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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여자 꼬시려고 담배끊는 이야기 -후편-

참잘했어요사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31 00:59:38
조회 855 추천 27 댓글 4
														


전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lilyfever&no=575803&_rk=Zxh&exception_mode=recommend&page=1




번뇌를 벗어버리자. 채우는건 소용 없다. 비우고 비워라. 그리하여 해탈할지니.


종교적 성향따위를 가지고 있던적은 없지만 술에 대한 내 감상은 언제나 매한 마찬가지다. 비우고 비울수록 스스로를 좀먹어가는 이 음료를 사랑하게 된게 언제였더라? 분명 고등학생 시절 호승심을 참지 못하고 입에 대기 시작했겠지. 하지만 언제부터 이런 불자의 형태로 술을 즐기게 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상담실 구석에 비치된 저 마법의 간이 냉장고의 내부 상당수의 지분은 술이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여기 병원 맞지? 병원의 간이 냉장고면 보통 의약품이나 주사기나 그런게 보관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병원에서 술 같은걸 반입해도 괜찮은건가? 아니, 그 전에 이것도 일단 알콜로 쳐야하나?

...뭐, 내가 여기 한 두번 찾아온것도 아니고 저 냉장고에 항상 술이 비치되어있다는 것은 알고있다. 마음 같아서는 밀반입하는 경로와 루트가 궁금해지긴 하지만 일단 머릿속에서 치워놓도록 하자. 캐물으면 분명 골치아파질 것 같기도 하고 말야.


덕분에 시간이 좀 흐른 지금 계속된 리필 덕에 테이블에는 비어버린 맥주병이 대여섯병이나 나열되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나 유민이 둘다 취기란 것을 쉬이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었고 남들에게 흔히들 볼 수 있는 취중진담이란 설은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형태중에 하나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술자리는 항상 담백하다. 아니, 오히려 화끈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덕담 쌓는 성인군자마냥 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고리타분한 제스처는 오래전 졸업해 이제는 심심하면 알아서들 나발을 불어대는 이 상황이 익숙하니까 말이지. 하하, 인생사 뭐 있나?


거기다 술의 장점은 또 있다. 해탈한 맥주병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우리 둘 관계에서 언어력 취약계층인 내가 우위에 선다는 점이다. 뭐, 여전히 어휘력은 꽝이긴 하지만 쓸데없는 자신감을 늘려준다는 것이 술의 매력이다. 아, 정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음료야.


나는 몇병째인지 모를 맥주병을 완전히 해탈시켜 쾅! 소리 나게 탁자에 내리쳤다.



"그으러어니이까아! 지랄이고 나발이고 다 좆까라 그래! 필수요소인지 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한데! 연애하는게 뭔 자격증이라도 필요한거야? 하루밤 불장난은 이제 질렸단 말이야! 혼자는 이제 싫다고! 나도 연애하고 싶다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하다, 시발. 나는 그냥 보통의 연애가 하고 싶은거다. 그냥 평범하게 꽁냥거리고 싶고, 평범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고, 평범하게 함께 사랑하는 상대와 미래를 그리며 꺄륵거리고 싶다.

...뭔가 나와는 조오오온나게 안어울리는거 같긴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존나게 그런 연애가 하고 싶다!


내 땡깡질을 듣던 유민은 아주 질려버린것인지 한참 전부터 대답이 없다. 하긴 짜증이 날 법도 하겠지. 아니면 술기운이 오른걸지도 모르고. 이 고릴라는 술이 들어가면 나와 반대로 얌전해지는 성격으로 알고 있다. 나이가 먹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는게 은근히 위안이 되네.


덕분에 나는 한참이나 유민을 향해 가타부타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었고, 때문에 흘러가듯 나온 유민의 질문의 의도를 알아채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후회해?"


"뭐?"


"레즈비언인거 후회하냐고."



이건 또 뭔소리래냐? 나는 비어버린 맥주병을 보고는 한병 더 꺼낼까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으음, 혓바닥이 저릿한거 보니 슬슬 취기가 올라오나보네. 좀 자제해야겠어.

별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에 난 이런저런 생각으로 답변해줄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유민은 그런 날 멀뚱거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병 입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남녀관계였으면 쉽잖아. 호감 있으면 고백하고 아니면 차이고. 맘에 들면 사귀면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면 그만이고. 그런데 너 같은 부류는 고백은 커녕 가치관을 내보이기도 힘든게 현실이잖아."


"응? 나는 그런거 별로 상관없는..."



아차, 실언이다. 살짝 오른 취기에 나는 유민이 말하려는 바를 뒤늦게 알아채고는 황급히 입을 가리며 눈치를 살폈고, 역시나 유민은 나를 쓰레기 잔반 보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랑이다, 이 띨빡아. 하긴, 너 같은 미친년들이 넘쳐나면 너와 같은 성향의 아이들도 좀더 기 좀 피고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너 같은 년이 유니크한거지. 보통 너 같은 부류는 성향을 숨기고 사는게 일반적이라고."



정론이라 더 짜증나는 말. 썅, 항상 옳은 말은 유민이가 하고 나는 반박거리 찾다가 쭈그러 드는게 일상이라지만 술 좀 들어간 김에 나는 좀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흥, 그럼 나 같은 유니크한 여자를 만나서 고백하면 되는거 아닌가?"


"유니크는 세상에 하나뿐이라 유니크 한거야."


"그럼 적어도 나랑 비슷한 성향의 레어한 아이를 찾으면 연애 씹가능? 인정합니까?"


"...도대체 뭔 소린지. 설마 취한거야?"


"뭐, 조금 그럴지도..."



뭔가 가라앉는 분위기의 대화 속에 말꼬리를 흐리며 유민의 눈치를 살폈다. 유민은 여전히 절반쯤 남은 맥주병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이상한걸? 지금 이 상황이 영 좋은 흐름이 아니라는건 바보인증마크가 붙은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수백번은 더 됬을 우리 둘의 술자리가 매너리즘과 지루함으로 가득할지 언정 이런 끈적질척한 분위기는 처음이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난 잘 돌아가지 않는 짱구를 굴려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지만 바보는 결국 바보일 뿐이었고, 그 사이 유민은 나 마냥 취기가 올라오는지 양손을 들어 미간을 꾹 눌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진짜로 너, 진심인가보네."


"응? 뭐가?"


"연애하고 싶다는거."



내가 지금까지 외치며 지랄발광하던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유민이에게는 헛소리였나보다.



"솔직히 금연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거리를 들고온거 봐서는 또 술이라도 얻어먹으러 온건가 했어. 근데 이번엔 진짜라서 그런지 조금 당황스럽네."


"...지금까지 내 말을 귓등으로 쳐들었냐?"


"미안."



어라, 왜 이리 순순하지? 살짝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사과해보이는 유민의 모습은 귀하게도 진정성이 담겨져 있었고, 나는 그 모습에 뜨겁게 타오르는 고취감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하하하! 내가 유민이를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니! 이게 얼마만이냐!?



"그래서 금연하고 싶다는 것도 전부 진심?"


"뭐, 갈등이 안된다면 거짓말이긴 하지만 끊을 수 있다면 끊고 싶습니다, 선생님!"


"그건 안되겠는데?"


"엥?"


"나는 너 금연 안시킬꺼라고."



이건 뭔소리다냐? 앞뒤없는 유민의 대답에 방황하는 사이 유민이는 하얀 가운의 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져보였다. 나는 얼떨떨하게 유민이 던진 물건을 캐치했고 혼란스러움에 흐릿해진 눈동자로 고개를 숙여 받아낸 물체를 살펴보았다.

으음, 이것이 당췌 무엇인고? 어디보자, 내 눈이 아주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어도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굵은 돋음체 한글로 써져있네.


※흡연은 폐암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힌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오오, 이런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읽어보지 않는건데! 내 손에 든것이 타르와 니코틴을 선두로한 발암물질, 통칭 담배라는 물건이란걸 알아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민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유민은 내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품에서 담배를 하나 더 끄집어 내더니 입에 물어보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라? 잠깐만!



"어어!? 야! 너 담배도 폈어?"


"아니."



아, 그러세요? 하지만 대답과는 다르게 담배를 꺼내 입에 꼬나문 유민이는 거침없이 흡연자가 하는 다음 행동, 즉 불을 찾는 것 마냥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요년 장난이 아니잖아? 나는 황급히 몸을 뻗어 유민의 손을 캐치하며 소리쳤다.



"아니 잠깐만! 네가 왜 담배를 가지고 있는거야!? 아니아니아니, 그전에 직업이랑 상반되는 행동은 하지 말아줄래요? 명색이 금연 상담사란 타이틀 가지고 있으면서 담배피려고 하는건 좀 아니잖아!?"



내 횡설수설함에 유민은 내게 붙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 표정 그대로 내 시선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으음, 저 표정은 역시 날 질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게 좋으려나? 내가 어쩔줄을 몰라하자 유민은 내게 붙잡힌 손을 슬며새 빼내더니 한숨을 내쉬어보였다.



"이거 놔 돌대가리야. 이거 몇일전 같이 술먹었을 때 네가 놓고간 것들이야."



흠, 이 발암물질이 몇일전 내가 무의식중에 놓고간 것들이란 말이지? 아니, 그건 둘째치고 도대체 이걸 네가 왜 가지고있냐고? 하지만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민이는 별거 아니라는 것 마냥 반대편 주머니에서 라이터(진짜로 가지고 있어!?)를 꺼내들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고, 결국 난 다시 놓쳤던 유민이의 손을 붙잡으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야, 하유민! 너 미쳤냐! 갑자기 왜이래!?"


"아 좀! 닥치고 가만히 있어!"



...이유를 모르겠다. 저렇게 앞뒤 재지않고 행동하는건 내가 알던 하유민과는 너무 동떨어진다. 평소대로라면 이런 미친 짓거리의 진원지는 내가 되어야 정상 아닌가?

하지만 유민이의 행동에 농담이란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난 꼬랑지를 내리고 유민을 지켜보기로 했다. 유민이는 기어코 자신이 꼬나문 담배에 불을 붙여보였다.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장면. 나는 정신나간 년 마냥 입을 쩍 벌리고 유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유민이는 내 평소의 모습처럼 불을 붙인 담배연기를 폐 깊숙이 들이켜 보였다.


그리고 장렬히 전사한다. 유민은 한참이나 콜록거리며 압력밥솥마냥 연기를 좍좍 뿜어댔으니까. 하이고, 절명하지 않은게 신기하네.

그래도 꼴에 불쌍하게 보일정도로 기침을 해대니 연민 비슷한 동정심이라도 생겨 난 조심스레 유민에게 말을 걸었다.



"유민아, 괜찮아?"


"씨발, 역시 모르겠어. 이딴걸 도대체 왜 피는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젠 나도 습관이 되서 딱히 이유를 대라면 할 말은 없어요. 내 속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이나 기침을 해대던 유민이는 짜증섞인 표정으로 들고있던 담배를 노려보다 책상에 짓이겨 꺼뜨렸다. 음, 터프한 년. 하지만 역시 나와 달리 유민이에게 담배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돈만 쳐먹는 발암물질따위가 어딜 감히 하유민님 근처에 얼씬거린단 말인가?


유민이 몰래 피식거리며 말 잘듣는 꼬맹이마냥 입다문 채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때, 유민이는 들고있던 라이터를 나에게 던져보였고 나는 어버버하며 황급히 라이터를 붙잡았다. 그리하여 내 손에는 절대절명의 위기나 다름없는 현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야 말았다. 한손에는 담배, 한손에는 라이터. 금연을 하겠다고 결심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꼬라지란 말인가.


유민이는 눈을 비벼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피워."


"에?"


"피라고."


"...이거, 담배?"


"그럼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젠장, 두번 말하게 하지마! 나도 슬슬 한계니까!"



방금전부터 유민이는 진짜 이상하다. 나한테 욕을 하고 짜증을내고 화를 내는게 일상이긴 하지만 이 처럼 사람을 몰아붙이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유민이와 알고있던 십수년의 세월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처음인지라 나는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어 힘겹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꺼넀다.



"아니, 근데 유민아. 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까라면 까!"



네엡. 알겠사옵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유민이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게 좋겠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좋은건지 아니면 몸에 문제가 있는건지 알 수는 없지만 유민이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닌거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운 나쁘게 똥 밟았다 생각하고 따르도록 하자. 좀 어울려주면 다시 평소대로 돌아오겠지.

나는 울상지으며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그것에 불을 붙여보였다. 한모금 들이킨 나는 이것을 뱉어야할지 말아야할 고민했고,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염증나는 자신을 느끼며 연기를 입으로 뿜어내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이 황홀감에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떨려온다. 아... 제길, 좋다. 안 피운지 근 하루정도밖에 안됬는데 담배가 이렇게 맛있었나?



"어때?"



대답을 요구하는 유민의 질문에 난 멍한 표정에 헤실거리는 웃음을 걸어보이는것으로 답해줬다. 으음, 병원안에서 담배피는게 걸리긴 하지만 뭐 어떠냐? 일단 명색이 금연 상담사가 허락해 주셨으니 펴도 괜찮겠지.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에 방안이 뿌옇게 물들어간다. 그런 내 모습에 유민이는 조금 기분이 풀린건지 방금처럼 짜증내는 표정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년 성격상 주먹질이라도 안해줬으니 고맙게 여겨야지.

나는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흡연자의 즐거움을 맘껏 상기시켰고 유민이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춘다. 얘가 갑자기 또 왜 이래? 야야, 어차피 금연 망한거 술이라도 마시자! 아직 잔뜩 남았을꺼 아냐?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라도 한병 더 꺼내올 심산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윽고 들려온 유민이의 말은 내 몸을 경직시켰다.



"네 말마따나 너처럼 멍청한 연애는 할줄 몰라. 아니, 한적이 없어. 할 줄도 모르고 관심순위에서도 낮았고. 그래서 내가 아는 거라곤 그 상황을 대비해 준비하는 것 뿐이었어."



...잠깐. 내가 잘못들은건가?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민을 바라보았다.

내 귀가 축농증에 걸렸거나, 달팽이관에 이상이라도 생긴게 아니라면 하유민이 지금 자신의 연애상담을 하고있다. 지금껏 이 미친년과 함께 어울리며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빅 이벤트가 급작스레 시작된거다.

무성애자라고 불릴정도로 연애라곤 쥐뿔도 관심없던 하유민이?


솔직히 호기심보다는 충격이 컸기에 나는 혼란속에서 멍하니 유민을 바라보는것이 최선의 행동이었고 그런 나의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민이는 그저 자기 할말은 하겠다는듯 말을 이어나갔다.



"쓸일이 없으니 재산도 꽤 모았고, 아버지 후광으로 낙하산으로 입하사긴 했지만 이젠 나름 인정도 받아 직업도 안정적이야. 거기다 이제 곧 내 명의의 집도 생길 예정이지. 시간이 남아도니 가사도 충실히 배웠고, 성격도 꼼꼼해서 누구를 챙기기도 잘해. 너라면 알지? 뭐, 입이 험하다는게 단점이면 단점이겠지만 이해하도록 해. 누구누구씨 덕분에 습관이 됬거든."


"...자부심 쩌네. 네네, 그거 참 대단도 하십..."



어쨌든 귀하다고 보면 귀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인지라 나는 최대한 혼란을 감추려 애쓰며 유민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려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유민이가 내게 상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건...



"근데 이렇게 준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막상 내가 신뢰를 얻고 싶어할 당사자는 어렸을때 성격 못버리고 연애를 하나의 오락거리로만 생각하더라. 그것도 10년이 넘게 말야. 그러니 어쩌겠어? 그 사람이 날 보지 않는다는 건 내가 부족하단 거잖아? 난 누군가를 유혹하는 법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숫처녀인걸. 그러니 내가 아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준비하는 걸 택하기로 했지. 그게 몇년이 걸린다 해도 말야."



커밍아웃? 자백? 선언? 아니면...

고백...?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민을 마주보며 떨리는 이빨을 딱딱 부딛히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기, 유민아. 그거 뭔가 묘하게 들리는..."


"그런데 말야!"



폭포수 처럼 쏟아내는 유민의 행동거지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거지? 술마시다 푸념하다 끊겠다 선언했던 담배를 피던게 어째서 이런 청문회 같은 지경까지 오게 된거냔 말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속에서 이미 폭발할대로 폭발한 유민이의 언성은 잔뜩 상기된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드디어 네가 연애를 하고 싶다잖아! 그것도 진짜로 마음을 터놓고 함께지내는 그런 진짜 연애를! 항상 지멋대로에 남은 생각치도 않고 자기가 레즈비언인걸 숨길생각도 없이 떠들어대는 한심한 년이! 나한테 외롭다고 징징대기 시작했다고!"



얼굴이 홧홧거린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년은 나를 부끄러움에 수장시켜 익사시킬 생각인건가?

자, 일단 진정을 좀 해야한다. 이 벼락이라도 내리친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장황한 연설이라도 하는 것마냥 어느사이엔가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까지하는 유민의 팔을 붙잡으며 힘겹에 입을 열었다.



"유민아, 잠시 진정 좀 하고..."


"담배피는 네 모습이 좋았어."



순간 처연히 내뱉은 유민의 어투에 몸이 얼어 할말을 잊고 말았다. 뭐, 솔직히 말해 생각해 둔것도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겠지. 하긴 이런 상황, 나한테 어울리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저렇게 직설적으로 날 좋다고 말해준 사람이 부모님 의외에는 없었으니까.

흥분과 처연함 속에서 유민이는 날 빤히 내려다보며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정도의 정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독한 연기를 내뱉으며 날 향해 웃어주는게 좋었어. 술마시며 날 향해 푸념하던 모습도 좋았어. 연습한답시고 내 손톱으로 네일아트하는 모습도 좋았고, 내가 욕할때마다 배시시 웃으며 넘기려던 네 멍청한 모습이 너무너무 좋았어."


"저기 나는..."


"그거 알아? 네가 여자를 좋아한다 나한테 고백해줬을때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내게도 그 기회란 것이 주어졌으니까."



...지금와서 생각해보지만 하유민도 일단 여자는 여자였다. 주민등록증 두번째 시작번호가 2로 시작하는 대한민국이 인정한 여자. 아무리 성깔이 더럽지만 내 이상으로 예쁘게 생겼고, 내 이상으로 입이 험하지만 보드랗고 작은 입술을 지니고 있으며, 날 항상 잡아먹을듯이 쏘아대지만 그 지저귐이 어지간한 하룻밤 상대의 여자의 신음소리보다 간드러지게 느껴질 정도의 마성을 소유하고 있는...


어째서 이제 알아챈거지? 이년은 내 성적취향에 포함되는 성별까지 가진 완벽한 여자였는데.


어째서 유민이를 항상 고릴라나 독사 마냥 생각해 왔던걸까?



"나는 그냥 너의 그 모든게 좋았었어. 그리고 지금 기회가 온 이상 더 이상 놓칠 생각은 없어. "


"유민아. 나는 너를..."


"외롭다고 했지?"



붙잡은 유민이의 팔을 통해 떨림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떨림을 통해 어쩐지 알것 같았다.

내 대답을 계속해서 끊어내는 것으로 두려움을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강한척을 하는게 참으로 하유민 답다.


나는 유민이의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외로운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런 내 주억거림에 유민은 오늘 처음으로 웃음 비스무리 한것을 입가에 걸어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말을 기다려왔어. 너라면 알꺼야. 내가 어떤 여자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할지 말야. 하지만 말야..."



유민이가 원래 말을 잘하는 타입이긴 하지만 어렇게까지 장황해지니 박수라도 치고싶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입 다물고 있는게 좋겠지.

솔직히 부끄러움을 꾹꾹 눌러가며 말하고있는 유민이의 목소리는...


녹음해두고 계속해서 듣고싶을 정도로 환상적으로 예뻤으니까.



"나와 연애한다면 외로움따윈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 줄 자신 있어. 항상 이렇게 술이나 쳐마시며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 대화가 아닌, 너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너에게 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유민이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상이 반짝인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별 천지 마냥 반짝인다. 이 나이가 되어 소녀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 펼쳐진다고? 그리고 그게 진짜 가능하다고?

...시발! 어렸을 때 좀 더 많이 읽어볼껄 그랬어!



"아람아. 아니, 차아람씨."



내 이름이 이렇게 간드러지는 단어라는 것을 평생 처음 알았다.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귓불이 뜨겁고 목 안쪽에서는 거미줄이 쳐진 것마냥 끈적거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취기를 느끼는 체질은 아니니까 술 때문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이 몽글몽글 거리는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유민이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가린 채 잠시 뜸을 들인다. 이 이후에 유민이의 입에서 나올 대사가 뭔지 본능적으로 알고있다. 그런데도 이성적으로는 모르겠다. 듣고나서 있을 선택의 시간이 무섭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뭐지, 부정맥인가?


이런 미친! 사람이 너무 긴장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따먹기가 나오는건가?


꼴깍꼴깍. 침을 몇리터는 삼켰을것 같은 착각 속에서 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조여가며 기다렸고.



"저와 사귀어 주세요."



유민이의 기어들어가는 고백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급히 역으로 질문하고 말았다.



"저기말야, 담배 끊으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아?"



엄청나게 고뇌한 끝내 내뱉은 고백이었을꺼다. 그런데 그걸 내 멍청한 질문으로 회피는 것처럼 보이자 유민이의 표정이 단숨에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잠깐! 이게 아닌데!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다급히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저기..."



말꼬리를 늘리며 표독스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던 나는 부끄러움에 한참이나 밍기적대고 뜸을 들이다 고개를 돌려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금연 상담사 애인 할 몸인데 담배 피면 모양새가 안나잖아."



아아... 저질렀다. 차아람 이년이 결국 저질러 버렸습니다!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 위에다 올리고당을 한바가지 쏟아부어버린 것 같은 발언이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나도 사람이고 여자인지라... 이런 표현에 환상을 가지지 않았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하유민은 그런 부끄부끄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리며 웅얼거렸다.



"...기다려봐. 지금 니코틴 패치라도 꺼내줄테니까."



평소의 차가운 도시의 여자를 연기하는 모습.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긴장하면 귓불이 빨개지는 유민이의 버릇. 나 처럼 부끄러움을 숨기려 애쓰는 유민이의 모습에 나는 히죽거리는 입가를 내리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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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남아있음. 길어서 별도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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