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V: DOHWA ***

살벌하고 살벌한 데스매치 대진표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1조: 짜루 VS 로즈

2조: 체리 VS 도파민

3조: 뚱냥이 VS 정호랑

4조: 집순희 VS 유주얼

5조: 니모 VS 라스칼

6조: 세라 VS 화의자

7조: 시계는와치 VS 니케나

8조: 하이루 VS 루비

9조: 치어 VS 김세레나

10조: 캐서린 VS 키키

11조: 크앙 VS 예니콜

12조: 리엔 VS 도화

13조: 차차다섯공주 VS 바림

14조: 무너 VS 서리태

15조: 차도도 VS 순대내장

“… 그래서 이제 뭐함?”

“푸흡…!”

그 와중에 긴장감이라곤 1도 없는 무너의 물음에 다들 빵 터져서 돌아오는 붐 씨의 대답을 못 들을 뻔했다:

[예선 경기는 지금으로부터 48시간 뒤에 진행되니 그 전에 추후 공지될 집결 장소로 모여주시면 되고, 그 이전까지의 시간은 자유롭게 활용하십시오. 해당 기간 동안 유령의 상담 또한 진행될 예정이니 희망하시는 참가자 분은 상담소로 이동해주시면 됩니다.]

“……”

그 때까지 계속 우리 틈바구니에 껴있던 령이, 지금까지 없던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뒤 바로 뒤쪽으로 포탈을 열고는 그 틈새로 넘어지듯 미끄러져 사라진다. 그러니까 저기로 들어가면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

“상담… 한번 받아볼까?”

“에이, AI가 해주는 상담이 얼마나 의미있다고.”

“어차피 상담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 들으러 가는 거 아님?”

“그래도 지금은 그런 거라도 하고 싶어…”

“치, 상담받고 싶으면 나한테 오면 되는데…”

그 와중에 궁시렁거리는 라스칼 덕분에 좀 웃긴 했다. 그래도 토깽아, 같은 참가자 입장에서 너한테 상담받는 건 좀 그렇지!

… 솔직히 아까까지는 딱히 상담이 필요하다고 느끼진 않았는데, 막상 령이가 들어간 포탈을 보고 있자니 조금 땡기긴 한다. 나, 생각보다 리엔과 싸우게 된 게 좀 충격인 걸까…?

다른 소녀들도 저마다의 생각이 있는지 몇몇은 나처럼 포탈 쪽을 힐끗거리고 있고, 몇몇은 (리엔이나 서리태처럼) 이미 흥미를 잃고 제 할 일을 찾아 흩어지고 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얘기 좀 해야겠다 싶어서 리엔의 뒤를 따라가려던 때 – 문득 누군가가 망설임 끝에 눈을 질끈 감고 포털 안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쟤는…?”

*** 상담 #1. 키키 ***

유령의 상담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실 상담’실’이라곤 해도 방은 아니고… 실제로는 방금 전 무너졌던 공원 안에 있는 정자를 빌린 세팅입니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선 익숙한 배경이 좋다고 생각해서요.

그나저나 준비를 갖추자마자 찾아오는 소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30명의 소녀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제가 아직 얼마나 부족한지만 새삼 깨달았거든요.

어쨌든 기념비적인 첫 손님입니다. 진심으로 반겨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어서오세요, 키키 님. 고민이 있으신가요?”

“아하하, 막상 오니까 쵸큼 민망하네…”

부끄러운 듯 볼을 긁으며 제가 앉아있는 정자 옆자리에 풀썩 걸터앉는 키키 님. 항상 밝고 에너지 넘치는 키키 님입니다만, 지금은 조금 기운이 없어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스테이터스 점검… 도파민 수치가 아까에 비해 다소 낮아져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할 줄 아라?”

“미션 수행을 위해 장비된 툴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 그래…”

처음엔 좀 긴장한 듯한 눈치였지만, 금새 키키 님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감지됩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걸까요?

“그, 대다난 건 아니고오… 그냥 어디에든 얘기가 하고 시퍼서 왔는데…”

“괜찮습니다. 경청하는 것 또한 상담의 일부니까요.”

제 말에 조금 마음이 놓인 듯한 키키 님이 잠깐 머뭇거린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냅니다:

“생가글 좀 해바써… 여기서 나가면… 내가 정말 ‘나’로 돌아가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

현재, VR 포드에 들어간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아바타와 연결이 끊어진 채 반영구적으로 동면 중입니다. <소녀 리버스>가 종료되어서 5명의 우승자가 선정되면… 아마 그들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깨어있는 인간이 되겠죠.

사실상 인류의 구원자나 마찬가지가 될 자리… 그런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키키 님의 소망은 과연…?

“난… 그저 세상 모든 사라미 행보캤으면 좋겠어.”

“…!”

분명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말했죠. 실로 한결 같은,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더더욱 올곧은 말.

“분명, 날 만든 ‘나’도 그러케 생각하고 이쓸 거야. 봐, 요기 내 옷에 저킨 거!”

키키 님이 자랑스레 가리킨 자신의 상의 – 거기엔 정말 알아보기 쉽게 ‘SMILE’ 이라고 써있었습니다.

“내가 날 이러케 만든 덴 분명 이유가 이써. 분명… 가튼 걸 원하고 이쓸 거야. 그러니까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결의를 다지듯 입술을 꽉 무는 키키 님에게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 키키 님은 강한 분이군요.”

“에, 그런가?”

조금 쑥스럽게 웃던 키키 님이 다시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러려면 이번에 이겨야 돼. 내가, 개서린한테…”

“……”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습니다만, 캐서린 님은 키키 님에 비해 레벨도 월등하고 전투 센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AI로서 논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키키 님의 승률은…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 얘기하는 건 제 역할이 아닙니다. 게다가… 왠지 키키 님과 얘기를 나누고 나니,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진 분이 지는 거야말로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기념비적인 첫 상담은 끝이 났습니다.

*** 상담 #2. 차도도 ***

두 번째로 찾아온 게 차도도 님일 거라고도 예상 못 했습니다. 대화를 많이 해보진 못했지만, 잠깐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 자아를 지녔는지 알 만했거든요.

“아, 오해하지 마. 난 상담받으러 온 게 아냐. 그냥…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긍정. 어떤 이유로든 방문은 환영입니다.”

“아하하, 아깐 잘 몰랐는데 말 되게 잘 하네!”

시원하게 껄걸 웃던 차도도 님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오케이, 그럼 시작할까… 먼저 내 ‘본체’에 대한 질문인데.”

완벽한 취조자의 자세로 다리까지 꼬고 앉은 차도도 님을 황급히 만류했다:

“에러. 소녀 X에 대한 정보에 대해선 발설할 수 없도록 금제가 걸려 있습니다.”

“하아… 왜 굳이? 우리가 왜 그걸 알면 안되는데?”

“……”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저도 모르니까요.”

“뭐 좋아, 넘어가고… 너도 이게 뭘 위한 이벤트인지는 알지?”

“긍정. 현재 <REBIRTH>의 서버 상황상 접속을 복구시켜줄 수 있는 인원은 최대 5명. <소녀 리버스>는 이 5명을 선발하기 위한 이벤트입니다.”

제 대답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차도도 님이 재차 묻습니다:

“좋다 이거야. 근데 그 선발을 굳이 ‘싸워서’ 뽑을 이유가 있어? 데스매치니 뭐니 하는 복잡한 룰까지 만들면서?”

“… RPG 게임이니까 전투가 들어가는 방식으로 만드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요?”

“… 너 왜 의문문으로 대답해?”

“!?”

말해놓고 제가 당황해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는 AI, NPC입니다. NPC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게 도대체…

“… 제게는 인간과의 정서적 교감을 위해 감정 에뮬레이터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AI는 할 수 없는 사고가 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뭔가 영 확신이 없는 대답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도도 님이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제게 말합니다:

“서리태는 널 그냥 깡통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내가 볼 때 넌 좀 특별해. 감정 뭐시기? 그게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

“… 감사합니다?”

또 의문문으로 나온 제 대답에 호탕하게 웃던 차도도 님이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기지개를 켭니다.

“그치만 음, 그렇구나~ 너도 운영 측 사정에 딱히 빠삭한 건 아니구나.”

“긍정. 제게는 상담을 위한 여러분의 기본적인 정보만 탑재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네가 나쁘단 게 아냐! 그냥…”

손사래를 치던 차도도 님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 

“… 내가 알아서 해야지 뭐.”

“네…?”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몸을 일으켜 떠나려던 차도도 님이 절 돌아보며 말합니다:

“기억해줘, 령아. 이 이벤트… 아니, 지금 모든 상황이 뭔가 이상해. 어긋나 있어. 평범한 AI라면 눈치 못 채겠지만… 어쩌면 너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 수신 불량. 차도도 님의 말씀이 잘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치만 언젠간 알게 될 거라고 믿어.”

그리 말하며 포탈 밖으로 사라지는 차도도 님.

… 그 때 좀 그 말을 경청했어야 했습니다.

*** POV: RASCAL ***

“……”

소녀들이 하나둘씩 유령의 상담소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걸 지켜본다. 치, 그렇게 잘 하나? 나도 잘해줄 수 있는데…

키키와 차도도가 왔다 간 뒤 3번째 상담의 주인공은… 우리 귀염둥이 차차다섯공주네. 아까 들어갈 때만 해도 좀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왠지 나오고 나니까 좀 밝아진 거 같기도 하고…?

“공주야~ 상담 잘 했어?”

“앗, 라스칼~”

… 다른 소녀 같았으면 뜨끔해서라도 내 눈치를 봤을텐데, 이 천진난만 그 자체인 애기는 그런 거 전혀 없이 해맑게 내게 다가와서 앵긴다. 뭐, 그래서 얘가 좋은 거지만.

“얼굴 밝아진 거 봐. 걔가 상담 잘 해줬나봐?”

원래 상담 내용은 사적인 거라 이렇게 함부로 물어보면 실례지만… 역시나 우리 공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술술 말하고 있다:

“으응, 그렇달까… 솔직히 령이는 말 많이 안 했어! 그냥 나 혼자 떠드는 거 조용히 들어준 게 많지.”

오호… 그래도 상담의 기본은 돼있는 놈인가? 가끔은 경청이 제일 좋은 상담일 때도 있거든.

그런데 이어지는 공주의 말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사실… 내 ‘원본’에 대한 얘기를 했거든. 난 되게 둥글둥글하고 스윗한 사람이지만… 내 원본은 조금 다른 성격인 것 같거든.”

“어? 그걸 알 수 있어?”

원본과의 접속이 끊어진 우리들은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예 모른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이런 서바이벌을 통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어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런데 얘는 어떻게…

“그냥… 뭔가 느낌 같은 거? 내가 나를 만들 때 일부러 원래의 나와 다르게 만들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어.”

“신기하네… 그래서 그걸 쟤한테 얘기한 거야?”

내 물음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공주.

“솔직히 걱정됐어… AI가 이해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잖아?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태클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되게 진지하게 들어줘서…”

“……”

공주가 만족했다니 기쁘면서도 묘하게 샘이 났다. 깡통한테 상담 능력으로 밀리는 건 좀 킹받는데…

“…… 함 염탐 가봐…?”

11화부터 14화까지는 유령의 상담 타임으로 진행될 예정. 소녀들의 심리나 정신상태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알아보는 시간이랄까...

사실 차다공 타임도 좀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싶었고, 솔직히 30명 전원의 상담 분량을 넣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면 한달 내내 상담만 하게 될테니 적당히 축약함 ㅎㅎ... 뭐 이번에 넘어가도 상담은 계속될 예정이니까.

아, 차도도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게 뭔 의미인지는 상담 타임 끝날 때쯤에...

다음화는 과연 누가 찾아오게 될지...? 그리고 그 와중에 정찰각을 재는 라스칼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