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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년전쟁.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7-1448)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1.24 16: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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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상기한 왕의 신하로서, 왕의 명령에 따라 그의 보호와 안전통행권 아래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상기한 시간과 장소에서 상기한 공작이 그들에게 상기한 지역으로의 안전통행권에 대해 통지하고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읽은 후, 상기한 왕과 왕국에 대한 반역자이자 적으로서 중범죄와 반역 혐의로 붙잡혔다. 그들은 그를 죄수로서 구금하고, 상기한 왕의 안전통행권을 무시하고, 그들이 상기한 왕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기한 왕권은 곧 상기한 왕국의 공동체이며, 왕국의 공동체는 곧 왕국의 왕권이라고 말했다.

-1450년 6월 30일, 서퍽 공작을 납치 살해한 선원들에 대한 대배심 기소장



1. 몽트뢰유 포위전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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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퍼드 공작의 후임으로 요크 공작 리처드가 임명되었다. 요크 공작이 루앙에서 행정 업무에 집중하는 동안 존 탈보트가 노르망디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1437년 2월,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퐁투아즈를 점령했다. 하지만 탕카르빌과 페캉 등 꼬 지방의 주요 거점들을 공략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4월, 베지에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랑그독 대표들은 3년 기한으로 상품세 징수를 승인했다. 하지만 기한이 지난 뒤에도 이 상품세는 정기적인 세금으로 정착된다.


8월, 프랑스는 몽타르지, 샤토랑동, 느무르, 몽트뢰유 등 파리 남쪽의 잉글랜드 거점들을 청소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몽트뢰유의 공성에는 4500명 이상의 병력과 포병대가 투입되었다.


요크 공작의 몽트뢰유 구원 시도는 실패했고, 10월까지 샤토랑동, 느무르, 몽트뢰유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몽트뢰유에서 포로로 잡힌 잉글랜드 병사들은 전쟁 포로로 대우받았지만 프랑스 출신은 반역자로서 처형되었다. 이제 오직 몽타르지만이 이 지역에서 잉글랜드의 전초 기지로 남게 되었다. 겨울의 시작과 재정적 제약으로 모와 크레이를 목표로 한 다음 작전은 중단되었다.


요크 공작은 노르망디에서 정부와 군대의 규율을 어느 정도 재건했지만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공작은 결국 11월에 임기 연장을 거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간다.




2. 부르봉 파벌 결성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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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년 12월, 샤를 7세는 그동안 귀족들에게 수여된 보조금의 대부분을 취소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지위에 비해 재산이 적으며 왕실의 보조금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부르봉 공작이 이에 반발했고, 잔 다르크와 어울리던 시절부터 샤를 7세와 사사건건 대립해왔던 알랑송 공작, 그리고 이복형인 오를레앙 공작을 잉글랜드의 포로 신세에서 해방할 의무를 가진 장 드 뒤누아 등과 연합해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 부르봉 파벌은 우선 오를레앙 공작을 해방해 파벌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에게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상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잉글랜드측은 앙주 파벌이 가진 힘을 과대평가했고, 부르봉 파벌을 키워서 프랑스에 아르마냑과 부르고뉴의 내전을 재현할 수 있다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오를레앙 공작의 해방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은 헨리 5세의 유언을 상기시키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때부터 보퍼트 추기경의 정치적 후계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과 글로스터 공작의 대립이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샤를 7세가 부르봉 파벌의 음모를 빠르게 간파하고 랑그독에서 군대를 소집하자 부르봉 파벌은 곧바로 항복했다. 결국 브르타뉴 공작 대신 부르고뉴 공작의 중재로 평화 협상이 진행된다.




3. 오를레앙 칙령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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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년 7월 20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5000명이 모를 포위했다.


9월 15일, 아성에서 농성하던 주둔군이 결국 항복하면서 모 시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는 부르고뉴와 평화 조약을 맺고 양모 수출을 재개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 협상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11월 초, 리슈몽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메인에서 공세를 개시해 생트슈잔을 비롯한 많은 거점을 탈환했다.


11월 2일, 오를레앙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 칙령에서 샤를 7세는 군대에 규율을 확립하고 용병 도적단의 약탈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용병들과 직업군인을 국왕군에 통합하고 귀족들의 군권을 제한했다.


11월 30일, 프랑스군이 아브랑슈를 포위했다. 하지만 도싯 백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구원군의 기습으로 포위군은 수많은 보급품과 대포를 잃고 패주한다.




4. 프라그리 반란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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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년 4월, 투렌과 니오르에서 부르봉 파벌의 주도로 '프라그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프라그리란 프라하의 후스파 봉기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반란의 주된 목표는 샤를 7세의 궁정에서 앙주 파벌을 축출하는 것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작년에 발표된 오를레앙 칙령이었다.


부르봉 파벌은 처음엔 샤를 7세를 납치하고 앙주 파벌의 지도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궁정의 보안이 엄중해서 곧 포기했다. 이후에는 왕세자 루이를 섭정으로 내세우고, 세금 감면을 약속하며 도시 세력을 포섭하고, 용병들을 동원해 국왕을 압박한다는 더 세련된 계획이 나왔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국왕에게 누설되었다.


샤를 7세와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군이 로슈에서 반란군에 맞서자 부르봉 공작은 오베르뉴로 도망쳤다. 이후 샤를 7세는 포병대를 보강한 뒤 생메상과 멜을 탈환했고, 이에 알랑송 공작과 왕세자 루이도 오베르뉴로 도망친다.




5. 아르플뢰르 포위전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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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년 7월 2일, 글로스터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대립으로 적절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요크 공작이 다시 노르망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요크 공작은 임무에 실패해도 문책받지 않을 권리를 요구한다.


한편 가스코뉴에서는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가 총독으로 임명되어 타르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노르망디 방어가 더 시급하다는 정부의 판단에 따라 대부분의 군대가 노르망디로 재배치되었다. 헌팅던 백작도 부관인 토머스 렘프스턴을 세네샬로 임명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간다.


8월 8일,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구원군과 함께 포위군 진영을 공격하거나 해상봉쇄를 뚫고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결국 10월 28일 잉글랜드가 아르플뢰르를 탈환한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방비가 약해진 틈을 노려 콩슈와 루비에를 점령했다.


8월 31일, 토머스 렘프스턴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타르타를 포위했다.


10월,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오랜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6. 퐁투아즈 포위전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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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년 1월, 토마스 렘프스턴과 알브레 영주가 합의에 도달했다. 타르타와 그 주변 지역은 알브레의 네 번째 아들에게 주어지며, 이 아이는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20년의 휴전이 제안되었고, 만약 샤를 7세가 3개월 이내에 구원군을 이끌고 타르타에 도착한다면 협정은 무효가 될 것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 협정은 가스코뉴 남부에서 잉글랜드의 통제를 강화할 위험이 있어 샤를 7세로서는 당장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 7세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것을 약속했고, 타르타의 항복 날짜는 1442년 6월 24일로 연기되었다.


5월, 샤를 7세가 직접 이끄는 프랑스군이 우아즈강에서 공세를 시작해 10월까지 크레이, 에브뢰, 퐁투아즈를 차례대로 탈환했다.


7월, 글로스터 공작의 아내인 앨리너 카범과 가신들이 헨리 6세의 죽음과 추밀원 의원들의 처형을 예측하기 위해 흑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가신들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화형당했고, 앨리너는 참회했지만 결혼이 무효화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글로스터 공작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 배제된다.


11월, 잉글랜드 추밀원은 노르망디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칼레만이라도 지킬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7. 타르타 포위전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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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 2월, 느베르에서 프랑스 대귀족들의 회의가 열렸다. 샤를 7세는 직접 참석하지 않고 상서인 르노 드 샤르트르를 대신 보냈다. 대귀족들은 국왕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며 감세를 요구했지만, 샤를 7세는 귀족들의 우려를 일축하며 자신이 선택한 통치 방식과 조세 체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관해서는 주권을 양도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같은 시기, 존 탈보트가 7년 만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슈루즈베리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6월, 탈보트가 지휘하는 4000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 남동부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뒤누아 등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반격에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난다.


같은 시기, 샤를 7세는 1만에서 2만 사이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향했다. 이 원정의 목표는 타르타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보르도와 바욘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6월 24일 프랑스군이 타르타를 간단히 점령했다. 곧 생세베르를 점령하고 주둔군 수백과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아두르강의 요충지인 닥스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바욘은 너무 멀어서 보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바욘 공격을 포기하고 아쟁으로 후퇴한 뒤 보르도로 향했다.


8월 24일, 잉글랜드군이 닥스를 기습해 탈환했다. 생세베르의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 주둔군을 도시에서 쫓아냈다.


8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사망했다.


9월, 프랑스군이 가론 강 하류의 요충지 렁공을 점령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다른 요충지인 생마케르와 라 레올에서 여전히 수운을 통제하고 있었다.


10월 초, 잉글랜드군이 렁공을 탈환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이 라 레올을 포위 공격해 도시를 점령하고 아성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11월 2일,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디에프를 포위했다.


12월 7일, 2개월에 걸친 치열한 포위공격 끝에 아성의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프랑스군이 라 레올을 점령했다. 하지만 물자 부족과 혹독한 날씨에 시달린 프랑스 군대는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한다.


그러나 이 원정으로 프랑스의 힘을 목격한 지역 귀족들은 잉글랜드를 버리고 샤를 7세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지역의 유력 귀족인 알브레, 푸아 백작, 아르마냑 백작이 전향하면서 가스코뉴 남부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8. 디에프 포위전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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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4월, 보퍼트 추기경의 조카인 서머싯 백작 존 보퍼트가 서머싯 공작으로 승진하고 메인과 앙주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암울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보퍼트 추기경이 제안한 대담한 작전을 위한 준비였다. 지금 잉글랜드가 처한 딜레마는 루앙과 보르도가 동시에 위협받고 있는데 둘 다 지키기에는 자원이 부족하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가스코뉴에 있는 프랑스 주력군을 앙주나 푸아투로 끌어들여 야전으로 격멸하고 휴전을 강요하는 것뿐이라는 논리였다. 상당히 그럴듯한 명분이었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원정을 계획한 진정한 목적이 추기경의 조카를 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8월 초, 서머싯 공작이 이끄는 원정군 4500명이 솔렌트에서 출항해 라 우그 해안에 상륙했다. 일주일 뒤, 아브랑슈에서 지원군이 합류해 병력이 6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원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요크 공작이 지키는 노르망디와 루앙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는 것이었지만, 서머싯은 시작부터 요크 공작과 갈등을 빚었다. 서머싯 공작의 병사들은 노르망디 곳곳에서 총독의 허락도 없이 물자를 징발하며 행패를 부렸고, 이후 완성된 87페이지에 달하는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서머싯의 군대가 저지른 무수한 갈취와 폭력 행위를 자세히 기록했다.


게다가 서머싯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샤를 7세와 가스코뉴 원정군이 원정을 중단하고 북부 프랑스로 돌아온 뒤였다. 노르망디의 방패가 되어 프랑스군을 루아르 이남으로 유인하겠다는 서머싯의 주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8월 15일, 장 드 뒤누아와 왕세자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디에프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전멸시켰다.


9월 중순, 서머싯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갑자기 앙제 인근에 나타났다. 잉글랜드군은 대포도 없이 도시를 포위하고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포위를 풀고 북서쪽으로 행군했다.


9월 말, 서머싯 공작은 푸앙세 인근에서 포병대와 합류하고 푸앙세를 포위 공격했다. 결국 프랑스군이 미끼를 물었고, 매튜 고프가 지휘하는 분견대 1500여 명이 샤토공티에에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구원군을 기습해 전멸시켰다. 하지만 잉글랜드 지휘관들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의 전투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의 동생이자 헨리 6세의 어린 시절 친구인 질 드 브르타뉴가 헨리 6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2000노블의 연금을 수여받았다. 샤를 7세는 격노하며 프랑스에 있는 질의 재산을 반역죄로 몰수하고 브르타뉴 공작의 평화 협상 중재 제안을 거절했다.


10월 중순, 서머싯 공작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이동해, 브르타뉴 국경의 성채 라 게르슈를 점령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는 잉글랜드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당황한 추밀원 의원들은 브르타뉴 공작에게 사과하고 서머싯 공작에게 명령을 내려 배상하게 했다.


12월, 서머싯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몽을 점령한 뒤 원정을 마쳤다. 중요한 임무의 실패와 대중의 비난에 충격을 받은 서머싯 공작은 코페 성으로 은퇴했고, 얼마 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사후 동생이자 1436년 칼레 포위전과 1439년 아브랑슈 포위전에서 활약한 영웅인 에드먼드 보퍼트가 서머싯 공작위를 계승했다.




9. 투르 조약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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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4년 2월,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외교 대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떠났다. 원정의 대실패와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로 프랑스측에 큰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퍽 백작은 국내로 돌아온 이후에도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면책권과 책임을 분담할 수행원들을 요구했다.


4월 8일, 방돔에서 예비 협상이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상서인 르노 드 샤르트르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해서 협상이 일주일 휴회되었다.


4월 16일, 대사들은 투르에서 다시 모였다. 잉글랜드측은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노르망디와 가스코뉴와 퐁티외의 영토와 주권을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측은 가스코뉴와 칼레와 긴 성만 양보할 수 있다고 답했다. 리처드 2세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듯 그렇게 종전 협상은 결렬되었고, 정략결혼이 포함된 장기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다.


프랑스측은 헨리 6세의 결혼 상대로 앙주의 르네의 딸이자 왕비의 조카인 마르그리트를 제안했다. 앙주의 르네는 1431년 뷜녜빌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많은 영토를 뜯긴 이후로는 이름뿐인 대귀족이었지만, 여전히 프랑스 궁정에서 앙주 파벌이 가진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잉글랜드 대사들은 만족했다.


5월 24일, 투르에서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헨리 6세의 대리 약혼식이 치러졌다. 나흘 뒤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8월, 잉글랜드와 휴전하면서 잉여가 된 용병들과 직업군인들의 처분에 골머리를 썩히던 샤를 7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공작이 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일으킨 내전에 개입했다. 왕세자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위스로 원정을 떠났고,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스위스 영토를 행군한 끝에 바젤을 포위했다.


같은 시기, 샤를 7세는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도시들을 정벌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렌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9월 중순, 바젤 포위 공격은 지지부진했고, 현지 민심을 고려하지 않고 잔혹행위를 벌이는 자칭 동맹군에 놀란 오스트리아군은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이에 질린 프랑스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한 뒤 스위스 연방과 협상을 시작했다. 왕세자 루이는 무릎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은 채 후방으로 물러났다.


같은 시기, 샤를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메스를 포위했다.




10. 루피 르 샤토 칙령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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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년 2월, 샤를 7세는 5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메스 시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샤를 7세와 고문들은 용병 도적단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상비군인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칙령으로 선발된 직업군인과 용병들은 우선 '랑스'라 불리는 6인 분대로 조직되었다. 하나의 랑스는 전신 갑옷을 입은 맨앳암즈 하나, 가벼운 갑옷을 입은 승마궁수 둘, 도끼나 검으로 무장한 경기병 하나, 비전투원인 종자 두 명으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중대는 100개의 랑스로 구성되었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임명한 대장에 의해 지휘되었다. 총 2000개의 랑스와 20개의 중대를 유지하고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들 칙령군은 정부나 지역 주민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평시에는 왕국 전역에 흩어져 배치되고 필요할 때만 모여야 했다.


4월 22일, 햄프셔의 티치필드 수도원에서 헨리 6세와 마거릿 왕비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7월, 샤를 7세가 앙주 파벌을 일시에 숙청했다.


같은 시기,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가 동생 질 드 브르타뉴와 말다툼을 벌인 끝에, 앞으로 자신의 허락 없이 잉글랜드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1월, 헨리 6세가 브르타뉴 공작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항의하고 궁수 20명을 질 드 브르타뉴의 호위로 파견했다.




11. 노르망디 총독 교체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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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3월, 브르타뉴 공작이 시농에서 샤를 7세에게 신서를 했다. 이에 질 드 브르타뉴는 형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잉글랜드군 5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돌아오겠다는 협박을 내뱉는다.


6월, 샤를 7세의 명령으로 질 드 브르타뉴가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8월 경,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졌다. 이에 프랑스와의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글로스터 공작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1441년 흑마술 스캔들 이후로 더 이상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왕족이자 1436년 칼레 포위전의 영웅 중 하나로서 대중적인 명성이 있었다. 결국 보퍼트 정부는 글로스터 공작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치체스터의 주교이자 유명한 법률가인 아담 몰린스는 루앙 정부의 회계를 검토한 뒤, 요크 공작의 무능함과 잘못된 통치를 노르망디의 쇠퇴와 잉글랜드군의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복무한 군인들을 데려와 요크 공작이 예산을 횡령했다는 증언을 하게 했다.


이에 요크 공작은 루앙 정부의 의원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데려와 혐의를 반박하며, 몰린스가 증인들을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서퍽 백작이 헨리 6세를 설득해 요크 공작을 노르망디 총독직에서 해임하고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12. 메인 양도 실패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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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년 2월 18일, 글로스터 공작과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2월 23일, 노스게이트 외곽의 세인트세이비어 구호소에 구금돼 있었던 글로스터 공작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글로스터 공작은 이미 56세 노인이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체포의 충격이 심장마비를 유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달변가이자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인물인 글로스터 공작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급사한 것은 보퍼트 정부에 너무나 유리한 사건이었다. 대중의 눈에는 글로스터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다. 정부는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했지만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4월 11일, 보퍼트 추기경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정치적 후계자인 서퍽 백작이 정부를 장악했다.


9월 23일, 메인 총독의 대리인인 오스번 먼드포드는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명령서가 제대로 된 형식으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11월 1일, 르망 시의 대성당에서 공개 회의가 열렸다. 잉글랜드인 지주들은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토지와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측은 협정문에 그런 내용이 없었다고 항의했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협상이 결렬되었다. 보고를 받은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인들의 가식과 기만에 대해 불평하며, 메인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한 군대를 소집했다.




13. 메인 양도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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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 2월 13일, 장 드 뒤누아가 이끄는 프랑스군 7000여 명이 르망을 포위했다.


회담에서 잉글랜드인들은 그들이 헨리 6세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서신을 낭독했다. 그 내용은 아담 몰린스가 오고 있다는 것과 몰린스가 샤를 7세와 이 문제를 논의할 때까지 항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헨리 6세가 메인 지방의 주권을 아직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왕은 단지 평화를 위해 주권을 포기하기로 동의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메인의 양도는 반드시 종전 협정이 맺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해야했다.


3월 15일, 결국 잉글랜드인 지주들이 10년치 지대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로 그날 저녁 잉글랜드 주둔군이 르망 시의 성문을 열었다.


4월 28일, 샤를 7세는 보병 상비군인 자유 궁수대를 창설한다는 칙령을 몽틸에서 발표했다.


이 칙령에서 샤를 7세는 종전 협정 없이 잉글랜드와의 휴전이 만료될 경우 노르망디 침공을 준비하기 위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의 모든 지역 공동체는 국왕군에 소집될 궁수들을 지명하고 장비를 지급해야 했다. 궁수들은 활 또는 쇠뇌, 장검과 단검, 강철 투구와 철판으로 보강된 두꺼운 면 갑옷을 갖춰야 하며 휴일마다 군사 기술을 연습해야 했다. 그 대가로 궁수들은 평시에는 세금을 면제받고 소집 시에는 봉급을 받을 것이었다.


6월, 서퍽 백작이 프랑스와의 약속을 이행하고 휴전을 성사시킨 공로로 서퍽 공작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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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년전쟁이 시작된 과정 (1259-1340)

2. 사우샘프턴 습격 (1338)

3. 라 카벨 대치 (1339)

4. 투르네 포위전 (1340)

5.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0-1348)

6.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60)

7. 장기 휴전 (1389-1415)

8. 헨리 5세의 정복과 죽음 (1415-1422)

10.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

11.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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