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이름없는 가드맨'이 앙그론, 붉은 천사에 맞서다

피어스Piers는 둘이서 전투의 깃발을 세웠던 마당으로 돌아왔다. 그와 그 꼬마녀석 둘이서. 둘이서 함께 깃발이 멋지게 바람에 휘날리게끔 모래주머니와 연료통을 둘러쌓아 깃대를 받혔었다. 깃발에는 그분이 계셨다. 다스리시는 황제께서, 커다라신 분이, 광휘를 등에 업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둘이서 깃발을 세웠었다. 그와 그 꼬마녀석 둘이서, 그와 하리Hari 둘이서. 그리고는 다른 녀석들을 불러 깃발 주위로 세웠다. 적들에게 맞서 보여주자. 우리들의 믿음이 충실함을 보이자. 깃발 아래에 모여라. 깃발을 지켜라. 그분께서도 우리를 보고 지켜주실 수 있도록.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이제 없었다. 그 꼬마녀석도.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어스는 입맛이 썼다. 그는 그 모두를 보고 겪어왔었다. 공포 따위에는 무감각해진 게 올리Olly 피어스였다. 그 어떤 것도 그를 뒤흔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것은 잃었을 때 기묘하리만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늙은 척탄병은 군모를 고쳐 쓰고, 한번 코를 훌쩍이고는, 두 눈을 비볐다. 염병할 늙은이 같으니. 더 나쁜 꼴도 봤었잖아.

그것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업랜드Uplands 고지대에 몰아치는 폭풍 같았다. 그는 올드 베스Old Bess를 들어올리고는 녀석의 잔량을 살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라고.' 그가 칼리버caliver에 대고 툴툴 중얼댔다.

그는 깃발 앞에 섰다. 깃발 바로 앞에. 설 다른 자리가 없었다. 그 꼬마녀석이 여기에 있었다면 피어스 바로 옆에 서 있었으리라.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옆에 섰으리라. 다른 녀석들도 그랬으리라. 다른 녀석들 전부 그랬으-

그게 왔다. 씨발 씹. 저거 보이냐, 녀석아? 신이 저렇게 크다. 날개도 달렸어! 박쥐 악마 날개가... 피어스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작은 지진처럼 땅을 울렸다. 도끼가 떨며 울었다.

피어스는 그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프라이마크란 것이 저렇게 생겨먹었다는 거지. 좆부랄 같은 놈. 포식자Eaters들의 주인. 지옥 그 자체만큼이나 크네 썅.

꼬마녀석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녀석은 피어스에게 무섭냐고 물었으리라. 녀석은 허구한날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피어스는 그 질문에 대답했으리라. 그는 '아니.' 라고 답했으리라.

그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으니까.

"그럼, 와라," 피어스가 울부짖었다. "와서 무슨 꼴이 날지 봐라!"

날개 달린 괴수가 코웃음쳤다. 놈의 피에 굶주린 발걸음이 늦추어졌다. 마치 궁금하다는 마냥, 이 조그마한 인간을, 그가 든 조그마한 총을, 그가 움켜쥔 너덜너덜한 깃발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왔다. 놈이 다시 코웃음쳤다. 황소처럼 크게 울리는 울음소리였다. 놈의 입술 사이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피어스가 올드 베스Old Bess를 조준했다.

"어서 와라." 그가 고함쳤다. "이 염병할 게 다 뭔지 한번 보자꾸나!"

어서 와주십시오. 저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미트러스Mythrus의 성령이시어, 빨리 와주십시오. 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젠장맞을 충실한 병사, 올리 피어스가요. 당신께는 올림포스 피어스겠죠, 더럽게 까다로운 전쟁의 여신님이시여. 제가 바로 당신께 선택받은 놈입니다. 절 아시잖습니까. 좀 빨리 와주세요. 절 기다리게 만들지 마십시오. 제발요, 전장의 숙녀분, 제발 좀요. 죽음 마님Dame Death, 이 쓸모없는 호로잡년아, 어디에 계시든지간에 이 늙은 병사에게 뭐라도 하나 은혜를 좀 내려주십쇼. 많은 것을 바란다는 건 알지만, 어차피 하시는 일은 딱 하나잖습니까. 아 좀, 제발요. 제발 좀. 이렇게 빕니다 제가.

앙그론, 붉은 천사가,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땅이 뒤흔들렸다. 깃발이 몸서리쳤다.

올리 피어스가 올드 베스를 발사했다. 광선이 연이어 놈의 몸 한복판에 명중했다. 엿같은 무게중심 정중앙에 맞췄다, 이 못생긴 살덩어리 새끼야!

"업랜드 테르시오Upland Tercio, 후아!" 그가 울부짖었다. "테라의 옥좌여! 테라의 옥좌여!"

피에 흠뻑 젖은 채, 앙그론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는 하늘로 두 주먹을 쳐들며 몬살반트 가드Monsalvant Gard의 불타는 총탑들이 뒤흔들릴 만큼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깃발이, 흩뿌려지는 피에 젖은 깃발이, 부러진 깃대에서 미끄러져 땅 위로 몸을 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