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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ㄱㅇㄷ]후삼국 호족 재지기반 부재설 비판에 대한 답변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12 12:30:35
조회 1436 추천 22 댓글 78
														


https://gall.dcinside.com/m/alternative_history/937227


상기 글에 대해서 어느 분이 장문의 비판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걸 답변해야 하나 하고 정리하다가.. 너무 길어져서 엉성하게 나마 글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연재글이나 계속 쓸까 하다가 저도 궁금해져서 모아놓은게 아까와서 글로 남깁니다.  대역갤에 올린 글에 대한 댓글이라 대역갤에 올리긴 하는데 혹시 문제가 된다면 자삭하겠습니다. 


해당 댓글의 비판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세 내용은 길어서 링크를 보시면 됩니다.



0. 지난 연재글의 나말여초 호족의 재지기반 부재에 대한 비판


여기서 보듯이 전덕재 선생은 앞서 인용한 이기동-손흥호의 인식론, 그러니까 김헌창의 난이 재지세력의 성장 및 신라 지방 지배체제의 변혁을 촉발한 결정적 계기라는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이 부분은 현재 학계의 통설로 봐도 무방함.11.06 18:12:54삭제


ㅇㅇ(121.146)뭐 이외에도 전덕재 선생 등이 사료 상 성주-장군들의 성격을 규명했던 것이라던가, 각종 불사 향도를 주도한 지방세력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각종 붍사 밀 불탑 조성기의 기록 등도 있지만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아무리 봐도 후삼국시대의 개막이 농경 및 해상을 불문한 재지세력의 지속적인 성장, 이에 대한 신라 조정의 지방 통제력 상실, 이로인한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국가체제 붕괴라는 일관된 도식으로 설명하고 있고, 이는 최근의 논문에서도 전혀 관점이 달라진 바 없음. 전덕재 선생은 신라사 전반, 그리고 특히 나말여초 사회경제사에 있어서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관점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있음.11.06 18:16:43삭제


ㅇㅇ(121.146)오히려 신라 말 지방 및 재지기반 세력들이 반란자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너의 관점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통설은 연구가 보다 세밀화하고 지속되기면서 반례에 부딪히기는커녕 향도 및 불사-불탑 조영에 관한 연구, 선종불교사 연구, 그리고 보다 더 세밀화한 문헌기록 분석을 통해 오히려 더욱 더 강화되고 있을 뿐임. 오히려 이전에는 단순한 마르크스주의 도식론으로 대충 때려맞춘 부분에 대해서 실제로 향도조직을 통해 지방세력이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신라의 지방체제를 밑바닥부터 잠식해나가던 과정이라던가,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의 지방지배 체제 이완에 대한 증거들을 오히려 더더욱 발견하여 그 증거를 보강한 상황임11.06 18:19:26삭제


ㅇㅇ(121.146)이에 반해 니가 신라 말에 지방세력이 대두하지 않았다고 우기기 위해서 제시한 증거는 오로지 별로 기록이 남지도 않은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출신'들 중에서 명확하게 진골귀족 및 재지기반인 사람이 없고 대부분 도적이었다 이런 식의 상상 속 소설인데, 애당초 세부적인 호족에 대한 연구로서 오히려 재지기반이거나 진골 출신인 것이 유력한 호족인물들이 더욱 더 규명되는 중이고, 그 성격도 농경기반 토호, 해상세력, 그리고 이들에 후원을 받은 선종 사원, 낙향한 진골귀족 혹은 그들의 후예로서 다양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부각될 뿐임.11.06 18:21:53삭제


ㅇㅇ(121.146)애당초 신라말에서 후삼국의 개막에 이르는 신라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축적된 연구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런 현재까지 통설을 차지하고 있는 종래의 연구들을 모두 무시한 채, 지엽적인데다가 사실 기록도 별로 남지 않아서 억측이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주제인 '후삼국시대 호족세력의 출신'이라는 걸 가지고 어떻게 '이전 신라시대에는 지방세력이 없었다'는 엄청난 비약을 논증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놀라울 따름이지만, 부디 충고하건대 자기 입맛에 맞는 논문만 편식하듯 보지말고 본인이 다루고 싶어하는 주제에 대해 다룬 이전의 연구들이 있을 때는 일단 본인 관점에 맞지 않더라도 참고해볼 것을 권함. 요컨대, 현재까지도 나말여초사의 통설은 여전히 지방세력의 대두와 이로인한 지방통치체제 이완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겠음




1. 대토지를 경영한 강력한 재지세력의 존재


 제 주장의 핵심 내용은 연재글에 써 있습니다. 

"후삼국시대 호족들에 대한 연구들은 재지사회에 노비로 대토지를 경작한 강력한 재지유력자의 존재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보여줍니다."

 고대 사회는 인구밀도가 희박하고, 토지 가치는 낮습니다. 경작자가 없는 토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미개간지가 많으므로 토지를 임차하고자할 경작자를 구할 수 없죠. 그래서 노예나 노비가 필요합니다. 

 만약 대토지를 소유하고 다수의 노비, 적어도 수백명을 소유한 재지유력자가 있었다면 이들은 성주나 장군을 지지하는 재지관반층을 형성하는게 아니라 성주나 장군이 되는 경우가 많았을 거라는거죠. 

 재지유력자 자체가 없다는게 아니라, 그렇게 강력한 재지유력자가 등장할 만큼 성장하는게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적으로요.




2. 그럼 신라 하대 재지세력의 성장과 여기서 등장한 호족의 존재를 입증한 전덕재등의 연구는 뭐냐? 금석문 연구가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느냐?


제가 인용한 사람들의 연구에 대해서 그건 대부분 빈약한 사료와 추정들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신바 있는데.. 그럼 나말여초 사회경제사에 있어서 가장 권위적인 연구자인 전덕재의 연구를 한번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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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신라 효공왕대 전후 신라 정부와 성주·장군의 동향에 대한 고찰", 2021


중알찬 이재는 위대한 大夫이다. 기회를 타고 뜻한 바를 발휘하여 일찍이 風雲 속에서 준수함을 드러냈고 생각을 바꾸어 몸을 닦으며 산천에 은혜를 갚기 바랐다. 표범의 무늬처럼 행실을 고쳐 조정에서의 세 가지 害毒을 모두 제거하고, 뱀처럼 도사리고 앉아 君子가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일[九思]을 더욱 삼갔다.

 이미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였으니, 이에 반드시 향리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살고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감화될 것이므로, 어디로 간들 좋지 않으리오? 마침내 높은 언덕을 선택하여 의로운 보루 를 쌓아 완성하였다. 강가에 있었으나, 우뚝 솟은 것이 깎아 세운 절벽과 같았고, 험준한 산을 등지고 있었지만, 가지런하고 평평한 것이 길게 꼬리를 문 구름과 같았다. 그제서야 조용히 西畿를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위의 기록은 최치원이 908년(효공왕 12) 말에 지은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登 樓記」의 일부이다....

 이재의 관등이 중알찬이고, 그가 표범의 무늬처럼 행실을 고쳐 조정에서의 세 가지 害毒을 모두 제거하였다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재는 6두품으로서 중앙 행정관서의 관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금석문과 續日本紀, 삼 국사기에 전하는 중아찬 관등을 수여받은 사람들이 모두 김씨였음을 미루어 보 건대,40) 중알천 이재의 姓 역시 김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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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재는 상기 논문에서  대구광역시 수성구 및 달성군 가창면 일대로 비정되는 수창군의 호족 이재(異才)가 신라의 중앙조정 관료 출신이며, 6두품이고 김씨라고 추정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논문을 인용할 때 학자가 완벽하리라 기대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덕재가 호족 이재의 출신이 신라 조정출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금석문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해석은 제대로 하는게 맞습니다. 


 전덕재가 위에서 이야기한 "조정에서의 세가지 해독을 제거했다."는 내용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둥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는 동문선(東文選)에 나온 내용입니다.


 원문은 "豹變而倂除三害"입니다.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표범의 무늬가 변하듯이 행실을 고쳐서 3가지 해를 제거했다."입니다. 여기 어디에도 조정에서의 세가지 해독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물론 관용어구 표현이라서 그럴수도 있겠죠.


 여기서 표변(豹變)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것으로 대인호변(大人虎變) 군자표변(君子豹變)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 해서, 대인은 천하를 혁신하고, 군자는 잘못을 고쳐서 표범의 털처럼 행실을 고친다는 의미입니다. 


 세가지 해(三害)란 진서 주처전(晉書 周處傳)에 나오는 것으로 행실이 나빴던 주처(周處)와 식인호랑이, 교룡이 사람을 괴롭히는 3가지 해악이라 불렸는데, 주처(周處)가 이를 깨닫고 뉘우쳐서 큰 사람이 되었다는 일화죠. 


 최치원은 관용어구로 이 표현을 사용한거같은데, 이 의미 어디에서도 조정의 해악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는 안됩니다. 번역을 잘못했거나, 또는 이 부분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했다고 봐야 합니다. 


 저는 오히려 굳이 해석하자면 신라말기에 반란군이나 초적(草賊) 출신이거나 유협으로 날뛰던 이재(異才)가 뉘우쳐서 행실을 고치고 악한 무리들을 물리쳐서 수창군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호족이 되었다는게 전덕재의 중앙 행정관료 출신이었다는 설명보다는 가능성이 높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덕재의 해석처럼 중알찬(重閼粲)이란 관직을 칭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시주로서 碣을 세웠으며 西□大將軍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착용한 소판(蘇判) 아질미(阿叱彌), 加恩縣將軍 熙弼, 當縣(마멸). 龍德 4년(924) 歲次 甲申 6月 日에 건립을 마치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923년에 건립된 이 탑비역시 최치원에 의해 쓰여진 금석문입니다. 여기서 소판(蘇判)은 3등 관등으로서 오로지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입니다.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금석문 자료에 의하면 김씨 관료나 최치원이 당나라 과거에 합격한 후 진사가 되어 착용한 기록이 총 6개 나옵니다. 


 전덕재의 해석에 의거한다면 아질미(阿叱彌)는 진골귀족이며, 김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최종석이나 이현숙, 하일식 등 다른 연구자들은 다 여기에 부정적입니다.


 최종석은 아질미의 이름은 "앗며", "앗미"로 읽히는 비한자식 명칭이라고 보고 아질미가 낮은 신분에서 호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현숙의 경우도 "新羅末 魚袋制의 成立과 運用"에서 신라 하대 진골귀족은 거의 한화된 성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질미가 진골이 아니었다고 해석합니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전덕재의 금석문 해석은 기본적으로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최치원의 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로는 대구지방의 호족 이재(異才)가 6두품이거나 신라 조정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오히려 그가 중알찬 관직을 사칭했을 가능성이 높죠. 이 시기에 신라 관직을 사칭하는게 일반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다만 이것만 가지고 전덕재의 모든 주장이 무너진다거나 그가 상상과 추정만으로 글을 썼다고 하진 않겠습니다. 


 전덕재는 해당 논문에서 "신라의 관리 또는 지방관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영남지역의 성주・장군들은 반 신라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궁예와 견훤에게 歸附하기를 꺼려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신라 왕경인 서라벌에 가까운 지역에서 신라의 관리나 지방관 출신들이 성주나 장군등 호족의 자리를 차지했을 가능성은 존재했을테니까요.


 전덕재가 진골 출신 호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다른 사례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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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고대-고려 초 울산지역 변동과 울주의 성립, 2020


 박윤웅이 태조 13년(930) 9월에 고려에 항복한 배경과 관련하여 박윤웅의 姓이 朴氏였다는 사실, 그가 고려 태조에게 보낸 인물이 崔奐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치원이 지은 「奏請宿衛學生 還蕃狀」에 897년에 賀正使로 파견된 金潁이 당나라 조정에 자신이 귀국 하는 편에 숙위학생인 金茂先, 楊潁, 崔渙, 崔匡裕 등 4인을 함께 보내달 라고 요청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64) 김영이 귀국할 때에 최환 등이 함 께 귀국하였을 것인데, 그 뒤에 최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런데 930년 9월에 박윤웅이 고려에 귀부할 때, 그가 崔奐을 태 조 왕건에게 파견하였다고 전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숙위학생인 崔渙이 개지변에서 보낸 崔奐과 동일 인물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897년 무렵에 귀국한 崔渙이 930년까지 생존하였 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崔渙과 崔奐은 동일인물에 대 한 이표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추정에 잘못이 없다면, 숙위학생 출신인 최환은 6두품신분으로서 출중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박윤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인물이었고, 이러하였기 때문에 박윤웅이 최환을 고려 태조에게 사절로서 파견하였다고 추정하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아가 6두품 신분의 숙위학생 출신이 보좌한 박윤웅은 혁거세의 후손인 박씨 진골귀족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호족이었다고 규정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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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재는 울산 지역의 호족 박윤웅(朴允雄)이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인 최환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보냈기 때문에 박윤웅은 진골귀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박씨라는 이유에서죠.


태조(太祖) 때 이 고을 사람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적을 세웠으므로, 하곡·동진·우풍 등의 현을 병합하여 흥례부(興禮府)를 두었다.....

계변성(戒邊城)이라고도 하며, 개지변(皆知邊)이라고도 하고, 화성군(火城郡)이라고도 한다.

고려사 지리지 경상도 울주


9월 정묘 개지변(皆知邊)에서 최환(崔奐)을 보내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고려사 태조 13년(930년) 9월


 박윤웅에 대한 사료적 근거는 고려사 울주 연혁에 나오는 글이 전부고, 이외에는 이를 인용한 세종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지리지 정도입니다. 울산 지방에 박윤웅이라는 호족이 있었고 공을 세웠다 정도죠.


 이 사람이 박씨고, 6두품 최환을 보냈으니 진골귀족일거라는건 위에서 수창군의 호족 이재(異才)가 6두품 출신일 것이라는 주장보다도 사실 근거가 부족합니다. 규정하여도 무방하지 않은게 아니라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울산이 경주에 인접해 있고, 고려후기에도 울산과 경주간 육상 교역이 활성화되어있었다는걸 생각하면 신라와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도는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해상세력이라면 신분이 높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나말여초 시기 해상세력은 대체로 신분이 낮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나중에 박윤웅이 고려사에 박씨로 기록되었다고 그가 진골이라면 순천 지역의 해룡산성에 웅거했던 해상세력으로 평가되는 호족 박영규(朴英規) 역시 진골이라고 할겁니다.


 변동명은 "新羅末ㆍ高麗初의 順天 豪族 朴英規"에서 박영규가 왕경인 출신이 아닌 지역민으로 보는데, 그가 해상세력이라는 점,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호족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이죠. 박씨의 여부보다는 차라리 지리적 요인을 강조하는게 전덕재의 견해를 보충하는데 효과적이었을거라고 봅니다.


 그럼 최환은 어떠냐구요? 박윤웅이 보냈을지도 모르는 최환이 6두품인지 당나라 유학생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견훤에게 투탁해서 봉사한 최승우(崔承祐, ? ~ 935년)가 당나라 유학생인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견훤을 진골 귀족 출신일지도 모른다고 볼수는 없잖습니까? 6두품 출신이 나말여초 시기에 진골이 아닌 이 밑에서 봉사하는 것이 이상한게 아니니까요.


 그럼 전덕재 외에 제기된 다른 근거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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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석, 홍성지역의 고대사회-지배세력의 성장과 변화를 중심으로, 2012


홍성읍지역에서도 금마천유역의 수로이용권과 농업생산력 발달에 의해 세력기반을 키워나갔던 兢俊세력이 대두하여 호족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103) 


이처럼 홍성읍세력이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이르러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우선 백제부흥운동의 패배로 인해 임존성세력의 지역 거점 기능 약화와 삽교천을 이용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등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농경에 적합한 내륙 홍성읍지역이 금마천유역의 개발이 촉진되면서 경제적 기반을 확충한 것도 큰 요인이 될 수 있었다


103) 김갑동, 2004, 고려 초기 홍성지역의 동향과 지역세력, 윤용혁, 2007, 통일신라․고려시대의 도청예정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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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논문을 확인하면서, 확실히 고대사 연구는 상당부분 상상과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왕이 운주(運州)를 공격하여 성 아래에서 성주(城主) 긍준(兢俊)을 격파하였다.

고려사 태조 10년 3월(927년)


 명주(溟州)의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왕렴(王廉)·왕예(王乂) 및 원보 인일(仁一) 등에게 마군 20,000명을 거느리게 하고

고려사 태조 19년 9월(936년) 일리천 전투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는 홍주(洪州) 사람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다. 태자(太子) 왕직(王稷)과 공주(公主) 한 명을 낳았다.

고려사 열전 태조 후비 흥복원 부인 홍씨


운주의 성주 긍준(兢俊)은 태조의 후비 홍씨의 아버지 홍규(洪規)와 동일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합니다. 운주가 1012년 홍주로 개칭되었기 때문이죠. 이정도 사료가 다이고, 저 위에 언급된 인용처 중에 김갑동의 논문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윤용혁의 글에는 어디에도 농업생산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양기석의 위 이야기에서 농업생산력에 대한 내용은 인용처나 근거가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홍주가 위치한 금마천 유역이 내륙으로서 농경중심지이나 농업생산력 기반으로 성장했을거라고 진짜로 상상한 것에 가깝습니다. 


 최소한 양기석의 주장을 제 주장에 대한 반박근거로 사용하시려면 해당 내용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최소한 확인이 되야됩니다. 


 저는 전덕재가 대구의 이재, 울산의 박윤웅과 같은 영남지방의 호족들이 신라의 지방관이거나 인적 네트워크 내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엄청나게 무리한 거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또한 양기석이 홍주의 호족들이 농업 생산에 기반해있었다고 상상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는 하지 않더라더요.


 그런 추정은 가능하죠. 사료가 워낙 부족하다보니 추정과 상상은 고대사 연구에 필요합니다. 그런 식으로 쌓고 보완해나가야죠. 


 문제는 전덕재를 인용하면서 상대의 견해나 인용은 추정이나 상상으로 몰아붙이거나 취사선택했다고 비난하는겁니다. 상대를 상상과 추정에 불과하다고 밀어붙이면서 그보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상상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논문을 반박근거로 제시하면 안되잖아요.


 그런 식으로는 제대로된 논의가 어려워요. 


 그리고 인용을 하려면 그냥 인용하는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 1차 자료나 인용처에 대해서 확인해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토지집중설에 대해서 검토해봅시다. 고대 사회경제사 권위자 전덕재의 견해를 검토함으로서요.


 전덕재의 토지집중 가설은 엄청나게 오래 전에 시작된 겁니다. 저는 전덕재가 2000년대 이후의 중근세 토지사 연구의 발전과정에서 상당 부분 뒤쳐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가 고대 농업사 연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에 전덕재는 "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사회변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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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나 신라지역에 우경이 농업생산에 이용된 이후, 이에 앞장섰던 계층들은 집체적 농업경영방식 때문에 공동체적 규제를 받던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공동체와 별도로 독자적인 농업생산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이들은 기존의 공동체 공유토지를 개간하여 자신의 사유지로 하거나 아니면 열악한 처지의 읍락구성원들의 세습적인 점유 토지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사유지로 겸병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이러한 현상의 심화 확대는 읍락 내 농민층 사이에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주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우경을 행할 수 있었던 부호농민층의 토지소유와 겸병의 확대는 읍락 내 공동체 성원들의 소유토지에 대한 침식과 직결되었고, 읍락이나 토지에서 유리된 계층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토지를 빼앗기거나 잃은 빈농층이 존재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는 3~4세기, 신라는 5~6세기에 각 읍락 내에 이제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호농민층, 소규모 토지를 소유한 자영 소농민층, 토지를 잃어 부호농민층에게 고용된 고용빈농층, 그리고 자식이나 자신의 몸을 팔아 노비로 전락한 노비층 등 다양한 계층분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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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이 논지에 따르면 우경을 통한 노동생산성이 증가함으로서 읍락 공동체의 공동경작 구조가 개별가호의 경작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33년 전에 한 것은 고대 농업상 연구자로서 전덕재의 기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토지소유의 양에 따른 계층분화에 대해서는 너무 나간 부분이 있습니다. 


 2018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에서 미야지마 히로시는 "양전사의 재검토 : 양안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서"를 발표합니다. 그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한반도에서 토지가 희소한 재화가 아니었고, 이에 따라 토지를 측정하는 방식과 부세제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죠.


 간단히 말해서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토지는 남아돌고 사람은 부족했다는겁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토지에 대해서 엄밀하게 국가가 관리하기 보다는 가호의 노동력이 보다 큰 가치를 가집니다. 


 부농층이 우경을 할 수 있게 되서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점유해서 빈농층이 유랑한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고대 한반도에서 토지는 남아도는 자원입니다. 미개간지가 널려있는데 왜 남의 토지를 주변에서 욕을 먹어가면서 빼앗아야 할까요? 


 남의 토지를 빼앗아 유랑하는 일이 생기면 부호층은 원래 그 가호가 부담하던 조세수취 부담이 가중될 우려도 있습니다. 촌주같은 부호층이 조세수취 실무나 역역동원을 관리하는데 토지를 빼앗아서 수취대상이 도망가게 만드는건 비합리적인 행동이죠. 


 그리고 경작지를 그렇게 뺏으면 누가 경작합니까? 전덕재는 노비화가 4~6세기에 시작되고 유의미한 영역에 도달했다고 추정하는거 같은데 노비가 경작한 걸까요?


 695년 신라촌락문서에 노비인구는 전체 인구 462명중 28명으로 6.1%에 불과합니다. 또한 촌락문서에 기록된 토지면적은 587결로 1인당 토지면적이 1.27결에 달합니다. 인구 대비 토지가 넓었습니다. 게다가 촌락문서에서 각 촌락의 점유지 면적은 경작지 면적보다 엄청나게 넓습니다. 사방에 미개간지가 널려있었다고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전덕재는 2006년 "한국고대사회경제사"를 출판합니다. 16년이 지났지만 그의 견해는 이러한 토지집중 가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우경의 도입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부호층들이 토지를 집적하고 읍락사회 구성원을 노비화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죠.


 다만 1990년대 논문과 달리 부호층이 읍락사회 구성원의 토지를 빼앗았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해당 책에서 통일신라의 농민들 대부분이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였다고 주장했는데,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인당 토지면적은 굉장히 넓었습니다. 


 이 시기는 휴경지와 미개간지가 경작지와 함께 널리 분포했고, 개별 가호들은 자신들의 가용한 노동력 한계까지 토지를 경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넓은 토지를 경작한다는게 더 유리하다는건 아닙니다. 


 신라촌락문서에 4개 촌락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사해점촌은 147명이지만 경작지는 165결이고 반대로 장하지촌은 125명의 인구에 경작지는 183결입니다. 경작지가 작지만 인구와 소, 말의 보유량은 사해점촌이 더 크고, 수취의 기준을 측정하는 계연(計烟)도 사해점촌이 더 높은 평가를 받죠.


 이는 사해점촌이 논(畓)이 102결, 밭이 62결인 반면, 장하지촌은 논은 63결, 밭은 119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건 보다 넓은 토지를 보유하는게 아닙니다. 가용한 노동력과 농기구, 축력을 통해서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토지를 경작하는가였죠. 


 그래서 조선 전기까지의 농업경영 양상을 조방적이고, 노동생산성 위주라고 학계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다 집약적인 농업이 고려시대에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위은숙 같은 경우도 있지만 신라시대까지 소급하진 않습니다. 


 인구밀도가 증가하여 토지가 희소해지고 토지가치가 높아지게 되는 것은 한반도에서 최소 15~16세기 들어서야 시작되고 17세기 들어서야 본격화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농민이 유랑하는 것은 토지를 빼앗겨서가 아닙니다. 재해나 전쟁, 과도한 수취등으로 인해서 생존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죠.


 이 시기 작은 토지를 경작한다면, 그것은 토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개별 가호가 가진 노동력과 축력, 농기구가 부족하여 토지를 넓게 경작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호철, 이x훈, 김건태, 미야지마 히로시를 비롯한 중근세 농업사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덕재가 고대 농업사 연구에 기여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의 토지집적이나 농업경영에 대한 이해들은 2000년대 이후 축적된 한국 농업사 연구의 결과를 충분히 흡수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해하시려면 이X훈이 존나게 싫어도 이X훈의 한국경제사나, 이헌창, 김재호의 경제사 책이나 이호철, 김건태, 미야지마 히로시등의 농업사 연구들을 고대부터 조선후기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단축해서 보시려고 하신다면 송기원의 "고려 전시과 수취의 성격"에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노동력과 토지의 상관관계와 이에 대한 기존 연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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