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여명]
[계몽의 이유]
[남은 것이 오직 재와 먼지뿐일 때]

불길 속에서 실루엣들이 날뛰었다. 악마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림자와 실루엣들의 불타는 형상은 불분명하게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다. 쓰러진 만인대의 화신들이 화염 속에서 태어나, 무릎까지 사이킥 화염 속에 담근 채 화염의 창을 내질렀다. 이스트반에서 배신당해 죽임을 당한 스페이스 마린들의 실루엣들이 도끼와 검, 손톱을 들고 일어섰다. 학살당한 군단들의 상징들은 검게 그을린 파워 아머의 재에 반쯤 가리워진 채였다. 그 모든 거인들 가운데서도 거인이라 할 만한 자가 있었다. 불길에 달아오른 맨 살을 드러낸 그의 거대한 양손은 돌진할 준비를 마친 채, 노도처럼 밀려드는 화염의 파도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죽어가는 제국의 열 번째 아들이, 아버지의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 짧은 순간 되살아난 것이었다.
수천 마리의 악마들이 불살라지고, 그 에테르 육체들은 거짓 골격 위에서 불타 사라졌다. 황제의 검으로부터 후광처럼 뿜어져 나온 순백의 화염이, 악마들의 존재를 침식하는 정화의 광휘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황제의 검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불꽃은 빛나는 파도가 되어 적들을 휩쓸었다. 황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곧 눈이 멀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일제히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커스토디안들이 그들의 주군을, 그들의 주인의 뒤를 따랐다. 커스토디안들이 불생자들을 찢어발겼다. 창을 내지르고 볼터의 총성을 울리는 것으로 악마들을 추방시켰다. 그들의 칼날은 악마들의 육신을 가르고, 악마들이 흘린 산성 피는 부식성 소나기가 되어 분수처럼 쏟아졌다. 안개는 더 이상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은, 불탄 시체로부터 피어 오른 잿가루들이었다. 잿가루로 짙게 물든 허공에서 창날들이 빛을 반사하며 은빛으로 번쩍였으니, 곧 만인대 최후의 돌격이었다.
황금빛 전사들의 뒤에서 그들의 무장 노예들이 새로운 탄약과 갑주 밀봉제를 들고 주인들의 뒤를 따랐다. 그 노예들 역시 각기 한 사람의 전사들이었으나, 지금 그들은 그 주인들이 휘두르는 창날에 의해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 수 년간 이어진 비밀 전쟁이 레기오 쿠스토데스로 하여금 한때 그들이 지녔던 위용의 흔적만이 남도록 하였으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5년 간 이 태양도 자비도 없는, 오직 사자들과 저주받은 자들만이 거하고 있는 영역을 위해 싸우고, 피 흘리고, 죽어갔으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왕이 왔으니, 태양은 떠올랐고, 그들은 함성과 함께 돌진하였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에, 그들의 칼에 죽어가는 악마들이 내지르는 울음소리조차도 무색해졌다.
황제의 맹습에도 살아남은 짐승들이 비틀거리면서도 커스토디안들을 향해 휘청휘청 달려나갔다. 녹아내려가는 양손에 부서져 가는 검을 쥐고, 멀어버린 채 피를 흘리는 눈으로 악마들은 무의미한 응시를 보내었다. 이미 죽어 있는 무언가가 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잔뜩 부풀어 오른 곱사등이 몸 속에 그것 자신을 죽인 질병을 가득 담고 있는 워프 생명체였다. 라의 창이 내질러지며 워프 생명체의 외눈을 터트리고, 뒤틀린 두개골을 부수며 그 머리를 관통하여 튀어나왔다. 라의 건틀렛 위로 부글거리며 쉭쉭거리고 있는 핏물이 묻고, 거품이 일고 있는 혈액은 황제의 오라 앞에 타오르며 수증기로 화하였다.
라는 탄창에 남아 있는 마지막 폭발성 탄들을 발사하였고, 바이저에 경고 문장이 떠오르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무기에 탄약이 바닥났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재장전!” 뒤쪽에 있는 무장 노예들을 향해 병기를 던지며 외치는 라의 손에는, 이미 메리디안 검들이 창을 대신해 뽑혀 나오고 있었다. 곡선을 그린 칼날이 병든 육신을 가르고, 썩은 장기들이 안개 낀 지면 위로 흘러나왔다. 라가 공격을 가할 때마다 검을 둘러싼 역장이 운동 에너지를 뿜으며 피해를 가중시켰다.
망막 디스플레이 화면 위로 종소리와 함께 하나의 룬이 떠올라 백색으로 깜빡였다. 쌍검을 매끄러운 동작으로 회전시켜 칼집 속에 집어 넣은 뒤, 라는 그의 무장 노예가 그에게 가디언 스피어를 도로 던지는 순간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라가 창대를 붙잡은 순간, 그의 살육은 이미 다시 시작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동족, 커스토디안들이 싸우는 방식이었다.
라의 눈에 시간은 존재하기를 멈춘 듯 보였다. 오직 박동하는 심장과, 근육 속에서 타오르는 유산(乳酸)만이 존재할 뿐.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그의 얼굴을 향해 번뜩이며 날아드는 칼날과 발톱들뿐이었다. 죽어가며 소멸해가는 불생자들의 재가 그의 갑주 위로 두껍게 내려앉았다.
“재장전!” 라의 등 뒤에서 솔론이 외쳤다. 라는 솔론의 메리디안 검들이 작동하며 찰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무장 노예가 지면에 꽂힌 채 남겨진 가디언 스피어를 주우며,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순종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는 묵직한 황동 칼이 베어 오는 것을 받아 흘린 뒤, 손가락에 낀 디지털 웨폰으로 레이저 광선을 뿜어 워프 생명체의 얼굴을 곡선형 머리에서 날려버리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광선에 날아간 해골로부터 악마의 육신의 찌꺼기들이 뿜어져 나와 황제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악마의 잔해는 그의 군주의 갑주에 닿기도 전에 불타 재로 변해버렸다.
노도처럼 뿜어져 나가는 화학성 불꽃이 라의 왼편에 있는 잔마다오의 위치를 표시해주었다. 인센디움 파이크들이 용이 울부짖듯 포효하며, 커스토디안들의 첫 번째 열이 휘두르는 칼에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는 워프 생명체들을 불태워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만인대와 그들의 금빛 왕은 두껍게 쌓인 재로 정강이까지 더러워져 있었고, 연기처럼 일렁이는 악마적 존재들은 황제가 휘두르는 불길에 삼켜진 채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악마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고통을 받게 된 것은, 기어코 황제에게까지 접근하는 데에 성공한 악마들이었다. 그들의 동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또 잔혹한 대악마들이 휘두른 무기가 노리고 있던 표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고, 악마들의 무기가 가르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일렁이며 맴도는 황금빛 안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이킥 권능이 천둥처럼 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 전쟁 군주가 짐승들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타오르는 화염검은 이미 짐승들의 척추를 꿰뚫고 있었다. 악마들의 눈구멍 속에서 화염이 솟구치고, 악마들은 몸속에서부터 끓어오르며 터져 나갔다. 이글거리는 피가 뿜어져 나와, 그들의 주군과 가까이에 있던 라와 커스토디안들을 흠뻑 적셨다.
열광적인 고양감에 라의 혈류가 빨라지고, 그의 몸을 둔하게 만들던 피로는 사라졌다. 그의 몸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피로감은 이 순간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살아 고동치는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그 심장의 박동은 복수요, 설욕이 되었다.
우리가 이기고 있다. 만인대의 전진과 함께 복스를 통해 다시 오가기 시작한 저주와 맹세의 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서 라는 승리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천재적 지성이 이 마지막 순간에 그들과 함께 서기 위해 부린 술수가 무엇이던지, 지금 그것은 제대로 먹혀 들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막아 세울 수는 없으리라.
황제가 자신의 검을 마치 창처럼 휘두르며 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던져진 황제의 검이 커스토디안의 어깨 위로 내질러지고, 타오르는 칼날은 워프 생명체의 머리를 뚫고 손잡이가 닿기까지 악마의 머리 속에 파묻혔다. 악마가 타올라 흐물하게 녹아 내릴 때까지 라는 그 악마를 거의 보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햇빛 충만한 안개 속에서 섬광과 함께 다시 황제의 손으로 되돌아온 칼날은, 또 다시 회전하며 적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그것들을 살육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파충류를 닮은 사냥개가 황제를 향해 뛰어 들었으나, 오직 황제가 있던 자리만을 가를 뿐이었다. 황제의 칼날이 사냥개의 목구멍 속에서 나타나고, 악마견은 녹아내린 피를 뿜으며 끄르륵거렸다. 황금빛 전쟁 군주는 악마의 목에 꽂힌 검을 그로부터 1초 뒤에 붙잡았고, 악마의 목을 찢어 칼날을 빼낸 뒤 다시 전진을 개시하였다.
그럼에도, 적들은 계속해서 돌격해왔다. 그것은 곧 노도요, 홍수와 같은 기세였다. 라는 잠시 뒤쪽으로 힐끗 시선을 보내 레이스본 관문을 바라보았다. 기계교의 기계장치와 접붙여진 웹웨이 관문은 너무도 부조화스러운 모습이었다. 라는 로브 차림의 통합자들이 마지막 남은 침묵의 자매단의 생존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푸른 안개 속으로 통과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그들의 주인의 곁에는 오직 만인대 만이 남게 되리라.
+준비하여라, 라.+
“폐하?”
라는 자신의 마지막 볼트탄 여섯 발을 맞고 주저앉아 쓰러진 맹금 형태의 워프 생명체을 뛰어넘어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자신의 창을 전선 뒤편으로 던짐과 동시에, 라는 메리디안 쌍검을 뽑아 들었다. 황제의 곁에 착지한 라는 황제와 등을 맞대고 섰다. 두 사람의 칼날은 은빛 격자무늬로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칼날이 만들어내는 그물망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베어 갈라버렸다.
+준비하여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폐하?”
라의 망막 디스플레이가 백색의 문장을 표시하며 번쩍였다. 라는 되돌아온 창을 붙잡고는, 그것을 헬리콥터의 회전익만큼이나 강하고 빠르게 휘둘렀다. 과부하된 발전기들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 주변의 터널에 금이 가며 불똥을 튀겼다.
+저곳이다, 라. 놈이 다가오고 있다.+
황제는 적들을 베고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화 속 지옥의 무리들을 향해 황제는 그의 근위병들을 이끌었고, 그들은 마치 옛 시대의 성기사들처럼 그들의 왕을 뒤따랐다.
침묵하는 황제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담겨 있었다. +놈의 순수한 존재성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참으로 순수하고도, 전적인 악의가.+
라는 몸을 뒤로 숙여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도끼 날을 피한 뒤, 창을 내질러 비늘로 덮인 워프 생명체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라는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 디오클레티안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의 동족은 자신의 창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뿔 달린 배불뚝이 괴물의 뱃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내장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악마의 부패한 내장에서 서식하던 파리들이 살 곳을 잃고 내장 주변에서 웅웅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불멸자들이라 하여도 지칠 수는 있었다. 꽉 다문 라의 이빨 사이로 들숨과 날숨이 오갔다. 투구 속에서는 땀방울이 얼굴 위를 흘러내리며 축축한 불길처럼 뜨거운 자국들을 만들었다. 망막 디스플레이 화면은 황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불꽃과 빛에 대응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화면을 어둡게 만들기를 반복하였다.
“제 눈에는 오직 적의 무리만이 보일 뿐입니다, 폐하.” 라는 그의 주군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매혹된 듯 넋이 나간 듯한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모습을 드러내어라….+
황제가 검을 들어 올리더니, 그것을 내리치며 화염의 호선을 그렸다. 화염의 파도가 노호성과 함께 앞으로 내달리며 타오르는 호선을 이루고, 황제의 앞에 서있던 불생자들의 대열이 화염에 휩싸였다. 시체가 불탄 잿가루가 바람 없는 허공 속에서 뒤로 되날아오고, 죽은 악마들의 근처에 있던 커스토디안들이 잿가루를 뒤집어썼다.
그림자가. 재 속의 형상이 드러났다.
남자였다. 그저 한 명의 남자. 긴 머리에 검은 피부, 원시 부족민 같은 수염에 뼈를 깎아 만든 장신구를 걸치고, 손에는 불에 그을려 단단하게 만든 나무 창대에 깬 석기를 덩굴식물로 묶은 창을 들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 스스로가 다른 이들 여럿에게 입혀왔던 것만큼이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남자의 피부 위로 창에 찔리고, 검에 베인 상처가 수백 곳이나 드러나 있었다. 가장 최근에 생긴 상처는 남자의 가슴에 나있는, 가장 많은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였다. 자야가 날린 최후의 일격이 남긴 것이었다.
울부짖는 광기의 대열을 등 뒤로 이끌고 있는, 단 한 명의 남자.
+최초의 살인의 메아리여.+ 라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황제의 목소리는 그의 머리를 부수 듯 강렬했지만 또한 동시에 부드러웠다.
“아나테마.” 역겹고도 매끄러운 목소리로, 남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포식동물들이란, 항상 공격을 가하기 직전에야 그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늑대들이 사냥감을 추격하며 울부짖듯이, 상어들이 사냥을 하며 그 지느러미로 바다의 수면을 가르듯이. 이곳에서도 잿빛 실루엣이 불생자들의 대열 사이를 가르며 나섰다. 너무도 인간적인 그것의 걸음 앞에 보다 나약한 워프 생명체들은 물러서 길을 열어주었다. 저 워프 생명체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이던지 간에, 이 석기 시대의 근육질 전쟁-족장의 모습이 그것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저, 최초의 인간들의 형태를 흉내만 내고 있을 뿐.
두렵게도, 라는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그의 주인의 눈동자 속에서 의심의 빛이 일렁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 모습에, 익숙지 않은 두려움의 얼룩이 그의 마음 속으로 밀려 들었다.
“폐하.” 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희가─”
그러나 황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군주와 악마는 서로를 향해 달려 들었고, 존재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였다. 전투를 벌이고 있는 양측의 보다 열등한 존재들을 앞질러가면서. 그리고 그 두 존재들, 한 종족의 구원과 그 종족의 파멸이, 서로의 칼날을 맞부딪혔다.
재 섞인 안개 속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황제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에게는 전적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고통에, 전쟁 군주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 길이와 너비가 각기 한 자루의 창과도 필적하는 다섯 개의 손톱들이 황제의 등 뒤로 자랑스레 빠져나온 채, 붉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라는 이전에 모든 남녀노소들이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볼 때면 각기 서로 다른 얼굴, 서로 다른 피부색, 서로 다른 기질들을 보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만인대의 전사들은 그와 같은 현상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러한 현상이, 진정한 불멸자와 대면하였을 때 그에 준비되지 않은 정신들이 압박을 느끼며 일으키는 서투른 혼동 현상이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라의 눈에 황제는 그저 다른 여느 이들과 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커스토디안들은 황제의 모습에서 오직 그들의 주인의 모습만을 보았다.
그 순간, 악마의 손톱이 그의 왕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그 순간, 라는 그의 종족의 다른 이들이 황제를 바라볼 때 보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왕이 될 소년이었다. 그는 후드 달린 망토를 뒤집어 쓴, 갈라진 입술 사이로 생기가 빠져 나오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인생의 절정기에 달한 기사, 사자 갈기 같은 검은 머리칼에 둥근 면류관을 쓴 기사였다. 그는 야만스러우면서도 강력한, 입가를 흐르는 핏물로 이빨이 붉게 물든 채 씨익 웃고 있는 야만인 군주였다.
그 이미지들. 그 모든 정체들. 한때 그가 거쳐갔던 존재들. 한때 그가 될 수도 있었던 존재들. 한 번 숨을 들이쉬어보지도 못한 존재들까지.
황제의 군홧발이 안개 낀 지면에서 들려 올려졌다. 자신의 몸을 꿰뚫은 다섯 개의 손톱에 들려 올려지는 동안 황제는 거의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검이 장갑 낀 손에서 떨어져 내려, 안개 속에 감싸여 사라졌다.
“황제 폐하께로 향하라!” 라가 비명을 지르듯 명령을 외쳤다. 명령을 외치는 목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그의 망막 디스플레이 화면이 0.5초 동안 흐려졌을 정도였다. “황제 폐하의 곁으로!!”
라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르게 적들을 살육하며 달려나갔다. 충성심과 증오심, 그리고 무언가 혀끝에서 역겹게 감도는 이름 없이 어색한 무언가가 뒤섞여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있었다.
공포심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공포심만은 결코 아닐 터였다.
나는 제국의 종말이다.
그 생각은 라가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 속의 실루엣이, 황제의 시해자가 그것의 존재 속에 있는 인간들의 생각을 뒤틀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라의 머릿속을 조악하지만 잔혹한 손가락으로 휘저어 폭력적이리만치 거칠게 비틀고, 그의 사고로 하여금 악마의 목소리의 형태를 띄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놈을 죽여라!” 라가 외쳤다. 그것은 반쯤은 명령이었지만, 또 반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였다. 가라앉아가는 재 속에서 인간의 형태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황제의 몸을 지면 위로 들어 올린 채였다. 황제가 자신의 몸을 꿰뚫은 팔을 움켜쥐었다. 텔레파시를 통해 전해져 온 황제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물러서라. 너희 모두. 어서 물러서라.+
나는 너의 죽음이다. 워프 생명체가 황제에게 약속하 듯 속삭였다.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날은 아니다.+
보호받지 않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할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황제가 라의 곁에 현신하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쥔 채, 그 머리칼은 쏟아져 내려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피가, 전설 속에서는 무어라 말하던지, 인간의 피가 황제의 부서진 갑주 위로 여러 줄기의 시내를 이루고 흐르고 있었다.
+라.+ 황제가 보낸 텔레파시는 고통을 견디는 기색을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라.” 그리고 나서, 황제는 눈을 들어 그의 충성스러운 커스토디안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한 자루 검이 황제의 몸을 파고 들었다. 금속과 요술 걸린 뼈로 이루어진, 화려하게 장식된 검이었다. 그 무기의 강철 칼날 위로, 영혼들로 빚어진 얼굴들이 꿈틀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황제의 성스러운 생명력을 빨아 마시며, 칼날 위의 얼굴들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황제가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자, 검은 몸부림치 듯 요동쳤다. 그 검은 살아 있었고, 굶주려 있었다. 그것의 형태는 물결 치듯 흔들리며 불분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 번의 울부짖음과 함께, 황제는 그 검을 자신의 몸에서부터 뽑아내었다. 갑옷이 주는 증강된 근력과 파괴적인 염동력으로, 황제는 손아귀에 쥔 검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자신의 가슴을 천둥처럼 강타하는 충격을 느끼며, 라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숨을 들이쉬려던 라는 자신이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입으로부터 핏물이 솟구쳐 나오며, 기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검이 그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악마가 그의 품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그의 핏 속을 흐르며 그의 뼈를 갉아 먹는 질병이었다. 그것은 그곳에 있으면서도 없었고,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커스토디안은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양손은 그의 몸을 꿰뚫고 있는 검을 감아 쥐고 있었다. 악마의 좌절감과 분노가 손가락을 통해 마치 번개 줄기처럼 신경통을 일으켰다.
“어째서?” 라는 그의 왕에게 물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우뚝 일어서, 그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그 순간, 라는 깨달았다. 영원과도 같이 느껴지는 이전의 순간들에 황제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정신 속에서 번뜩이며, 붉은 계시가 그의 생각 속으로 스며들었다.
너를 계몽시키기 위함이다. 그가 라와 함께 이 은하계의 과거에 존재했던 경이들과 죄악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황제는 그에게 그리 말했었다. 네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너는 더 열심히 싸우게 될 터이니.
그리고 이제 라는 깨달았다. 라 엔디미온. 살아서 그의 주인과 꿈과 야망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영혼. 그가 받았던 그 모든 계시는, 전쟁을 치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황제의 야망의 그림자와 파편들 만을 믿고 있을 때, 그만은 진실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진실이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는 순간까지 그 진실을 견뎌낼 수 있도록.
라는 떨리는 사지로 몸을 일으켜, 그의 창에 몸을 기대었다. 이제 검은 사라져 있었다. 악마는 그의 안에 있었다. 그의 육신에 갇히고, 고통에 물든 그의 의지에 묶인 채. 라는 악마가 뻗은 촉수들이 그의 뼈를 휘감고 비트는 것을 느꼈다. 인류의 주인에게로 손을 뻗고자 하는 욕구에 악마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의 핏속을 뚫어가며 요동치고 있는 이 악마는 결코 멈추지도, 죽지도 않으리라. 악마는 파괴할 수 없었다. 오직 가둬둘 수만 있을 뿐.
커스토디안은 그의 주군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어떤 설명이나 사과도 그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섬기기 위해 태어났고, 순종하기 위해 자라났으며, 가장 암울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가장 위대한 계몽을 받기 위해 선택되었다. 황제조차도 죽일 수 없었던 짐승이, 제국의 종말이 되기로 정해진 악마가 그의 몸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가 황제로부터 멀어질수록, 그의 주인으로부터 이 악마를 더 멀리 떼어놓을수록, 제국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날들은 더욱 길어지리라.
황제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고, 장갑 낀 그의 한쪽 손은 여전히 가슴의 부상을 움켜쥐고 있었다. 황제의 입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남은 것이 오직 재와 먼지뿐일 때를 위해.” 황제가 고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하여라.”
검이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한 번 떨어져 내렸다. 화염의 파도가 칼끝에서 뿜어져 나와 그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길이 뚫렸다. 동족들이 불탄 잿더미 위로 몸을 질질 끌고 있던 모든 불생자들이 이미 죽은 동족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라에게 말하였다. 그들 외에는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단 하나의 명령을.
+뛰어라.+
라 엔디미온. 물 도둑의 아들이자, 드라크’니옌의 금빛 감옥지기는 다시는 받지 못할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였다.
라는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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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라한테 여러 가지 진실들을 보여줬던 것도 다 황제의 빅 픽쳐였던 것....
황제가 피도 눈물도 없는 합리주의의 화신이라는 부분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다.
자기를 믿고 충성을 바치던 부하조차도 좋은 의도였던 아니던 결국은 도구로 써먹으려고 작정을 했었던 거니까.
근데 이걸로 황제 비난하는 여론 나올까봐 미리 말해두지만,
여러 작가들이 이미 말했듯이 황제가 저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저기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황제가 비인간적이다, 감정이 없다,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이래저래 까더라도 결국 황제는 이 세계관 인류에게 남았던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다.
물론 그 길은 마그누스와 호루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카오스 신들이 결국은 말아먹었지만.
황제가 저렇게까지 했어야만 인류에게 가까스로 남은 구원을 제시할 수 있었던 거고,
저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국 인류는 혼돈과 광기에 패배해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거라고 봐야지.
p.s. 브금은 저번 장에 쓴 거긴 한데 이번 장에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그냥 한 번 더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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