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Werwolf 3]-<9>

라이소자임 · 2022.04.08 21:21:27

"흐음..."

"...?"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리치에 관한 책을 한 권 빌려와서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는데, 도저히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야 당연한 게 옆에서 저 강시년이 아까부터 날 계속 뜷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부담스러워서 집중이 될 리가 있나.

"야, 박PD."

"왜."

"우리 예전에 어디서 본 적 있냐?"

"어? 뭔 개소리야 갑자기. 본 적 없지 당연히."

"아니,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내가 너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든단 말야."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난 유채린을 예전에 본 적이 없는데, 유채린은 예전에 날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건 그냥 니 착각이겠지."

"그런가?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나?"

"그럴 고민할 시간 있으면 이거나 좀 도와줘라."

난 옆의 가방에서 교재 하나를 꺼내어 유채린에게 툭 던져주었다.

"이게 뭔데? 일본어 교재?"

"어. 유나가 요즘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일본어 공부한다던데, 알다시피 유나는 일어 하나도 모르거든. 니가 유나한테 일본어 좀 가르쳐 줘라. 넌 토착왜구니까 일어 잘할 거 아냐."

"뭐, 뭐야? 이게!"

토착왜구란 단어에 발작버튼이 씨게 눌린 유채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씩씩거렸다.

얘는 확실히 놀려먹을 때가 제일 재밌단 말이지.

"내가 토착왜구면 넌 뭔데! 조센징이냐?"

"어~미안한데 나 한국인 아니고 독일인이야."

"이, 이익.."

내가 한국 출신이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유채린은 대꾸도 못하고 날 쏘아보기만 했다.

솔직히 거의 맨날 놀렸는데, 이 녀석도 이젠 좀 내성 생길 때도 되지 않았나?

"치사하게 같은 동맹끼리 이러기냐?"

"뭐? 내가 언제 너랑 동맹..아."

유채린의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했다.

이새낀 뇌가 1945년 이후로 업데이트가 안 됬나.

"아니 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냐..정신차려라 좀. 지금은 21세기라고."

"..흑, 그 때가 좋았는데."

독일에서 하면 아주 큰일날 소리를 서슴없이 내뱉는군.

이 스시녀는 아마도 자국의 현대사를 좀 제대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나 왔어~"

그러던 도중 장소월과 한세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치킨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걸 보니 또 치킨을 사왔나 보군. 분명 장소월이 사가자고 한세희에게 보챘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늑대야. 같이 치킨 먹자. 응?"

"싫어."

장소월은 뒤에서 날 껴안으며 말했다. 하아, 이젠 이 녀석을 일일히 밀쳐내기도 지쳤다.

"저건 뭐야? 일본어?"

"어. 유나가 요즘 학교에서 일어 배운데."

"뭐야, 우리 독립한 거 아니었어?"

"아니..제2외국어로 배운다고. 이 빡대가리야.."

이 녀석도 여태껏 산속에서 틀어박혀 살아서 그런지, 뇌가 일제강점기 당시에서 업데이트가 안 된 듯 하다.

아주 씨발 총체적 난국이구만..

"..도대체 그것들 언어를 왜 배우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일본 얘기가 나오자 장소월은 이번에도 표정을 굳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소월은 다른 한국 마물들 중에서도 유독 반일감정이 심한 편이었다. 물론 일제시대를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같이 일제시대를 겪은 한국 출신인 한세희는 반일감정이 저정도로 심하진 않던데...뭐지.

동아시아사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하나 이거..

"뭐? 야, 말조심해! 우리 언어가 뭐 어때서!"

"응? 늑대야, 쟤 일본 출신이었어?"

"어. 내가 말 안해줬나? 저새끼 일본 오사카 출신이야. 지 말론 일제강점기 때 여기로 넘어와서 정착해서 살고 있다던데."

"..그래? 몰랐네."

내 말을 들은 장소월은 유채린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 대해선 솔직히 개인적으로 할 말이 많지만, 내가 참을게? 그러니까.."

"아니 말해봐봐. 우리가 뭘 했냐니까?"

"...."

유채린은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빡친 티를 내며

장소월에게 계속 따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잠시 침묵하던 장소월은 이내 유채린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뭘 했냐고?"

"어..? 야, 야..너 갑자기 왜, 왜그러는데..무섭게.."

유채린을 노려보는 장소월의 두 눈에서 푸른 빛이 감돌았다. 주변 공기가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유채린은 당황하며 떨기 시작했다.

어어, 이거 또 싸움 나겠네. 하 시발.

"진정해 진정. 니가 화나는 건 알겠는데 자제해라."

"..칫, 알았어. 늑대 너 보고 참는 거야?"

"그래 나 보고 참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제발 여기서 싸우지 말아주라.."

장소월은 다시 날 껴안으며 내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된 걸 확인한 난 다시 책을 펼쳐 읽었다.

그러던 중, 부엌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한세희가 다가와 장소월에게 말을 걸었다.

"소월씨, 솔직히 그 모습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거 알아요?"

"응?"

"아시다시피 준성씨는 이미 유나랑 사귀고 있잖아요? 유나가 그 모습 보면 뭐라고 안 해요?"

"아..이런 거 보면 좀 많이 화내긴 해. 나 유나한테 완전 찍혔더라구."

"..상습범이었네요. 준성씨랑 친한 건 알겠지만, 유나가 싫어하는 걸 알았으면 준성씨에게 그렇게 여자친구처럼 행동하는 건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요? 제3자 입장에서도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거든요."

"...."

장소월은 한세희를 말없이 잠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혹시 잠시 시간 좀 괜찮을까?"

"네? 갑자기요?"

"응. 너한테만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상관없긴 한데..알겠어요."

그렇게 둘은 방을 나가 부엌으로 걸어갔다. 뭐야, 둘이서 나 빼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데.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난 이내 다시 책에 집중했다. 내 경험상 항상 저런 건 알고보면 쓸데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피렌체의 리치-잿빛 여섯 걸음]

책을 넘기던 도중 드디어 내가 찾던 파트가 나왔다. 잿빛 여섯 걸음. 리치누나가 알려준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나저나 지역이 피렌체인 걸 보면, 이탈리아 출신이었군.

예전에 이태리어를 살짝 배워본 적이 있었는데, 다음에 누나한테 이태리어로 한번 말 걸어볼까?

'스슥-슥'

유채린이 바로 옆에서 사인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소리 때문에, 다시 집중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얜 아까부터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그리는 거지.

"야 너 뭐 하냐?"

"아, 이거? 봐봐."

유채린은 이내 종이를 들어 보여주었다.

종이에는 '大東亜共栄圏' 이라고 쓰여있는 글자와 함께 욱일기가 뻗어나가는 아시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텐노 헤이카 반자이!"

"지랄을 해라..."

난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다시 책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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