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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괴담] 순환선앱에서 작성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11 01: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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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스란트 동부 철도 특급승차권
에를뢰젠 - 폴레노보 행, 1등석


이것은 당신의 기차표입니다. 에를뢰젠에서 출발해 폴레노보까지 가는 완행열차의 승차권이지요.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현실에 폴레노보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부 영토 어딘가의 벽촌에는 그런 이름의 도시가 있을는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당신은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을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표의 가장자리에 검표 도장이 찍혀있지만 검표원을 만난 기억이 있던가요? 애초에 이 표는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당신 이외의 승객이나 승무원이 보이십니까?
곧 당신은 스스로가 이 수상쩍은 열차를 타게 될 한치의 정황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열차는 존재하지 않는 벌판을 달려 폴레노보로 향하게 됩니다. 당신은 그 과정에서 경유하는 세 곳의 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온전하게 경험해야만 합니다.





창 밖에서 아우성이 들려온다면 당신은 티센(Tíseň)에 있습니다.
기차의 양 옆으로 구름처럼 운집한 군중이 당신에게 온갖 죄명을 덮어씌우고, 손가락질하고 목소리를 높여 비난할 것입니다.
개중에는 당신 개인의 것이 아닌 오욕도 있을 것이며, 간혹 군중 속에서 당신에게 실망한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히 감내하십시오. 어떻게든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시늉을 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필경 군중의 분노를 돋굴 것이고, 당신이 당하는 일은 비난으로 끝나지 않을겁니다.

열차가 승강장 안에 들어서 완전히 멈추면, 한 무리의 병정들이 군중을 해산하고, 등이 굽은 장군이 당신이 탄 객차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는 작은 책자를 펼쳐들고는, 당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직함과 업적들을 하나씩 부정할 것입니다.
부디 이에 격분하거나 저항하려 들지 말고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십시오. 장군은 항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굴욕적인 강등식이 끝나고 당신이 지닌 모든 명예가 짓밟히면 장군은 돌아가고 당신 역시 티센을 떠날 수 있습니다.



티센의 군중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열차는 곧 자작나무가 빽빽히 자란 음산한 숲 속을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디베스발트(Diebeswald)에 도착하게 됩니다.
곧 숲의 그림자 뒤에서 흰 껍질과 여러개의 팔을 가진 강도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열차의 문을 비틀어 부수고 들어와 안에 있는 모든 값진 물건들을 우악스러운 손아귀로 가로채 검게 벌어진 제 옹이구멍 안으로 던져넣을 것입니다.

그것들의 불경스러운 잔치판은 적어도 수시간동안 이어질 것이고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는 비위를 맞춰주며 어울리는 것입니다.
결코 저항하거나 물건을 숨기지 마십시오. 그들 몸 곳곳에 난, 자작나무의 지흔을 닮은 시커먼 흰자위의 눈들은 사람의 깊은 곳을 꿰뚫어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강도들이 마침내 만족하고 돌아갈 때 당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겁니다. 여행가방, 반지와 시곗줄은 물론 당신이 걸치고 있는 의복까지도 강제로 빼앗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치 나무 둥치와 같은 그것들의 손은 상냥함이 결여되어 있기에, 물건을 빼내는데 방해가 되는 부속지와 살점들도 주저없이 함께 뜯어갈 것입니다.



더이상 1등석이라고 볼 수 없는 처참한 풍경의 객차 안에서 당신이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사이, 열차는 프르젠스크(Przensk)에 도착합니다.
앞서 강도들이 망가뜨린 문을 통해 작고 검은 짐승들이 안으로 들이닥칩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당신의 작은 상처들을 넓게 찢어 내용물을 파먹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이 비명을 지르고 지르다가 마침내 쉬어버린 목으로 조용히 흐느끼기만 하게 될 즈음, 당신의 내장을 실컷 포식한 그것들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짐승들의 뒤를 이어 촛대를 든 문상객이 객차로 들어옵니다. 그와 함께 스산하고 차가운 안개가 흘러들어와 당신의 폐 속을 휘저어놓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당신의 살갗은 추한 청동색으로 물들어가고 신체의 말단부는 피가 몰려 검고 비대하게 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의식은 괴사해가는 육신의 모든 감각을 생생히 경험할 것입니다. 폐가 죽었음에도 산소를 찾아 무의미하게 숨을 헐떡일 것이고, 복강이 비어있음에도 끔찍한 허기에 주린 배를 움켜쥘 것입니다.

문상객은 그러한 변화를 미동하지 않고 수시간에 걸쳐 조용히 응시하다가, 당신 앞의 바닥에 촛대를 내려놓고서 돌아갑니다.





열차의 종착역은 폴레노보(Polenovo)입니다.
타다 남은 나무와 검게 그슬린 잡석 무더기 위로 잿빛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합니다.

곧 뜨거운 불과 벼락이 떨어져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희생물로 삼아 번제를 치룰 것입니다. 여정을 거치며 나약해진 당신의 몸은 지상을 뒤덮은 열풍과 충격파에 분해되어 산산조각납니다. 기름을 부은 듯 쉬이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지방질은 끓어오르고, 뼈는 폭압을 이기지 못해 빠각대는 소리를 내며 잘게 부서지고, 영혼은 새카만 연기로 화해 하늘로 올라가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습니다.
















티센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많이 당황하셨을겁니다. 당신은 분명 폴레노보에 도착하면 모든게 끝날거라 여기고 갖은 고난을 감내했겠지요. 그렇지만 이게 무슨 조화란 말입니까?
당신의 머릿속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기분나쁜 기시감에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면 모든 것이 처음 열차에서 눈을 떴을 때와 꼭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창 밖에서 다시 성난 군중의 아우성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당혹감과 두려움을 이해합니다. 언제나 가장 큰 공포는 끝날 기약이 없음에서 말미암는 법이니까요. 무한한 시간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 그보다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당신을 위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겁니다.
당신이 단 한번이라도 스스로가 의무라 부르는 행위에 대해 사유하고 그만두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만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굴복시킨 소국의 수도에서 침략자에 대한 울분에 찬 주민들 앞에서 개선식을 벌이며 그들의 조상을 모독했습니다.
빼앗은 들로 배를 불릴 조국과 당신에게 떨어질 진급과 훈장을 기대하면서 팔을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대의 진로에 있던 작은 마을에서는 전시 징발이라는 미명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이들의 재물과 식량, 나아가 존엄까지 취하며 모래사장에서 조가비를 발견한 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당신 부대가 그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가는데 일주일을 소요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할지 전 도무지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강제수용소는, 외딴 숲 속의 집단 매장지는 또 어떻습니까? 당신의 조국은 민중의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몹시 싫어했지요. 그래서 모조리 숨을 빼앗아 침묵시켰습니다.
하지만 순교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몹시 운이 좋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소한의 저항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으니까요.

지난 추계 공세 이후 검게 타오른 뼛조각만을 남긴채 사라진 폴레노보의 시민들처럼 말입니다.



네, 당신의 의문을 이해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현실에 폴레노보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어찌나 파괴에 열과 성을 다했는지 종전 이후 수십년이 흐르고도 재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군수공장 하나조차 없던 작고 볼품없는 지방도시에는 과분한 무력 투사였으나, '전략적 요충지'라는 표현은 실로 많은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처음도 아니었지요. 그것이 당신이 폴레노보라는 이름을 듣고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에게는 그저 추계 공세 내내 불태운 수많은 미개인 읍락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저도 당신이 그 모든 범죄의 유일한 책임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격언처럼, 당신같은 인간에게도 분명 순수한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던 시절이 있었을겁니다. 나라 전체에 완연한 극단주의와 대전쟁이, 당신 위로 끝없이 도열한 장군과 정치인들이 지금의 사단을 초래했겠지요.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모두가 당신과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한번. 단 한번이라도 당신이 잘못된 명령에 회의를 품었더라면, 그 실행에 최소한의 손속을 두었더라면, 적어도 그 과정에서 저열한 기쁨을 느끼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결코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유하지 않은 죄는 이토록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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