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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체코 시민 사회의 발전 (1860~1914년)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9 23: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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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체코-슬로바키아사; 권재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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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체코 내에서는 체코의 국가 권리를 주장하는 반정부 시위가 잇달았다. 1867년 8월 체코 왕의 대관식 때 사용하는 국가 보물을 빈으로부터 프라하로 옮겨오는 기념 퍼레이드에서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고, 1868년 5월 나로드니 디바들로(Národní divadlo), 즉 국립 극장 건립의 정초식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같은 달 체코 민족의 전설적 시조인 체흐(Čech)의 성지가 있는 르지프 산에서는 수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고, 또한 후스 전쟁의 불세출의 영웅인 지슈카 장군의 승전지인 지슈코프의 비트코프 산에서도, 체코 인들의 수호성인인 바츨라프 왕의 기사들이 나라가 위난에 처할 때 이를 구원하기 위해 숨어서 대기하고 있다는 유서 깊은 전설이 어려 있는 블라니크 산에서도 수만 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체코 민족의 영광스런 역사를 기리고 체코 왕국의 권리 회복을 외쳤다.
이러한 군중들의 시위에 고무된 체코 의회 대표들은 1868년 8월 82명 전원의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위상 변화는 당연히 합스부르크 군주와 체코 민족 간의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제국 의회가 체코 땅의 이름으로 채택한 법률들은 모두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82명 전원이 의회에의 불참을 서명하였다. 모라비아 지역의 대표들도 성명서를 채택하여 일부 지지를 표명하였고, 보헤미아 지역에서의 군중들의 시위가 모라비아 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이에 1868년 10월 빈 정부는 프라하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비상사태 선포로 대응하였지만, 체코 인들의 저항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체코 땅이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이 프로이센의 침입 경로라는 전략적 측면에서도 체코 인들의 저항은 오스트리아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었고, 프로이센과의 또 다른 충돌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체코 문제의 타결을 결심하게 되었고, 체코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통해 체코 민족의 권리를 수용할 것을 표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체코 민족 대표들과 협상에 들어간 호헨바르트(Hohenwarth, K.) 정권은 1871년 이른바 기본 조항(fundamentální články)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소위 말하는 체코 문제 타결에 들어갔는데, 이 기본 조항의 기본 정신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원 체제를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의 삼원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 정신의 조항의 정신에 따라 체코는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인정하고, 외교, 재정, 군사에서의 공동 내각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여타의 문제에 있어서는 체코 지역은 체코 정부가 관장하고, 체코 의회의 권한도 확대하며, 체코 내의 체코 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문제는 거주지에 따라 지역 행정 구역을 획정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러한 기본 조항의 정신은 체코 본토격인 보헤미아 지역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상대적으로 독일인들의 영향력이 강한 모라비아 지역은 근본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였고, 독일인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슐레지엔 지역은 체코 문제의 타결에 처음부터 참여를 거부하였다.
어떻든 이러한 기본 조항은 체코 민족의 자결과 자율을 위해서는 분명히 진일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체코 내 독일인들에게 하등의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족적인 반대에 나섰고, 베를린 정부까지도 이에 가세하였다. 그리고 이 기본 조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관계에 전혀 영항을 미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상 유지를 구실로 헝가리 또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결국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호헨바르트를 해임하였고, 기본 조항도 자연히 무산되고 말았다. 더욱이 1872년의 체코 의회 선거에서도 표의 바중이 월등하게 높은 대귀족들에 대한 독일계 후보들의 매수 작전으로 체코계 후보들이 패배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873년 체코 정치 지도자들은 빈의 제국 의회 뿐만 아니라, 프라하의 체코 의회에의 참여도 거부하였다. 이것이 체코 수동 정치 혹은 소극 정치(pasivní politika)의 시작이었는데, 수동식 저항이라고도 불리는 이 소극 정치를 주도한 사람은 팔라츠키와 리게르였다. 두 사람은 체코 문제는 더 넓은 국제 정치의 구도 속에서, 유럽 열강들의 패권 경쟁의 각축 속에서 그 해결점을 찾아야 하며, 체코로서는 그러한 기회가 올 때까지 모든 권리에 대한 주장을 계속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대응의 성과에 대해 곧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존한다는 입장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특히 지방 의회에의 참여 거부로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에 있어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여러 경제적 손실과 특히 교육 문제에 있어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여러 경제적 손실과 특히 교육 문제에 있어서의 어려움의 가중으로 수동적 저항은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873년 모라비아 지역 대표들이 지방 의회에의 참여를 결정하고, 다음 해에는 빈의 제국 의회에도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이들은 보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정치로써 국민들의 여론에 부응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보헤미아 지역에서도 믈라도체시, 즉 신체코 진영이 모라비아 지역 대표들의 예를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나섰고, 1874년 성탄절을 기해 독립 정당을 창당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신체코당은 구체코당과 마찬가지로 그 지지 세력의 기반이 도시 부르주아지이고, 그 정치적 이념이 자유주의인 것은 같지만, 보다 진보적인 색깔을 띠는 점은 달랐다. 그리고 구체코당이 도시 상류층의 지지와 더불어, 특히 신체코당의 출현 이후 교회의 지지가 컸던 반면에, 신체코당은 상공인들의 지지와 더불어, 교사와 학생들을 포함한 주로 반교회적인 인텔리겐치아들의 지지가 컸던 점이 달랐다.
신체코당은 당의 조직과 프로그램이 확고하였다. 체코 의회에의 참여 이외에도 시민권의 확대, 모든 사람들의 투표 참여권 확보, 교육의 발전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신체코당의 이러한 정책을 널리 홍보함에 있어서는 신체코당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그레그르(Grégr, J, 1832-1896)가 창간한 ‘민족 신문(Národní listy)'의 힘이 컸다. 이 신문의 편집에는 당대 최고의 작가들인 네루다와 아르베스(Arbes, J)도 참여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신체코당이 아직 소수당에 불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점차 구체코당에서도 이들의 견해와 현실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대표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8년 두 당의 대표들이 신체코당의 현실 정치론에 입각하여 체코 의회에 등원하게 되었고, 이로써 향후의 체코 정치는 소극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적극 정치 혹은 능동 정치로 돌아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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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국립 극장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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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의 체코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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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1월 22일자 민족 신문; 황제이자 국왕인 프란츠 요제프가 서거했다

체코 정치 지도자들이 종래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정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참여의 능동 정치(Aktivní politika)로 돌아섰을 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내외 정치는 많은 변화에 직면해 있었다. 아우에르스페르크(Auersperg, A.) 정권 아래에서의 오스트리아는 어려운 국면을 극복하고 정치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국내 정치에서의 안정은 보다 적극적인 대외 정책으로의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이즈음 이미 이탈리아가 독립하고, 통일된 독일이 탄생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진로는 자연히 발칸 반도로 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1878년의 베를린 회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무력에 의한 점령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남슬라브 인들의 거주지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은 상당수 독일인 자유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슬라브 인들의 거주지인 이 지역을 편입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슬라브 인들이 수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는 제국의 민족 구성을 더욱 슬라브 쪽으로 기울게 하여 독일인들의 지배와 이익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에르스페르크가 물러나고, 타페(Taaffe, E., 1835-1895)가 정부를 구성해야 할 입장에서 그는 체코 대표들의 지지를 필요로 하였다. 그는 먼저 체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 다음, 이미 연합 전선을 구축한 상태인 구체코당과 신체코당을 끌어들이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또한 폴란드의 대귀족들과 오스트리아의 가톨릭당의 우익 세력의 지지를 더하여, 1879년 타페는 마침내 자신의 각료 회의 의장에 대한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초당적인 정부를 표방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사안에 따라 난립하는 정당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타페는 분명히 의심의 여지없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사회 안정을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도 주저하지 않았다.
타페 정부의 중소 상공인들에 대한 관심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점차 심화되어 가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양극화 현상을 막아 줄 중산층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근로법을 제정하여 1884~1885년부터 근로 시간을 공장에서는 11시간, 광산에서는 10시간, 미성년자는 8시간으로 제한하고, 부녀자의 야간 노동은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년 뒤에는 상해 보험과 질병 보험도 도입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동 정책은 물론 1880년대 전반의 노동 운동에 대한 심한 탄압의 보완적, 혹은 대체적 성격도 없지 않았다.
체코 땅의 대표들은 제국 의회에의 등원에 앞서 언제나 이른바 국가 권리 주장(státoprávní ohrazení)을 잊시 않았다. 이는 자신들의 제국 의회 참여가 자신들의 국가 권리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선언을 담고 있는, 하나의 형식적인 외교 각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적 형식주의는 체코 대표들의 타페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자신들의 견해에 어긋나고 유권자들의 이익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위한 지지를 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타페 정부가 무너지면 체코의 이익에 가장 위협적인 독일인 자유주의자들이 내각을 장악하게 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타페 정부는 체코 대표들에게 많은 양보를 제공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감질나지 않을 정도의 양보인 이른바 '부스러기 양보'만으로도 족하였던 것이다. 가령 별반 중요하지 각료 자리 하나를 체코 인에게 내 준다든지, 혹은 1880년의 이른바 스트레마이르 법령(Stremayrova jazyková nařízení)에 따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의 관공서와 법원에서 체코 어와 독일어에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 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등한 자격이라는 것도 관공서와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독일인이면 독일어를 사용하고 체코 인이면 체코 어를 사용한다는 것일 뿐이지, 관공서와 관공서 간의 행정 언어와 관공서 내의 행정 언어는 여전히 독일어로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어떻든 이러한 작은 양보들 중에서 그래도 중요한 것은 1882년에 도입된 프라하 대학의 분리였다. 17세기 초 빌라호라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완전히 독일화 되어버린 이 대학이 독일 대학과 체코 대학으로 나눠짐으로써 향후 체코 교육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런데 사실 능동 정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처럼 몇몇 양보를 얻어낸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코의 정치 지도자들이 체코 의회와 제국 의회의 정치 무대를 통해서 합리적인 사고와 전문성에 바탕을 둔 선진된 정치 문화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소극 정치 시대에는 도덕적인 고결성과 굽힐 줄 모르는 저항성과 선동성이 있으면 족하였지만, 이제는 깊이 있는 전문성과 인내와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였다. 또 한 가지 능동 정치가 이바지한 바는 민족과 국가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는 점이었다. 체코인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 기관에 근무하는 것이 더 이상 반민족적인 행위로 간주되지 않음으로써 체코 인들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 향상이 크게 신장되었고, 각 분야에서 체코인 전문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880년대 모라비아를 포함한 체코 땅에서는 독일인들과 체코 인들이 상호간의 민족적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1880년부터 체코 땅의 체코 인들과 독일인들은 각각 자신들의 민족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를 설립하여, 특히 양 민족의 민족 구성이 비슷한 혼합 지역에서의 활동을 강화하였다. 이는 분명히 긍정적인 효과도 없지 않았지만, 오히려 민족 갈등을 증폭시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컸다. 급진적이고 국수적인 민족주의를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반 대중으로부터의 현격한 지지 감소와 타페 정부의 독일계 자유주의자들에로의 경도에 위기의식을 느낀 리게르의 구체코당은 1889년 빈에서 독일계 정당들의 대표들과 이른바 '합의 사항'의 협의에 들어갔다. 이 협상안의 요체는 체코 땅을 체코어 지역과 독일어 지역으로 분리한다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체코 지역의 독일인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보장해 주되, 그 대신 체코 의회의 선거 제도에서 다소의 양보를 얻어 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체코 땅에서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체코 땅의 독일인들로서는 이 협상안이 자신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국경 지대에 자신들만의 특별 구역을 창설코자 하는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충족시켜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승리로 간주 절대적으로 환영하였지만, 체코인들은 신체코당과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1890년 체코 의회에 회부된 이 협상안은 대부분의 구체코당원들 또한 반대하였다. 결국 협상안은 무너지고 구체코당도 이와 운명을 같이 하였으며, 1891년의 선거는 신체코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이후의 체코 정치의 주도권도 신체코당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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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아우에르스페르크, 타페, 호헨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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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보헤미아 왕국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체코 지역은 여전히 근대 산업 문명의 주변 지역에 속해 있었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이미 근대 산업 문명의 중심부에 들어가 있었다. 1880년 경 체코 땅의 산업 생산은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 산업 생산의 거의 2/3에 이르렀고, 이를 국민 1인당 생산으로 환산해보면 당시의 프랑스 수준과 비슷하였다. 체코 지역의 이러한 산업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이 지역 국민들의 높은 교육 수준과 근면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 밀도였다. 19세기 중반 체코 땅의 인구는 900만에 육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도로와 철도의 건설로 인한 비교적 잘 정비된 교통망이 체코 지역 산업 발전의 근간이 되었고, 국경 지방의 공업 지역과 내륙 지방의 농업 지역을 포괄하는 국토 개발의 다양성도 내수 시장의 활성화에 이바지 하였으며, 당시 가장 발전된 형태의 기계였던 증기 기계의 에너지원인 석탄의 풍부한 매장도 공업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그리고 체코의 공업은 초기에는 전통적인 텍스타일 공업과 유리 공업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차츰 기계, 화학, 식료품 공업으로 전환하였고, 농업의 경쟁력도 우수하여 전통적인 농업 국가인 헝가리 등과도 어깨를 겨를 정도였다. 특히 사탕무와 호프는 유럽 전역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증기 기계의 발명으로 제1차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전기 모터와 연소 모터의 발명이 제2차 산업 혁명을 가져왔다. 체코의 초기 전기 공업은 아크 램프와 전기 모터 차량의 유명한 디자이너인 크르지지크의 활동에 힘입은 바 큰데, 그는 1900년에 이미 최초의 대형 발전소를 건설하였고, 이에 앞서 1891년에는 프라하 시에 최초의 전차를 운행시켰다. 발명왕 에디슨(Edison, T. A.)의 동업자이자 그 자신이 발명가이기도 한 콜벤(Kolben, Emil, 1862~1943)의 기계 공장은 전기 모터의 생산에 착수하였고, 믈라다볼레슬라프에 위치한 라우린-클레멘트(Laurin a Klement) 회사는 1899년 중부 유럽 최초의 모터 사이클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1906년부터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는데, 후에 이 자동차 공장은 유명한 슈코다(Škoda) 자동차 공장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체코 최초의 자동차는 1897년 코프르지브니체의 자동차 공장이 만든 프레시덴트(President)라는 상표의 자동차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공장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회사는 1906년부터 시리얼 프로덕션에 들어갔고, 독창적인 상표인 타트라(Tatra) 자동차의 생산에 착수하였다. 체코-모라비아-콜벤다네크(Českomoravská-Kolben-Daněk, ČKD) 회사는 1907년부터 또 다른 체코 자동차인 프라가 카(Praga car)의 생산에 들어갔고, 1889년에 설립된 체코모라비아 기관차 공장(Českomoravská strojima)은 기차의 차량과 엔진을 수출하였다.
1869년 오스트리아인 슈코다(Škoda, Emil, 1839-1900)가 체코의 플젠에서 시작한 슈코다 공장은 1890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가장 큰 기계 공장과 무기 공장으로 성장하였고, 종업원 수만 해도 3천명을 넘었다. 물론 기계 공업의 이러한 급속한 발전에는 야금 공업의 뒷받침이 있었고, 체코 자본으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손꼽힐만한 은행으로 성장한 체코 산업 은행(Živnostenská banka)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의 체코 공업, 특히 기계 공업의 발전은 경이적인 것으로서 유럽의 선진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체코 땅의 공업 생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체 공업 생산의 60%를 상회하였으며, 1910년 체코 땅의 전체 인구 1천만 중 36%의 농업 종사 인구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공업, 수송, 무역 등에 종사할 정도로 체코 땅의 공업화는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정치에서의 자유주의의 영향과 경제에서의 시장 경제 원리에 입각한 자유 경쟁 체제의 도입으로 인한 근대 산업 사회의 발전으로 체코 땅의 사회 구성도 매우 다양한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귀족들은 행정, 국방, 외교 분야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차츰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반면에 도시 부르주아들은 특히 기업 활동에 있어서의 성공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교수, 의사, 변호사 등 상류 인텔리겐치아들의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확대일로에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주국이 붕괴될 때까지 그 체제를 떠받쳐주게 되는 관료들의 사회적 위치는 여전히 막강하였다. 군대와 가톨릭교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새로운 경제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일부 프티부르주아들의 신장은 괄목할 만하였지만, 중소 상공인들은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많은 숫자가 낙오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농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일부 성공한 농민과는 달리 많은 소농과 소작농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인구의 가장 많은 부분을 점하고 있으면서 가장 낮은 사회 계층을 이루는 구성원이 노동자들이었다. 대규모 공장, 광산, 중소기업과 농장의 노동자로 구성된 이들의 생활 조건은 산업화의 초기에 특히 열악하였다. 1859년의 근로법은 고용주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어, 피고용인들이 심지어 1일 16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1880년대 초 근로법의 개정으로 의무 노동 시간이 상당히 완화되긴 하였지만, 일부 숙련공을 제외한 대다수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특히 텍스타일 공업과 같은 일부 업종에서는 가장인 남자 한사람의 임금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부인과 어린이의 노동이 불가피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대개 40대에 이미 직장에서 은퇴해야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노동 강도, 급식 상태, 주거 환경 등이 열악하였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힘든 노동을 기계들이 대신해줌으로써 노동 시간이 현저히 감축되는 등, 점차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여건이 항상되어 갔다. 그리고 특히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노동 운동도 노동 환경의 개선과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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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벤 기계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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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코다 사가 개발 제작한 군용 구급차; 1906년형 C1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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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산업 은행

1891년의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신체코당은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노선만으로는 다양한 사회 계층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보다 온건하고 현실적인 노선으로의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현실주의자(realista)를 자처하면서 현실적인 정치를 표방하고 나신 마사리크, 카이즐, 크라마르시 등을 당 지도부로 영입하게 된 배후 동기였다. 그런데 이들 중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는 마사리크와는 달리, 카이즐과 크라마르시는 현실 정치와 능동 정치를 내세워 종래의 체코 국가에 대한 권리 주장을 먼 훗날의 과제로 미루면서, 무엇보다도 체코 민족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동한 제국 내에서의 확고한 지위 확보에 당의 최우선 목표를 두었다.
교육의 보급과 산업의 발달로 도시에서는 중소 상공업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프티부르주아 계급이, 농촌에서는 중소 지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 계층 간 농민들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기존의 구체코당이나 신체코당의 양당구도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높여갔다. 대자본가와도 다르고 노동자들과도 다른 이들 중산층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동시에 우려를 표시하였고, 자신들이 소속된 중소기업의 보호를 요구하면서 타페 정부의 선거 제도 개혁과 중산층 육성 정책에 힘입어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1897년의 선거에서 체코 사회 민주당은 체코 본토격인 보헤미아 지역 전체 유권자의 1/3의 지지를 확보하여 신체코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당으로 급부상하였지만, 불평등한 선거 제도 떄문에 단지 5명의 대표를 의회로 진출시키는데 그쳤다. 그러나 체코 사회 민주당과는 달리 신체코당은 제국 의회에서 60명의 대표를 규합하는 가장 큰 교섭 단체로 부상하였다. 이에 바데니(Badeni, K.) 정부는 신체코당을 친정부 그룹으로 끌어들이면서 체코 땅에서의 체코어의 열세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 정책을 발표하였지만, 독일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그의 언어 정책도 그의 내각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1897년 12월 2일 비상계엄이 선포될 정도로 프라하 시는 격렬한 시위장으로 변하였고, 체코 땅에서의 두 민족 간의 갈등은 더욱 더 심화되었다. 빈의 식당에서는 독일인 종업원들이 체코인 손님들의 접대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양 민족 간의 대립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민족 사회주의당(Česká strana národně sociální)은 국제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에 종속시킬 만큼 체코 민족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 당은 사회 민주당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국가와 군대 내에도 적지 않은 적대 세력을 갖게 되었다.
18세기에 독자적인 행정 구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가 1849년에 이를 다시 회복한 모라비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뒤늦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인해, 그리고 보수 계열 정당들과 가톨릭 세력의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보혜미아 지역과는 달리, 체코 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민족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1905년 이른바 모라비아 협약(Moravské vyrovnání)을 봉해 두 민족이 타협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협약은 근본적으로 독일 민족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는 불평등성 때문에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사회 민주당 계열의 정당들을 중심으로 한 평등 선거와 보통 선거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고, 체코 철도 노동자들의 소극적인 저항인 태업이 뒤따랐으며, 1905년 11월에는 전면 파업이 선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선거 제도의 개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07년 보통 선거권과 평등 선거권이 보장된 새 선거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이 선거에서 사회 민주당이 100만 이상의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헝가리 지역을 제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최대의 정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체코 땅에서도 체코 사회 민주당이 40만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고, 신체코당은 농민당에게도 뒤지는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결국 제3당의 지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보통 선거와 평등 선거의 도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국의 국가적 안정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에게 있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의 경제적 번영을 보장해줄 광대한 시장으로서, 그리고 동쪽과 서쪽의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들 열강들의 패권주의를 막아주고 안정을 확보해 줄 훌륭한 방패막이로서 그 존재 가치가 충분하였다. 따라서 제국 내 보수 계열의 정당들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사회 민주당과 같은 혁신 계열 정당들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 간의 갈등도 아직 제국을 와해시킬 만큼 그토록 격렬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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