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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오스트리아도 조선에 포함외교를 시도했음.story앱에서 작성

AYAS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7.04 21: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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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7월 상해로 향하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소속 증기 코르벳함 SMS Zrínyi 호는 7월 28일 갑작스럽게 조선 연안에 나타났고 이어서 제물포에 정박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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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 Zríni 호




SMS Zrínyi 호는 1870년 오스트리아 트리에스트에서 건조된 군함으로, 최신형 주력함은 아니였지만 길이60m 폭11m에 여러문의 후장포로 무장한 만재배수량 1450톤에 해당하는 대형 증기 코르벳선이였는데




당시 오스트리아는 조선 인근에서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선박중 가장 큰 군함을 골라 조선에 파견했으며 이는 조약체결에 앞서 조선에 위압감을 주는 동시에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였다고 생각된다




조선도 이전부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라는 열강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있었고 얼마전 1월에는 주일 오스트리아 공사관이 주일 조선공사 김가진에게 가볍게 접촉한적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에 대한 정보가 막연히 부족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대형 이양선의 내항은 조선 정부를 당황스럽게 했다




SMS Zrínyi 호는 1890년 8월 초 제물포에 정박하였고 함장인 키텔 백작과 몇몇 장교들은 그대로 한양으로 올라가 오스트리아와 조선간의 통상조약체결 의사를 타진하였다




SMS Zrínyi 호의 내항은 조선 정부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크게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외무아문에서는 키텔 함장에게 조선측이 당장이라도 오스트리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회담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사를 피력하였지만




키텔 함장은 자신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대표로써 협상을 진행하거나 조약을 체결할 권리가 없으며 그저 예방차 조선을 방문한 것이라 설명하였고 조만간 오스트리아 전권공사가 다시한번 조선을 방문하여 조약 체결을 준비할 것이라 예고하며 몇일간의 정박 후 그대로 조선을 떠났다




이때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한양으로 상경한 키텔 함장과 장교들을 정식으로 외무아문에 소개한 인물이 주조선 독일 공사관의 크린 영사였고, 키텔 함장과 장교들이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지냈던 곳도 한양의 독일 공사관이였기에 조선측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없어 무척이나 당황했다




따라서 통리아문의 수장인 민종묵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프랑스 공사관의 플랑시 공사에게 찾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 즉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속하거나 조공을 바치는 나라중 하나인지 아니면 독립적인 국가인지 또 오스트리아가 황제에 의해 통치되는지 아니면 왕에 의해 통치되는지 등에 관한 정보등을 질문하였고




이에 플랑시 공사는 오스트리아는 황제가 통치하는 군주국이고 독일과는 동맹관계를 맺고있기에 양측이 해외에서 제 3국과 접촉할때 둘중 한쪽이 먼저 해당국가에 영사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후 다른 한쪽이 접촉할때 이를 돕는다는 조약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라 설명했으며 절대로 두 국가 사이에 어떠한 주종, 우열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조선측을 안심시켰다




하여튼 조선은 당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 열강간의 견제를 통한 중립을 도모하기 위해 열심히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맺던중 이였는지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의 조약체결에도 긍정적인 입장이였으며 고종 또한 이에 관심을 가지고 주일 공사 김가진을 접견할때 오스트리아에 관하여 질문하기도 했다




SMS Zrínyi 호가 다시 상해로 떠난 후 1890년 8월 조선에는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가 외교, 법률 고문으로 초빙되었고, 이때 일본은 오스트리아와 조선간의 빠른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둘 사이를 중계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이 조선에 서구열강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책략중 하나였다




1869년 오스트리아-일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오스트리아와 일본 양국은 별다른 충돌없이 어느정도 우호관계에 있었고 서로가 각각 아시아와 유럽에서 러시아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국가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일본측에서는 자연히 평소 오스트리아와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1869년에 맺은 불평등 조약을 청산하려고 했으며(결과적으로 1897년 청산됨) 오스트리아도 동아시아 문제에서는 내심 일본을 지지하며 러시아를 견제하는 그런 분위기가 흘렀으므로 일본의 중계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위에서 말했듯이 오스트리아가 조선에 접근한것도 러시아를 경계해서였는데, 특히 1880년대 후반 불가리아에서의 이권다툼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고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전세계 영향력을 줄이고자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아시아에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1893년 이후로 오스트리아는 1896년을 제외하고 매년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이어 전 세계에서 4번째로 수에즈 운하를 많이 사용하는 국가였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아시아를 비롯한 타 대륙에 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주일 오스트리아 공사관에서는 조오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885년 부터 본국의 빈 외교부에 주기적으로 조선의 동향, 관련 소식들을 총합 수천 페이지의 편지와 전보, 보고서를 통하여 보냈으며 심지어 이는 1914년 1차대전으로 인해 보고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주일 오스트리아 공사 비겔레벤 남작은 당대 조선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 및 국권상의 지위등을 보건대 조선을 동아시아의 불가리아로 칭하여도 어색함이 없다고 했으며,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놓고 대립하던 시기에 나온 발언인지라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는걸 극도로 경계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물론 조약 체결에 대해 정치적 고려 이외에도 자국 국민, 상인들의 조선 활동에 있어서 발생하던 여러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항구도시 트리에스트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의 개항장을 통한 무역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이에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 상인들도 동아시아에 진출했는데, 이들은 조선에까지 진출하여 상업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조선간에는 통상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오스트리아 상인들은 조선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독일 공사관을 통해 업무를 처리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인지한 오스트리아는 자국 상인들의 안정적인 상업활동을 보장하고자 통상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느꼈다




어쨋든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892년 도쿄에서 주일 오스트리아 공사 비겔레벤 남작과 주일 조선 공사 권재형(을사오적 권중현의 개명전 이름)이 만났고 조약 체결과정에서 작은 잡음이 일긴 했지만 어찌저찌 마무리되어 1892년 5월 29일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공식적으로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오수호통상조약은 이전에 조선이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과 체결한 다른 불평등조약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였고 전문은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있으니 관심있다면 한번 읽어보셈




조오수호통상조약 체결이 끝난 후 비겔레벤 공사는 본국 의회에 이를 보고하였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1893년 5월 의회에서 공식적인 승인이 떨어지자 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한 전권사신을 조선에 보내기로 한다




이때 오스트리아는 전권사신과 더불어 다시한번 전투함을 파견하는데, 이는 전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국력을 과시하고 위압감을 심어줘 포함외교를 달성하는 동시에 동아시아를 넘보던 러시아에게 경계를 남기기 위한 목적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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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er Franz Joseph I 급 방호순양함 SMS Kaiserin Elisabeth 호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 톈진에 주둔중인 SMS Kaiserin Elisabeth 호의 육전대원들




어쨋든 이번에는 이전처럼 구형 프리킷이 아닌 1890년 크로아티아 폴라에서 건조된 최신 전투함 Kaiser Franz Joseph I 급 방호순양함 SMS Kaiserin Elisabeth 호를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SMS Kaiserin Elisabeth 호는 1893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극동 파견 전투함중 가장 큰 선박이였고 길이104m 폭15m에 만재배수량 4566톤에 달하는 거대한 근대적 순양함이였으며 이는 일본이 청나라의 진원과 정원에 대항하기 위해 건조한 당시 일본 최대 전투함이자 기함인 마츠시마 방호순양함과 동급의 크기,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전권사신은 함장이던 베커제독이 맡게되었으며 SMS Kaiserin Elisabeth 호는 1893년 양력 10월 3일에 제물포에 정박하였고 4일에는 베커가 장교 4명과 함께 한양으로 상경하여 3일간 조약 비준 업무를 수행하게된다




이후 10월 5일 양측은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으며 이때 베커 일행은 상호간 친선의 증표로 소총 20정과 탄약 3상자를 선물로 건냈고 조선측에서도 조약의 비준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베커와 일행들을 연회에 초청하였다




또한 고종이 직접 경복궁의 집옥재에서 이들을 만나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이날 완전히 조오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되었고 이때 조선에서 칭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공식 칭호는 대오스트리아 대황제 겸 보헤미아 대군주 헝가리 대전교 군주였다




조약 비준 후 조선측에선 민영환, 이범진 등이 유럽에 파견되어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 등의 전권공사 역할을 겸임했지만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1890년대 후반 러시아와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고 점차 일본이 조선에서 우세를 잡기 시작하자 주목할만한 이해관계가 없던 조선에 대해 더이상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 공사관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주조선 독일 공사관을 경유하거나 일본에 있는 주일 오스트리아 공사관을 통해 관련 업무를 처리하다가 결국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며 짧은시간 이어진 교류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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