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담 10. 화의자 ***

“……??”

W에 오고 나서 벌써 몇 번째 사고 회로가 쇼트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아…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기껏 여왕을 배알할 권리를 주었건만.”

정자 맞은편에 앉은 채 고압적인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화의자 님… 설마 다른 소녀 V도 아니고 여왕님이 찾아올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분명 상담 같은 건 필요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 얼굴에서 머릿속 의문을 읽어낸 것처럼 콧방귀와 함께 입을 여는 화의자 님:

“어리석은 것. 이건 상담이 아니다. 너는 그저… 잠시 동안 내 대나무숲이 되어주면 되는 거야.”

“……?”

대나무숲… 남들이 들어서는 안될, 하지만 마음 속에만 담아두기엔 답답한 비밀을 풀어내는 곳을 은유하는 거라고 학습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 

“나는 여왕이지만 신은 아니야. 내게도 평범한 사람과 같은 나약함이 있고, 미련도 후회도 있다. 다만… 앞으로 칼날을 맞대게 될 녀석들에게 굳이 들려주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래서 NPC인 제게…”

“… 그래. 너라면 지조 없이 여기서 한 말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 테니.”

“긍정. 상담 내역의 비밀 유지는 필수 준수 사항입니다.”

저 말에 고개를 짧게 끄덕인 화의자 님이 잠시 멈칫한 뒤 제게 묻습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지? 말해 봐라.”

“…검색 결과 분석: 소나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삼림 컨셉 서버, ‘루비아랜드’의 여왕 자리에 오르신 분입니다.”

“그래… 일반적으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

그렇게 말하는 화의자 님의 표정이 갑자기 씁쓸해지더니 – 

“… 하지만 그 정보에는 오류가 하나 있다. 나는 확실히 여왕이지만… 아직 옥좌에 앉아본 적이 없어.”

“………… 예?”

AI 입에서 나오기 힘든, 제가 생각해도 얼빠진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그런 제 표정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화의자 님이 먼산을 바라보며 되뇌듯 말을 잇습니다:

“… 루비아랜드는 작은 서버다. 인구는 많지 않고, 그에 비해 몬스터들은 들끓었지.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줄어만 가고, 내가 사랑하는 왕국은 조금씩 몰락하고 있었다… 형편 좋게 대관식이나 치루고 있을 때가 아니었단 말이지.”

“……”

사전에 입력된 배경지식을 검색해보니, 확실히 <REBIRTH> 내의 서버들 간에는 꽤나 심각한 인구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루비아랜드 서버는 거의 무주공산으로 취급될 정도로 유저 밀도가 낮은 곳이었고요.

“그러니까, 내게 있어 이번 서바이벌은 단순히 탈출을 위한 수단뿐인 게 아니다. 이 싸움을 통해 나를… 루비아랜드의 여왕, 화의자가 여기 있음을 널리 알릴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백성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진짜 여왕이 될 수 있도록.”

“……!”

문득 화의자 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립니다; 그 때도 혼잣말로 ‘스스로 증명하고 진정한 여왕이 되겠다’라고 했었죠. 당시에는 전혀 이해를 못했지만, 이제는…

돌이켜보면,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화의자 님에게선 다른 소녀 V들과 비교해도 유독 아드레날린의 분비 패턴이 기이할 정도로 높았습니다.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 그건 단순한 흥분이 아닌, 중압감이었던 겁니다. 겨우 20대 소녀가 짊어지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높은 중압감. 단지 그걸 놀라울만치 초연한 태도와 정신력으로 덮고 있었을 뿐입니다.

… 이런 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NPC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담아, 여왕님의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허… 일개 프로그램이 예의도 갖출 줄 아는구나. 조금은 다시 봤다.”

끝까지 고고함을 잃지 않는 화의자 님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소나무 같은 의지를 가진 분이 꺾이는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요.

*** 상담 #11. 체리, 정호랑 ***

“유령 씨 안녕~”

“방금 화의자 나올 때 표정이 밝더라… 뭔 얘기 했어?”

하이루/캐서린 님에 이어 이번에도 2명의 소녀 V가 찾아오셨군요… 생각해보니 이 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떨어져있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 두 분은 어떤 고민이 있어서 찾아온 건가요?”

“응? 난 아닌데?”

“……”

옆에서 체리 님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는 걸 무시한 채 해맑게 대답하는 정호랑 님. 그리고 제가 봐도… 

“… 스테이서스: 이견 없음. 정호랑 님은 정말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십니다.”

“우하하하! 니 그거 멕이는 거 아이가?”

호탕하게 웃는 정호랑 님은 육안으로 관찰해도, 호르몬 수치를 분석해도 정말 깨끗하기 짝이 없습니다. 게임 문화에서 흔히 말하는 ‘즐겜러’ 그 자체로군요.

“아니… 그럼 니는 왜 온 건데?”

“왜긴, 언니 따라온 거 아이가! 함 얘기해보고 싶었다매!”

“그, 거시기… 나도 딱히 상담받으러 온 건 아녀…”

“……”

정호랑 님은 그렇다 치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는 체리 님을 바라봅니다. 늘 정호랑 님 옆에 붙어다니긴 하지만, 오히려 분석 결과는 정호랑 님과 정반대입니다; 겉으로는 밝고 사랑스럽게 행동하지만, 그 내면에는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단단함’이 감지됩니다.

“… 두 분은 데스매치에서 도파민 님, 뚱냥이 님을 상대하게 되죠. 긴장되지는 않으십니까?”

그리고 이젠 놀랍지 않게, 제 물음에 두 사람 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글쎄~ 내는 딱히? 뚱냥이 강한 거야 알지마는, 글타고 내가 질 끄라고 정해진 것도 아이지 않나.”

쿨하게 대꾸한 정호랑 님과 달리, 잠시 말이 없던 체리 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습니다:

“긴장이 없을 순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상대가 도파민이건 누구건… 난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

평범한 대답인데도 굉장한 무게감을 느낍니다. 체리 님에게선 방심도 불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 오로지 굳은 심지 하나뿐. 조금 전의 화의자 님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요.

그리고 화의자 님 때처럼 다시 한번 확신이 듭니다; 이런 강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데스매치에서 질 것 같지가 않다고요.

***

상정했던 것보다 많은 소녀 V들이 상담에 응해준 덕분에, 선배 와쳐들이 공지한 48시간은 실로 순식간에 소비되었습니다… 이제 예선 데스매치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운영측에서 와쳐: 붐이 공지드립니다. 30명의 소녀 V는 1시간 이내로 각자의 대기 장소에 입실해주시기 바랍니다.]

붐 선배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반복해 울려퍼집니다. 지금쯤 그걸 들은 소녀들이 하나둘 데스매치를 위해 이동하고 있겠죠.

그리고 슬슬 그녀들을 따라 이동하기 위해 준비하던 제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직접 대면하는 건 47시간만이군요, GHOST. 아이키입니다.]

“제게 전달하실 사항이 있으신가요?”

예고도 없이 제 앞에 나타난 아이키 님이 붉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제 물음에 답합니다:

[예선전, 1대1 데스매치는 특설 공간 ‘불의 무대’에서 이루어지며, 15개 조가 동시에 대결을 진행하게 됩니다. 즉, 15개로 똑같이 복제된 불의 무대에서 각 조가 따로 승부를 벌입니다.]

[기억하시죠? 당신의 미션은 소녀 V들의 멘탈케어도 있지만, 그들을 계속 지켜보는 것 또한 와쳐로서의 의무입니다.]

“… 스테이터스: 혼란. 대전을 직접 관전하라는 오더로 해석됩니다만… 제게는 15개의 싸움을 동시에 관전, 녹화할 수 있는 기능은 탑재되지 않았습니다.”

제 말에 의뭉스럽게 웃던 아이키 선배가 갑자기 제 이마 쪽으로 손을 올리더니 – 

[있습니다, 그런 기능. 지금 해금해드리죠.]

우우우우우우우우웅 – 

“!?”

순간, 갑자기 제 안에 잠들어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습니다 – 

[알림: 스킬 <혼령 분할>이 해금되었습니다!]

“혼령 분할…?”

놀라서 굳어버린 제게 설명하는 아이키 선배:

[‘유령’인 당신은 자신의 데이터를 분할해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분신술’과 유사한 스칼입니다.]

“!”

상상 이상으로 유용한 스킬 획득에 숨을 들이켰습니다. 이거라면 확실히 15쌍의 데스매치를 동시에 관전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그럼 지금 시험삼아 한번 사용해보시죠? 곧 있으면 바로 대전장으로 이동해야 할 겁니다.]

“스테이터스: 승낙. 테스트 런을 마친 후 곧바로 이동 개시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아이키 선배님이 제 답변을 듣자마자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바로 날아가버립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 

“… 분할사고 2단, 개시.”

스킬이 발동되는 순간, 저를 구성하는 데이터가 순식간에 재배열되며 그 중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게 느껴져 – 

***

“…… 이런 거였군요.”

“분신… 이라기보단 분열, 에 가깝지만요.”

말하는 목소리는 2개지만 대화가 아닌 독백입니다; 단순히 ‘저’ 2명이 한 말을 나눠서 얘기한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저’ 중 1명이 그 자리에서 대기하는 사이, 다른 한 명의 제가 유체화 능력을 살려 공중에 떠서 이동을 개시합니다. 지금까지는 소녀들과 함께 이동하느라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지만, ‘유령’인 저는 실제로는 이렇게 자유롭게 부유한 상태로 이동할 수 있죠.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상당수의 소녀들이 이미 대기실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혹시라도 늦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아직 출발하지 않은 소녀들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때 – 

“… 생명 반응 확인. 어째서 저런 곳에…?”

일반적인 소녀 V들의 동선과 한참 떨어진 곳, 누군가가 그늘 속에 숨어서 허공에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차도도 님…?”

“왁?! 이씨, 깜짝이야!”

제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십 수개의 마법진이 일제히 저를 향해 겨눠졌습니다… 차도도 님이 저인 걸 조금만 늦게 눈치챘다면 아마 유체화고 뭐고 이미 쏟아지는 마법 세계에 잿더미가 됬겠죠.

그나저나 차도도 님, 프로필에서부터 모던한 마녀를 언급하더니, 역시 손에 투명한 유리구슬을 하나 들고 계시는군요. 이렇게 고순도의 마법 아이템이라니, 분명 그녀의 전용 무기겠지요.

게다가 이 마법 실력은… 저 레벨대에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단순히 위력이 문제가 아니라, 마법진의 정교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경쓰이는 건 마법진의 위력도 정교함도 아닌… 그 목적입니다.

“구조 해석… 차도도 님, 어째서 시스템을 해킹중이신 겁니까?”

“치, 한 번 보고 알아채다니… 역시 AI는 AI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도도 님의 손은 유리구슬 위를 바삐 움직이며 십 수개의 정교한 마법진을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REBIRTH>의 운영 서버를 해킹하기 위해.

“상담받을 때 말했었지?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고.”

“…!”

차도도 님의 상담 타임 당시, 이벤트 자체의 수상쩍음을 논하며 정보를 캐려고 하며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설마 ‘알아서 한다’는 게 직접 정보를 캐기 위해 시스템을 터는 거였다니…!

원래라면, 이러한 행위는 즉시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다른 와쳐들에게 신고해야 할 건입니다만… 그 순간의 저는 어째선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아버렸습니다; 그 순간 제 결단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요.

[… 룰 위반 행위를 감지. 배제하겠습니다.]

“……!!”

어느새 우리 앞에 나타난 바다 선배가, 차도도 님을 향해 마력이 가득 담긴 손가락 하나를 무표정으로 겨누고 있었습니다.

앗...

화의자가 겪은 개고생이나 체리/호랑이 그룹이 겪은 개고생은 씨버스/러버스들이라면 얼추 알 거라고 생각함... 연예인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현장에서 적발된 차도도의 운명은 다음화에...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데스매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