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 갤러리 오픈 기념 백일장 결과를 발표합니다]
(갤러리 글은 65535 글자 이하로만 올리라고, 등록이 안 되어서 HTML로 올렸습니다. 보기가 불편하실 겁니다. 아래 블로그 주소에서 읽으시면 훨씬 더 가독성 높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poetone/221397545978 )
급조된 백일장이었지만 작품들을 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웠습니다. 시가 독자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다고 어느 평론가가 진단했던 게 벌써 20년 너머의 일입니다. 그러한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2018년 현재에도 시를 읽으시고 시를 쓰시는 분들이 정말 많구나, 그리고 정말 다양한 시들을 쓰시는구나, 새삼 놀라면서 시 한 편 한 편을 정독했습니다. 사정상 저 혼자 심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래 말씀드리는 작품 선정은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주관이 반영된 것이므로 이번 백일장에 선정되지 못했다고 해서 상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며칠 고민하며 읽은 시들 중 말씀드렸던 것처럼 1위, 그리고 2위, 그리고 3위에 선정되신 작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저의 카카오톡(poetone78)으로 주소, 전화번호 남겨주시면 시집 『하와와, 너에게 꽃을 주려고』(미디어샘, 2018), 시작법서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미디어샘, 2018), 하와와 2019 달력, 투명 책갈피 4종 선물 세트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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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선정작
가을 편지 (9m43s)
그리운 얼굴을 눈으로 밟으며 걸었다
아침 같지 않은 아침이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고
뭐라 할지 몰라 편지에는 안부만 적었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식과
궁금한 사람의 감감무소식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중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턱을 괴고 앉아 모르는 사람의 수필을 읽는다
제철 과일은 제철이 아니어도 먹을 수 있고
하루 만에 지구의 반대편으로 갈 수 있다는데
가까운 것들이 멀어지는 게 왜 이리 두려울까
쓸 것은 많은데 쓰일 것이 없는 세상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고
떨어지는 단풍, 그 길 위에 서서
먼저 지나간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실례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주소 란은 비워두었다
날씨는 점점 흐려졌고 머뭇거리는
불빛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툰 칼 솜씨로 깎은 과일을 벤치에 앉아
오물오물 씹어먹고 껍질을 바닥에 뱉었다
정반대의 계절과 정반대의 시간을
절반만큼 되돌려놓고 싶다
[감상평]
제목이 “가을 편지”인데 시에서 정말 가을 냄새가 납니다. 가령 이런 문장. “정반대의 계절과 정반대의 시간을/ 절반만큼 되돌려놓고 싶다”. 정확히 가을에 대한 문장입니다. 몇 겹의 계절이 섞여 있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시간적 속성, 즉 “정반대의 계절과 정반대의 시간”이 정말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장입니다. 아침엔 겨울이었다가 낮에는 봄이었다가 다시 밤에는 겨울이 되는, 가을은 그런 계절입니다. 시에서 특정한 계절을 담는 능력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정말 좋은 시구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말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장난을 하되 말장난에서 그치지 않는 것, 아무래도 그러한 재미가 시가 추구하는 재미겠지요.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식과/ 궁금한 사람의 감감무소식",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제철 과일은 제철이 아니어도 먹을 수 있고", "가까운 것들이 멀어지는 게 왜 이리 두려울까", "쓸 것은 많은데 쓰일 것이 없는 세상", 이러한 언어의 유희는 이 시를 지탱하는 큰 기둥입니다. 그 기둥이 무척 정성스러워서 읽는 사람이 무안해질 지경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식과/ 궁금한 사람의 감감무소식”를 겪으면서, 앓으면서 이 삶을 지납니다. 자칫 가벼워질 수도 있는 언어와 사물의 반대 속성을 이 시는 진중함과 솔직함으로 돌파해 나갑니다. “가까운 것들이 멀어지는 게 왜 이리 두려울까”, 가을은 이런 감정을 느끼기 좋은 계절입니다. 낙엽이 그렇고 낮과 밤의 길이가 그렇습니다.
“먼저 지나간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실례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주소 란은 비워두었다”라고 이 시가 말할 때 우리는 문득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먼저 지나간 사람의 안부를 묻는데도 태도가 필요하다고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소 란은 비워두었다”라고 다시 시가 말할 때, 우리는 홀연 심연에서 떨고 있는 우리의 깊은 그리움을 호출하게 됩니다. 이 시에서 어쩌면 가장 빛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를 만약 어디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만났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좋은 시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시인으로 뵙겠습니다. 오랜 시간 언어와 다투며 연마한 내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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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선정작
입동 (식복)
신발장 낯선 구두 한 켤레,
겨울이 신고 온 것
너의 귀여운 퓨마 운동화가 채웠다면
그의 구두는 없었을까
창문을 두드리는 비,
집 나간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수원(水原)
돌아온 탕아들을 모르는 체하는 그녀
빗물에 낙엽이 문드러지듯
비 맞은 신문지는 마음처럼 찢어졌더랬다,
그리움을 매일 밤 책꽂이에 꽂아도
다음날 아침이면 무너져내렸더랬다,
수원에서 제일 귀여운 너
너도 이제 그만 너에게로 돌아가 주라ㅡ,
눈이 오는 날에서 너는 온데간데없을 것이나
나는 내심 첫눈이 늦게 오기를 바라였다
[감상평]
귀여운 시입니다. 귀여운 슬픔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슬픔도 이렇게 발랄하게 귀여울 수 있구나, 시를 읽으면서 공감했습니다. “신발”에서 시작한 상상력이 인간의 존재론에까지 닿았습니다. 확장입니다. 첫 문장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신발장 낯선 구두 한 켤레,/ 겨울이 신고 온 것”, 뒤에서 정황이 나오지만 그 낯선 구두 한 켤레는 아마도 자신의 것으로 보입니다. “너”(아마도 수원에 사는가 봅니다)가 없는데, 존재하던 네가 부존재 하는데 이 세계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통과하면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이 시는 정밀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러한 상실감을 이렇게 말합니다. “집 나간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수원(水原)/ 돌아온 탕아들을 모르는 체하는 그녀”. 집을 나간 물방울들(물방울들이 집을 나갔다니, 사실 놀라운 상상력이기도 합니다.)이 다른 곳도 아니고 수원(水原), 그러니까 물의 근원으로 떨어집니다. 이때의 수원은 수원(city)이기도 하고 가상의 공간(물의 근원)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거처이기도 합니다. 집을 나간 물방울들도 자신의 근원으로 떨어지는데 정작 “그녀”만 없습니다. 가까이 보면 대비인데 멀리, 그리고 넓게 보면 이별에 대한 은유입니다. 정말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도 이제 그만 너에게로 돌아가 주라ㅡ,”니, 이 말은 아마도 “너”라는 대상이 도무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러한 슬픈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그 어법이 참 귀엽습니다. 시는 작게, 최대한 작게 말하는 장르라는 명제를, 그래서 그 사소함으로 더 커질 수 있다는 비밀을 이 시는 슬며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정말 압권입니다. 첫눈이 늦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이 시는 말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서 너는 온데간데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제가 해석한대로 산문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나는 첫눈이 오면 너를 잊을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만 너를 죽도록 그리워할 것이다. 어차피 겨울은 오기 마련이고 나는 너를 잊을 것인데, 그래도 이 지독한 그리움이 빨리 끝나는 것은 또 싫다. 그러니 어차피 첫눈이 오려거든 너를 지독하게 앓다가 잊을 수 있을 만큼만 첫눈은 조금 늦게 왔으면 좋겠다’. 너를 못 잊겠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은 이렇게나 어려운 물질입니다. 이렇게나 복잡한 마음의 사정들을 이 시는 담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처음엔 이 시를 1위로 선정했었습니다. “빗물에 낙엽이 문드러지듯/ 비 맞은 신문지는 마음처럼 찢어졌더랬다,”, 이 구절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이렇게나 좋은 시를 쓰시는 분이 이렇게나 상투적인 표현을 쓰시는 것을 보면 언어에 대해 조금 더 고민을 해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입니다. 빗물에 낙엽이 문드러지는 것 자체가, 비 맞은 신문지가 마음과 같이 찢어졌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허사(虛辭), 즉 빈말입니다. 저 말은 다른 부분에서 이미 말해지고 있습니다. 시는 어쩌면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는 장르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애써 참는 장르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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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선정작
손목터널증후군(최지민)
어둠이 코를 찌를 때
축음기 바늘을 엘피판 위에 얹어 놓고 잠자리에 들던 당신
나는 손가락 끝마디로 잠들지 못하는 당신의 손목을 짚어본다
짙은 향수 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가
서로를 부축하며 비틀비틀 걸어 들어간 길목
콧속을 찌르며 머릿속까지 비집고 들어선 후미진 골목,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처럼
1분 1초 갈피마다 빼곡히 꽂혀 있는 여인숙 간판들
그것들 샅샅이 살펴보는데 문득,
비
목
이라 쓰인 주점 전광판에 전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혈관을 따라 흘러 다니는 매미 울음소리,
경련하듯 명멸하는 실핏줄,
돌아 누운 당신,
당신의 물방울 같은 엉덩이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듯 청각을 곤두세우면
당신이 이 시공時空 밖으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저녁
그렇게 서로 호시탐탐 촌각을 다투면서
투명하게 팽창해가던 우리는 그러나
점점 더 가까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번개 치듯 번쩍인 어둠이
한순간 삼켜버린 눈부신 적막 속으로,
그리하여 서로에게서 가장 머나먼 곳까지, 우리는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다
[감상평]
쓴 소리부터 드리겠습니다. 쓸데없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를 부축하며 (비틀비틀) 걸어 들어간 길목", “콧속을 찌르며 머릿속까지 비집고 들어선 (후미진) 골목,", "1분 1초 갈피마다 (빼곡히) 꽂혀 있는 여인숙 간판들". 괄호 부분의 말들이 전부 안 써도 되는 말들입니다. 술집들이 즐비한 거리이기 때문에 “비틀비틀”일 수밖에 없고 시 전체의 상황이 “후미진” 곳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후미진”과 같은 말은 “역전 앞”과 같은 말입니다. 안 쓰셔도 됩니다. “1분 1초 갈피마다”니까 당연히 빼곡합니다. 시는 언어와 끊임없이 싸우는 장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투른 표현에도 불구하고 시에 묻어 있는 열기가 참 좋았습니다. 손목터널증후군은 ‘압박성 신경병증’입니다. (저도 이 시를 읽고 난 후에 검색을 해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목이 이렇게 정해진 이유는 아마도 ‘너’를 그리워하다가, 앓다가, 내가 아프게 되었다는 (그것도 신경병증이라니) 사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이 정말 좋습니다. “서로에게서 가장 머나먼 곳까지, 우리는/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다”. 이 문장은 비문입니다. “~까지,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산문에서는 불가능하고 또한 잘못 쓰인 문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에서만 가능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멀리 갔길래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시는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쓰는 것입니다.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상상들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당신의 물방울 같은 엉덩이”처럼 촉촉한 시입니다. 좋은 시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진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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