론이고 어떤 중세 마을에도 무신론자는 없었다.

게다가 브릭스톡에서 가장 크고 견고한 건물이었던 성 앤드류 교회는 예배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일과 놀이의 장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신도석(nave)에서 집회를 열고, 가장 건조한 구석에 곡식을 저장하며, 교회 경당에서 물건을 팔았다.

성 앤드류 교회의 사제는 수많은 중요한 의무를 가지고 있었지만, 또 다른 책임도 있었다. 스태니언의 성 베드로 교회는 브릭스톡 교구 내의 예속된 예배당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브릭스톡 교구는 브릭스톡과 스태니언 두 개의 마을과 성 앤드류 교회와 성 베드로 교회 두 개의 교회를 포함했다. 대부분의 경우, 스태니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성탄절, 부활절, 성 앤드류 축일 등 주요 축일에는 교구 교회인 성 앤드류 교회에서 축하하기 위해 몇 마일 정도 걸었을 것이다.

세실리아 페니파더에게 이러한 제도, 즉 마을, 장원, 교구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파종 시기와 수확 시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장원 법정에서 벌금과 수수료를 납부했으며, 교구에 십일조를 바쳤다.

종종 마을, 장원, 교구가 서로 겹쳐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을 다리를 수리하는데 교구 자금을 사용할 수 있고, 비 오는 날에는 장원 법정이 성 앤드류 교회의 본당에서 열렸으며, 마을 사람들은 장원의 부역을 이행하기 위해 함께 일했다.

그러나 세 기관의 영역은 명확하게 일치하지 않았고, 지저분하게 겹쳐지는 마을, 장원, 교구의 경계선을 지닌 브릭스톡은 잉글랜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 농촌 공동체의 전형이었다. 이미 정착해 있던 마을 위에 경제 구역과 교회 구역이 겹쳐지면서, 장원과 교구의 경계는 그들만의 논리에 따라 그려졌다. 마을에는 농민들이 정착했고, 장원은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들을 부양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교구는 기독교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되었기 때문에 이 세 기관의 경계선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Judith M. Bennett, A Medieval Life: Cecilia Penifader and the World of English Peasants Before the Pl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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