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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이바나시 (장판, 가면, 칼)

라오디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2.04 14:16:58
조회 78 추천 0 댓글 2

장 베르몽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을 도시의 광장. 오늘은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에 걸맞게 광장은 무거운 적막만이 맴돌고 있었다. 추운 날씨 탓이었을까. 매섭게 부는 칼바람에 장 베르몽트는 옷깃을 추스렸다. 파르스름한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었어."


그는 고개를 들었다. 광장 한가운데에 꽂혀 있는 막대기 하나. 막대기 끝에는 둥그런 물체가 박혀 있었다. 물체는 누가 검붉은 안료로 덧칠한 것처럼 보였다. 한때 빛나는 눈동자를 가졌었다. 앙다문 입술과 오똑한 코는 젊은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청아한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는 힘이 있었고, 매혹적인 몸매는 탐욕스런 귀족들의 눈길을 붙잡았었다. 누가 봐도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어느 누구도 그녀가 비밀결사 '푸른 불씨' 소속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는 품속에서 가면을 꺼냈다. 그리 특징지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가면이었다. 눈가에 파란 종달새 그림이 작게 그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주름진 손으로 가면을 어루만지던 그는 침음과 함께 회상에 잠겼다.


그 날은 지금과 달리 광장에 사람이 가득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의 외침과 깔갈거리며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 포장된 도로를 걸어다니는 마차와 한껏 묘기를 선보이는 광대들의 모습까지. 언뜻 보면 평화로워보이기까지 하는 도시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귀족과 왕족의 향락적이고 추악한 일면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당장 도시 외곽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빽빽한 골목과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오물, 포장되지도 않은 도로 속에서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심지어 파리와 구더기로 가득찬 시체를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장 베르몽트가 직접 빈민가에 가보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또한 기아에 못 이겨 죽었을 테지.


"좋은 술이군요."


테이블에 잔이 내려앉았다. 한 모금 머금은 채 밖을 내다보던 그는 뒤를 돌아봤다. 커튼이 창문을 가린 탓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방. 소파에 기대어 앉은 한 인영이 가지런한 자세로 그를 보고 있었다. 어둠마저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릴 수 없었는지 얼굴이 유독 밝아보였다. 반쯤 감긴 눈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허나 장 베르몽트는 그 모습이 그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시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 하나를 집어왔을 뿐이야.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군."


"술의 향과 맛을 더해주는 건 음미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면에서 이 술은 저에게 있어 가장 알맞아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갈 틈도 없는 술만큼 맛없는 것도 없죠."


그렇게 말한 그녀의 시선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곳이 어딘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 베르몽트는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동안 둘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 받았다. 해가 기울고 어느덧 하늘이 노을빛 한숨을 내뱉을 무렵. 하루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상인들의 어수선함이 어렴풋이 들려올 무렵.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갈 테냐?"


"제 몸 하나로 혁명의 불씨를 일으킬 수 있다면, 지옥이라도 갈 거예요."


"그대로 끝날 수도 있다. 아까운 목숨 하나만 저버리게 될 수도 있어."


"아뇨."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창가에 드리우는 노을이 그녀의 머리칼에 흘러내렸다. 그는 손으로 빗어주고 싶었다. 사실 곧 있을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녀는 옷도, 얼굴도, 머리도 모두 치장한 상태였다. 굳이 빗어줄 필요가 없었다. 다만 두려울 뿐이었다. 벌써부터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져 그대로 허공 속으로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혁명의 불씨가 피어오른 상태. 만약 한 방울의 기름 있다면 그 불씨는 바로 피어오르게 될 겁니다."


"그 생각이 틀렸다면?"


"상관없어요. 어차피 칼 피냐 공작이 죽는다면 제 소명은 다한 겁니다."


반짝이는 날붙이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풍성한 레이스로 뒤덮인 복대에 작은 칼 하나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숨을 멈췄다. 지금껏 상상 속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그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알지 못하게. 술에 잔뜩 취해 옆사람도 모를 정도로 공기가 농밀해질 때. 단숨에 일을 처리할 거예요."


그녀의 눈빛이 증오로 일렁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체만체하며 지나가는 공작의 모습. 오물로 뒤덮여 숨쉬기도 힘든 그곳을, 짐승들이 살아가는 곳이라 말하며 사람대접도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인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장 베르몽트 따라 '푸른 불씨'에 들어온 것이다. 십 여년 동안 품어왔던 복수의 칼날을 공작의 목덜미에 들이미는 날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애초에 그녀를 '푸른 불씨'에 가입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우연히 그녀가 집회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을 살길 바랐다. 진짜 부모가 아니었지만, 그는 그녀를 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너무 깊게 들어왔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나아갈 수밖에.


장 베르몽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연약한 손. 언뜻 향기마저 느껴지는 건 젊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그 젊음이 한순간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왔다.


장 베르몽트는 말했다.


"엘레아-."


그때, 종소리가 온 도시에 울려 퍼졌다. 성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만찬에 올 손님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것 같았다. 엘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누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베르몽트님. 준비가 됐습니다."


장 베르몽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을 보니 마차 한 대가 엘레아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아버지."


문 옆에 다가선 엘레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단어를 꺼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새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그 말과 함께 엘레아의 얼굴에 가면이 씌어졌다.








장 베르몽트는 얼굴을 들었다. 눈송이가 하늘하늘 내려오고 있었다.


"엘레아. 혁명은커녕 오히려 사람들이 널 비웃었다."


단두대에 목이 잘리던 그 날. 어리석다고 했다. 멍청하다고 했다. 예쁜 만큼 머리가 바보가 아니냐는 수치도 들었다. 그럼에도 엘레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쳐든 채, 떨어지는 칼날을 받아들였다.


"실패해서 그랬던 걸까. 만약 성공했다면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네가 죽으니 '푸른 불씨'도 예전만하지 않다. 언제 발각되어 목숨을 잃게 될지 몰라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러니 네가 던진 목숨이 그 어느 것보다 값지다고 할 수 있을까."


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못 가게 막았다면 살 수 있었을까. 억지로 고집을 피웠다면, 차라리 미움을 받았더라면. 엘레아가 살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 베르몽트는 가면을 바닥에 던졌다. 이제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그 또한 언제 잡힐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미련없이 광장을 떠나려했다.


"저 누나는 멍청하지 않아요."


그때.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소년이 그가 던진 가면을 들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저에게 먹을 것을 줬거든요."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엘레아가 품었던 눈빛을, 소년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해줬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꼭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그 날을 오게 하기 위해 누나가 목숨을 던진 거죠?"


잘 먹지 못해 뺨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말랐다. 팔다리가 야위어 걸을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소년의 목소리는 절대 야위어있지 않았다. 당찼다. 희망을 바라보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럼 저 또한 목숨을 던질 거예요. 누나가 그랬듯이,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소년은 막대기에 걸린 엘라아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봤다. 마치 그녀가 가졌던 마음을 전해받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을까요?


장 베르몽트는 천천히 다가갔다. 눈으로 덮인 바닥에 그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소년의 앞에 선 장 베르몽트는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옛날, 다 헤진 옷차림을 하고서 꿋꿋이 서있던 엘레아에게 했던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같이 갈 테냐?"





-쓰다 보니 장판 키워드를 까먹음.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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